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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자본주의 - 현대 세계의 거대한 전환과 사회적 삶의 재구성 아우또노미아총서 27
조정환 지음 / 갈무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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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적 측면

  이 글의 제목은 이 책의 내용을 환기시키기 위한 의문문이 아니다. 정말 인지자본주의가 무엇인가 물어보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인지자본주의를 초기 자본주의, 테일러주의와 포드주의로 대표되는 산업자본주의에 이은 제3의 자본주의의 물결로서 정의하고 있으며, 이것으로 특징지어지는 사회에서 등장하는 여러 사회현상들을 마르크스의 『자본』을 해석하여 분석하고 있으며, 그것이 각 사회현상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적용해보고 있다. 

  그가 현재의 자본주의를 인지자본주의로서 규정하는 이론적 근거는 스피노자인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기존의 자본주의 분석의 틀과 자신을 차별화하려는 전략으로 보인다. 기존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경우, 잘 알려진 틀에 따라서 토대와 상부구조를 이원적으로 분리하고 그 각각에 대한 고찰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속류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경우 토대를 열심히 분석하고 상부구조의 여러 요소들을 토대로 환원시키는 방식을 취한다. 반대로 서구 마르크스주의라고 불리는 독특한 흐름은 보통 상부구조가 어떻게 하부구조에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 기술한다. 그러나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들이 대상을 바라보는 여러 측면들은 동일한 실재의 다양한 양태들이다. 그 가운데 인간이 인지할 수 있는 것은, 실재의 속성이 사유라는 것과 그 양태가 물질이라는 것이다. 이 구조를 차용하면, 토대와 상부구조 역시 동일하게 작동하는 자본주의의 두 측면일 뿐이라는 결론에 다다른다.

  스피노자의 이런 이론적 측면은 마르크스주의에 두 가지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 자본주의는 이 세계(그리고 그것을 작동시키는 개인)를 지배하면서 물질적인 생산의 측면만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가 통제하고 지배하는 영역은 실재 그 자체인데, 그러므로 자본주의는 정신의 영역, 즉 인지의 영역까지 지배한다. 저자는 인지의 영역을 매우 넓게 잡고 있는데, 요약하자면 인간의 모든 정신적 활동이다. 그러나 스피노자의 길을 따라서, 그 정신적 활동은 역시 언제나 물질적 활동과 맞물려 있을 수밖에 없다. 이것은 흔히 심리철학에서 인지라고 부르는 그 개념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헤겔이 말하는 정신의 활동에 더 가까워보인다. 이것은 일종의 통합이론으로서, 마르크스주의 안에서도 충분히 정신의 문제에 대해서 고찰할 수 있는 연합전선이다.

  둘째 가능성은, 서비스 노동에 대한 분석이다. 굳이 마르크스의 이론을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자본주의가 진전함에 따라 상품생산노동에서 용역생산노동으로 노동의 구조가 변화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인데, 마르크스주의에 따르면 여전히 세계의 중심은 자연에 노동을 투여하여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이론, 즉 노동가치설에 대한 부정은 마르크스주의 이론 전체에 대한 부정과도 같을 만큼 그것은 그 이론에서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 책에서도 이야기하듯 이것은 19세기적 한계를 안고 있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포스트포드주의를 분석하는 이론적인 틀로서는 무언가 미묘하게 어긋나는 부분이 있는 것이다. 스피노자의 이론은 여기에 대한 교정이다. 용역생산노동이 어디에서 가치를 창출하고 있는지, 노동을 실재와 결합되어있는 일원론적 차원에서 고찰함으로써 노동가치설을 버리지 않고도 서비스노동을 분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노동에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는, 노동이 더 이상 사용가치와 잉여가치를 더한 고전적 판매가격에 따라 결정되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다. 즉, 노동 역시 노동시장이라는 영역이 새로 산출됨으로써 순전히 교환가치로서 평가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역으로 자연과 아무런 관계를 맺고 있지 않은 용역생산노동에게 임금을 지급해야하는 이유가 되기도 하는데, 그것의 수요와 공급이 분명히 창출되기 때문이다. 무엇을 생산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노동시장에서 수요가 있느냐가 그것이 노동인지 아닌지를 결정한다. 이것은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데, 전술한대로 서비스노동이 임노동으로서 발돋움하게 되었다는 의미와, 동시에 노동시장 자체를 수요를 창출하는 자본(또는 자본가)이 결정하는 단계에 옴으로써 사회 전체가 자본(가)에게 더욱 충실하게 귀속될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다는 의미 또한 담고 있다.

  분명 이 책의 저자의 이러한 입장은 타당한 측면이 있다. 마르크스주의에는 분명 정신적 측면 - 이 책의 용어에 따르면 인지적 측면 - 에서 약점이 있었고,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 이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여러가지 시도를 했다. 그것은 수정주의일 수도 있고, 프로이트-마르크스주의일수도 있으며, 저자의 입장과 비슷할 스피노자-마르크스주의일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국면을 ‘인지자본주의’라는 말로 새로 정의할 만큼 정말 무언가 새로운 것이 있는가? 그것은 조금 의문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자본주의는 그 탄생에서부터, 아니 자본주의가 아니더라도 모든 경제체제는 언제나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정신적 측면들을 동반해서 사람들을 지배해왔다. 자본주의 경제는 그 시작에서부터 여러가지 이데올로기적 기제들이 그 체제를 잘 작동시킬 수 있도록 사람들을 여러 형태로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것은 막스 베버의 말처럼 종교적 윤리일 수도 있으며, 아담 스미스가 말한 자유 속에 자리잡히는 질서의 원리에 대한 신뢰일 수도 있고, 또 그 밖의 다른 것일 가능성도 상존한다. 이러한 국면은 자본주의가 전개되는 곳곳에 배여있는 것이지, 현재 국면에서 그것이 유독 독특하게 드러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 책에서 ‘인지자본주의’라고 정의하는 개념은, 사실 어떤 특정한 국면을 이야기하기보다는 자본주의 특유의 인지구조 자체에 대한 이야기라고 보는 것이 더 옳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읽다보면 드는 느낌은 무엇보다도 다음과 같은 것이다. 일종의 이론적 짜깁기. 내가 각각의 이론에 대해서 잘 모르는 탓도 있거니와, 사실 스피노자와 바렐라 사이에 어떤 접점이 있는 것인지 대체 이 책만 보아서는 잘 모르겠다. 위에서 썼듯이, 그가 해석하는 바렐라의 인지 개념은 어떤 과학적 측면에 기반을 한 것이라기보다는 상당히 철학적인 수준의 논의인 것으로 보이며, 오히려 내게는 헤겔의 내음이 더욱 많이 느껴졌다. 또한 다양한 사회학적, 철학적 분석이 인지자본주의라는 개념 아래 재배치가 되어있는데, 그 일관성을 잡아내기가 그렇게 녹록하지는 않은 작업이다. 그래서, 다시 물어보는 것이다. ‘대체 인지자본주의란 무엇입니까?’  

 

실천적 측면

  만약 자본주의적 경제체제 내에서 우리가 인지적 측면에 우리가 주목해야 한다면, 그것은 용역생산노동이라는 독특한 노동의 형식일 것이다. 인지자본주의의 측면에서, 서비스 노동은 양가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사람들의 삶의 위치가 불안정해지고, 언제나 비정규직 이상의 삶을 살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그 이유는, 위에서도 기술했듯이, 철저하게 자본포섭적인 노동의 형식이기 때문에, 사회적 일자리 조절이 최대의 이윤을 목표로 삼는 자본에 의해 구성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로 더 이상 고전적인 노동개념에 얽매이지 않은, 새로운 가치창출이 가능한 영역으로서도 주목할 수 있다. 이 가치창출은 자본의 포섭을 당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는 이러한 노동의 조건 하에 놓인 사람들을 다중으로 개념화하고 있다. 이 다중들은 이런 조건 아래서 각각이 혁명의 가능성을 내재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표면화되지 않으며, 가끔은 매우 산발적인 형태로 일어난다. 그 산발적인 형태가 곳곳에서 출현할 때, 그것이 바로 그 조건이 더 이상 진전될 수 없는 형태까지 진행되었다는 징후이며 동시에 혁명의 전조이기도 하다. 그는 이 틀거리를 지금까지 있었던 여러 혁명적 시위나 운동들에 적용하여 고찰하고 있다. 그 핵심은, 사람들의 인지구조 그리고 자본주의 자체에 내재하고 있다고 간주되는 모순 그 자체가 폭발하는 것, 그리고 그 폭발을 이끌어내는 주체 개개인의 혁명적 능력에 대한 신뢰인 것 같다.

  이런 논의가 정말 옳은 해석인가 하는 문제는 둘째로 치더라도, 정말 이런 이론구조를 따라간다면 혁명은 발생하는 것일까? 나는 여기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 책의 저자의 입장을 요약하자면,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예견한 토대에서부터 폭발하는 모순이 상부구조에 영향을 주어 만들어지는 혁명적 정국이라는 것은, 사실 그 모순의 폭발이 상부구조라고 부르는 인지의 영역에서도 동시에 일어나는 과정이기 때문에 경제 자체의 파괴적 징후는 곧 인지구조에서의 혁명의 징후이기도 하다는 어떤 희망적 입장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단적으로, 자본주의가 그만큼이나 만만한 체제이던가, 가 내가 던지고 싶은 질문이다. 오히려, 저자의 입장은 그의 이론적 분석의 연역적 결론이라기보다는 자신의 희망을 투영한 어떤 미래상같다는 느낌을 더욱 많이 받았다. 그와 반대로 해석하자면, 물질구조를 지배하는 자본주의는 인지구조 또한 아주 강력하고 근접적으로 지배하고 있다는 결론에 다시 이를 수 있다. 또한 그 인지구조는 경제위기 자체를 자본의 순환에 따르는 단순한 국면으로 만들어버리거나, 혹은 월가와 미국의 부동산 업자들이 결탁하고 세계적으로 자본을 수집해 돈잔치를 벌인 정도에 불과한 사건으로 축소시킬 수도 있다. 또한 현재 실제로도 그렇게 진행이 되고 있기도 하다. 자본 자체의 문제는 윤리의 문제로 환원되거나 치환되거나 대체되고, 자본의 문제는 감추어진다. 사실 그것이 자본주의가 강제하는 인지구조이기도 하다.

  게다가 실제 그것이 어떤 모순을 사람들의 내부에서부터 폭발시키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폭발은 양태의 측면 혹은 토대의 측면에서 다시 가로막혀 좌절하는 경우 또한 숱하다. 이 책의 저자는 자신의 희망사항을 최근의 등록금 시위나 서남아시아 이슬람 국가들의 민주주의 혁명 등에서 보려고 하는 듯 하지만……. 리비아는 여전히 내전중이고, 시위에 나가야할 많은 다른 학생들은 역시나 시위보다는 아르바이트를 가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다중의 힘을 믿기보다는, 혁명적 지도자나 전위세력의 힘을 더욱 신뢰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더욱 큰 효과를 불러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짧은 내 생각이다. 

 

덧댐 : 자본론 분석에 대하여

사실 이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이론가들에 대하여 거의 아는 바가 없기 때문에, 이 책을 술술 읽어내려가는 일 자체가 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내용에 대해서 이해하기도 대단히 힘들었습니다. 특히나 아직 자본론을 직접 읽어본 적은 없고 입문서 정도만 뒤적거려본 정도로서는, 자본론을 상세하게 인용하면서 지대와 이윤 사이의 관계에 대해 논하는 장에서는 숨이 턱턱 막힐 정도의 느낌만 들었고요. 

서평으로 적은 이 글은, 그래서 이 책의 내용에서 내가 알 수 있는 것, 아는 이론가들에 대해서만 서술한 것입니다. 개인적인 이론적 학습의 수준을 더욱 높인 뒤에, 다시 도전해봐야 하는 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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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meral 2011-08-31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래 내용을 메일로도 보내드렸습니다. -------------------

안녕하세요,

저는 웹진 <자율평론>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정연이라고 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박효진 님이 작성하신 <인지자본주의>에 대한 서평글을 오는 9월 초 발행 예정인 <자율평론> 36호 게재할 수 있을지 문의를 드립니다.

<자율평론>은 2002년부터 지금까지 총 35호의 웹진을 발행한 계간 정치철학 웹진이며, 누구나 인터넷을 통해 자유로이 접근할 수 있는 copyleft 웹진입니다. 그간 <자율평론>에 게재되었던 모든 원고들은 아래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waam.net/xe/autonomous_review

<자율평론>은 인문학 강좌 공간인 다중지성의 정원, 독립 출판 활동을 하는 갈무리 출판사, 세미나 공간 다중지성 연구정원의 마디 단위로, 위 공간들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지적 활동들의 성과들을 모아내고, 우리들의 생각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한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매체가 아니기 때문에 원고료를 드리기는 어렵지만, 게재를 허락해 주신다면 웹진이 발행되는 대로 PDF 파일을 보내드리겠습니다.

모쪼록 긍정적인 검토를 부탁드리며, 더 궁금하신 사항이 있으시다면 아래 연락처로 언제든지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자율평론> 편집위원회 김정연 드림
daziwon@waam.net / 02-325-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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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란 무엇인가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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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을 어떻게 볼 것인가

  유시민이라는 이름은 참 복잡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처음 알게 되었을 무렵, 그리고 그가 유명한 논객으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을 때 그와 동시에 거론되던 이름은 진중권, 강준만, 김규항 등이다. 그들은 여전히 지금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정치논객들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어이가 없을 정도지만, 정치적인 견해가 전혀 다른 두 사람을 무리없이 좋아할 수 있었던 시절도 있었다. 

  그 이름이 복잡해진 것에는, 결국 어쩔 수 없이 노무현이라는 이름이 끼어든다.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생전에 그랬듯, 그리고 죽은 뒤에도 처절하리만큼 그의 이데올로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자기가 전공한 경제학에 대한 지식은 이론적인 무기가 되었고, 날카로운 말과 편안한 글쓰기를 모두 겸비한 쉽지 않은 능력은 실천적인 무기가 되었다. 그는 많은 진보정치인들과 논객들에게, 좋은 상대이면서 넘기 힘든 벽이기도 하다. 

  이러한 현실적인 조건들이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 이나 『경제학카페』를 읽는 느낌으로 이 책을 읽을 수만은 없는 이유를 만들어준다. 노무현을 옹호하거나(『노무현은 왜 조선일보와 싸우는가』) 자신을 변명하는(『후불제 민주주의』) 책이 아니라 어느 정도 이론적인 성격을 갖춘 책인데도 그러하다. 정치인 유시민의 견해를 빼고 일반적인 국가이론 입문서로서 읽으려 해도, 그의 인상은 여전히 지워지지 않으며 그가 왜 이런 식으로 글을 쓰게 되었을까를 지속적으로 의심하게 된다. 이를 떨쳐내기가 매우 힘들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글쓴이를 의심하면서 글을 읽는 것은 논리학적으로 오류다. 나쁜 사람이 말을 했다고 그 말이 나빠지는 것은 아닌 것이다. 따라서 정치에 대해 관심이 많은 어떤 누군가가 이 책을 썼다고 생각하고 책을 일단 들여다보기로 했다.

이론적인 분석의 수준 1 : 포퍼의 그림자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가 전례 없는 성공을 거둔 이후, 출판가에는 여러 분야의 철학·이론에 대한 입문서가 유행을 타고 있는 듯하다. 이후 샌델 자신의 책도 여러 권 발간되었고, 그에 대한 여러 측면의 반박도 출판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유시민 또는 출판사가 이 책을 언제 기획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책이 이러한 흐름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혐의를 받기에는 충분하다. 심지어 제목부터 『…란 무엇인가』 이겠는가. 

  서술상의 분류와 특징도 샌델의 책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지금까지 역사상 등장했던 여러 이념들을, 그 원형을 지니고 있는 학자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그들의 입장을 살펴본다. 단순히 현대에 이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며, 현실정치에서 어떤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가에 집중해서 분석하기보다는, 그 원형을 살핌으로써 발전이나 왜곡의 상을 살피고 진정한 의미를 밝히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서술방법이다. 

  또한 상식적으로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책의 가장 앞에 와야 정상인데도 불구하고 가장 뒤에 배치되어 있다는 것도 샌델과 일치한다. 이론의 역사나 발전의 단계를 추적해보려고 한다면 응당 시대순으로 배열하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이다. 유시민이 ‘국가주의 국가론’으로 가장 처음 제시한 홉스의 철학은 사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극복하겠다는 명확한 의지를 천명하며 탄생한 것이다. 이러한 배치가 생겨난 이유는 아무래도 현대의 국가나 공동체 이론에 있어서 고대의 목적론적 이론이 부활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샌델을 통해 이같은 이론적 논쟁의 맥락이 널리 알려진 탓이 더 클 것이다. 그의 책에 드리운 샌델의 그림자는 단지 우연의 일치일까? 

  이 책이 빚지고 있는 학자는 샌델 뿐만이 아니다. 샌델이 보인다는 것은 오히려 내가 혼자 해보는 추측일 뿐이다. 오히려 그가 의지한 것이 아주 분명하고 확실한 학자는 포퍼다. 목적론적 국가관을 분석하는 작업에서 그는 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 이라는 책을 거의 인용하다시피 한다. 이런 국가이론들의 실제 정치에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살펴보는 과정에서는, 포퍼의 반증주의적 사회철학이 자유주의의 정수인 것처럼 소개하고 있다. 포퍼의 이야기가 책의 여러 부분을 지배하고 있다보니, 이 책에서 펼쳐지는 분석이나 견해가 그의 고유한 것인지 아니면 포퍼의 견해를 요약한 것인지가 불분명해지는 수준에까지 다다른다. 

  목차를 중심으로 포퍼의 견해가 어떻게 적용되는지 살펴보고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반민주주의적인 목적론적 국가관에 가장 강력한 반대자는 포퍼이며(4장), 혁명과 개량 사이에서 고민하는 현실의 정치에서 가장 그럴듯한 지향점을 제공해주는 것이 포퍼의 점진적 개량이라는 사회공학(6장), 이것이 바로 진짜 진보정치이며(7장), 시장경제의 원리가 돌보아주지 못하는 사회적 연대가 필요한 부분을 국가가 도맡아 하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가장 올바른 절차를 철학적으로 제시해주는 사람 또한 포퍼이다(8장). 그래서 포퍼는 ‘진보자유주의자’이다. 

  포퍼의 견해가 잘 요약이 되어있는지는 둘째로 하더라도, 과연 그가 간추린 포퍼의 정치적 견해가 정말 그가 말한 것처럼 정치적인 변화에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인지는 의문스럽다. 이것은, 현재의 상황을 변화시키고 조금 더 진보적인 방향으로 변화시키고 싶어하는 유시민에게는 더욱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그는 이러한 이론적 기여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모양인데, 나는 이 문제에 대해 매우 부정적으로 답변을 할 수 밖에 없다. 

  포퍼 식의 점진적 진보가 가능한 이유, 그리고 그가 그러한 정치이론을 주장할 수 있었던 기반에는 ‘반증이 가능해야 과학’이라는 그만의 독특한 반증주의 과학철학이 깔려있다. 이 입장은 어떤 명제도 거짓이 확인되기 전까지는 참이라고 가정된다는 것을 말하며, 이것은 다시 어떤 명제도 완전한 참은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포퍼의 견해를 근본적으로 받아들이자면, 정치권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도 참일 수 없지만, 동시에 그것에 저항하고자 하는 세력이 하는 말 또한 참일 수 없다. 

  진리의 힘을 쟁취할 수 없는 정치투쟁은 과연 가능할 것인가? 그가 잘 파악하고 있듯이, 현실적으로 집권하고 있는 집단에 비해서, 진보주의자들은 상대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힘이 적다. 따라서 진보주의자는 현실이 아니라 이성에 기댄다. 유시민은 진보가 이성을 사용한 점진적 진보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했지만, 그 진보의 성취는 언제나 현실적 상황을 뛰어넘은 진리의 힘을 이용해서만 가능하다. 사실 그가 파악한 이성이란 바로 이런 의미의 이성, 현실이 어떻다 하더라도 진리를 추구할 수 있도록 인간을 이끄는 그 이성이다. 그래야만 이성을 통한 진보의 성취가 가능하다. 그가 논의를 많이 기대고 있는 것과는 달리, 그가 진보에 대해 열망하는 것은 오히려 칸트적 의미의 이성에 더 가까워 보인다. 보수주의의 원조인 버크나 그것이 철학적으로 가장 정치하게 표현된 흄의 실천철학에서만 보아도, 진리에 대한 회의는 언제나 보수주의의 무기이지 진보정치세력의 무기는 될 수 없다.

이론적인 분석의 수준 2 : 진보자유주의를 어떻게 할 것인가

  그렇다면 포퍼를 제외하고 난 그의 정치적 견해는 무엇일까? 이 책에서는 그것이 진보자유주의로 개념화되어있다. 이 책의 전체에서 그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을 국가관이 없는 자들이라고 비판하며, 자신의 국가관이 진보적인 정치세력이 가져야하는 국가관이라고 주장한다. 과연 그렇다면 그것이 대체 무엇인지 되묻고 싶은데, 나는 적어도 이 책에서 소개된 내용에 국한한 이 개념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포퍼를 강조하는 등 그의 태도를 살펴보았을 때, 그는 행정부를 통제할 수 있는 법을 합리적으로 바꾸는 절차를 대단히 중시한다. 이것은 그가 스스로를 자유주의자라고 말하는 것에 부합하기도 하다. 자유주의 정치철학 또는 국가관의 핵심은 그가 포퍼에 대해 말할 때 은연중에 주장하듯이 ‘완전히 올바른 가치는 없다’는 것이다. 그가 잘 설명하고 있듯이 자유주의 이론의 국가관, 즉 사회계약에 따르면, 세상엔 여러 가치들이 경쟁적으로 받아들여지길 기다리고 있으며, 공동체 내의 구성원들은 이성에 의지한 합리적 토론을 거쳐 여러 가치들을 승인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구축한다. 어떤 가치가 실제로 옳은지 그렇지 않은지 여부와는 상관없이, 사회계약에 의해 승인된 것은 무엇이든 그 사회가 주목하는 가치가 된다. 또한 개인들의 자유는 여전히 가장 존중받아야 할 대상들이기 때문에, 여전히 개인들은 그 주목하는 가치와 상관없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에서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 

  사실 그가 주장하고자 하는 진보적 자유주의는 그 결과의 측면에서 롤즈의 사회철학과 비슷한 함의를 지니고 있는 듯하다. (이런 측면에서, 그가 국가와 공동체에 대해서 논하면서 현대의 가장 중요한 자유주의 이론가인 롤즈를 전혀 언급하거나 인용하지 않은 것을 심히 의문스럽게 생각한다.) 출발선을 같게 하는 최소한의 경제적 지원을 국가가 담당하고, 나머지를 시장경제가 담당하게 하며, 우연적인 조건에 좌우되는 측면을 최소화해야한다는 것은 이미 롤즈의 『정의론』과 『정치적 자유주의』등에서 제시된 자유주의의 새로운 측면들이다. 

  그러나 유시민은 이 진보적 자유주의가 자유주의 국가관과 목적론적 국가관이 결합한 형태의 공동체이론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어쨌든 그가 말하고 싶었던 바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즉, 윗 문단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공동체가 연대를 통해 최소한의 사회적 삶을 보장해주는 것은 도덕적인 옮음에 해당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목적론적 국가관의 측면이다. 그런데 이걸 합리적이고 정당한 절차를 통해서 보장하는 문제는 자유주의 국가관의 측면이다. 따라서 자유주의가 진보정치를 함축하려면 목적론적 국가관을 수용해야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굳이 목적론적 국가관을 수용하지 않아도 된다. 롤즈는 칸트의 비판철학의 개인중심적 측면을 받아들여 진보적인 정치적 실천을 철학적으로 정당화하고 있다. 유시민의 입장에 선다면, 칸트의 실천철학이 목적론적 측면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롤즈의 철학도 목적론적 측면을 담고 있다고 옹호할 수도 있겠다. 문제는 그 뿐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시장경제를 옹호하는 자유주의자라도 경제를 원활하게 운용하기 위해 진보적 정치를 해야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경제학자인 한 인도의 아마티아 센이 대표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동물권 이론으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진보적인 철학자인 피터 싱어 또한, 자신의 독특한 진보적 정치에 대한 이론을 구축하는 데 목적론적 국가관을 전혀 수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목적론과 철학적으로 정반대에 서있는 공리주의를 자신의 기초로 삼는다. 유시민이 말하는 진보적 자유주의란, 자유주의이거나 혹은 노직이나 하이에크 같은 자유지상주의자들과는 구분되는 ‘그냥 자유주의’이지, 무언가 특별한 자유주의는 아니다. 

  더군다나, 합리적 절차를 중요시하는 자유주의 국가관과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보여준 목적론적 국가관을 결합한다고 이야기하면서도 그것이 가능한지 보여주는 어떠한 논증도 이 책에는 들어있지 않다. 이 두 국가관은, 본질적으로 옳은 가치가 있는가 없는가, 그것을 어떻게 사람들이 인정할 수 있는가, 그 가치를 이룰 수 있도록 공동체가 개인에게 간섭하는 것이 옳은가 옳지 않은가 등등 사사건건 시비가 붙는 사이이다. 첫 번째 질문에 목적론은 그렇다고 대답하며 자유주의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두 번째 질문에 그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라는 대답에 자유주의자는 절차 없이는 정당화 없다고 응수한다. 세 번째 질문에는 간섭해도 된다는 입장과 그것은 자유의 침해라는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한다. 그런데 유시민의 논증이란, 축약하자면 그저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수준이다. 이 두 국가관이 이토록 쉽게 조합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라면, 이 두 국가관(또는 넓은 의미에서 정치철학) 사이에서 벌어진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의 논쟁은 모두 부질없는 것이었나보다.

이론적인 분석의 수준 3 : 홉스의 문제

  또한 이 책의 분류에 따르면, 홉스는 국가주의 국가론을 정당화하는 이론가에 들어가고 있다. 오해를 줄이기 위해서 덧붙이자면, 홉스는 국가의 힘을 대단히 강조하긴 하지만 정치철학의 전통에 있어서는 자유주의자에 편입시키는 것이 더 올바르다. 그 이유는 자유주의 정치철학의 핵심요소를 확립하고 이론적으로 전개한 사람이 바로 홉스이기 때문이다. 핵심요소란 다름아닌 보편주권론과 사회계약설이다. 보편주권론은 공동체를 구성하는 모든 사람들에게서부터 주권이 나온다는 이론이며, 사회계약설은 이 주권자들의 합리적 선택에 따른 계약에 의해 국가(공동체)와 정부가 구성된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홉스는 국가주의자라기보다는, 계약의 내용을 바탕으로 국가의 폭력독점을 극단적으로 정당화한 자유주의 정치철학의 선조쯤 된다고 보는 것이 맞다. 로크와 밀, 그리고 수많은 자유주의자들이 그 이론적인 격차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자의 범위에 포함되는 것은 바로 이 두 가지를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홉스가 군주제를 선호한 이유도 이러한 맥락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즉, 그에 따르면, 이미 국가가 실행하려는 것은 계약에 의해 동의받은 내용이므로 되도록 빨리 해야한다. 그런데 행정부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의견이 분산되어 실행이 더뎌지므로, 그 의지가 단일한 군주제가 실행속도가 가장 빠르다는 것이다. 그가 주장한 군주제란 현대의 위계적 관료제를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군주제이다.

  그가 이렇게 이야기한다면, 그가 자유주의자로 분류하지만 귀족정을 옹호하는 루소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농담이 아니라, 실제로 그는 『사회계약론』에서 정부의 형태를 논하는 중에 귀족정이 가장 좋은 정치체제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정치적 입장을 취하는 것일까? 애석하게도 그렇지 않다. 그가 주장하는 귀족정이란 선출 귀족정을 이야기하며, 이것을 현대언어로 번역하자면 대의민주주의쯤 된다. 정치사상사적 맥락을 놓치면 이와 같은 실수를 범하게 되며, 그가 무엇을 기준으로 이야기하는지 그리고 그 내용이 실제로 무엇인지를 더욱 면밀하게 살펴보지 않으면 범하게 되는 실수라고 생각한다.

  국가의 폭력독점과 그 힘의 범위를 가장 넓게 설정한 이론가라는 점에서 국가를 중시한 사람으로 간주하고 싶었던 유시민의 마음은 십분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으나, 정치철학의 전통 자체를 부정하는 분류방법은 쉽게 용납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생각하는 국가주의는 신분제를 옹호하는 근대 절대주의 국가라든가, 플라톤 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철학에서 발견되는 공동체 우선적인 철학에 더욱 부합하는 것 같다.

‘국가란 무엇인가’를 어떻게 볼 것인가

  글을 마무리지으면서, 정치가로서의 유시민을 고려하고서 책을 다시 읽어나가기로 해보겠다.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분야도 아닌, 정치인이 정치이론에 대해서 쓴 책이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이 책의 백미는 책의 가장 끝에 있는 맺음말이다. 애초에 내가 시도했던 ‘정치인 색깔 빼고 보기’라는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유시민은 스스로 ‘정치인으로서 이 책을 썼다’고 주장하고 있다. 나같은 사람들은 허탈해질 수 밖에 없다. 아, 이것은 무슨 청천벽력같은 소리란 말인가. 

  사실 정치인으로서의 유시민을 고려하고 이 책을 읽어보자면, 국가이론과 상관없이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에 대한 변명으로 점철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지금은 합당하려고 열심히 기를 쓰는)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에 대한 비판, 그리고 거의 절대악과 같이 묘사되는 이명박 대통령의 행정부와 한나라당에 대한 경멸로 가득하다. 포퍼의 점진적 이론에 대해 무게를 싣는 이유는, 그것을 다름아닌 자신의 정치적 입장과 동일시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즉, 한나라당-민주당과 민주노동당-진보신당 사이에서, 자신이 이론적으로 옳은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은 것이다. 베른슈타인이 ‘역사에서 승리했다’는 평가는 어떤가. 독일 사민당이 현재까지 존속하는 것이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가 승리했다는 증거라고 하니 참 할 말이 없다. 

  이러한 변명의 정점은 베버의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를 들먹이며 절대악 한나라당을 몰아내야한다는 가장 마지막 장이다. 베버의 책을 직접 읽어본 적이 없어서 이것이 정확히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 개념인지는 알 수 없으나, 유시민의 설명에 의하면 신념윤리는 자신이 설정한 이상을 향해 실천하는 동기를 가장 우선에 두는 시각이며 책임윤리는 결과에 책임을 지는 윤리관이라는 것이다. 운동과는 다르게 정치인은 책임윤리에 따라 정치를 해야한다. 이것은 민주주의라는 정치제도 자체가 최악을 피하기 위해서 설계된 제도라는 그의 입장과 결합하여, 그 정치제도의 본질을 가장 잘 구현하기 위한 수단이 연합정치라는 것이다. 또한 이는 최악을 피하는 ‘예측 가능한 결과’에 입각한 책임윤리에도 부합한다. 

  유시민이 저술한 이론서들이 그러하듯이, 이 책이 아주 쉽게 술술 읽힌다는 것은 매우 좋은 점이다. 하지만 그런 능력이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정당화하는 데 쓰이거나, 그런 입장을 반영하여 정치철학의 역사를 제멋대로 재구성하는데 쓰인다면 그것은 ‘목적론적’으로 온당하지 못한 일이 될 것이다. 이 책에서, 유시민은 ‘국가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선현들이 답변도 제대로 소개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그렇게 변명이 급했을까.

 

덧댐 1 : 이 글의 본문의 두 번째 부분인 ‘진보자유주의에 대한 문제’의 아이디어는 아는 친구이자 이글루스 유명 블로거인 Socio의 글(http://www.facebook.com/socio1818/posts/168970979827554)에서 빌어왔음을 밝힌다.

덧댐 2 : 노무현은 생전에 이순신에 감정이입을 하더니 유시민은 유수의 이론가들에 감정이입을 한다. 물론 그 감정이입은 왜곡과 아전인수를 곁들인 것들이다. 어쩜 둘이 이렇게 비슷한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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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6-27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는 정치학도 모르고 유시민의 책도 읽어보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저자 자신이 스스로 밝혔듯이, 이 책은 국가론 입문서가 아니라 한 정치인이 자신의 국가관과 정치 윤리관을 밝힌 책으로 보입니다. 저자가 형식적으로 기존의 정치이론들을 끌어들였기 때문에 이런 비평을 하신 것이라 여깁니다만, 저자가 현실 정치인인 이러한 저서의 경우는 학문적 차원의 잣대보다는 저자의 개인적인 정치적 입지의 천명이라는 잣대로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애초에 저자가 제시했던 제목은 '나에게 국가란 무엇인가'였는데, 출판사에서 수정을 요구했다고 어디선가 지나치며 읽은 것 같아서 몇 자 끄적여 봤습니다.

박효진 2011-06-28 00:30   좋아요 0 | URL
이 글의 끝에서 짧게 줄였습니다만, 이 책을 정치적 입장의 천명이라는 잣대로 바라볼 경우, 그와 입장이 같지 않은 저로서는 별로 할 말이 없습니다...

다만,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여러 학자들의 이론을 끌어들이고 싶다면 가장 우선해야 할 것은 그 학자들의 입장에 대한 분석과 연구겠지요. 그런데 제가 이 글에서 지적한대로 이론분석에서부터 삐끗하고 있으니, 정당화의 근거조차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글에서는 격하게 표현하지 않았습니다만, 대체 포퍼의 책을 읽은 것인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 마르크스의 책을 읽은 것인지도 의심스럽고요. 물론 열심히 운동하던 대학교 시절에 다 뗐겠지만...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주목할만한 신간 도서를 보내주세요

  이번달에는 유난히 재미있게 읽어볼만한 철학자 평전이 많이 나왔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런 평전 종류의 책들은, 사상 입문과 더불어서 그들의 생활이 어땠는지에 대해서 알아볼 수도 있는 게 장점이죠.  

1. 스피노자 

  근대를 뛰어넘는 근대의 방법론으로서 주목받고 있는 철학자인 스피노자에 대한 책입니다. 사상에 대한 입문을 할 수 있는 책은 더러 있지만(사실 별로 없지만) 삶에 대한 이마만큼 두께의 생애에 대한 책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여러 방식으로 스피노자를 자신의 철학에 차용하려고 시도하고 있고 충분히 좋은 시도라고 생각하지만, 그의 생애를 음미하며 그 자체로 즐겨보는 것도 괜찮겠네요. 또는, 비슷하게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2. 데리다 평전 

  다음은 수많은 오해에 둘러싸인 데리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를 어떻게 한 마디로 설명해야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 책은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집에 『데리다』라는 다큐멘터리가 있는데, 자막도 없는데다가 영어와 프랑스어가 난무하는(...) 영상이라 제대로 본 적도 없는데... 여튼 그의 삶은 그의 혁명적인 사상 만큼이나 뜨거웠다는 건 많이 알려진 사실이죠. 알제리 이민자 출신 아웃사이더로서 68혁명에도 참여하는 등 사회참여에도 활발하였고요. 

 

 

 

3. 철인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다음은 스토아 학파의 대가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입니다. 그는 사상사적으로 탁월한 저서를 남긴 것과 동시에, 로마 제국시대 최고의 전성기라는 5현제 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한 황제이기도 합니다. 인문학 안에서도, 역사학에서는 그의 정치, 경제적 치세에 대해 연구하는 데 치중하고, 철학에서는 그가 스토아 학파의 사상적 전개에 남긴 업적에 대해서만 연구하게 마련이죠. 아무래도 종합적인 연구를 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좋은 모범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4. 미국 예외론의 대안을 찾아서 

  미국에 대한 연구서는 여럿 있지만, 목차나 내용, 분량에 있어서 참 충실한 책은 오랜만이기에 추천목록에 올립니다. 정치, 사회사적인 맥락에서 미국을 연구하는 것은, 여러모로 쉬운 일은 아니지요. 한국에게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나라일 뿐 아니라,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 미국에 대한 시각이 매우 대립적으로 형성되어있기 때문일텐데요. 그 시각에 깊이를 더하는 책이었으면 하는 기대가 있네요. 

 

 

 

5. 불안의 시대 

  단적으로 말해, 지금 세계를 지배하는 신자유주의는 불안을 먹고 자라는 경제, 사회적 경향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요. 그러므로 '불안'은 이 시대를 지배하는 키워드입니다. 『불안의 시대』는 그 불안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형성되었는지 분석하는 책입니다. 사람들의 불안은 경제체제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은 일반적인 사실인데, 그에 대한 어떤 분석을 제공해주는 책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단, 보수주의자로 분류할 수 있고, 미국의 제국적 역할에 대해 강조하는 하버드 대학의 경제사학자 니얼 퍼거슨의 추천사가 조금 마음에 걸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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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탄생- 진화론, 비교생물학 등으로 살펴 본 아버지의 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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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엇을 보았는가 - 버트런드 러셀의 실천적 삶, 시대의 기록
버트런드 러셀 지음, 이순희 옮김, 박병철 해설 / 비아북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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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지난 달 알라딘 독자 신간평가단이 선정한 인문/사회/과학분야 주목할만한 도서이다. 이 책이 선정된 이유는 일단 이 책의 지은이인 버트런드 러셀이 글을 매우 시원하고 잘 쓰는 작가일 뿐 아니라, 각각의 주제들에 대해서 아주 논리적이고 핵심만 간결하게 기록하기로 워낙 유명한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여러 에세이집들이 번역된 데 이어서, 영어로 『Bertland Russell's Best』라는 제목이 붙어있는 이 책도 번역이 되어 나왔다. 많은 독자들, 그리고 나조차도 말 그대로 'best'일 것이라 생각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완전히 속았다. 이 글은 best도 아니고, 그냥 아무것도 아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이다. 아무런 고려없이 러셀의 글을 마음대로 재단질해서, 마치 잠언집을 보는마냥 형편없이 편집해놓았기 때문이다. 러셀이 이 책의 원고를 직접 보고, 수정을 봐주고, 서문을 써주었다는 것 자체가 정말 이해가 안될 지경이다. 일말의 이해를 할 수 있는 실마리가 있다면, 러셀 본인만은 각각의 단편이 어떤 의미로 쓰여진 조각글인지 다 이해할 수 있고, 그래서 이 정도만 인용해도 그 뜻이 온전히 전달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거라는 정도다. 이것도 아주 많이 이해한 것이다. 러셀을 접한 이래로 그에 대해 이렇게 분노한 것은 처음이다……. 

  이 책이 화가 나는 이유는, 위에서 내가 추측한 러셀이 이 책을 별 생각없이 출판할 수 있게 한 이유와 정확하게 반대이다. 러셀이 아닌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여기에 등장하는 각각의 조각글이 어떤 맥락에서 어떤 의도로 쓰인 것인지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서유럽 사람의 입장에서 쓴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대한 비하가 가감없이 수록되어 있기도 하고, 지금은 폐기된지 오래인 행동주의 심리학에 기반한 사회개혁 프로그램에 대해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글도 보인다. 같은 글에서 인용했다고 하는데, 전혀 연결이 되지 않는 두 단편이 나란히 이어서 쓰여있기도 하다. 대체 이것을 어떻게 바라보아야할까? 

  그의 글은 이런 식으로 뽑아내어 읽었을 때 그 정확한 의미를 전혀 파악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는다. 그는 기본적으로 논리학자이며, 문장과 문장, 문단과 문단 사이의 연관이 매우 높은 편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글의 논지 전개를 따라가야만, 그가 실제로 하려는 주장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근거가 어떻게 그 주장을 받쳐주는지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가 글에서 자주 쓰는 (그의 체험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이는) 다양한 비유들도, 글 전체와 아주 짙은 관계를 맺고 있다. 다시 말해, 그의 비유는 단순히 수사적 전략에 그치지 않고 아주 강한 논리적 연결고리를 전제하고 쓰인다. 

  그나마 그가 일관되게 논리적으로 비판하는 종교에 대한 부분은 그 뜻이 살아있는 편이다. 그것은 논리적 완결성을 결여한 종교의 교리와 도그마에 대한 철학적 비판, 그리고 그의 대표적인 에세이집 가운데 하나인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에서 보여주는 종교의 여러가지 사회적인 해악에 대한 지적들이 많이 알려져있기 때문에 그나마 쉽게 이해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다른 주제에 대한 조각글들은, 특히나 결혼(성)과 윤리, 도덕에 대한 단편들의 경우 이런 난점은 더욱 두드러진다. 이미 번역되어 나오기도 한, 같은 주제에 대한 다른 에세이들은 명쾌하고 직접적으로 서술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는 이러한 러셀의 글의 참맛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이 책으로 러셀을 읽으려 시도하는 것은, 그 자체로 완전히 실패하는 것이다. 러셀의 노벨상 수상 소감문, 그리고 이 책이 주로 인용하지만 한국에는 아직 번역되지 않은 많은 에세이들이 차라리 편집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실려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너무 많이 남는다. 러셀의 글이 어떤지 알아보고 싶다면, 차라리 에세이집이 완전히 번역되어 나온 다른 책들, 예를 들면 『행복의 정복』, 『우리는 합리적 사고를 포기했는가』같은 책이 훨씬 낫다. 나는 주로 사회적인 주제들에 대한 에세이가 실려있는 『게으름에 대한 찬양』을 특히 좋아한다. 이런 책들은 특정한 주제에 편중되어 있어 그의 입장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것은 힘들지라도, 그의 글의 특징적인 면이나 성향을 파악하는데는 훨씬 도움이 될 것이다. 

  단 하나, 이 책의 긍정적인 면을 하나 꼽아보자면, 편집자와 해설자가 달아놓은 코멘트들이 다행히도 어느 정도는 이 책의 혼란스러운 면을 다소나마 보완해주고 있다는 점이다. 러셀을 전체적으로 조망하기 위해서는, 러셀을 연구한 사람들의 이같은 정리가 약간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의 글과 진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역시나 다른 사람들의 코멘트나 2차문헌에 의존하기보다는 원래 저자와 직접 대면하고 책을 통해 대화하는 것이 훨씬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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