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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감옥에서 - 어느 재일조선인의 초상
서경식 지음, 권혁태 옮김 / 돌베개 / 2011년 3월
평점 :
품절


 

  교훈으로서의 역사

  전통적으로 인간의 역사의 가장 큰 기능은 교훈성이었다. 설화나 신화의 전승은 '이렇게 해야한다.'거나 혹은 '이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말을 하기 위해 좀 더 이해하기 쉽고 직관적인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취하고, 이 가운데 상당수는 실제 벌어졌던 일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이다. 단순하게는 이들의 집적이 곧 역사가 된다. 현대의 역사가들이 그토록 강조하는 '엄밀한 사실로서의 역사'란, 구전설화 시절부터 태동한 위와 같은 경향에 비해 그 탄생이 한참 뒤쳐진다. 어찌 보면 오히려 이 교훈적 성격을 더욱 강하게 하기 위한 - 그러니까, 이를테면 너희를 가르치려고 꾸며낸 말이 아니라 진짜 있었던 일을 들려줄테니 매우 조심해야 한다는 식의 - 방법론적 엄밀함이라고까지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역사적 사건이 교훈적이라는 것은, 사실상 아무런 의미를 지니고 있지 못하다. 교훈은 언제나 누구에게/어떤 교훈을 주어야 하는지(또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는지)가 문제로 떠오르고, 이 부분은 항상 문제적 영역이다. 완벽하게 동일한 역사적 사건이라도, 위의 두 가지가 무엇이냐에 따라서 사건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재편집되며, 재생산된다. 때로는 서로 다른 편집본이 전혀 다른 대상과 가치를 지향하는 경우도 있으며, 흔히 이런 현상은 역사전쟁이라는 말로 표현되곤 한다. 

  이 역사전쟁의 전선은 세계의 무수한 곳곳에 형성되어있다. 특히 '식민주의'라 불리는 이념적 경향에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 많이 남아있는 곳에서는, 21세기인 현재도 여전히 진행형이다. 그 가운데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사람들에게 가장 가까운 문제는, 역시나 일본의 식민지배와 관련된 문제일 것이다. 20세기의 첫 절반동안 일본의 제국주의적 경향은 주변 각국에게 심대한 악영향을 분명하게 끼쳤다. 이 제국주의는 일본 민족의 탄생과 함께 등장했고, 그러므로 20세기를 지배한 '민족=국가'라는 등식과 맞물려 행정적(물질적)으로 증식되었다. 이에 맞선 민족들은, 경제이념과 관계없이 저 등식을 (다소나마)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엿고, 이는 (한국을 포함한) 피억압 민족을 각 민족공동체별로 통합하고 일본의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이론적 기반이 되었다. 

  재일조선인 - 위치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언어의 감옥에서』의 글쓴이 서경식 교수는 자신의 위치를 이방인(디아스포라)이라고 규정하고, 이 위치에서의 경험을 증언하고 이론적으로 정당화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그를 이방인으로 만들어주는 현실적 조건은 재일조선인이라는 자신의 신분이다. 그가 생각하는 재일조선인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자신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정치적 경향을 지닌 집단의 중요한 통일성의 도구(기제), 즉 언어가 자신의 사고와 행위의 기반을 지배하고 있는데서 생기는 이질감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특히 그가 2~3세에 해당하고, 그의 집안에서 민족교육에 대해 그렇게 열성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보이는 현상인데, 많은 재일조선인들이 공유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 책의 1부인 '식민주의와 언어'에서 이에 대한 논의가 전개되고 있다. 어찌보면 논의라기보다는, 자신의 체험을 여러 사례를 들어 학술적 언어로 표현한 에세이에 가까워 보이기도 한다. 

  둘째, 재일+조선인이라는 두 가지 정체성이 자신에게 공존하는 가운데, 각 개별 정체성을 대표하는 집단(일본과 한국(또는 북조선)이라는 민족국가)에게 공인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승인받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여러가지 측면에서 공존하는 정체성을 거부하고,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갖추어야할 단일함을 끊임없이 요구하기 때문이다(라고 글쓴이의 주장을 요약하는 것이 올바른 것일지는, 아직도 뚜렷하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가 없다. 거칠게 정리한 수준이다). 위의 언어보다도 더, 본질적으로 글쓴이가 자신을 이방인이라고 규정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이 책 내부에서 따로 장을 내어 심화시킨 측면이 없지 않기에 첫째 이유를 따로 떼어놓았지만, 글쓴이의 정신세계 전체를 지배하는(그래서 이 책의 실제 대부분을 차지하는) 일관된 흐름은 바로 이 부분이다. 첫째는 어쩌면 이러한 상황의 부수적 효과일런지도. 

  글쓴이 스스로가 지적하는 '한국의 독자들이 자신을 찾는 이유'인, 기억의 정치학이라는 맥락이 중요해지는 것(또한 그 스스로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 지점도 바로 여기이다. 역사의 교훈은 대개 집단서사와 결부되어있으며, 집단서사의 현대적 버전은 다름아닌 민족서사이다. 특정한 공동체, 즉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역사는 매우 중요한 계기를 만들어준다. 다름아닌, 학문의 이름으로 집단서사를 성립시키는 것이다. 한국사(한국 민족의 역사), 일본사(일본 민족의 역사) 같은 것들은 그러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모든 집단(굳이 민족이 아닌, 다른 정체성으로 뭉친 곳도 마찬가지다.)에 있어 고유의 집단서사가 존재한다는 것은, 보편적 현상으로 보면 그럭저럭 넘어갈만하다. 그러나 민족사의 경우, 어떤 교훈을 집단의 구성원에게 전달하느냐에 따라, 국가 제도의 물리적 행정과 더불어 엄청난 파급효과를 낳는다. 이는 민족공동체와 국가공동체가 대체로 동일한 경우, 반드시 발생한다. 전쟁의 책임은 이제 끝난 것이며, 새로운 세대는 '희망찬 역사관'을 바탕으로 일본민족을 중흥해야 한다는 식의 일본우익들의 주장은 이같은 고민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들고, 패전국으로서 자신을 위치시킴과 동시에 그런 패배의 역사를 반복하지 말라고 교시하는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간다. 

  자유주의자 문제 

  재일조선인인 글쓴이는 이에 대해 당연히 비판적이다. 그러나, 그가 이 책에서 더욱 무게를 두고 비판하는 사람들은 위와 같은 싸구려 정치공학으로 민족을 팔아먹는 이들이 아니다. 물론 현실적으로 이들이 가장 큰 힘을 발휘한다는 것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책의 주된 주제이며, 동시에 그가 더욱 문제라고 생각하는 부분은 일본과 한국 내에서 이런 싸구려들을 비판하는 이른바 자유주의자(리버럴, 리버럴리스트)들이다. 가라타니 고진의 책을 번역한 박유하 교수나, 한국의 대표적인 페미니스트 조한혜정 교수와의 교류로 유명한 (역시나 일본의 대표적인 페미니스트로 알려진) 우에노 치즈코 교수 등이 여기에 포함되어있다. 

  단순히 서경식 교수의 입장만이 실린 이 책만으로는, 사실 그와 그의 비판의 대상(그리고 그들이 글쓴이를 향해 내놓은 반비판)들 사이에 오고간 논의가 무엇인지 종잡기 힘들다. 게다가 한국인에게는 (적어도 내게는) 생소한 '전쟁책임론의 이론철학적 기초'에 대한 더 넓은 논의의 맥락도 알아야하기 때문에, 이 책에 등장하는 여러 주장의 진짜 의도와 의미가 무엇인지는 쉽게 와닿지 않는다. 

  그러나 아주 쉽게 알 수 있는 것은, 이 자유주의자들이 탈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해보인다는 사실이다. 위안부 문제를 민족이 아닌 가부장적 국가제도의 문제, 즉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비판하는 시도라든지, 양국 모두가 객관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사실에 대해서는 반드시 알아야한다는 식의 논설, 인류사적 시각에서 보았을 때 일본의 전쟁은 잘못된 일이므로 윤리적 책임은 져야하지만 '한국'에 '일본'이 사죄해야 한다는 것은 민족주의적 시각에 매몰된 입장이므로 반대해야 한다는 주장은, 어쩌면 민족을 부정하는 사람들에게서 보이는 당연한 결론이다. 

  서경식 교수의 비판 - 보편주의와 특수주의의 결합, 그 사이에서 

  이들에 대한 글쓴이의 비판은, 전혀 다른 두 방향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더욱 보편적인' 보편주의의 관점에서 자유주의자들을 '편협한' 보편주의라고 비판하는 방향이다. 자유주의자들의 탈민족주의는 일본민족이라는 개념을 없애보림으로써 명백하게 존재했던 '일본' 민족의 전쟁책임을 없었던 것으로 만든다. 그리고 민족 대신 대체물을 통해 전쟁 중에 발생한 구체적 사건에 대해서만 책임을 묻는다. 

  그러나, (서경식 교수의 입장에 따르면) 어떤 대체물을 중심으로 조직된 이론의 평가는 현실에 얼마나 정합적인가에 따라 좌우된다고 할 때, '민족=국가'인 20세기 초반의 현실에서 민족주의 이념 이상으로 설명의 힘을 가지는 이론(혹은 민족의 대체물)이 있을 수 있는가? 글쓴이의 답은, 민족주의가 전부는 아니라 할지라도, 이 시기의 민족주의는 다른 어떤 보편이론(예를 들면, 페미니즘)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위상을 지닌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세계에 참여하고 설명해내려는 지식인이라면, 반드시 민족주의를 고려해야만 한다. 따라서, '더욱 보편적인' 보편주의는 반드시 민족이라는 것을 자신의 품에 안아야만 한다. 

  또 다른 한 방향은, 특수주의적 비판이다. 여기서의 특수란 다름아닌 서경식 교수 스스로를 뜻한다. 그가 경험하고 있는 특수함은, 정확하게 민족(국가)라는 존재를 통해, 그 경계에서 구성된다. 그리고 이 책의 다른 여러 글에서 보이는 그의 개인적인 여러 경험은, 민족이 단순히 탈민족주의라는 사상적, 이론적 조류를 수용하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극복될 수 없는 물리적 힘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시 말하면, 민족 사이의 이방인이라는 그의 존재 자체가 민족의 실체와 힘을 증명하는 가장 강한 증거라는 것이다. 탈민족주의의 관점에서는 그도 역시 자기들과 동일한 자유주의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지 못했고, 따라서 탈민족주의적 자유주의자가 될 수 없었다. 민족이라는 유령은 그의 곁을, 그리고 우리의 곁을 여전히 맴돌고 있다. 

  체험과 증언의 가치 

  이 책은, 그래서 어떤 이론적 전망이나 체계를 제시하지 않는다. 에세이의 모음이라는 책의 구성 자체의 특징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글쓴이의 특수한 정치적 위치에서 기인하는 바가 더 큰 것으로 보인다. 이런 특징은 그가 비판하는 사람들과의 대립, 특히 그들이 기대고 있는 다양한 탈민족주의적 경향들과의 대립으로 더욱 명확해진다. 그의 비판에 따르자면, 이러한 경향들은 그 자체로 논리적 정합성과 일정한 정치사상적 의미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전쟁책임 문제의 근본은 결국 민족(국가)의식일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듯 하다. 하지만 이들의 논리적 완결성에 비해 그에게는 (적어도 이 책에서는) 이론적 무기는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점은 그의 명확한 정치적인 입장과 묘한 긴장을 일으킨다. 

  대신 서경식 교수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체험이다. 자신의 체험, 그가 자주 인용하는 레비의 체험 등에 대한 강조는, 기억의 정치를 재구성할 수 있는 중요한 증언이 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현실의 문제에 잘못된 접근방식을 채택할 수도 있는 완결된 이론체계에 대한 반정립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의 입장에서 체험과 증언은 전쟁책임문제와 민족문제,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 문제를 통합해 일관되게 설명할 수 있게 해주는 도구이자 자기정당화의 중요한 계기가 된다. 체험을 통한 직관적 판단(특히 재일조선인이라는 위치)이 가져다주는 통찰이, 모든 인류에게 평화를 선사할 수 있는 기반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맺는말 

  그러나 레비의 자살, 그리고 글쓴이 자신의 토로에서 읽어낼 수 있듯, 체험을 되살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이유는 증언을 듣는 많은 사람들은 증언에 극단적으로 드러난 비정상성을 수용할 수 있는 인식의 체계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이 성공할 수 있을지 가능성을 점쳐보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오히려, 이 체험과 증언은, 긍정적 미래의 가능성을 지속시키기 위해, 즉 그런 체험과 증언과 유사한 상황이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 체험과 증언의 당사자들이 지속적으로 실천해야 할 (당위적인) 사명과도 같다.  

  그리하여, 냉철하고 확고한 정치적 입장에 비해, 그가 그리고 있는 앞날은 4부의 대담에서 스스로 인정하듯 다소 공상적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단순히 '대안이 없는 일본 우익과 자유주의자 양비론'이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민족주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극복해내는 일은 결코 짧은 시간에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인 것만은 분명하다. 또한 이를 위해 (글쓴이의 분석에 따르면) 가장 먼저 포기되어야 하는 일본의 민족주의가 지금처럼 지속되는 이상, 각각의 민족들은 그 폭력적 이념을 일본에 의지해 유지시킬 가능성이 높다. 이는 각 민족들이 적대적 공생관계에 돌입하는 우울한 미래를 낳을 것이다. 

  『언어의 감옥에서』에서 중심적으로 다루어지는 것은, 제목의 뜻과는 달리 일본 내에서 벌어진 전쟁책임론에 대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다시 그 내용의 대부분은 자유주의자 비판이다. 한편 그의 분석은 충분히 귀담아들을만 하고, 그의 체험은 충분히 고려되어야하는 것들이다. 이 둘이 결합했을 때, 너무나도 이상적이긴 하지만 새로운 정치가 열린다. 서경식의 책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위와 같은 이유들이 우리에게 제공해주는, '더욱 보편적인' 보편주의적 통찰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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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주목할만한 신간 도서를 보내주세요

이번 달 제가 고른 신간의 컨셉은 '자본주의'입니다. 우리를 강력하게 지배하지만 여전히 문제적인 체제이자 개념인 자본주의. 그 탄생과 함께 여러 각도에서 비판적 분석이 이루어졌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가장 설득력있는 (어쩌면 인간이 고안할 수 있는 최종의) 경제체제로서 자본주의를 신봉하면서 살아갑니다. 자본주의 자체는 무엇이며, 사람들은 어떻게 자본주의에 영향을 받고 또 재탄생시키는지 알아볼 수 있는 책이 많이 나왔네요. 

  1. 돈의 본성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핵심은 누가 뭐라하더라도 역시 '돈', 즉 화폐겠죠. 마르크스 뿐만이 아니라, 다른 여러 철학-사회학자들에게 모든 실제 상품과 교환이 가능한 이상한 존재인 '돈'은 가장 흥미를 끄는 연구대상입니다. 이 책은 화폐에 대한 일반적인 이론과 분석을 개괄적으로 소개한 뒤에, 이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 소개하고 있네요. 가장 상식적인 수준에서 볼 수 있는 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고요. 이 책을 통해서 자기 마음에 드는 분석에 대해 더 깊게 살펴볼 수도 있다는 점에서 화폐분석에 들어가는 책으로 좋을 거라 생각합니다. 번역자가 칼 폴라니를 한국에 소개한 것으로 유명한 홍기빈이라는 점도 마음에 듭니다.

 

  

  2. 데이비드 하비의 맑스 『자본』강의 

  자본주의 분석의 일인자는 누가 뭐라 하더라도 마르크스가 아닐까 합니다. 자본주의라는 개념 자체를 확립시키고, 이론적인 전제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함으로써 여전히 유효한 사상가라고 할 수 있지요. 그래서 그 결과물인 『자본』(『자본론』) 은 어렵고 힘든 책인데도 여전히 의미있고 많이 읽히는 것이겠죠. 『자본』에 대한 수많은 개설과 해설서들이 있었지만,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이라는 책으로 유명한 데이비드 하비의 강의라서 더 믿음이 가네요. 하비 스스로가 현대 자본주의를 가장 잘 분석했다고 평가받는 학자이기 때문이죠. 마르크스과 하비의 조합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3. 미디어의 이해 - 인간의 확장 

  자본주의는 인간의 물질적 생활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생활 깊숙한 곳에도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바로 우리 주변을 둘러싼 미디어 때문이지요. 이 책은 현대 미디어 이론가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인 맥루한의 저서 가운데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나왔던 책들과는 다른 번역자의 새 번역이네요. 자본주의 분석과는 거리가 약간 있지만, 인간의 정신세계에 큰 영향을 끼치는 미디어의 속성과 힘에 대한 설명은 다시금 미디어의 기능과 영향력에 대해서 실감하게 합니다. 이 책을 읽으려다가 몇 번을 포기한 기억이 있어서, 새로 나왔다고 하니 고통스러운 기억이 스멀스멀 떠오르지만 그래도 다시 또 도전해보고 싶은 책이네요.  

 

 

  4. 공간의 생산 

  위에 보았던 책들은 다소간 거시적인 측면에서 분석한 자본주의인 반면에, 이 책은 미시적인 측면이 강한 책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마르크스주의자이자 유명한 사회학자인 르페브르의 책은, 사실 한국에서는 다른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들에 비해서 구경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매우 반갑네요. 공간을 재편하는 문제는, 자본주의라는 존재가 사람들의 습관을 자본주의적으로 바꾸는 문제와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있기 때문에, 미시적으로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지만, 이 책은 그 가운데서도 고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지요.  

 

 

 

  5. 후쿠자와 유키치의 아시아 침략사상을 묻는다 

  그렇다면 한국의 자본주의는 어디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을지 고민해보는 것도 좋을거라 생각합니다. 생각해보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일본의 세계경제체제 편입, 그리고 그 일본에 의한 지배가 한국의 자본주의의 가장 깊은 뿌리라고 할 수 있겠죠. 그리고 그 사상적 기원은 바로 일본 화폐의 얼굴, 후쿠자와 유키치입니다. 일본 근대화의 기수, 사상적 아버지, 행동하는 지식인 등등의 이미지로, 일본에서는 한국의 세종대왕 만큼이나 칭송받는 인물이죠. 하지만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보인 군국주의와 탈아입구적 면모 또한 이 사람에게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기에, 일본을 제외한 다른 국가들에게는 좋지 않은 인상을 가지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인상일 뿐, 사실 한국의 어느 역사책에서도 그에 대해 다루지는 않지요. 사상적, 정치적 중요함에 비해서 너무나도 홀대받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 면에서 그에 대한 (옹호적 연구이든 비판적 연구이든) 연구는 우리의 지금 모습을 이해하는데도 매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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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쿠리 2011-07-15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앙리 르페브르 찾으러 왔다가 우연히 이런데서 보게 되는군요. 저 05 후배입니다. 효진이네 화이팅.

박효진 2011-07-15 17:27   좋아요 0 | URL
브람스를 좋아하며 현대철학에 관심이 많은 당신은 누구십니까 근데 리스트가 2008년에 만들어진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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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용윤리학과 도덕적 딜레마 발표문 초고> 

1. 들어가는 말 - 전쟁에 대한 두 가지 비판적 접근 방법

  지난 달 미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여러 국가들은 리비아 내전에서 시민군 측에 손을 들어주었고, 카다피 정권을 실력으로 무너뜨리고 민주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내전에 개입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렇듯 멀리 있는 것 같지만, 전쟁은 사실 우리의 주변에 있다. 최근 2년 동안 한국에서 일어난 사건 가운데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피격사태는 이런 사실을 다시 한 번 각인시켜주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은 2000년대 들어서 미국이 감행한 전쟁에 대한민국 정부가 군대를 파견하여 힘을 보탠 것을 기억한다. 더 멀게 보자면, 인류에게 가장 큰 상처를 남긴 전쟁인 제 2차 세계대전은 종결된 지 70여 년이 다 되어가지만, 그 당시에 결정된 전후처리의 흔적은 아직도 세계의 곳곳에 남아있다. 

  하지만 우리의 주변에 흔하게(?) 있는 만큼, 전쟁은 일어났을 때 이에 연관된 인간들의 삶을 송두리째 파괴한다. 전쟁은 결코 <람보>나 <라이언 일병 구하기>일 수 없으며, 어떤 매체로도 그 참혹함을 온전히 담아낼 수 없는 비극이 속출한다. 전쟁에 직면한 개인은 불안하고 일관되지 못한 일상을 경험한다. 홉스의 유명한 표현을 빌리자면, 전쟁상태에서는 ‘예술이나 학문도 없으며, 사회도 없다. 끊임없는 공포와 생사의 갈림길에서 인간의 삶은 고독하고, 가난하고, 험악하고, 잔인하고, 그리고 짧다.’ 위 문단에서 묘사한 것과 같이 전쟁이 인간의 주변에 언제나 존재하는 것은 매우 비극적인 사태임이 틀림없다. 인간은 언제든지 험난함에 노출될 수 있다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전쟁이 철학적 고려의 대상이 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전쟁이 없는 상태를 만드는 것에 대한 홉스나 마키아벨리 식의 무비판적이고 현실주의적인 해법, 즉 자기보존을 위해서 힘을 길러서 상대를 무력으로 제압하는 것은 결정적으로 그 공동체를 일상적인 전쟁상태로 돌입시킨다. 다시 말해 홉스의 묘사와 같은 상황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이런 자각에서부터, 전쟁을 규범적으로 정의하고 제한해야 할 필요성이 생겨난다. 전쟁이란 무엇인가? 전쟁은 모두 나쁜 것인가? 만약 좋은 전쟁과 나쁜 전쟁이 있다면, 이 둘을 가려낼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인가? 지금까지 일어난 전쟁들은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전쟁에 대해 규범적으로 고려하는 사회이론가와 사회철학자들은 이런 문제에 대해 고민한다. 

  전쟁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전쟁 자체를 부당한 것으로 간주하고 현실에서 일어나는(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모든 전쟁에 반대하는 것이다. 방법이나 철학적인 근거는 각각 다르겠지만 결론에 있어서 이와 같이 주장하는 여러 전통들을 묶어서 평화주의(pacifism)라고 한다. 비폭력 무저항 운동이나 시민불복종, 양심적 병역거부등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대개 평화주의자들이다. 다른 하나는 정당한 전쟁과 부당한 전쟁을 가릴 조건을 내세우고, 그것에 따라 현실에서 일어나는(또한 앞으로 일어날) 전쟁에 대해 평가하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전쟁은 정당했거나 또는 정당하기 때문에 감행해도 되고(또는 감행해야 하고), 반대로 어떤 전쟁은 부당했거나 또는 부당하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전쟁의 정당성을 판별할 수 있는 조건들을 내세우는데, 이 조건들이 바로 정의로운 전쟁 이론(just war theory)의 토대가 된다. 

  정의로운 전쟁이 가능하다는 주장은 대개 환상적 평화주의와 무규범적 현실주의 사이에서 적절한 타협점을 제시한다고 평가받으며,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 스스로가 자신들을 그런 위치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정의로운 전쟁 이론에 대한 이러한 평가를 얼핏 보았을 때, 이 이론이 앞으로 일어날 전쟁을 효과적으로 제한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어 우리의 이목을 끈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정의로운 전쟁 이론이 해결할 수 없는 해석상의 난점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역사상 일어났던 전쟁과 앞으로 일어날 전쟁에 대해서 올바르게 판가름할 수 없다는 것을 보이고자 한다. 또한, 전쟁이 없고 공동체와 개인 모두가 서로에 대해 적의를 가지지 않는 평화에 대한 이상을 지향점으로 설정하는 것만이 전쟁을 줄이고 종식시킬 수 있는 길이며, 정의로운 전쟁 이론은 적어도 이러한 지향점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에 전쟁이 없어지는 ‘진정한’ 평화의 상태를 이론적으로 도출해내지 못한다는 점을 드러내 정의로운 전쟁 이론을 비판하고자 한다.

 

2. 정의로운 전쟁 이론의 일반적 구조

  전쟁을 전쟁 선포, 전투, 그리고 전후 처리의 세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면, 전쟁에 대한 도덕적, 윤리적 평가 역시 단계마다 각각 적용될 것이다. 즉, 전쟁에 대한 윤리적 평가는 전쟁 전체를 지배하는 정당성에 대한 평가, 전투 과정에서 벌어지는 구체적인 사건들에 대한 평가, 그리고 종전 이후 수습조치에 대한 평가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 일반적으로 정의로운 전쟁 이론에서는, 이 세 부분에 대한 평가에서 모두 정당성을 획득하는 경우에만 어떤 전쟁은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들 가운데 한 부분에서도 정당성을 획득하지 못한다면, 그 전쟁은 부당한 것이 되며 따라서 해서는 안되는 것이었거나 해서는 안될 전쟁으로 평가받는다. 

  다양한 이론가들이 정의로운 전쟁의 조건에 대해 제시했지만, 일반적 구조의 특징을 살펴보기 위한 좋은 사례는 1983년 미국 천주교 사제회의에서 제시한 항목들이다. 현재까지 역사적으로 존재한 여러 정의로운 전쟁 이론을 고려하여 설정한 노력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이를 나열해보면 

 ① 정당한 원인,
 ② 실재적 권위,
 ③ 상대적인 정의관,
 ④ 올바른 의도,
 ⑤ 최후의 수단,
 ⑥ 성공의 개연성,
 ⑦ 전쟁의 상응성,
 ⑧ 전투의 상응성,
 ⑨ 분별성이다. 

  이 모든 조건을 만족할 경우 그 전쟁은 정의로운 전쟁이다.

 

2.1. 왜 전쟁을 하는가? - 전쟁 개시의 정의(jus ad bellum)

  이 가운데 ①부터 ⑦까지는 ‘어떤 전쟁이 정당한 전쟁이다.’ 라고 선포되기 위해 필요한 조건으로서, 전쟁 전체를 지배하는 정당성을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 

 ① 전쟁은 분명하고 진정한 위험에 대처하는 행위일 경우에만 가능한데, 이 행위는 민간인 보호나 적절한 삶의 조건을 마련하는 것, 그리고 기본적인 인권을 보장하는 것을 포함한다.
 ② 전쟁은 공동체 단위에서 정치적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권위에 의해서 결정되어야 한다. 
 ③ 전쟁 당사자들이 자신들의 신념이 무제한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지하여야 한다. 
 ④ ①에서 언급한 조건을 충족시켰을 때에만 ②에서 언급한 권위에 의해 기획, 전개될 수 있다. 
 ⑤ 전쟁을 제외한 다른 수단을 생각할 수 없을만큼 충분히 다른 수단을 강구한 뒤여야 한다. 
 ⑥ 전쟁을 먼저 선포하는 쪽에서 성공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한다. 다시 말하면 실패할 가능성이 더 크게 예상되는 경우, 비이성적으로 무력에 의존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에 전쟁을 일으켜서는 안된다.  
 ⑦ 전쟁을 일으켰을 때 생기는 비용이 전쟁을 통해 기대할 수 있는 혜택(이익)보다 적거나 적어도 같아야한다. 

  전통적으로 정의로운 전쟁 이론은 이 부분에 대단히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근대 이전의 전쟁의 경우, 상대적으로 전쟁을 실제로 수행하는 전투원들 사이의 전투의 집합이 전쟁인 경우가 많았다. 현대에도 마찬가지지만 전투원은 전쟁 속에서 인간으로 간주되지 않으며 전쟁도구(무기)와 같은 지위를 획득하는데, 따라서 전쟁 전체를 지배하는 정당성만 확보할 수 있으면 개별 전투들은 도덕적으로 거의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정당성이 일종의 명분이 되어 전쟁을 통해 얻는 여러 결과들을 도덕적, 윤리적으로 정당화해주는 역할을 했다.

 

2.2. 어떻게 전쟁을 하는가? - 전쟁 수행의 정의(jus in bello)

  그러나 무기의 발달과 사회의 변화는 전쟁의 양상을 바꾸어놓았다. 무기는 과학의 발달로 인해 각종 화학물질과 강력한 폭발력 등으로 더 이상 전투원만을 표적으로 삼지 않는 형태로 점점 바뀌어갔다. 대량살상무기(WMD)가 이에 대한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또한 근대국가의 국민개병제나 군산복합체적 면모 때문에 어떤 공동체 내에서 더 이상 전투원과 비전투원을 명확하게 구별하는 일이 불가능해졌다. 따라서 현대전에서는 여러 가지 이유로 민간인을 학살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전투과정에서 벌어지는 구체적인 사건에 대한 윤리적 평가는 위와 같은 변화에 의해서 요청된다. 제 2차 세계대전, 그리고 이후 일어난 수많은 전쟁을 통해 드러난 무차별 폭격이나 양민학살, 인종청소 등의 병폐는 전투에 대한 도덕적 고찰을 통해서만 부당한 것으로 드러난다. 따라서 

 ⑧ 전투와 구체적인 작전을 실행하였을 때 얻을 수 있는 혜택이 그에 따르는 손해보다 많거나 적어도 같아야 하고,
 ⑨ 무고한 사람 즉 비전투원이거나 명백하게 상대방의 전투 행위에 참가하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는 해를 입혀서는 안된다는 조건이 부가된다. 

  정의로운 전쟁 이론이 이 부분에까지 관심을 확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비판의 여지는 충분하다. 첫째, 여전히 많은 전쟁에서 전투 내의 정당성은 확보되지 않는 실정이다. 그 이유를 위에 썼듯이 근대적 공동체 자체의 성격에 돌릴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전쟁을 일으키거나 혹은 그에 대항하는 집단의 전투원들이 속해있는 상황과 그들이 자행하는 비도덕적 행위에 있다고 보는 것이 더욱 현실적이다. 전투를 실제로 수행하는 전투원들은 도덕적인 고려를 할 수 있는 상황에 전혀 놓여있지 않으며, 따라서 도덕적 규범들을 위반하는 일도 그만큼 빈번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게다가 전쟁이라는 상황 자체가 전투원과 비전투원을 구분하게 만드는 근거가 되는데, 모든 전투원들은 전투원이기 이전에(전쟁 이전에) 인간으로서 그리고 시민으로서 존중받는 개인이다. 전쟁의 정당성과 관계없이 전쟁은 이러한 억지스러운 구분을 스스로 생산해내며 인간의 존엄성을 침범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렇다면 정의로운 전쟁은 사실상 비전투원(그리고 개인)의 권리와 생명을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보장해주지 못한다.

 

2.3. 전후 처리 - 전쟁 이후의 정의(jus post bellum)

  위의 두 가지 밖에도 정의로운 전쟁 이론에서 반드시 고려되는 고전적인 요소는 ‘전쟁이 끝난 뒤의 상황은 전쟁이 시작되기 전의 상황과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국가가 침탈당한 자기 영토에 대해 회복을 주장하며 침략국에 대해 반격을 가했을 때, 침략국에게 정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부분은 침탈당한 자기 영토와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생긴 비용에 대한 보상 이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만약 그 국가가 침략국을 상대로 그 이상의 영토와 보상을 요구하며 역으로 침략할 경우, 그 전쟁은 부당한 전쟁이 된다. 

  그러나 현대에 오면 위와 같은 고전적인 개념은 위기를 맞는데, 인도주의적 개입이라는 새로운 상황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인도주의적 개입은 이전의 상황에 대해 명백한 변화를 의도하고 개입하는 것이다. 이런 개입적 전쟁이 성공적으로 수행되었을 경우, 전쟁을 선포한 국가는 패전국에 계속 주둔하며 다시는 이전과 같은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변화시켜야 할 것이다. 하지만 과연 승전국에게 그것을 실행할 도덕적 의무가 있는가? 만약 그러한 도덕적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승전국은 그것을 패전국에 강요하게 되며 따라서 패전국의 민주주의와 국가주권을 무시하는 결과를 낳고 말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어떤 상황을 어떻게 건설할 것인지에 대해 승전국의 도덕적 의무와 패전국의 국가주권이 상충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도덕적 의무가 없다면, 애초에 그런 인도주의적 개입은 어떤 명분을 지닐 수 있는가? 또한 승전국은 전쟁이 초래하는 패전국의 혼란과 무질서를 그대로 내버려 두고 떠나야 하는 것인가? 

  정의로운 전쟁 이론은 이러한 질문에 대해 혼란과 무질서를 교정할 의무가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패전국의 민주적 절차와 권위, 주권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국제사회의 충분한 동의 또한 얻어야 한다. 패전국의 민주주의와 국제사회의 민주주의라는 두 가지 방향에서 정당성을 획득한다면, 전후처리의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다. 그러나 인도주의적 개입을 통해서 이전에 발생한 비인간적, 비민주적 사례를 제거하는 것은 쉽게 성공할 수 있지만, 그 이후의 체제에 대한 책임의 문제는 정의로운 전쟁 이론 내에서 간단하게 해결되지 않는다. 

 

3. 정의로운 전쟁 이론의 역사

  정의로운 전쟁 이론이 어떻게 탄생하였고, 또 기존의 전쟁들을 어떻게 해석해왔는지 살펴보는 것은 이 이론이 현실적으로 어떤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지 알아볼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정의로운 전쟁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에게, 전쟁을 조장, 방조하거나 또는 전쟁을 환상적인 것으로 포장하고 찬양하며 여기에 참여할 것을 독려하는 프로파간다로 사용할 목적이 있었는지는 의문스럽다. 들어가는 말에서 기술했듯이, 정의로운 전쟁에 대한 이론은 오히려 무분별한 전쟁을 제한하기 위해서 요청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이론이 그들이 의도한 전쟁에 대한 제한과는 반대되는 결과로 나아갔거나 혹은 적어도 전쟁을 부당하다고 평가하고 억제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면, 그 이론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의도한 바를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러 이론 가운데서도, 정의로운 전쟁 이론의 원형인 기독교의 이론과, 이를 현대적으로 부활시켰다고 평가받는 왈쩌의 이론을 살펴보는 것이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전자는 현재까지도 이어져 내려오는 정의로운 전쟁 이론이 최초로 등장한 시기이며 그 틀이 거의 바뀌지 않은 상태로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반면 후자는 우리 가까이에 있는 전쟁들을 자신의 정의로운 전쟁 이론에 따라 평가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3.1. 근대 이전의 정의로운 전쟁 이론 - 기독교의 관점

 

 

 

 

 

 

 

  최초로 정의로운 전쟁 이론을 제기한 철학자는 아우구스티누스이다. 철학자이면서 동시에 신학자였던 그는, 전쟁을 지상의 세계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적극적인 개입으로서 해석했다. 따라서 복음의 준수와 실천 여부에 따라 그 전쟁이 얼마나 정의로운가를 판가름할 수 있었다. 이는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당시의 비폭력 평화주의자 신자들과 신학적인 갈등을 일으키는 입장이었지만, 끝내는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후 다루게 될 왈쩌는 이에 대해 ‘(정의로운 전쟁 이론은) 단지 전쟁을 위한 변명으로서 전쟁을 도덕적, 종교적으로 용인하는 하나의 방식이었을 뿐이었’으며, ‘실제로 전쟁을 도덕적, 종교적으로 용인하는 것이 정의로운 전쟁 이론의 기능이었다.’ 고 말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런 입장은 아직 정의로운 전쟁과 종교적 가치에 입각한 성스러운 전쟁을 구분하지 못하는 초보적인 단계로 볼 수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전쟁 이론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더욱 정교하게 다듬어 정의로운 전쟁 이론의 원형을 완성시켰다. 그에 따르면, 어떤 전쟁은 평화를 파괴하지만 어떤 전쟁은 평화를 달성하고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다. 후자는 정의로운 전쟁(bellum iustum)이라고 부를 수 있다. 어떤 전쟁이 정의로운 전쟁이 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하는데, 정당한 권한과 정당한 근거, 그리고 정당한 의도가 그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천주교 사제 회의에서 언급한 항목 가운데 ②, ①, ④가 각각 여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정의로운 전쟁 이론에 있어 각 항목이 지니는 의의는 다음과 같다. 

  첫째, 정당한 권한의 문제에서 아퀴나스는 이 권한이 공적으로 획득한 것이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사적인 개인들은 전쟁을 선포하거나 수행할 수 없다. 전쟁을 수행할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한 판단은 국가의 통치를 위임받는 사람에 의해서만 이루어져야 한다. 군주는 이 권한을 가지고 공동체에 위협적인 존재에 대해서 판단하고 처리할 수 있다. 이는 다시 말하면 군주 또한 사적 개인으로서 내린 판단을 통해 전쟁을 선포해서는 안되고, 공공의 이익과 견해를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는 점을 뜻하기도 한다. 

  둘째, 정의롭지 않은 것을 실력을 통해 저지하고 없애는 것이 전쟁으로 정의되기 때문에, 전쟁을 초래한 국가 또는 군주는 논리적으로 정의롭지 못한 존재가 되어버린다. 정의롭지 못한 것에 대한 기준은 크게 두 가지로 제시되고 있다. 하나는 타국을 침략하고 이에 대한 보상에 소홀한 경우이다. 이 때 피해 당사국은 침략을 감행한 국가에게 전쟁을 선포할 수 있는 정당한 근거를 획득한다. 다른 하나는 부정의를 제대로 시정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는 경우이다. 이 때에는 부정의를 시정하기 위해 군사적으로 개입할 수 있다. 만약 이런 근거를 마련하지 못한다면 어떤 국가도 전쟁을 선포할 수 없으며, 따라서 국가 간 균형이 자연스럽게 유지된다. 

  셋째, 전쟁을 선포하는 목적이 도덕적인 것과 반드시 결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전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제공해준다. 전쟁이 재화를 획득한다거나 영토를 확장하는 등의 현실적인 이익을 획득하기 위해 의도되었다면, 아퀴나스에게 그것은 정의롭지 못한 전쟁이다. 전쟁은 언제나 선을 늘리고 악을 줄이는 데 사용해야만하는 방법이며, 그러므로 매우 조심스럽게 수행되어야 한다. 그는 또 전쟁을 수행하는 전투원과 군주는 특정한 감정이나 조건에 휘둘려 도덕적인 면을 침범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같은 장치들이 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국가 간 균형을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지는 의문이다. 현대의 정의로운 전쟁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이 이론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해석의 문제이다. 과연 어떤 것을 침략이라고 하고 어떤 수준이어야 그것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일본은 다케시마를 일본의 영토로 해석하고 한국의 실질적 점유를 침탈로 간주한다. 반면에 한국은 독도를 한국의 영토로 해석하고 일본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경우 무엇이 침략이고 무엇이 적정한 수준의 보상이 될 수 있을까? 그나마 이 부분은, 엄밀하게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어느 정도 직관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정당방위의 결과에 대해 도덕적인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부정의를 시정하기 위해 타국에 무력을 통해 간섭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 정당하며 또 어떤 경우에 부당할까? 어떤 국가가 부정의를 시정하지 못한다는 판정은 누가 해줄 수 있는가? 이 경계는 어느 전쟁에서나 상당히 모호하고 복잡한 문제를 낳는다.  



3.2. 정의로운 전쟁 이론의 현대적 변용 - 왈쩌의 정의로운 전쟁 이론
 

3.2.1. 정의로운 전쟁이론의 토대

  왈쩌는 정의로운 전쟁 이론을 현대적으로 복권시킨 학자로 평가받는다. 또한 지난 한 세기 동안 있었던 전쟁을 스스로 세운 기준을 통해 해석하고 평가함으로써 뜨거운 현안에 직접 접근하는 대담함이 돋보인다. 그는 스스로를 현실주의와 평화주의 사이에서 중도를 지켜나가는 사람으로 간주하는데, 이것은 자신이 성장하면서 지켜본 전쟁을 바라보는 여러 관점들에 대한 경험을 기술하는 일과 그에 대한 비판으로 구체화된다. 이러한 비판적 작업의 토대는 크게 세 가지 측면으로 요약해볼 수 있다. 

  첫째는, 지금까지 현실에서 일어난 구체적인 전쟁 사례에 대한 해석을 중심으로 자신의 입장을 전개한다. 이는 역설적으로 전쟁에 대한 현실주의적 관점을 비판하는 역할을 한다. 그는 구체적인 전쟁들을 그 자체가 아닌 도덕적 시선에서 재해석하여 제시한다. 전쟁의 시작에서 종결까지 그것을 수행하는 인간은 계속해서 도덕적인 결단을 내려야하는 상황에 부딪힌다는 것이다. 우선 전쟁의 선포부터가 도덕적인 결단이며, 이 결단을 내린 사람들은 도덕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 그의 일관된 생각이다. 또한 전투는 행위의 문제와 결부되어있기 때문에 결코 도덕적인 판단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 그는 현실주의와 평화주의 모두가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대해 일반적 잣대를 들이밀어 그 참모습을 제대로 그려내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전쟁에서 도덕을 고려하지 않을 경우, 결국 전쟁에 연관된 민간인, 나아가서는 인류 전체에 대해 중대한 범죄를 저지를 소지가 다분하다. 반면 평화주의는 모든 폭력을 거부함으로써 명백한 악에 대해서 무기력해질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이런 무기력은 상황을 개선시키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의 핵심이다.

  셋째, 그가 제시하는 ‘전쟁에서도 지켜져야 하는 도덕의 최소한’은 인간의 기본권, 즉 생명과 자유에 대한 수호이다. 전쟁을 타산의 문제나 비용과 이익을 계산하는 것은 전쟁의 참혹함을 막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따라서 전쟁을 하는 순간에도 언제나 이것만은 지켜져야하고, 또 이것을 지키는 방향으로 전쟁을 선포하고, 수행하며, 또 종결시켜야한다.

    3.2.2. 정의로운 전쟁의 조건

  왈쩌는 전통적으로 논의된 정의로운 전쟁의 조건, 예를 들면 위에서 언급했던 천주교 사제회의의 항목들 가운데 정당한 원인에 집중해서 자신의 논증을 전개한다. 정당한 원인(cause), 즉 대의(Cause)는 다른 항목들에 비해 비교적 덜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전쟁의 명분과 원인에 대한 그의 입장은 명확하다. 전쟁은 침략에 대한 저항인 경우에만 정당화될 수 있으며, 침략이란 다름 아닌 자국민의 기본권이 침해당하는 사태를 말한다. 이런 사태는 인간 모두가 지켜야하는 도덕성에 대한 심각한 도전임과 동시에 생명과 자유를 수호할 의무를 지니는 한 국가에 대한 심각한 타격이기도 하다. 

  또한 그는 국가 내 개인 간의 관계와 국제사회 내 국가 간의 관계를 유비하여 바람직한 국제사회의 모델을 제시한다. 즉, 

 ① 각 개인들은
② 시민으로서 생명과 자유(특히 사적 소유)에 대한 권리를
③ 법적으로 보호받으며
④ 자기 생명과 자유를 수호하고 그걸 다른 개인이 돕는 것이 정당화되며
⑤ 이외에는 공권력이 폭력적으로 등장하지 않고
⑥ 기본권을 침해한 개인에게 국가가 심리적, 물리적 제약을 가하듯이, 

 국제관계에서도 

 ① 각 주권국가들이
② 영토와 통치권리를
③ 국제법을 통해 보장받으며
④ 주권과 영토를 수호하고 그것을 다른 국가가 돕는 것이 정당화되며
⑤ 이외에는 다른 전쟁이 정당화되지 않고
⑥ 침략을 저지른 국가는 전범으로 처벌하는 것이 정의로운 국제사회의 모습이라고 주장한다. 

이 모델과 모순을 일으키지 않고 일어나는 전쟁은 정당한데, 침략에 대한 대응으로 일어나는 전쟁이 여기에 부합한다. ④ 의 원리에 따르면 인도주의적 개입도 어느 정도 정당화된다. 

  전투 중의 도덕에 있어서 그는 전투원과 비전투원의 구별을 확실하게 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한다. 하지만 전쟁의 특성상 의도하지 않은 비전투원의 피해는 언제나 발생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이것은 부수적인 것이며, 그것을 직접 의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도덕적 비난의 대상에서 제외될 소지가 있다고 말한다. 또한 직접 의도하지 않았을 때에만, 그리고 그 의도가 매우 좋을 때에만 비전투원에 대한 살상의 행위는 정당화될 수 있다. 또한 전후의 책임 있는 현지 복구를 통해 전쟁을 끝마쳐야 한다고 덧붙이고 있다. 

  그러나 왈쩌의 위와 같은 입장은 꽤 엄밀해보이고 정식화된 것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중세적인 정의로운 전쟁 이론에 대해 들이밀었던 해석의 문제를 다시 들이밀 수 있다. 이 ‘해석의 문제’는 왈쩌 스스로가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자신의 이론에 비추어 정당화함으로써 자초한 면이 크다. 왈쩌는 9-11 테러에 비추어보았을 때 미국은 테러 주체인 알-카에다에 대해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는 충분한 명분이 있다는 점, 첨단무기기술을 통해 비전투원에 대한 살상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자신의 입장을 펼쳤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전쟁의 대상이 알-카에다가 아니라 아프가니스탄이 되었던 것일까? 아프가니스탄이 알-카에다에 호의적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지만, 알-카에다가 미국에 테러를 가할 수 있을 만큼의 금전적, 물질적 지원도 아끼지 않았는지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또한 그는 이라크 전쟁에 대해서는 부당한 전쟁이라고 말함으로써, 해석의 주관성이 얼마나 자신의 이론에 깊게 개입할 수 있는지 스스로 보여주었다. 

  게다가 그는 이런 기준을 확립했음에도 불구하고, 비상상황(supreme emergency)이라는 예외를 가정하여 큰 논란을 빚는다. 물론 ‘누가 보아도 직관적으로 명백한 악이 출현했을 경우’로 극도로 제한하고 있지만, 비상상황에는 도덕적 고려가 매우 적거나 있지 않아도 정당화된다고 함으로써 이론적인 모순을 일으키고 있다. 게다가 누가 이것을 판정해줄 수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또한 그는 핵의 전쟁억지력을 어쩔 수 없이 수용하고 있다. 그러나 핵은 적대하는 어느 국가에게나 명백한 위협 요소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저지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는 일은 왈쩌의 기준에서는 정당하겠지만, 피침략국은 핵을 사용할 가능성이 매우 높으므로 이것은 전인류적인 기준에는 매우 부당한 일이 될 가능성이 높다.
 

4. 맺는 말 - 전쟁은 정의로울 수 있는가?

  전쟁은 그 자체로 역사적인 사건이다. 역사 속에서 전쟁을 찬양하고 참여를 독려했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와는 달리, 전쟁은 그 어떤 다른 사건도 그만큼 참혹하고 잔인할 수 없기 때문에 역사적인 사건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에 대한 특별한 고찰이 요구되고, 이것을 억제할만한 이론적, 실천적 수단이 요청된다. 전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입장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전쟁 자체를 부당한 것으로 간주하는 평화주의, 나머지 하나는 부당한 전쟁을 설정하는 정의로운 전쟁 이론이다. 

  정의로운 전쟁 이론은 대다수의 전쟁을 부당하다고 주장함으로써 전쟁을 제한한다고 정의로운 전쟁 이론가들은 주장한다. 이 이론은 이상에만 갇힌 평화주의와 인간을 동물 이하의 존재로 전락시키는 현실주의 사이에서 적절한 타협점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들에 따르면 전쟁은 선포, 수행, 종전 이후라는 세 가지로 구분되며, 각 부분에서 정당성을 획득했을 때 정의로운 전쟁이 된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설명의 전통은 중세의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 시작되었으며, 마이클 왈쩌는 현대에 이 논의를 복각시키고 여러 전쟁에 대해 비판적으로 평가함으로써 정의로운 전쟁 이론의 힘을 증명하였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정의로운 전쟁 이론은 앞으로 수행할 전쟁은 정당하다고 주장할 근거를 마련해줌으로써 전쟁을 개시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한다. 이렇게 주장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는, 정의로운 전쟁 이론은 해석 앞에 열려있다는 점이다. 무엇이 정의인지, 무엇이 침략에 대한 반응인지 정의로운 전쟁 이론은 내부적으로 제대로 설명해내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론적 완결성을 갖추지 못한 채 어떤 전쟁에 대해서는 호의적이라는 것이 정의로운 전쟁 이론의 거의 유일하지만 가장 큰 문제인데, 특정한 전쟁을 허용하는 것은 해석의 다양성과 맞물려 다양한 전쟁에 대한 허용으로 직결되기 때문이다. 

  미국의 진보적 지식인 하워드 진은 자신의 제 2차 세계대전 참전 경험을 다음과 같이 적어놓았다. ‘나는 육군 항공대에 입대해 폭격수가 됐고 파시즘을 물리치기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중략) 아무 생각 없이 서류철에다가 [다시는 안 돼.] 라고 끄적거리고는 나 스스로도 놀랐다. (중략) 정당한 전쟁과 부당한 전쟁이 있다는 다소 정통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인류의 어떤 문제를 푸는 데 있어서도 전쟁은 전혀 해결책이 아니라는 쪽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이런 관점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기는 너무도 어렵다.’ 특히, 평화를 옹호하는 시각은 인도주의적 개입에 이르러서 자신의 관점을 포기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전쟁을 사고하는 기본적인 원칙이다. 전쟁은, 정당화하기에는 그 결과와 유산이 너무나도 끔찍하다. 또한 역사적으로 일어난 전쟁을 평가하는 것은 쉬워도, 앞으로 어떤 전쟁이 일어날 것이며 또 그 전쟁을 선포해도 되는지에 대해 평가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사실상 정의로운 전쟁 이론은 여기에서 그 기능을 멈춘다. 따라서 우리가 가장 기본적으로 삼아야하는 원칙은 ‘전쟁은 어떤 경우에도 부당하다.’ 는 직관적인 결론이다. 이것이 결론이자 전제가 되어야, 전인류가 정말 갈구하는 전쟁이 없는 평화, 모든 인류가 형제애를 바탕에 두고 영위하는 평화가 찾아올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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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의로운 전쟁은 가능한가? - 정의로운 전쟁 이론에 대한 비판적 접근 <수정>
    from 효진이네 2011-07-01 03:47 
    <응용윤리학과 도덕적 딜레마 보고서,트랙백해놓은 글을 수정, 보충한 것입니다.>① 평화주의에 대한 내용을 빼고 정의로운 전쟁 이론만 집중적으로 논의②기독교 전통의 정의로운 전쟁 이론에 대한 내용을 삭제③비상사태윤리에 대한 내용을 추가1. 들어가는 말 - 전쟁 비판으로서의 정의로운 전쟁 이론 얼마전 일어난 리비아 내전은 국제 사회에 어려운 숙제를 하나 더 내주었다. 독재자 카다피에 대항한 민중들이 현 정부를 무너뜨리고 민주적인 정부를 수립하겠다
 
 
 

<현대 사회철학의 제문제 발표문 초고. 존 크리스먼, 『사회정치철학』의 5번째 장 '보수주의, 공동체주의, 사회적 자아관' 요약.>  

  어떤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인지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그 사회가 어떤 덕목을 추구하고 권장하는지 알아보는 것이다. 이 경우 그 덕목이 객관적으로 바람직하며, 또 그 사회가 그것을 얼마만큼의 강도로 권장하고 있는지에 따라 그 사회가 얼마나 좋은 사회인지 결정된다. 다른 하나는 어떻게 그 사회에서 추구하는 덕목이 확정되는지에 대해 탐구하는 것이다. 앞의 경우와 반대로 이 때에는 그 덕목의 객관성과는 별개로 그것이 ‘좋은 것’으로 간주되는 과정에서 우연적이고 외부적인 요인이 얼마나 덜 개입했는지에 따라 그 사회의 수준을 판가름할 수 있다. 줄여서 말하면, 사회는 크게 ‘좋음(good)’과 ‘정당성(legitimacy)'이라는 관점에서 평가할 수 있다. 

  이전 시간까지 살펴보았던 자유주의적 관점은 이 가운데 후자, 즉 정당성을 우선시한다. 이런 관점에서는 사회가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 과정으로 자신을 구성하고 있을 경우 그 사회가 ‘정의롭다’고 말한다. 자유주의적 입장은 적어도 인간과 무관하게 객관적으로 타당하여 따라서 인간이 수용할 수밖에 없는 덕목이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 회의적이다. 이런 가정은 모든 덕목에 대해 합리적으로 반성할 수 있는 인간을 요청한다. 또한 이런 반성을 거쳐서 수용되어야만 그 덕목은 정당성을 획득한다. 이 같은 정당성을 획득한 덕목들이 모여야만 한 사회를 구성하는 덕목들 전체가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으며, 이러한 정당성을 획득한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이다. 

  위와 같은 자유주의적 논변에 대해 다양한 반론이 존재하였지만, 특별하게 이 글에서는 공동체주의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에 의해 가해진 비판에 집중하고자 한다. 공동체주의자들은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문제를 제기한다. 첫째, 근본적으로 인간은 특정한 덕목에서 분리될 수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이에 대해 합리적으로 반성하는 인간상은 허구적이다. 둘째, 따라서 덕목에 대해 완전히 중립적으로 판단하여야 한다는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자유주의적 이념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셋째, 설령 그것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공동체적인 삶에서 누릴 수 있는 행복을 심각하게 파괴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1. 보수주의

  1.1 보수주의의 정의와 특징

  보수주의(conservatism)는 넓은 의미에서 변화나 진보에 대한 믿음보다는 기존의 공동체와 그것이 의존하고 있는 가치체계를 지키는 데 더 큰 비중을 두는 심리적인 경향을 가리킨다. 그러나 정치철학적인 맥락에서의 보수주의는 다음과 같은 더욱 엄밀한 요소를 포함하는 정치철학적 입장을 가리킨다. 

  첫째, 단순한 심리적인 태도가 아닌 논리적인 정당화를 통해서 전통을 강조한다. 특히 이런 논리적인 정당화는 역사를 통해 귀납적으로 이루어진다. 역사를 통해서 지켜졌던 공동체의 요소들은 지켜졌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바람직하다는 것이 증명되었는데, 섣부른 믿음은 그런 바람직한 덕목들을 축소시키거나 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사회는 이 덕목들을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실천하게끔 만드는 것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아야한다. 기존의 가치체계에 대한 회의는 자신이 얼마나 정당한지 충분히 증명할만한 자원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반면에 가치있는 것으로 평가받는 여러 덕목들은 그 자체로 그 사회 내에서는 개별 인간들에게 행복을 안겨줄 수 있는 것들이기에 충분히 권장되어야 사람들이 행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따라서 개인의 권리 자체의 타당성 검토나 덕목 자체의 객관적 가치 같은 문제들은 부차적인 것으로 바뀌며, 이들은 그저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한 몇몇 요소 가운데 하나로서 그 지위가 격하된다. 만약 어떤 개인이 좋은 것을 자기 판단에 따라 거부하려 한다면, 보수주의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이는 매우 미련하고 어리석은 짓이 될 것이다. 이 셋은, 개인은 ‘좋은 삶(가치있는 삶)’을 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사회는 이것을 강력하게 권장해야한다는 보수주의자들의 입장을 잘 보여준다.

  1.2. 보수주의 사회모델의 한계와 전환

  하지만 이 같은 차이에도 불구하고 보수주의와 자유주의는 특정한 덕목이 본질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견해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따라서 그 덕목이 어떻게 정당화되는가 하는 문제가 중요하다. 자유주의자들은 이런 정당화가 개인이 외부의 간섭 없이 수용하는 데 토대를 두고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 보수주의자들은 그 덕목이 옳은지 그른지는 그 덕목이 가치있는 것으로서 간주된 역사적 배경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개인들의 수용이나 승인이 전혀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보수주의의 사회모델은 심각한 결함을 안고 있다. 특정한 덕목들은 특정한 집단의 이익을 관철시키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보수주의자들은 사회와 그 사회를 구성하는 여러가지 덕목들을 전통에 근거해 조직하려고 하며, 그것은 자연스럽게 기존에 특혜를 받던 집단의 이익을 가장 잘 수호한다. 또한 전통적인 가치관에 의해 가장 특혜를 받는 집단이 실제로 사회의 재조직, 재구성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이는 특혜를 받는 집단과 그렇지 못한 집단 사이의 불평등을 더욱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따라서 전통에서 배제된 사람들은 그 가치가 보편성이나 일반성을 가지지 못한다고 항의할 수밖에 없다. 즉 가치는 권력과 결부되어있는 것이다. 엄연히 존재하는 불평등은 사회가 기초하는 가치에 의존하였을 때 생기는 것이고, 이것이 불평등을 심화시킬 수밖에 없다. 또한 사회를 이렇게 조직하려는 전략 자체도 논리적으로 심각한 결함에 노출되어 있다. 한 사회가 고수해오는 가치체계에 대해 일반적이고 보편적으로 반성할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다. 게다가 그런 덕목들이 역사적, 사회적 조건에 의해서 우연적으로 정당화되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필연적인, 즉 객관적인 것으로 간주하려는 것은 논리적인 비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수주의자들이 제기하는 자유주의적 인간관에 대한 비판 및 사회에 대한 여러가지 다른 시각은 여전히 경험적으로(심리적으로)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다. 이러한 점을 부각시키고 합리적으로 정당화하려는 시도가 공동체주의자라 불리는 사조가 나타나는 배경이다. 테일러Talyor, 샌들Sandel, 매킨타이어MacIntyre, 왈쩌Walzer 등이 자유주의적 입장에 대해 비판을 제기하며 대표적인 공동체주의자로 분류되었다. 공동체주의자 각각의 학문적 토대나 논증의 형태는 다를지라도, 자유주의적 인간관과 가치평가기준, 그리고 그 원리가 실행된 공동체의 형태에 대해 문제제기를 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2. 공동체주의

  2.1 자유주의적 자아에 대한 비판

  자유주의적 자아관의 기본적인 요소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합리적이고 자율적인 행위자가 특정한 정치권력, 사회 구조, 가치의 체계 등을 수용할 때에만 그들이 정당화된다는 것이 기본적이다. 이러한 대상들이 가치있는 것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인간들이 이들을 ‘가치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둘째, 이 과정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모든 개인이 기존의 어떤 가치체계에도 의존하지 않고서 가치에 대해 메타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어야한다. 셋째, 사회는 이러한 개인들의 능력을 최대한 존중하는 방향으로 조직되어야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개인들이 추구하는 각각의 가치들에 대해서 편중되지 않고 중립적이어야 한다. 이 중립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언론, 결사, 이동, 사생활의 자유 같은 것들이 반드시 필요하며, 이들 요소가 갖춰져야만 정의로운 사회라고 부를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인간은 어떤 가치체계에도 의존하지 않는 판단을 할 수 있는가? 공동체주의자들은 이 질문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다. 각각 근거하고 있는 학설은 다를지라도, 공동체주의자들은 공통적으로 인간의 존재가 근본적으로 사회적이라고 주장한다. 인격이 가능한 이유는 어떤 공동체가 그를 인간으로서 대우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공동체는 인간으로서의 대우는 많은 가치들을 함축하고 그것을 수용하도록 성장 과정 전체에서 강요한다. 이들에 따르면 자유주의적 입장에서 주장하는 반성적 능력은, 사실 가치 자체 또는 가치 체계 전체에 대한 객관적 반성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이 신념으로 삼은 특정한 가치가 의심스러울 때에만 그에 대해 반성한다. 게다가 이 반성은 가치에 대해 의심하고 거부하는 것보다는, 그 덕목의 진정한 의미나 본질에 대해 숙고하는 쪽에 더욱 가깝다. 진정한 자아의 발견은 의심하는 능력을 자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규정된 가치들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고 합리적으로 정당화하는 데서 비롯된다. 

  또한 이러한 가치체계들은 단순히 인간이 수용해야 하는 체계라는 것을 넘어서, 모든 판단을 가능하게 해주는 지평으로 기능할 수도 있다는 점은 자유주의적인 인간관이 가능한지에 대해 더욱 심각한 의문을 제기한다. 이런 점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것은 언어이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사고한다. 언어는 어떤 인간에 대해 선택적이지 않고, 오히려 지정된 언어 하나가 인간의 사고의 기반이 된다. 언어에 대한 이런 일반적인 시각에 입각해서 본다면, 자유주의적 자아관은 언어가 없이도 반성적으로 사고할 수 있다는 다소 억지스러운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런 사고는 자유주의의 인간에 대한 형이상학적 입장을 비판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인간은 존재 자체로서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규정한 여러가지 가치들이 쌓인 결과물이다. 그리고 인간은 그러한 가치를 몸에 담아 실천하면서 인간으로서 거듭난다. 인간을 규정하는 데 사회는 필수적이다. 이는 사회를 벗어난 사유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함축하는 듯 보인다. 

  게다가 이런 인간관은, 그야말로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인 자유주의적 인간관과는 달리, 실제 인간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훨씬 더 잘 반영하고 있다. 인간들은 실제로 특정한 덕목들을 의식하지 않고 실천하며 살아간다. 매번 가치체계를 반성한다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어색하다. 자유주의적 가치관에 입각해 특정한 덕목들에 대해 매번 숙고하는 사람들은 소수이며, 이는 오히려 자유주의적 인간관이 보편적, 일반적이지 않고 특정한 인간관을 보편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비약을 담고 있다는 주장을 하는 근거가 된다.

  2.2 사회적 자아와 가치 신조

  사람들이 실제로 자유주의적 자아관에 부합하는 삶을 살고 있지 않다는 점은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한다. 사람들이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지 않다면, 공동체주의가 실제 삶에 더 잘 부합한다고 소극적으로 주장하는 선을 넘어서, 자유주의가 묘사하는 자아와 가치체계 사이의 관계가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이 어떤 가치를 선택하게 되는 동기와 그것이 정말 인간의 이익에 부합하는지에 대해 잘못된 시선으로 접근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모든 공동체는 특정한 가치관을 기초로 성립된다. 그러나 개인은 태어나기 전에 자신이 살아갈 공동체를 선택할 수 없다. 따라서 특정한 가치관은 개인에게 주어진 형태로 등장한다. 물론 자유주의자들이 이러한 면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며, 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치관에 대한 전면적인 반성과 선택은 가능하며 언제나 가능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것이 그 가치관을 구성하는 덕목들이 공동체 내에서 가치있는 것으로, 즉 정당한 것이 되는데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공동체주의자들에 의하면, 이런 가치들은 그 가치를 받아들인 인간들의 내면에서 자신의 본질을 드러낼 뿐, 선택당하는 대상이 아니라고 반박한다. 

  더군다나 역설적으로, 자유주의자들은 이러한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 능력에 대단한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그들은 모든 덕목은 사람들의 승인을 통해서만 가치있는 것으로 거듭난다고 주장하지만, 선택능력은 승인과 상관없이 지켜야하는 가치가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자유는 개인들이 삶을 살게 해주는 형식적인 조건일 뿐이지, 인간이 평가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덕목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다. 공동체주의자들은 설령 인간이 자유주의자들의 주장대로 자유롭다고 할지라도, 그 자유롭다는 의미는 어떤 특정한 덕목을 실천함으로써 드러나는 것이지 결코 그 자체가 인간을 규정지을 수는 없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인간을 규정짓는 제 1원리로 자유를 설정함으로써 생기는 문제는 이 뿐만이 아니다. 공동체는 자유주의자들의 입장에 따라 정의를 확립할 필요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현실적으로는 좋은 공동체가 되기 위해 특정한 덕목에 입각해서 개인을 행복한 삶에 이를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하기도 한다. 개인의 기본적 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해 정의를 추구할 경우, 설령 객관적으로 미덕인 덕목이 존재하고 국가가 그것을 장려하려고 할지라도 개인은 그것을 거부할 수 있고 또한 국가는 그 거절을 보장해야 하는 어려운 문제에 봉착한다. 개인들이 각각 설정한 가치들을 증진시킬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국가라는 식으로 이 문제를 회피하려고 해도 여전히 근본적으로는 해결되지 못한다. 이와 더불어서, 선택된 가치들이 무엇이냐를 고려하지 않고 그 가치들이 어떻게 정당화되었는가에 대한 고려에 집중하는 것은 언제나 가치와 정당성 사이의 괴리를 낳을 수밖에 없다. 제도적으로 정당화된 덕목 혹은 가치체계라고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와 어긋날 경우 그 정당화된 가치는 관철되는 데 상당한 비용이 필요하다. 

  자유주의자들은 이에 대해 특정한 덕목이나 가치체계의 증식은 공적 영역이 아니라 사적 영역에서 이뤄져야 하며, 여기에 국가가 특정한 가치를 지지하며 개입하는 것은 정의롭지 못한 행위라고 지적한다. 이는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이 확실하게 분리된다는 생각을 전제하고 있다. 하지만 공동체 내에서 시민의 모든 생활은 공적이며,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경계도 그 개념만큼 명쾌하지도 않다. 사회는 다양한 물리적, 정신적 기제를 동원해 개인의 사적 영역에 개입한다. 또한 이런 다양한 사적 영역 자체가 국가의 공적 활동을 지지하는 기초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사적 영역들은, 어떤 경우에는 사적 영역의 이해관계에 대해서만 주장하지 않는다. 공적 영역에 적용되는 집단적 가치가 관철되는 것이 자신들의 사적 이익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자유주의적인 인간관에 입각해서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다. 이런 현상들은 모두 다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구분이 희미하며, 긴장관계에 놓여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런 논거들에 의해서 자유주의적인 인간관에서 핵심적인 면모인 자율성은 의심스러운 개념이 된다. 자율성에는 모든 가치와 덕목은 개별적이며, 개인은 언제나 그에 대한 반성이 가능해야 하고, 그 능력을 그 어떤 가치보다도 근본적인 것으로 간주한다는 세 가지 면이 그 핵심이다. 하지만 이 세 가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공동체주의가 제기하는 위와 같은 비판에 직면해야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전히 이 자율성 개념을 고수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면 개념을 조금 약하게, 반성이 가능하다는 사실에 대한 인정과 반성이 가능하다고 자각하는 순간 인간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할 수 있다는 정도로 자율성을 인정할 수는 없는 것인가? 만약 이러한 자율성을 인간이 인식할 수만 있다면, 이것은 다시 공동체주의자들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 될 수도 있다. 공동체주의의 인간관은 반성의 가능성 자체를 형이상학적으로 차단해버리고, 반성을 통해 올바른 가치를 추구해나갈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2.3. 자유주의와 공동체의 붕괴

  자유주의적 인간관에 부합하는 인간들이 모여 정치공동체를 구성했을 경우, 그 공동체는 올바르게 유지될 수 있는가? 공동체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의 입장에 대해 이런 질문을 던지면서 비판하기도 한다. 굳이 인간을 근본적으로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동물이라고 규정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끊임없이 회의하고 공동체가 좋은 것으로 간주하는 가치와 덕목들에 대해 거부하는 개인은 결국 공동체를 결성하지 못하고 고립되며 불행에 빠지게 될 것이다. 공동체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개인이란 원자화된 개인이며, 부유하고, 언제나 불안에 놓여있고, 항상 다른 삶의 양식을 찾아서 헤매는 개인이라고 추정한다. 자유주의적 인간은 정의로울 순 있을지 몰라도, 행복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가치들이 객관적으로 타당한가 그렇지 않은가, 또는 그것들이 정당화된다는 것이 중요한가 아니면 이미 선하다고 인정되었는가 하는 문제는 여기에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 세계에는 개인도 공동체도 이미 주어진 것으로서 존재하는 상태이다. 하지만 자유주의적 개인은 기존의 가치와 덕목에 대해 회의하는 순간, 자신의 삶을 여러 측면에서 지탱해주는 사회 체계와 거리를 멀리할 수밖에 없고 그것은 그 자체로 물질적, 정신적 불행을 수반한다. 개인의 심리적 안정을 곧장 행복에 연결시킬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안정적으로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삶이 보장되는 것은 일반적으로 행복에 매우 중요한 요소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동체주의자의 이런 주장은 무리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개인의 삶이 원자화되는 경향은 자유주의보다는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의해 나타나고 있다는 분석이 훨씬 타당하다. 롤즈의 최소수혜자 원칙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재산의 권리에 대한 주장은 자유주의에 필수적인 요소도 아니며 꼭 그런 결과를 수반하는 것도 아니다. 정치적 자유주의(민주주의와 절차적 정당성을 강조하는 경향)와 경제적 자유주의(자유로운 재산권의 향유에 기초해 시장의 작동에 의해 재화의 가치가 결정되는 것을 바람직하게 생각하는 경향)는 반드시 구분하여 생각해야 하며, 여기서의 자유주의는 정치적 자유주의를 말한다. 공동체주의자들은 이 두 가지를 섞어서 사용하고 있거나, 적어도 정치적 자유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 사이에 확실한 논리적 연결이 성립된다는 것을 증명해야만 자유주의적 인간관이 사회적 삶의 파괴를 가져온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개념적으로 정치적 자유주의는 정치적 권리를 통해 경제적 자유주의를 수용할 수도, 거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3. 자유주의의 적극적 대안으로서의 공동체주의

  이제까지 살펴본 자유주의에 대한 공동체주의의 비판은, 단일한 공동체주의적 입장에서 개진된 것이 아니라 공동체주의자로 분류되는 여러 학자들의 다양한 입장을 열거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체주의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바람직한 사회의 모델은 어느 정도 수렴되는 경향이 있고, 이는 자유주의와는 전혀 다른 과정을 거쳐 공동체를 확립하고 유지하며, 발전시킨다. 

  공동체주의는 단순히 시민 각각에게 민주주의적인 권리를 부여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공동체의 의사 결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그 가치를 구현할 수 있도록 시민들을 동원한다. 개인들은 단순히 그 가치가 옳은 것이라고 승인하는 것 뿐만 아니라, 그 공동체가 그러한 가치를 실현하는 활동을 하려할 때 그 가치를 담지하는 역할도 하게 된다. 이런 활동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시민적 자질, 즉 공동체 내에서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는 수많은 덕목을 교육받아야한다. 개인의 숙고과 그것이 집단적으로 모여 이루어지는 집단적 숙고는 자신이 지니게 된 시민적 덕목들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해내기 위해 필수적이다. 이런 민주주의는 자유주의적이라기보다는 공화주의적이다. 루소의 일반의지를 이해하는 것은 공동체주의의 이런 관점에 대한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하지만 민주주의에 대한 공동체주의적인 접근은 세 가지 문제를 일으킨다. 첫째, 어떤 가치를 발견하는 집단적 숙고가 모든 공동체 구성원들을 집단적 숙고의 주체로 받아들이는가? 이미 공동체에서 규정된 가치들은, 그 가치의 내적인 의미에 의해서 특정한 집단을 체계적으로 배제하는 효과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이 공동체 내에서는 그 어떤 의미에서도 숙고의 주체가 될 수 없으며, 공동체에 귀속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결정된 그 가치관을 받아들이기만을 강요당하는 것이다. 이는 민주주의의 기본 정신에 어긋나는 귀결이지만, 공동체주의적 입장에서는 포착해낼 수 없는 존재들이다. 

  둘째, 집단적 숙고를 통해 공동체 내에서 옳은 것으로 판정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객관적으로 옳다고 말할 수 있는가? 만약 직관적으로 명백하게 그릇된 가치가 집단적 숙고를 통해서 발견되었다면, 공동체주의는 그 가치가 명백하게 그르다는 것을 논증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답변은 대체로 회의적이다. 이는 공동체가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다는 점을 암시한다. 이런 공동체에서는 결국 자유주의적인 인간관의 가장 큰 특징인 객관적, 일반적 반성능력이 반드시 요청되어야만 한다. 만약 이 점을 인정한다면, 이는 공동체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를 어느 정도 포기하는 것이다. 

  자유주의자들의 입장에서는, 인간이 어떤 가치에 지배적인 영향을 받는 것과 여러 가치들에 대해 개별적으로 반성할 수 있는 능력이 분리될 수 있다. 영향은 우연적이지만, 인간의 능력은 인간이라면 모두 갖추고 있는 본질적인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동체주의자들에게는 이런 구별이 분명하지 않다. 또한 인간들은 어떤 가치를 학습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실제로 어떤 가치에 대해 반성하고 근본적으로 재검토하면서 자신의 신념의 체계를 수정해나가기도 한다.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자율성의 개념을 ‘약한 자율성’으로 이해한다면 위와 같은 비판은 충분히 가능하다. 

  셋째, 그렇다면 공동체주의에서 주장하는 ‘공동체’란 대체 무엇인가? 루소의 공화주의적 이상이 대표적이지만, 공동체주의에서 주장하는 여러 형태의 공동체들은 모든 인간들이 같이 적절하게 협의할 수 있는 소규모의 공동체에 이론적인 뿌리를 두고 있다. 이들은 그 규모가 작은 만큼 동질성을 느끼기도 쉬우며, 그만큼 동질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다루어야 하는 공동체는 그렇지 않다. 현대 정치철학에서 다루어야 할 공동체는 지역적으로도, 인종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대단히 이질적인 존재들의 혼합체이다. 공동체주의자는 이런 이질적 공동체에서도 소규모 공동체의 이상을 실현해야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들은 어떤 공동체가 공동체라고 생각하는가?

4. 자유주의, 자유, 문화

  공동체와 시민사회에 대한 공동체주의자들의 입장은 분명히 귀를 기울여 수용할만한 부분이 있다. 이들은 한 인간이 사회관계망에서 벗어나는 것을 상상하기는 대단히 힘들며, 그것에 의존하는 경향이 상당히 강하다는 통찰을 제공해주고 있다. 이러한 가치들은 대개 문화라는 형태를 띄고 인간에게 부여되며, 이는 세계관과 깊은 연관을 맺는다. 한 공동체 안에서 자유가 의미하는 바는, 이러한 문화가 고양하려고 하는 가치들을 자유롭게 추구할 수 있도록 그 배경을 제공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공동체주의의 입장은 문화정책에 대한 일정한 입장을 대변한다. 자유주의적인 입장에 따르면, 특정한 문화를 육성하는 것은 가치중립성에 어긋나므로 정의롭지 못한 방침이다. 하지만 만약 이러한 육성이 소수문화를 보호하는 방향에 초점이 맞추어져있다면, 자유주의자들의 입장에서는 답변하기가 쉽지 않다. 

  자유주의자들은 이러한 문화의 문제에 대해서, 자유주의적으로 각 문화를 보호하는 정책을 낼 수 있도록 논증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은 다양한 문화를 보호하여 공동체 내의 사람들이 반성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를 늘리기 위한 방법으로서 문화에 대한 보호를 주장할 수 있다. 현실적으로 인간이 특정한 문화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는 매우 제한적인데, 폭넓은 기회를 제공해주어야 실질적으로 구체적인 개인들의 자율성을 늘릴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문화의 문제로 이행할 경우,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사이의 논쟁은 단순히 이론적인 논쟁을 넘어서 지극히 구체적이고 정책적인 문제로 넘어가게 된다. 만약 자유주의자가 문화를 보호하기 위해 위와 같은 주장을 한다면, 특정한 가치가 보편적인 가치가 되어야 하며 그것이 보편성을 띄기 위해 사회가 적극적으로 역할을 해야한다고 주장하는 문화 역시 보호해야 하는가? 그들의 목표는 분명하게 반자유주의적이기 때문에 자유주의적인 정의의 원칙과는 모순된다. 이처럼 자유주의는 선을 추구하는 수많은 하위문화를 어떻게 보호하고 육성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언제나 봉착하게 된다. 국가는 정의를 추구하는 것만큼이나, 현실적으로 좋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보장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양한 가치를 추구하는 다양한 문화들 사이에서 공정성을 확립하는 일과, 그 각 문화에 소속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치를 증진시켜 행복한 상태에 이르게 해야한다는 두 가지 과제는 자유주의적 논리 내에서는 지속적으로 긴장을 일으키며, 이는 인간의 다양성과 보편적 특징에 대한 고민을 더욱 깊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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