<응용윤리학과 도덕적 딜레마 발표문 초고>
1. 들어가는 말 - 전쟁에 대한 두 가지 비판적 접근 방법
지난 달 미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여러 국가들은 리비아 내전에서 시민군 측에 손을 들어주었고, 카다피 정권을 실력으로 무너뜨리고 민주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내전에 개입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렇듯 멀리 있는 것 같지만, 전쟁은 사실 우리의 주변에 있다. 최근 2년 동안 한국에서 일어난 사건 가운데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피격사태는 이런 사실을 다시 한 번 각인시켜주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은 2000년대 들어서 미국이 감행한 전쟁에 대한민국 정부가 군대를 파견하여 힘을 보탠 것을 기억한다. 더 멀게 보자면, 인류에게 가장 큰 상처를 남긴 전쟁인 제 2차 세계대전은 종결된 지 70여 년이 다 되어가지만, 그 당시에 결정된 전후처리의 흔적은 아직도 세계의 곳곳에 남아있다.
하지만 우리의 주변에 흔하게(?) 있는 만큼, 전쟁은 일어났을 때 이에 연관된 인간들의 삶을 송두리째 파괴한다. 전쟁은 결코 <람보>나 <라이언 일병 구하기>일 수 없으며, 어떤 매체로도 그 참혹함을 온전히 담아낼 수 없는 비극이 속출한다. 전쟁에 직면한 개인은 불안하고 일관되지 못한 일상을 경험한다. 홉스의 유명한 표현을 빌리자면, 전쟁상태에서는 ‘예술이나 학문도 없으며, 사회도 없다. 끊임없는 공포와 생사의 갈림길에서 인간의 삶은 고독하고, 가난하고, 험악하고, 잔인하고, 그리고 짧다.’ 위 문단에서 묘사한 것과 같이 전쟁이 인간의 주변에 언제나 존재하는 것은 매우 비극적인 사태임이 틀림없다. 인간은 언제든지 험난함에 노출될 수 있다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전쟁이 철학적 고려의 대상이 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전쟁이 없는 상태를 만드는 것에 대한 홉스나 마키아벨리 식의 무비판적이고 현실주의적인 해법, 즉 자기보존을 위해서 힘을 길러서 상대를 무력으로 제압하는 것은 결정적으로 그 공동체를 일상적인 전쟁상태로 돌입시킨다. 다시 말해 홉스의 묘사와 같은 상황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이런 자각에서부터, 전쟁을 규범적으로 정의하고 제한해야 할 필요성이 생겨난다. 전쟁이란 무엇인가? 전쟁은 모두 나쁜 것인가? 만약 좋은 전쟁과 나쁜 전쟁이 있다면, 이 둘을 가려낼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인가? 지금까지 일어난 전쟁들은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전쟁에 대해 규범적으로 고려하는 사회이론가와 사회철학자들은 이런 문제에 대해 고민한다.
전쟁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전쟁 자체를 부당한 것으로 간주하고 현실에서 일어나는(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모든 전쟁에 반대하는 것이다. 방법이나 철학적인 근거는 각각 다르겠지만 결론에 있어서 이와 같이 주장하는 여러 전통들을 묶어서 평화주의(pacifism)라고 한다. 비폭력 무저항 운동이나 시민불복종, 양심적 병역거부등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대개 평화주의자들이다. 다른 하나는 정당한 전쟁과 부당한 전쟁을 가릴 조건을 내세우고, 그것에 따라 현실에서 일어나는(또한 앞으로 일어날) 전쟁에 대해 평가하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전쟁은 정당했거나 또는 정당하기 때문에 감행해도 되고(또는 감행해야 하고), 반대로 어떤 전쟁은 부당했거나 또는 부당하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전쟁의 정당성을 판별할 수 있는 조건들을 내세우는데, 이 조건들이 바로 정의로운 전쟁 이론(just war theory)의 토대가 된다.
정의로운 전쟁이 가능하다는 주장은 대개 환상적 평화주의와 무규범적 현실주의 사이에서 적절한 타협점을 제시한다고 평가받으며,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 스스로가 자신들을 그런 위치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정의로운 전쟁 이론에 대한 이러한 평가를 얼핏 보았을 때, 이 이론이 앞으로 일어날 전쟁을 효과적으로 제한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어 우리의 이목을 끈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정의로운 전쟁 이론이 해결할 수 없는 해석상의 난점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역사상 일어났던 전쟁과 앞으로 일어날 전쟁에 대해서 올바르게 판가름할 수 없다는 것을 보이고자 한다. 또한, 전쟁이 없고 공동체와 개인 모두가 서로에 대해 적의를 가지지 않는 평화에 대한 이상을 지향점으로 설정하는 것만이 전쟁을 줄이고 종식시킬 수 있는 길이며, 정의로운 전쟁 이론은 적어도 이러한 지향점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에 전쟁이 없어지는 ‘진정한’ 평화의 상태를 이론적으로 도출해내지 못한다는 점을 드러내 정의로운 전쟁 이론을 비판하고자 한다.
2. 정의로운 전쟁 이론의 일반적 구조
전쟁을 전쟁 선포, 전투, 그리고 전후 처리의 세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면, 전쟁에 대한 도덕적, 윤리적 평가 역시 단계마다 각각 적용될 것이다. 즉, 전쟁에 대한 윤리적 평가는 전쟁 전체를 지배하는 정당성에 대한 평가, 전투 과정에서 벌어지는 구체적인 사건들에 대한 평가, 그리고 종전 이후 수습조치에 대한 평가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 일반적으로 정의로운 전쟁 이론에서는, 이 세 부분에 대한 평가에서 모두 정당성을 획득하는 경우에만 어떤 전쟁은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들 가운데 한 부분에서도 정당성을 획득하지 못한다면, 그 전쟁은 부당한 것이 되며 따라서 해서는 안되는 것이었거나 해서는 안될 전쟁으로 평가받는다.
다양한 이론가들이 정의로운 전쟁의 조건에 대해 제시했지만, 일반적 구조의 특징을 살펴보기 위한 좋은 사례는 1983년 미국 천주교 사제회의에서 제시한 항목들이다. 현재까지 역사적으로 존재한 여러 정의로운 전쟁 이론을 고려하여 설정한 노력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이를 나열해보면
① 정당한 원인,
② 실재적 권위,
③ 상대적인 정의관,
④ 올바른 의도,
⑤ 최후의 수단,
⑥ 성공의 개연성,
⑦ 전쟁의 상응성,
⑧ 전투의 상응성,
⑨ 분별성이다.
이 모든 조건을 만족할 경우 그 전쟁은 정의로운 전쟁이다.
2.1. 왜 전쟁을 하는가? - 전쟁 개시의 정의(jus ad bellum)
이 가운데 ①부터 ⑦까지는 ‘어떤 전쟁이 정당한 전쟁이다.’ 라고 선포되기 위해 필요한 조건으로서, 전쟁 전체를 지배하는 정당성을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
① 전쟁은 분명하고 진정한 위험에 대처하는 행위일 경우에만 가능한데, 이 행위는 민간인 보호나 적절한 삶의 조건을 마련하는 것, 그리고 기본적인 인권을 보장하는 것을 포함한다.
② 전쟁은 공동체 단위에서 정치적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권위에 의해서 결정되어야 한다.
③ 전쟁 당사자들이 자신들의 신념이 무제한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지하여야 한다.
④ ①에서 언급한 조건을 충족시켰을 때에만 ②에서 언급한 권위에 의해 기획, 전개될 수 있다.
⑤ 전쟁을 제외한 다른 수단을 생각할 수 없을만큼 충분히 다른 수단을 강구한 뒤여야 한다.
⑥ 전쟁을 먼저 선포하는 쪽에서 성공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한다. 다시 말하면 실패할 가능성이 더 크게 예상되는 경우, 비이성적으로 무력에 의존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에 전쟁을 일으켜서는 안된다.
⑦ 전쟁을 일으켰을 때 생기는 비용이 전쟁을 통해 기대할 수 있는 혜택(이익)보다 적거나 적어도 같아야한다.
전통적으로 정의로운 전쟁 이론은 이 부분에 대단히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근대 이전의 전쟁의 경우, 상대적으로 전쟁을 실제로 수행하는 전투원들 사이의 전투의 집합이 전쟁인 경우가 많았다. 현대에도 마찬가지지만 전투원은 전쟁 속에서 인간으로 간주되지 않으며 전쟁도구(무기)와 같은 지위를 획득하는데, 따라서 전쟁 전체를 지배하는 정당성만 확보할 수 있으면 개별 전투들은 도덕적으로 거의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정당성이 일종의 명분이 되어 전쟁을 통해 얻는 여러 결과들을 도덕적, 윤리적으로 정당화해주는 역할을 했다.
2.2. 어떻게 전쟁을 하는가? - 전쟁 수행의 정의(jus in bello)
그러나 무기의 발달과 사회의 변화는 전쟁의 양상을 바꾸어놓았다. 무기는 과학의 발달로 인해 각종 화학물질과 강력한 폭발력 등으로 더 이상 전투원만을 표적으로 삼지 않는 형태로 점점 바뀌어갔다. 대량살상무기(WMD)가 이에 대한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또한 근대국가의 국민개병제나 군산복합체적 면모 때문에 어떤 공동체 내에서 더 이상 전투원과 비전투원을 명확하게 구별하는 일이 불가능해졌다. 따라서 현대전에서는 여러 가지 이유로 민간인을 학살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전투과정에서 벌어지는 구체적인 사건에 대한 윤리적 평가는 위와 같은 변화에 의해서 요청된다. 제 2차 세계대전, 그리고 이후 일어난 수많은 전쟁을 통해 드러난 무차별 폭격이나 양민학살, 인종청소 등의 병폐는 전투에 대한 도덕적 고찰을 통해서만 부당한 것으로 드러난다. 따라서
⑧ 전투와 구체적인 작전을 실행하였을 때 얻을 수 있는 혜택이 그에 따르는 손해보다 많거나 적어도 같아야 하고,
⑨ 무고한 사람 즉 비전투원이거나 명백하게 상대방의 전투 행위에 참가하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는 해를 입혀서는 안된다는 조건이 부가된다.
정의로운 전쟁 이론이 이 부분에까지 관심을 확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비판의 여지는 충분하다. 첫째, 여전히 많은 전쟁에서 전투 내의 정당성은 확보되지 않는 실정이다. 그 이유를 위에 썼듯이 근대적 공동체 자체의 성격에 돌릴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전쟁을 일으키거나 혹은 그에 대항하는 집단의 전투원들이 속해있는 상황과 그들이 자행하는 비도덕적 행위에 있다고 보는 것이 더욱 현실적이다. 전투를 실제로 수행하는 전투원들은 도덕적인 고려를 할 수 있는 상황에 전혀 놓여있지 않으며, 따라서 도덕적 규범들을 위반하는 일도 그만큼 빈번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게다가 전쟁이라는 상황 자체가 전투원과 비전투원을 구분하게 만드는 근거가 되는데, 모든 전투원들은 전투원이기 이전에(전쟁 이전에) 인간으로서 그리고 시민으로서 존중받는 개인이다. 전쟁의 정당성과 관계없이 전쟁은 이러한 억지스러운 구분을 스스로 생산해내며 인간의 존엄성을 침범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렇다면 정의로운 전쟁은 사실상 비전투원(그리고 개인)의 권리와 생명을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보장해주지 못한다.
2.3. 전후 처리 - 전쟁 이후의 정의(jus post bellum)
위의 두 가지 밖에도 정의로운 전쟁 이론에서 반드시 고려되는 고전적인 요소는 ‘전쟁이 끝난 뒤의 상황은 전쟁이 시작되기 전의 상황과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국가가 침탈당한 자기 영토에 대해 회복을 주장하며 침략국에 대해 반격을 가했을 때, 침략국에게 정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부분은 침탈당한 자기 영토와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생긴 비용에 대한 보상 이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만약 그 국가가 침략국을 상대로 그 이상의 영토와 보상을 요구하며 역으로 침략할 경우, 그 전쟁은 부당한 전쟁이 된다.
그러나 현대에 오면 위와 같은 고전적인 개념은 위기를 맞는데, 인도주의적 개입이라는 새로운 상황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인도주의적 개입은 이전의 상황에 대해 명백한 변화를 의도하고 개입하는 것이다. 이런 개입적 전쟁이 성공적으로 수행되었을 경우, 전쟁을 선포한 국가는 패전국에 계속 주둔하며 다시는 이전과 같은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변화시켜야 할 것이다. 하지만 과연 승전국에게 그것을 실행할 도덕적 의무가 있는가? 만약 그러한 도덕적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승전국은 그것을 패전국에 강요하게 되며 따라서 패전국의 민주주의와 국가주권을 무시하는 결과를 낳고 말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어떤 상황을 어떻게 건설할 것인지에 대해 승전국의 도덕적 의무와 패전국의 국가주권이 상충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도덕적 의무가 없다면, 애초에 그런 인도주의적 개입은 어떤 명분을 지닐 수 있는가? 또한 승전국은 전쟁이 초래하는 패전국의 혼란과 무질서를 그대로 내버려 두고 떠나야 하는 것인가?
정의로운 전쟁 이론은 이러한 질문에 대해 혼란과 무질서를 교정할 의무가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패전국의 민주적 절차와 권위, 주권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국제사회의 충분한 동의 또한 얻어야 한다. 패전국의 민주주의와 국제사회의 민주주의라는 두 가지 방향에서 정당성을 획득한다면, 전후처리의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다. 그러나 인도주의적 개입을 통해서 이전에 발생한 비인간적, 비민주적 사례를 제거하는 것은 쉽게 성공할 수 있지만, 그 이후의 체제에 대한 책임의 문제는 정의로운 전쟁 이론 내에서 간단하게 해결되지 않는다.
3. 정의로운 전쟁 이론의 역사
정의로운 전쟁 이론이 어떻게 탄생하였고, 또 기존의 전쟁들을 어떻게 해석해왔는지 살펴보는 것은 이 이론이 현실적으로 어떤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지 알아볼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정의로운 전쟁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에게, 전쟁을 조장, 방조하거나 또는 전쟁을 환상적인 것으로 포장하고 찬양하며 여기에 참여할 것을 독려하는 프로파간다로 사용할 목적이 있었는지는 의문스럽다. 들어가는 말에서 기술했듯이, 정의로운 전쟁에 대한 이론은 오히려 무분별한 전쟁을 제한하기 위해서 요청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이론이 그들이 의도한 전쟁에 대한 제한과는 반대되는 결과로 나아갔거나 혹은 적어도 전쟁을 부당하다고 평가하고 억제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면, 그 이론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의도한 바를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러 이론 가운데서도, 정의로운 전쟁 이론의 원형인 기독교의 이론과, 이를 현대적으로 부활시켰다고 평가받는 왈쩌의 이론을 살펴보는 것이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전자는 현재까지도 이어져 내려오는 정의로운 전쟁 이론이 최초로 등장한 시기이며 그 틀이 거의 바뀌지 않은 상태로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반면 후자는 우리 가까이에 있는 전쟁들을 자신의 정의로운 전쟁 이론에 따라 평가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3.1. 근대 이전의 정의로운 전쟁 이론 - 기독교의 관점
최초로 정의로운 전쟁 이론을 제기한 철학자는 아우구스티누스이다. 철학자이면서 동시에 신학자였던 그는, 전쟁을 지상의 세계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적극적인 개입으로서 해석했다. 따라서 복음의 준수와 실천 여부에 따라 그 전쟁이 얼마나 정의로운가를 판가름할 수 있었다. 이는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당시의 비폭력 평화주의자 신자들과 신학적인 갈등을 일으키는 입장이었지만, 끝내는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후 다루게 될 왈쩌는 이에 대해 ‘(정의로운 전쟁 이론은) 단지 전쟁을 위한 변명으로서 전쟁을 도덕적, 종교적으로 용인하는 하나의 방식이었을 뿐이었’으며, ‘실제로 전쟁을 도덕적, 종교적으로 용인하는 것이 정의로운 전쟁 이론의 기능이었다.’ 고 말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런 입장은 아직 정의로운 전쟁과 종교적 가치에 입각한 성스러운 전쟁을 구분하지 못하는 초보적인 단계로 볼 수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전쟁 이론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더욱 정교하게 다듬어 정의로운 전쟁 이론의 원형을 완성시켰다. 그에 따르면, 어떤 전쟁은 평화를 파괴하지만 어떤 전쟁은 평화를 달성하고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다. 후자는 정의로운 전쟁(bellum iustum)이라고 부를 수 있다. 어떤 전쟁이 정의로운 전쟁이 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하는데, 정당한 권한과 정당한 근거, 그리고 정당한 의도가 그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천주교 사제 회의에서 언급한 항목 가운데 ②, ①, ④가 각각 여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정의로운 전쟁 이론에 있어 각 항목이 지니는 의의는 다음과 같다.
첫째, 정당한 권한의 문제에서 아퀴나스는 이 권한이 공적으로 획득한 것이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사적인 개인들은 전쟁을 선포하거나 수행할 수 없다. 전쟁을 수행할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한 판단은 국가의 통치를 위임받는 사람에 의해서만 이루어져야 한다. 군주는 이 권한을 가지고 공동체에 위협적인 존재에 대해서 판단하고 처리할 수 있다. 이는 다시 말하면 군주 또한 사적 개인으로서 내린 판단을 통해 전쟁을 선포해서는 안되고, 공공의 이익과 견해를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는 점을 뜻하기도 한다.
둘째, 정의롭지 않은 것을 실력을 통해 저지하고 없애는 것이 전쟁으로 정의되기 때문에, 전쟁을 초래한 국가 또는 군주는 논리적으로 정의롭지 못한 존재가 되어버린다. 정의롭지 못한 것에 대한 기준은 크게 두 가지로 제시되고 있다. 하나는 타국을 침략하고 이에 대한 보상에 소홀한 경우이다. 이 때 피해 당사국은 침략을 감행한 국가에게 전쟁을 선포할 수 있는 정당한 근거를 획득한다. 다른 하나는 부정의를 제대로 시정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는 경우이다. 이 때에는 부정의를 시정하기 위해 군사적으로 개입할 수 있다. 만약 이런 근거를 마련하지 못한다면 어떤 국가도 전쟁을 선포할 수 없으며, 따라서 국가 간 균형이 자연스럽게 유지된다.
셋째, 전쟁을 선포하는 목적이 도덕적인 것과 반드시 결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전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제공해준다. 전쟁이 재화를 획득한다거나 영토를 확장하는 등의 현실적인 이익을 획득하기 위해 의도되었다면, 아퀴나스에게 그것은 정의롭지 못한 전쟁이다. 전쟁은 언제나 선을 늘리고 악을 줄이는 데 사용해야만하는 방법이며, 그러므로 매우 조심스럽게 수행되어야 한다. 그는 또 전쟁을 수행하는 전투원과 군주는 특정한 감정이나 조건에 휘둘려 도덕적인 면을 침범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같은 장치들이 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국가 간 균형을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지는 의문이다. 현대의 정의로운 전쟁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이 이론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해석의 문제이다. 과연 어떤 것을 침략이라고 하고 어떤 수준이어야 그것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일본은 다케시마를 일본의 영토로 해석하고 한국의 실질적 점유를 침탈로 간주한다. 반면에 한국은 독도를 한국의 영토로 해석하고 일본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경우 무엇이 침략이고 무엇이 적정한 수준의 보상이 될 수 있을까? 그나마 이 부분은, 엄밀하게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어느 정도 직관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정당방위의 결과에 대해 도덕적인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부정의를 시정하기 위해 타국에 무력을 통해 간섭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 정당하며 또 어떤 경우에 부당할까? 어떤 국가가 부정의를 시정하지 못한다는 판정은 누가 해줄 수 있는가? 이 경계는 어느 전쟁에서나 상당히 모호하고 복잡한 문제를 낳는다.
3.2. 정의로운 전쟁 이론의 현대적 변용 - 왈쩌의 정의로운 전쟁 이론
3.2.1. 정의로운 전쟁이론의 토대
왈쩌는 정의로운 전쟁 이론을 현대적으로 복권시킨 학자로 평가받는다. 또한 지난 한 세기 동안 있었던 전쟁을 스스로 세운 기준을 통해 해석하고 평가함으로써 뜨거운 현안에 직접 접근하는 대담함이 돋보인다. 그는 스스로를 현실주의와 평화주의 사이에서 중도를 지켜나가는 사람으로 간주하는데, 이것은 자신이 성장하면서 지켜본 전쟁을 바라보는 여러 관점들에 대한 경험을 기술하는 일과 그에 대한 비판으로 구체화된다. 이러한 비판적 작업의 토대는 크게 세 가지 측면으로 요약해볼 수 있다.
첫째는, 지금까지 현실에서 일어난 구체적인 전쟁 사례에 대한 해석을 중심으로 자신의 입장을 전개한다. 이는 역설적으로 전쟁에 대한 현실주의적 관점을 비판하는 역할을 한다. 그는 구체적인 전쟁들을 그 자체가 아닌 도덕적 시선에서 재해석하여 제시한다. 전쟁의 시작에서 종결까지 그것을 수행하는 인간은 계속해서 도덕적인 결단을 내려야하는 상황에 부딪힌다는 것이다. 우선 전쟁의 선포부터가 도덕적인 결단이며, 이 결단을 내린 사람들은 도덕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 그의 일관된 생각이다. 또한 전투는 행위의 문제와 결부되어있기 때문에 결코 도덕적인 판단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 그는 현실주의와 평화주의 모두가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대해 일반적 잣대를 들이밀어 그 참모습을 제대로 그려내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전쟁에서 도덕을 고려하지 않을 경우, 결국 전쟁에 연관된 민간인, 나아가서는 인류 전체에 대해 중대한 범죄를 저지를 소지가 다분하다. 반면 평화주의는 모든 폭력을 거부함으로써 명백한 악에 대해서 무기력해질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이런 무기력은 상황을 개선시키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의 핵심이다.
셋째, 그가 제시하는 ‘전쟁에서도 지켜져야 하는 도덕의 최소한’은 인간의 기본권, 즉 생명과 자유에 대한 수호이다. 전쟁을 타산의 문제나 비용과 이익을 계산하는 것은 전쟁의 참혹함을 막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따라서 전쟁을 하는 순간에도 언제나 이것만은 지켜져야하고, 또 이것을 지키는 방향으로 전쟁을 선포하고, 수행하며, 또 종결시켜야한다.
3.2.2. 정의로운 전쟁의 조건
왈쩌는 전통적으로 논의된 정의로운 전쟁의 조건, 예를 들면 위에서 언급했던 천주교 사제회의의 항목들 가운데 정당한 원인에 집중해서 자신의 논증을 전개한다. 정당한 원인(cause), 즉 대의(Cause)는 다른 항목들에 비해 비교적 덜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전쟁의 명분과 원인에 대한 그의 입장은 명확하다. 전쟁은 침략에 대한 저항인 경우에만 정당화될 수 있으며, 침략이란 다름 아닌 자국민의 기본권이 침해당하는 사태를 말한다. 이런 사태는 인간 모두가 지켜야하는 도덕성에 대한 심각한 도전임과 동시에 생명과 자유를 수호할 의무를 지니는 한 국가에 대한 심각한 타격이기도 하다.
또한 그는 국가 내 개인 간의 관계와 국제사회 내 국가 간의 관계를 유비하여 바람직한 국제사회의 모델을 제시한다. 즉,
① 각 개인들은
② 시민으로서 생명과 자유(특히 사적 소유)에 대한 권리를
③ 법적으로 보호받으며
④ 자기 생명과 자유를 수호하고 그걸 다른 개인이 돕는 것이 정당화되며
⑤ 이외에는 공권력이 폭력적으로 등장하지 않고
⑥ 기본권을 침해한 개인에게 국가가 심리적, 물리적 제약을 가하듯이,
국제관계에서도
① 각 주권국가들이
② 영토와 통치권리를
③ 국제법을 통해 보장받으며
④ 주권과 영토를 수호하고 그것을 다른 국가가 돕는 것이 정당화되며
⑤ 이외에는 다른 전쟁이 정당화되지 않고
⑥ 침략을 저지른 국가는 전범으로 처벌하는 것이 정의로운 국제사회의 모습이라고 주장한다.
이 모델과 모순을 일으키지 않고 일어나는 전쟁은 정당한데, 침략에 대한 대응으로 일어나는 전쟁이 여기에 부합한다. ④ 의 원리에 따르면 인도주의적 개입도 어느 정도 정당화된다.
전투 중의 도덕에 있어서 그는 전투원과 비전투원의 구별을 확실하게 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한다. 하지만 전쟁의 특성상 의도하지 않은 비전투원의 피해는 언제나 발생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이것은 부수적인 것이며, 그것을 직접 의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도덕적 비난의 대상에서 제외될 소지가 있다고 말한다. 또한 직접 의도하지 않았을 때에만, 그리고 그 의도가 매우 좋을 때에만 비전투원에 대한 살상의 행위는 정당화될 수 있다. 또한 전후의 책임 있는 현지 복구를 통해 전쟁을 끝마쳐야 한다고 덧붙이고 있다.
그러나 왈쩌의 위와 같은 입장은 꽤 엄밀해보이고 정식화된 것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중세적인 정의로운 전쟁 이론에 대해 들이밀었던 해석의 문제를 다시 들이밀 수 있다. 이 ‘해석의 문제’는 왈쩌 스스로가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자신의 이론에 비추어 정당화함으로써 자초한 면이 크다. 왈쩌는 9-11 테러에 비추어보았을 때 미국은 테러 주체인 알-카에다에 대해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는 충분한 명분이 있다는 점, 첨단무기기술을 통해 비전투원에 대한 살상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자신의 입장을 펼쳤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전쟁의 대상이 알-카에다가 아니라 아프가니스탄이 되었던 것일까? 아프가니스탄이 알-카에다에 호의적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지만, 알-카에다가 미국에 테러를 가할 수 있을 만큼의 금전적, 물질적 지원도 아끼지 않았는지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또한 그는 이라크 전쟁에 대해서는 부당한 전쟁이라고 말함으로써, 해석의 주관성이 얼마나 자신의 이론에 깊게 개입할 수 있는지 스스로 보여주었다.
게다가 그는 이런 기준을 확립했음에도 불구하고, 비상상황(supreme emergency)이라는 예외를 가정하여 큰 논란을 빚는다. 물론 ‘누가 보아도 직관적으로 명백한 악이 출현했을 경우’로 극도로 제한하고 있지만, 비상상황에는 도덕적 고려가 매우 적거나 있지 않아도 정당화된다고 함으로써 이론적인 모순을 일으키고 있다. 게다가 누가 이것을 판정해줄 수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또한 그는 핵의 전쟁억지력을 어쩔 수 없이 수용하고 있다. 그러나 핵은 적대하는 어느 국가에게나 명백한 위협 요소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저지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는 일은 왈쩌의 기준에서는 정당하겠지만, 피침략국은 핵을 사용할 가능성이 매우 높으므로 이것은 전인류적인 기준에는 매우 부당한 일이 될 가능성이 높다.
4. 맺는 말 - 전쟁은 정의로울 수 있는가?
전쟁은 그 자체로 역사적인 사건이다. 역사 속에서 전쟁을 찬양하고 참여를 독려했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와는 달리, 전쟁은 그 어떤 다른 사건도 그만큼 참혹하고 잔인할 수 없기 때문에 역사적인 사건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에 대한 특별한 고찰이 요구되고, 이것을 억제할만한 이론적, 실천적 수단이 요청된다. 전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입장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전쟁 자체를 부당한 것으로 간주하는 평화주의, 나머지 하나는 부당한 전쟁을 설정하는 정의로운 전쟁 이론이다.
정의로운 전쟁 이론은 대다수의 전쟁을 부당하다고 주장함으로써 전쟁을 제한한다고 정의로운 전쟁 이론가들은 주장한다. 이 이론은 이상에만 갇힌 평화주의와 인간을 동물 이하의 존재로 전락시키는 현실주의 사이에서 적절한 타협점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들에 따르면 전쟁은 선포, 수행, 종전 이후라는 세 가지로 구분되며, 각 부분에서 정당성을 획득했을 때 정의로운 전쟁이 된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설명의 전통은 중세의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 시작되었으며, 마이클 왈쩌는 현대에 이 논의를 복각시키고 여러 전쟁에 대해 비판적으로 평가함으로써 정의로운 전쟁 이론의 힘을 증명하였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정의로운 전쟁 이론은 앞으로 수행할 전쟁은 정당하다고 주장할 근거를 마련해줌으로써 전쟁을 개시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한다. 이렇게 주장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는, 정의로운 전쟁 이론은 해석 앞에 열려있다는 점이다. 무엇이 정의인지, 무엇이 침략에 대한 반응인지 정의로운 전쟁 이론은 내부적으로 제대로 설명해내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론적 완결성을 갖추지 못한 채 어떤 전쟁에 대해서는 호의적이라는 것이 정의로운 전쟁 이론의 거의 유일하지만 가장 큰 문제인데, 특정한 전쟁을 허용하는 것은 해석의 다양성과 맞물려 다양한 전쟁에 대한 허용으로 직결되기 때문이다.
미국의 진보적 지식인 하워드 진은 자신의 제 2차 세계대전 참전 경험을 다음과 같이 적어놓았다. ‘나는 육군 항공대에 입대해 폭격수가 됐고 파시즘을 물리치기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중략) 아무 생각 없이 서류철에다가 [다시는 안 돼.] 라고 끄적거리고는 나 스스로도 놀랐다. (중략) 정당한 전쟁과 부당한 전쟁이 있다는 다소 정통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인류의 어떤 문제를 푸는 데 있어서도 전쟁은 전혀 해결책이 아니라는 쪽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이런 관점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기는 너무도 어렵다.’ 특히, 평화를 옹호하는 시각은 인도주의적 개입에 이르러서 자신의 관점을 포기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전쟁을 사고하는 기본적인 원칙이다. 전쟁은, 정당화하기에는 그 결과와 유산이 너무나도 끔찍하다. 또한 역사적으로 일어난 전쟁을 평가하는 것은 쉬워도, 앞으로 어떤 전쟁이 일어날 것이며 또 그 전쟁을 선포해도 되는지에 대해 평가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사실상 정의로운 전쟁 이론은 여기에서 그 기능을 멈춘다. 따라서 우리가 가장 기본적으로 삼아야하는 원칙은 ‘전쟁은 어떤 경우에도 부당하다.’ 는 직관적인 결론이다. 이것이 결론이자 전제가 되어야, 전인류가 정말 갈구하는 전쟁이 없는 평화, 모든 인류가 형제애를 바탕에 두고 영위하는 평화가 찾아올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