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델의 관점에서, 절차적 공화정은 한 가지 역설을 품고 있다. 독립된 개인이 누려야 할 자유와 그에 해당하는 권리를 강조하면 할수록, 실제로는 개인이 전혀 통제할 수 없는 구조에 대한 종속이 더욱 심화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구조를 변화시키려는 노력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에서, 그는 시민적 덕성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즉, 시민적 덕성이 강조하는 공동체의 자치에 대한 참여의 덕목을 되살리자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 사회의 확대와 공동체의 확대의 구별, 의존의 심화와 공동체성의 강화의 구별을 내세운다. 기술의 발전이 사회의 규모를 점점 키우고, 고도의 분업이 사람들의 사이의 의존을 심화시켰지만, 이것이 공동체 의식의 강화로 연결되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로, 이 거대한 규모의 사회를 온전히 인식할 수 없는 개인의 한계상황만 심화되었으며, 따라서 사람들은 “공공적인 것”에 관한 관념과 인식을 가지는 것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대응하는 담론의 역사를 추적해봄으로써, 절차적 공화정을 향한 전이를 확인할 수 있다.


  19세기는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대규모 조직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진보주의자들은 과학적 관리법, 전문가주의를 도입해서 이런 대규모 조직들에 대응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 시기까지도 진영을 막론하고 시민적 덕성의 담론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다. 특히 대규모 기업집단에 대응하기 위한 두 가지 노선을 살펴보면 이런 점이 드러난다.


  첫째는 대규모 기업집단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경제를 탈집중화해야한다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에 동참한 사람들은 대규모 회사의 운영자들이 확보한 대규모의 금권을 통해 민주주의를 직접적으로 위협할 가능성이 있다고 간주했다. 또한 소속 피고용자(노동자)들을 회사에 묶어놓아서 이들이 시민적 덕성을 고양시킬 기회를 박탈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이들은 산업민주주의라는 담론에 이르게 되는데, 이것은 기업을 고용주와 피고용자 모두의 통제범위 안에 놓으려는 발상이다. 이것은 피고용자로 있다가 기술을 배워 자영업자로 독립하는, 자유노동의 이상에 충실한 아이디어였다.


  반대로 대규모 기업집단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규모를 키워야한다는 주장도 등장했다. 이런 생각은 기업집단의 대규모화가 역진불가능한 현상이라는 진단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현대적인 규모의 경제라는 발상과 달리, 이들은 대규모화에 따른 시민적 공동체의 대규모화라는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었다. 즉, 지역공동체성이 아닌 국가정체성을 매개로 시민들을 규합하고, 이들의 열망을 대규모화된 정부에 집중시키자는 발상이었다.


  반면 이런 대규모 기업집단이 새로운 사회적 정체성을 부여한다고 주장한 사람도 있었다. 이들은 소비자주권이라는 개념을 꺼내들었다. 사회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서, 더 이상 가치를 중심으로 뭉쳐있는 공동체는 유효하지 않다. 하지만 기업집단과 그들의 판로가 커질수록, 그 기업집단의 생산품을 사용하는 소비자로서의 정체성은 어느 시대보다도 확고해졌다. 그러므로 사회 또한 소비자 정체성을 중심으로 조직될 것이라는 전망이 등장한 것이다. 이것은 생산자 기반 가치 중심의 사회관에서 소비자 기반 만족 중심 사회관으로의 이동을 의미한다. 이 사회관은 두 가지 방식으로 옹호되었다. 한계효용의 법칙에 따라, 소비로 인한 생산과 분배효과를 극대화해야 한다는 공리주의적 방식과, 소비생활이 더 이상 도덕적 명령에 구속받지 않고 완전히 자발성을 확립한다는 자발주의적 방식이 그것이다. 이들에게 모든 사회적 조직의 목표는 “가장 광범위”하고 완전한 “경제적 만족”이었다.


  이런 변화를 추적해보기 위해서는, 경제와 관련된 서로 다른 두 가지 법의 서로 다른 운명을 살펴보면 된다.


  첫번째는 체인점 숫자가 늘어날수록 점포당 세율이 누진되는 세법인 반체인법이다. 19세기 말 반체인법이 처음 시행될 때, 옹호자들은 체인점이 지역 공동체에 아무 것도 기여하지 않는데, 반면에 소상공인들은 이웃의 사정에 밝고 공동체 운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방식으로 시민적 덕성의 고양에 기여한다고 주장했다. 즉, 이런 소규모 공동체들은 시민적 덕성이 가장 잘 발현되는 경제체제로서 의미가 있었기 때문에, 반체인법은 이런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했다. 반면 반대자들은, 상점의 목적은 최고의 제품을 최저가에 공급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소비자주의적 논증에 기대고 있었다. 이 주장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힘을 얻었고, 반체인법은 1930년대 폐지된 이후 더 이상 논쟁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두번째는 기업간의 연합이나 개별 기업의 규모, 독점을 제한하는 반트러스트법이다. 19세기 말 이 법이 처음 생길 때, 이 법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시민적 덕성에 의존하는 논증을 펼쳤다. 즉, 큰 기업은 정치를 침범하고 시민들의 연합을 고용-피고용 관계로 단순화시키기 때문에 나쁘다. 이렇듯 반트러스트법은 가격과 무관한 이슈로 등장했다. 오히려 이 법의 최초의 반대자로 기록된 노동운동가 건턴은, 소비자주의와 유사한 논증으로 반트러스트법을 반대했다. 기업의 규모가 커지면 생산품의 가격이 내려가고, 노동자에게 안정된 고용과 높은 임금을 보장할 것이다. 물론 건턴 또한, 이런 환경이 시민적 덕성의 육성에 더욱 유리할 것이라는 주장도 동시에 내놓았다.


  20세기로 넘어갈 무렵 브랜다이스 대법관은 효율성과 시민적 덕성에 각각 의거한 논증을 통해서 반트러스트법을 옹호했다. 우선, 대규모 기업집단은 규모의 경제보단 경직성이 훨씬 더 부각된다. 또한 그들의 성공은 효율성보단 독점을 이용한 가격조정에서 기인한다. 따라서 기업집단의 대규모화는 규제할 필요가 있다. 또한 소규모 자영업자들이 노력에 따라 성공할 기회가 주어지는 시민적 상황을 유지해야 한다는 논증도 내세웠다. 브랜다이스의 이런 입장은 가격 고정정책에 대한 그의 옹호에서 잘 드러난다. 생산품 가격을 고정시키는 것은, 폭탄할인을 쏟아내는 대형 할인매장으로부터 소규모 상점들을 지켜내서 “경쟁을 보호하는” 정책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반면 루스벨트 시대에 들어서면서 상황은 달라진다. 보수적인 법학 교수인 아놀드는, 반트러스트법을 구닥다리라고 매도한 전력에도 불구하고 루스벨트 정부에서 반트러스트위원회의 책임자로 임명된다. 그리고 그는 그 당시까지 유명무실하던 반트러스트법을 아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이 두가지 모습이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샌델이 볼 때 그의 논리는 일관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반트러스트법에 반대할 때도, 책임자로서 이 법을 활용할 때도 가격 지표와 효율성의 관점에서 접근했다. 즉, 기업의 규모는 더 이상 반트러스트법의 압박대상이 아닌 것이다. 반면 독점으로 인해 기업이 시장가격 이상으로 판매할 때에는, 지체없이 반트러스트법의 기소대상이 되었다.


  물론 루스벨트 시대 이후 1950, 60년대까지도 시민적 덕성에 의존하는 논증은 간간이 살아남았다. 이런 입장을 기반으로 의회에서 반트러스트법을 옹호하던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기업집단이 점점 커져가는 것, 즉 경제력의 집중은, 실제로 특정한 지역에서 일하는 사람들과는 전혀 무관한 대도시의 탐욕스런 경영자와 투자자들이 실제로 일하는 사람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비극적인 결말을 초래할 권력을 이양하는 것이다. 집중의 정도와 권력의 크기는 비례하므로, 기업의 크기를 일정 수준 이하로 제한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1970년 이후로 이런 논증은 담론지형에서 소수로 전락한다. 이것을 확인하기 위해, 이후의 보수진영과 진보진영에서의 논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레이건 정부 시기의 보크는 규모의 경제와 효율성 향상을 위해서는 반트러스트법에 반대해야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예전에 이슈가 되었던 가격고정에 대해서도, 시장 참여자들의 권리를 제한하면 필연적으로 비효율이 발생하기 때문에 반대했다. 반면 진보주의자인 네이더는, 독점은 필연적으로 비최적분배상태를 야기시킨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반트러스트법을 옹호했다. 또한 유통채널의 장난으로 인한 비효율가격의 출현을 막기 위해 가격고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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