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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감옥에서 - 어느 재일조선인의 초상
서경식 지음, 권혁태 옮김 / 돌베개 / 2011년 3월
평점 :
품절
교훈으로서의 역사
전통적으로 인간의 역사의 가장 큰 기능은 교훈성이었다. 설화나 신화의 전승은 '이렇게 해야한다.'거나 혹은 '이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말을 하기 위해 좀 더 이해하기 쉽고 직관적인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취하고, 이 가운데 상당수는 실제 벌어졌던 일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이다. 단순하게는 이들의 집적이 곧 역사가 된다. 현대의 역사가들이 그토록 강조하는 '엄밀한 사실로서의 역사'란, 구전설화 시절부터 태동한 위와 같은 경향에 비해 그 탄생이 한참 뒤쳐진다. 어찌 보면 오히려 이 교훈적 성격을 더욱 강하게 하기 위한 - 그러니까, 이를테면 너희를 가르치려고 꾸며낸 말이 아니라 진짜 있었던 일을 들려줄테니 매우 조심해야 한다는 식의 - 방법론적 엄밀함이라고까지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역사적 사건이 교훈적이라는 것은, 사실상 아무런 의미를 지니고 있지 못하다. 교훈은 언제나 누구에게/어떤 교훈을 주어야 하는지(또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는지)가 문제로 떠오르고, 이 부분은 항상 문제적 영역이다. 완벽하게 동일한 역사적 사건이라도, 위의 두 가지가 무엇이냐에 따라서 사건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재편집되며, 재생산된다. 때로는 서로 다른 편집본이 전혀 다른 대상과 가치를 지향하는 경우도 있으며, 흔히 이런 현상은 역사전쟁이라는 말로 표현되곤 한다.
이 역사전쟁의 전선은 세계의 무수한 곳곳에 형성되어있다. 특히 '식민주의'라 불리는 이념적 경향에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 많이 남아있는 곳에서는, 21세기인 현재도 여전히 진행형이다. 그 가운데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사람들에게 가장 가까운 문제는, 역시나 일본의 식민지배와 관련된 문제일 것이다. 20세기의 첫 절반동안 일본의 제국주의적 경향은 주변 각국에게 심대한 악영향을 분명하게 끼쳤다. 이 제국주의는 일본 민족의 탄생과 함께 등장했고, 그러므로 20세기를 지배한 '민족=국가'라는 등식과 맞물려 행정적(물질적)으로 증식되었다. 이에 맞선 민족들은, 경제이념과 관계없이 저 등식을 (다소나마)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엿고, 이는 (한국을 포함한) 피억압 민족을 각 민족공동체별로 통합하고 일본의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이론적 기반이 되었다.
재일조선인 - 위치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언어의 감옥에서』의 글쓴이 서경식 교수는 자신의 위치를 이방인(디아스포라)이라고 규정하고, 이 위치에서의 경험을 증언하고 이론적으로 정당화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그를 이방인으로 만들어주는 현실적 조건은 재일조선인이라는 자신의 신분이다. 그가 생각하는 재일조선인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자신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정치적 경향을 지닌 집단의 중요한 통일성의 도구(기제), 즉 언어가 자신의 사고와 행위의 기반을 지배하고 있는데서 생기는 이질감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특히 그가 2~3세에 해당하고, 그의 집안에서 민족교육에 대해 그렇게 열성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보이는 현상인데, 많은 재일조선인들이 공유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 책의 1부인 '식민주의와 언어'에서 이에 대한 논의가 전개되고 있다. 어찌보면 논의라기보다는, 자신의 체험을 여러 사례를 들어 학술적 언어로 표현한 에세이에 가까워 보이기도 한다.
둘째, 재일+조선인이라는 두 가지 정체성이 자신에게 공존하는 가운데, 각 개별 정체성을 대표하는 집단(일본과 한국(또는 북조선)이라는 민족국가)에게 공인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승인받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여러가지 측면에서 공존하는 정체성을 거부하고,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갖추어야할 단일함을 끊임없이 요구하기 때문이다(라고 글쓴이의 주장을 요약하는 것이 올바른 것일지는, 아직도 뚜렷하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가 없다. 거칠게 정리한 수준이다). 위의 언어보다도 더, 본질적으로 글쓴이가 자신을 이방인이라고 규정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이 책 내부에서 따로 장을 내어 심화시킨 측면이 없지 않기에 첫째 이유를 따로 떼어놓았지만, 글쓴이의 정신세계 전체를 지배하는(그래서 이 책의 실제 대부분을 차지하는) 일관된 흐름은 바로 이 부분이다. 첫째는 어쩌면 이러한 상황의 부수적 효과일런지도.
글쓴이 스스로가 지적하는 '한국의 독자들이 자신을 찾는 이유'인, 기억의 정치학이라는 맥락이 중요해지는 것(또한 그 스스로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 지점도 바로 여기이다. 역사의 교훈은 대개 집단서사와 결부되어있으며, 집단서사의 현대적 버전은 다름아닌 민족서사이다. 특정한 공동체, 즉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역사는 매우 중요한 계기를 만들어준다. 다름아닌, 학문의 이름으로 집단서사를 성립시키는 것이다. 한국사(한국 민족의 역사), 일본사(일본 민족의 역사) 같은 것들은 그러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모든 집단(굳이 민족이 아닌, 다른 정체성으로 뭉친 곳도 마찬가지다.)에 있어 고유의 집단서사가 존재한다는 것은, 보편적 현상으로 보면 그럭저럭 넘어갈만하다. 그러나 민족사의 경우, 어떤 교훈을 집단의 구성원에게 전달하느냐에 따라, 국가 제도의 물리적 행정과 더불어 엄청난 파급효과를 낳는다. 이는 민족공동체와 국가공동체가 대체로 동일한 경우, 반드시 발생한다. 전쟁의 책임은 이제 끝난 것이며, 새로운 세대는 '희망찬 역사관'을 바탕으로 일본민족을 중흥해야 한다는 식의 일본우익들의 주장은 이같은 고민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들고, 패전국으로서 자신을 위치시킴과 동시에 그런 패배의 역사를 반복하지 말라고 교시하는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간다.
자유주의자 문제
재일조선인인 글쓴이는 이에 대해 당연히 비판적이다. 그러나, 그가 이 책에서 더욱 무게를 두고 비판하는 사람들은 위와 같은 싸구려 정치공학으로 민족을 팔아먹는 이들이 아니다. 물론 현실적으로 이들이 가장 큰 힘을 발휘한다는 것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책의 주된 주제이며, 동시에 그가 더욱 문제라고 생각하는 부분은 일본과 한국 내에서 이런 싸구려들을 비판하는 이른바 자유주의자(리버럴, 리버럴리스트)들이다. 가라타니 고진의 책을 번역한 박유하 교수나, 한국의 대표적인 페미니스트 조한혜정 교수와의 교류로 유명한 (역시나 일본의 대표적인 페미니스트로 알려진) 우에노 치즈코 교수 등이 여기에 포함되어있다.
단순히 서경식 교수의 입장만이 실린 이 책만으로는, 사실 그와 그의 비판의 대상(그리고 그들이 글쓴이를 향해 내놓은 반비판)들 사이에 오고간 논의가 무엇인지 종잡기 힘들다. 게다가 한국인에게는 (적어도 내게는) 생소한 '전쟁책임론의 이론철학적 기초'에 대한 더 넓은 논의의 맥락도 알아야하기 때문에, 이 책에 등장하는 여러 주장의 진짜 의도와 의미가 무엇인지는 쉽게 와닿지 않는다.
그러나 아주 쉽게 알 수 있는 것은, 이 자유주의자들이 탈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해보인다는 사실이다. 위안부 문제를 민족이 아닌 가부장적 국가제도의 문제, 즉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비판하는 시도라든지, 양국 모두가 객관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사실에 대해서는 반드시 알아야한다는 식의 논설, 인류사적 시각에서 보았을 때 일본의 전쟁은 잘못된 일이므로 윤리적 책임은 져야하지만 '한국'에 '일본'이 사죄해야 한다는 것은 민족주의적 시각에 매몰된 입장이므로 반대해야 한다는 주장은, 어쩌면 민족을 부정하는 사람들에게서 보이는 당연한 결론이다.
서경식 교수의 비판 - 보편주의와 특수주의의 결합, 그 사이에서
이들에 대한 글쓴이의 비판은, 전혀 다른 두 방향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더욱 보편적인' 보편주의의 관점에서 자유주의자들을 '편협한' 보편주의라고 비판하는 방향이다. 자유주의자들의 탈민족주의는 일본민족이라는 개념을 없애보림으로써 명백하게 존재했던 '일본' 민족의 전쟁책임을 없었던 것으로 만든다. 그리고 민족 대신 대체물을 통해 전쟁 중에 발생한 구체적 사건에 대해서만 책임을 묻는다.
그러나, (서경식 교수의 입장에 따르면) 어떤 대체물을 중심으로 조직된 이론의 평가는 현실에 얼마나 정합적인가에 따라 좌우된다고 할 때, '민족=국가'인 20세기 초반의 현실에서 민족주의 이념 이상으로 설명의 힘을 가지는 이론(혹은 민족의 대체물)이 있을 수 있는가? 글쓴이의 답은, 민족주의가 전부는 아니라 할지라도, 이 시기의 민족주의는 다른 어떤 보편이론(예를 들면, 페미니즘)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위상을 지닌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세계에 참여하고 설명해내려는 지식인이라면, 반드시 민족주의를 고려해야만 한다. 따라서, '더욱 보편적인' 보편주의는 반드시 민족이라는 것을 자신의 품에 안아야만 한다.
또 다른 한 방향은, 특수주의적 비판이다. 여기서의 특수란 다름아닌 서경식 교수 스스로를 뜻한다. 그가 경험하고 있는 특수함은, 정확하게 민족(국가)라는 존재를 통해, 그 경계에서 구성된다. 그리고 이 책의 다른 여러 글에서 보이는 그의 개인적인 여러 경험은, 민족이 단순히 탈민족주의라는 사상적, 이론적 조류를 수용하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극복될 수 없는 물리적 힘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시 말하면, 민족 사이의 이방인이라는 그의 존재 자체가 민족의 실체와 힘을 증명하는 가장 강한 증거라는 것이다. 탈민족주의의 관점에서는 그도 역시 자기들과 동일한 자유주의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지 못했고, 따라서 탈민족주의적 자유주의자가 될 수 없었다. 민족이라는 유령은 그의 곁을, 그리고 우리의 곁을 여전히 맴돌고 있다.
체험과 증언의 가치
이 책은, 그래서 어떤 이론적 전망이나 체계를 제시하지 않는다. 에세이의 모음이라는 책의 구성 자체의 특징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글쓴이의 특수한 정치적 위치에서 기인하는 바가 더 큰 것으로 보인다. 이런 특징은 그가 비판하는 사람들과의 대립, 특히 그들이 기대고 있는 다양한 탈민족주의적 경향들과의 대립으로 더욱 명확해진다. 그의 비판에 따르자면, 이러한 경향들은 그 자체로 논리적 정합성과 일정한 정치사상적 의미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전쟁책임 문제의 근본은 결국 민족(국가)의식일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듯 하다. 하지만 이들의 논리적 완결성에 비해 그에게는 (적어도 이 책에서는) 이론적 무기는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점은 그의 명확한 정치적인 입장과 묘한 긴장을 일으킨다.
대신 서경식 교수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체험이다. 자신의 체험, 그가 자주 인용하는 레비의 체험 등에 대한 강조는, 기억의 정치를 재구성할 수 있는 중요한 증언이 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현실의 문제에 잘못된 접근방식을 채택할 수도 있는 완결된 이론체계에 대한 반정립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의 입장에서 체험과 증언은 전쟁책임문제와 민족문제,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 문제를 통합해 일관되게 설명할 수 있게 해주는 도구이자 자기정당화의 중요한 계기가 된다. 체험을 통한 직관적 판단(특히 재일조선인이라는 위치)이 가져다주는 통찰이, 모든 인류에게 평화를 선사할 수 있는 기반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맺는말
그러나 레비의 자살, 그리고 글쓴이 자신의 토로에서 읽어낼 수 있듯, 체험을 되살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이유는 증언을 듣는 많은 사람들은 증언에 극단적으로 드러난 비정상성을 수용할 수 있는 인식의 체계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이 성공할 수 있을지 가능성을 점쳐보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오히려, 이 체험과 증언은, 긍정적 미래의 가능성을 지속시키기 위해, 즉 그런 체험과 증언과 유사한 상황이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 체험과 증언의 당사자들이 지속적으로 실천해야 할 (당위적인) 사명과도 같다.
그리하여, 냉철하고 확고한 정치적 입장에 비해, 그가 그리고 있는 앞날은 4부의 대담에서 스스로 인정하듯 다소 공상적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단순히 '대안이 없는 일본 우익과 자유주의자 양비론'이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민족주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극복해내는 일은 결코 짧은 시간에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인 것만은 분명하다. 또한 이를 위해 (글쓴이의 분석에 따르면) 가장 먼저 포기되어야 하는 일본의 민족주의가 지금처럼 지속되는 이상, 각각의 민족들은 그 폭력적 이념을 일본에 의지해 유지시킬 가능성이 높다. 이는 각 민족들이 적대적 공생관계에 돌입하는 우울한 미래를 낳을 것이다.
『언어의 감옥에서』에서 중심적으로 다루어지는 것은, 제목의 뜻과는 달리 일본 내에서 벌어진 전쟁책임론에 대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다시 그 내용의 대부분은 자유주의자 비판이다. 한편 그의 분석은 충분히 귀담아들을만 하고, 그의 체험은 충분히 고려되어야하는 것들이다. 이 둘이 결합했을 때, 너무나도 이상적이긴 하지만 새로운 정치가 열린다. 서경식의 책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위와 같은 이유들이 우리에게 제공해주는, '더욱 보편적인' 보편주의적 통찰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