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용주의연구 발제. 리처드 로티, 『철학 그리고 자연의 거울』2장 요약의 요약>

  이 장에서 로티는 마음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사고실험을 통해 우리가 우리의 내면, 즉 정신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그것이 정말로 존재하는 것에 관한 언급인지를 살펴보려 한다. 대척행성인은 우리와 모든 행동이 똑같지만, 마음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마음에 관해 표현하는 언어도 없다. 우리가 흔히 마음의 상태(정신적 상태)라고 칭하는 것들을 그 사람들은 곧장 특정한 신경적 상태로 표현한다. 지구인이(우리가) 이들을 만난다면, 우리는 이들에게 마음이 있는가 없는가에 관해서 토론하게 될 것이며, 여러 입장이 상충할 것이라고 로티는 주장한다.

  그러나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에 관한 여러 실험들이 이들에게는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 데카르트 이래로 마음 또는 정신적인 것의 특징으로 간주되는 것은 확고부동함(틀릴 수 없음, incorrigibility)이다. 마음에 떠오르는 것은 너무나도 명확하게 알려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확실하게 알려지는 마음 바깥에 있는 것과는 다르다. 그러나 대척행성인들에게는 신경세포의 반응이 너무나도 명확하게 알려진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반응은 물리적인 과정에 대한 설명이지 정신적인 것에 관한 규명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 지구인은 대척행성인들에게도 마음이 있지만 그들은 그것에 관해서 알지 못한다고 간주하거나, 또는 우리 지구인과 대척행성인 모두에게 마음이 없다고 하고, 우리가 정신적인 것에 관해 표현하는 것들이 무의미한 표현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어느 쪽으로 결론을 맺든 우리 지구인이 전통적으로 생각해온 마음 개념과는 다른 해석이 나올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문제로 부각된다. 대척행성인에게도 마음이 있다고 가정할 경우, 그들에게 적용되는 마음의 개념은 우리 지구인에게 적용되는 마음의 개념과 다를 수 밖에 없다. 마음의 개념에 핵심적인 것은 확고부동함인데, 그들에게는 신경적 상태가 확고부동하게 알려지기 때문이다. 우리 지구인과 대척행성인 모두에게 마음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마음과 정신적 상태에 관해 사용하고 있던 수많은 표현들을 폐기해야 하는 상황에 다다르게 된다. 이 둘을 중재하기 위해 철학사 속에서 여러 시도들이 있긴 했지만, 로티는 그들이 중립적이라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특징도 없는 시도들이라고 평가한다.

  마음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없다고 생각하는 것, 둘을 중재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들, 이 모든 노력들은, 가장 명백한 것이 가장 실재적이라는 플라톤의 원리 그리고 그 명백한 실재들을 인간이 고스란히 반영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울의 이미지에서 파생되었다고 로티는 주장한다. 여기에서부터 현대에 등장한 다양한 마음과 몸 문제에 관한 입장들을 검토해야 할 필요성이 생겨난다. 로티에게 분석의 대상이 되는 주요한 입장들은 행동주의, 회의주의, 유물론의 세 가지다.

  행동주의와 거울의 이미지는, 인간의 행동이 마음의 상태를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다는 가정 때문에 관련이 있다. 그러나 행동과 마음 사이에는 수많은 대응관계가 있다는 것이 너무 명백하기 때문에, 행동주의자들은 행동과 마음 사이를 매개하는 필연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을 지적해왔다. 예를 들어 그것은 우리의 언어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언어는 마음에 관한 표현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마음을 거부하는 데 쓰일 수 있는 도구가 아니다. 게다가, 이런 필연성이 보장된다고 해도 행동주의는 마음을 파악하는 데 올바른 입장일 수는 없다고 로티는 주장한다. 마음과 행동 사이에 필연적인 연결이 있다고 해서, 마음이 없다고 주장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회의주의자들은 나와 정신 사이의 관계, 즉 확고부동함이 성립하는 관계가 다른 사람과 다른 사람의 정신 사이에도 성립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정신의 존재에 관해서 확신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부류이다. 그러나 확고부동함을 구성하는 두 가지 속성, 즉 사적인 것과 직접적인 것이 필연적으로 연결되어있다고 주장할 때에만 이런 주장이 가능하다. 비트겐슈타인은 사적 언어의 불가능성에 관한 논증을 통해 이런 확고부동함이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회의주의자들은 이런 확고부동함 때문에 정신적인 것은 있다고 주장했다. 로티는 이 두 주장을 검토하면서, 사밀함을 거부한 비트겐슈타인을 높게 평가하면서도 각각 다른 직접적 상태를 언어로 환원하여 그 사람의 상태에 대해 직접 판단할 수 있다는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에 관해서는 비판적이다.

  심신동일론에도 여러 부류가 있다. 그 가운데 몸의 상태와 마음의 상태를 구분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주제중립적’ 분석에 의거한 논증이 있는데, 이는 몸과 마음 가운데 어떤 것을 우리가 선택해야하는지에 관해서는 알려주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다. 그러므로 이 논증에 의거해 유물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유물론이라는 형이상학적 가정을 이미 전제하고 있는 셈이다. 로티가 궁극적으로 지지하는 입장은 제거적 유물론인데, 이는 정신적인 상태가 있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 입장이다. 로티는 이것이 우리 지구인의 철학과 사상의 역사적 맥락에서 나온 특수한 문제 또는 특수한 은유법이라고 주장하고, 존재론적인 지위라는 모호한 말에 큰 관심을 가지는 과정 속에서만 나올 수 있는 문제라고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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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주의연구 발제. 리처드 로티, 『철학 그리고 자연의 거울』발제>


  1. 대척행성인들(Antipodeans)

 

  로티는 ‘마음이 없는 사람’들을 가정하고, 자신들에게 ‘마음이 있다’고 간주하는 인간과 비교함으로써 지금까지의 심리철학적 입장들이 어떻게 가능한지 논하려고 한다. 그는 이 ‘마음이 없는 사람’들을 대척행성인(Antipodean)이라고 칭하고 있다. 로티에 따르면 Antipodea는 “데카르트의 이원론에 대항하는 학파 가운데 하나로서, 오스트리아와 뉴질랜드를 중심으로 형성되었지만 이제는 거의 잊혀진 철학 학파”의 이름이다. 대척행성인은 인간과 행동이 완전히 같은데, 단 한가지 차이가 있다 - 마음이 없다. 또한 우리가 흔히 마음의 상태라고 부르는 것들을 심리-물리적 상태로 설명한다는 특징이 있다. 대상을 향한 지향은 그 대상과 대응하는 여러 신경세포들의 흥분상태로 설명된다. 그래서 ““두려움을 느낀다”, 그리고 “놀라움을 느낀다” 등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대척행성인들)은 이러한 것들이 “앉는다”, “감기에 걸렸다”, 그리고 “성적으로 흥분되었다” 등과는 전혀 다른 정신적인(mental) 상태 – 특별하고 분명한 종류의 상태 – 를 의미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따라서 아픔과 같은 정신적인 상태들은 “신경섬유 C가 자극될거야” 식의 명제로 표현된다. 또한 이들에게도 철학은 있지만, 그 내용에 마음과 관련된 단어들 – 이를테면 관념(idea), 혹은 지각(perception), 정신적인 표상(mental representation) - 이 전혀 없으며, 로크가 제기한 “관념의 베일”(주: 관념의 베일이란 경험주의적 인식론에서 발생할 수 있는 대표적인 문제이다. 경험론에 따르면, 인간은 외부의 주어진 것을 대면하면 그에 대응하는 관념을 마음에 떠올린다. 주어진 것은 물질적이고 반면에 관념은 정신적이다. 둘은 같지 않다. 그렇다면 인간이 아는 것(인식하는 것)은 관념인가 아니면 주어진 것인가? 만약에 주어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면, 관념은 어떻게 주어진 것을 정확하게 반영하는지에 관한 설명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것은 설명하기 힘들다. 주어진 것과 관념은 존재론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관념을 인식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인간의 인식의 대상이 관념이라면, 정확한 인식은 어떻게 가능한가? 나아가서, 관념에 대응한다고 하는 주어진 것이 있는지 인간은 확신할 수 있는가? 이것이 관념의 베일이 의미하는 바이다.) 문제 또한 발생하지 않는다. 또한 신화적 단계에서 실증주의적 단계로 바로 넘어간다.(주: 이는 프랑스의 실증주의 사회철학자 콩트의 사회발전 단계를 인용한 것이다. 그는 사회가 3단계로 발전한다고 주장했다. 신화적 단계에서 사람들은 세계가 신들의 힘에 의해 움직인다고 설명한다. 그 다음 형이상학적인 단계에서는 경험적 근거가 없는 논리적 장치들(예를 들어 헤겔의 ‘정신’ 개념)이 세계를 이해하는 핵심적인 매개라고 설명한다. 마지막으로 실증주의적 단계에서는 이 세계의 변화를 실증적 학문(즉 경험과학)을 통해 포착하고 그 결과들로 세계를 설명한다.)

 

  지구의 철학자들은 이들에게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에 관해 토론하기 시작한다. 대척행성인들 또한 이 철학자들이 무슨 논의를 하는지 알고싶어서 그들을 이해하고자 귀를 기울여보았다. 대척행성인들의 마음과 관련한 지구의 철학자들의 의견은 둘로 나누어졌는데, 로티는 이들을 각각 온건한(tender-minded) 사람들과 강경한(tough-minded) 사람이라고 부른다. 온건한 사람들은 그들이 아직 마음의 경지로 들어가지 못한 즉자적인 상태에 있다고 간주하거나(마음의 영역으로 들어가라고 소리치는 내부성이라는 마을의 사무소 직원), 또는 철학사적으로 헤라클레이토스가 이미 성취했으나 플라톤에 의해 잊혀진 생각, 다시 말해 마음은 이미 물질과 결합되어있고 이들을 분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생각이라는 것(플라톤이 우시아(=존재)를 이데아(=관념)에 동화시킴으로써 지구 서양인들의 의식에서 사라져버렸던 폴레모스(=변화, 물질)(주: 그리스 신화에서 전쟁의 신을 뜻하는 말로, 헤라클레이토스가 만물의 근본적인 법칙을 여기에 비유한다.)와 로고스(=불변, 정신, 이성)의 결합을 대척행성인들이 파악했음을 보여준다)을 대척행성인들이 이미 깨달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강경한 사람들은 그들에게 심적인 상태, 예를 들어 ‘아픔’이 과연 있을까를 물었다. 대척행성인들이 이야기하는 ‘아픔’은 언제나 심리-물리적 사실 – C-신경섬유의 자극 - 의 기술일 뿐이다. 이는 심적인 상태가 아니다. 하지만 인간은 심리-물리적 사실이 발생하면 ‘아픔’을 느낀다고 말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아픔’의 상태에 있다고 말할 때 인간이 보이는 행동과 아픔상태가 발생했을 때 대척행성인이 보이는 행동은 완전히 같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된다. “그들의 경험은 우리의 경험과 같은 현상적인 속성을 포함하고 있는가? 혹은 C-신경섬유의 자극은 고통스럽게만 느껴지는가? 혹은 그 자극은 똑같이 무시무시한 것이기는 하지만 어떤 다른 방식으로 느껴지는 것은 아닌가? 아니면 그 자극에는 아무런 느낌이 없는가?”

 

  또한 원느낌의 문제도 제기된다. 특정한 자극을 주면(“남색을 보여주면”) 그에 반응하는 특정한 신경적 상태(“C-692”)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과 대척행성인 모두에게 동일하다. 인간에게 남색을 보여주면, 그는 남색을 마음에 떠올리고 있다고 분명히 답할 것이다. 마음이 있는 인간에게 원느낌은 남색 하나이다. 그렇다면 대척행성인은 어떤가? 만약 그에게 마음이 있다고 한다면, 남색을 보여주었을 때 그는 남색을 표상하는가 아니면 C-692를 표상하는가? 둘 다인가 또는 어느 쪽도 아닌가? 하지만 로티에 따르면, 이런 실험들로는 그들이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에 관해 의미있는 답변을 얻을 수 없었다고 말한다. 원느낌이 남색이라면, 그들이 어떻게 남색을 보고 자신이 C-692의 상태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지의 과정(무의식적 추론?)이 명확하지 않다. 만약 C-692의 상태가 원느낌이라면, 그들은 남색을 보지 않고도 C-692의 상태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환각 같은 것들이 여기에 속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 스스로가 C-692의 상태에 있다(남색을 보고 있다)고 여긴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데, 이를 통해 그 상태에 있다는 것이 현상적 속성을 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이 정의하는 ‘현상적’이라는 말과는 같지 않은데, 인간에게 ‘현상적’이라는 말은 표상, 관념 등의 속성을 가리키는 말이지 신경적 상태의 속성을 가리키는 말은 아니기 때문이다.

 

  
  2. 현상적인 속성

 

  이 부분은 마음과 몸의 이원론을 옹호하는 크립키(주: 솔 크립키(1940~). 언어철학, 논리학에 큰 영향을 끼친 미국의 현대 철학자. 프린스턴대학 명예교수. 가능세계에 관한 양상논리학을 창시하고, 필연성 개념이 형이상학적이며 인식론과는 분리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펴 논리학과 철학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다.(위키피디아 요약))의 글로 시작된다. 그는 감각적인 인식의 경우, 감각을 일으키는 자극과, 그 자극을 수용할 수 있는 감각이라는 두 측면으로 나누어진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자극이 없어도 감각이 작동한다면(예를 들어 꿈을 꾸거나 물에 빠져 죽을 뻔 했을 때를 회상하는 등) 감각하는 주체는 그 자극이 있다고 여기게 되고, 반대로 자극이 있더라도 감각이 작동하지 않는다면(예를 들어 얼어붙은 손을 바늘로 찌른다면) 감각하는 주체는 그 자극을 없는 것으로 여긴다. 즉, 어떤 인식적인 조건을 충족시켰을 때에, 우리는 무언가를 느끼고 그것을 인식의 증거로 삼는다. 그런데 정신적인 현상(예를 들어 아픔)의 경우, 이런 인식적인 조건이 오로지 마음 안에서만 일어나기 때문에 그 이외의 다른 조건을 충족시킬 필요가 없다. 다시 말해, 아픔이 일어나기 위한 조건이 갖추어질 경우 바로 그는 아픔을 느끼며, 아픔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은 아픔이 일어나기 위한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은 경우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아픔은 외부의 환경에 대해서 독립적인 심적 상태이다.

 

  만약 이 논의를 따른다면, 대척행성인들은 아픔을 느낀다고 말할 수 있는가? 우리는 C-신경섬유가 자극받을 때 아프다고 말한다. 그들은 C-신경섬유가 자극받을 때 C-신경섬유가 자극받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와 대척행성인들이 C-신경섬유를 자극받을 때, 똑같은 것을 느끼는가? 같다면 왜 같은지, 또 다르다면 왜 다른지에 관한 해명이 필요하다.

 

  만약 이 둘이 같다고 하려면, 같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에 관한 정확한 정의가 필요하다고 로티는 주장한다. 대척행성인이 C-신경섬유에 관해서 계속 얘기하는 것이 아픔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과, 그렇기 때문에 대척행성인은 아픔에 관해서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미묘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단순히 C-신경섬유가 우리가 정의하는 아픔과 다르다고 하여도 그것을 아픔이 아니라고 단순하게 말할 수는 없다. 또한, 마음의 상태에 관한 기술은 다음과 같은 것을 가정하고 있다고 로티는 주장한다. "(1) 정신적인 것이 그 담지자에 의해서 확고부동하게 알려질 수 있다는 점은 그것이 정신적인 상태이기 위한 조건이다. (2) 우리는 이렇게 확고부동하게 알려질 수 있는 상태를 가지지 못하는 존재가 비물리적인 상태들(가령 믿음)을 문자 그대로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를 축약하자면, 확고부동한 것은 정신적인 것이 가지는 가장 기본적인 속성이다. 로티는 이것이 정신적인 것에 관한 데카르트식의 선입견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고 말한다. 만약 대척행성인들이 C-신경섬유의 상태를 확고부동하게 안다면, 그들에게 마음이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일까? 정신적인 것의 기준이 확고부동함인 한, “그들의 C-신경섬유가 자극받고 있다고 여겨진다는 보고를 할 때 그들은 어떤 느낌(마치 우리가 “아프다!”고 말할 때 보고하는 것과 동일한 느낌)을 보고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어떤 상태에서 뉴런이 촉발하는 어떤 소음을 내고 있을 뿐인가?”라는 질문에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다. 이 질문은 오히려, 우리가 아픔을 표현할 때 단지 뉴런을 보고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관한 반대되는 질문을 제기한다. 다시 말해, 대척행성인들은 왜 우리가 느낌과 마음이라고 부르는 이상한 것들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야 하는지 궁금해할 것이며, 또한

 

"“유물론자” 대척행성인들의 주장이 옳을 경우에 직면해야 할 대비를 해야 할 것이다. 즉 우리는 원느낌을 보고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단지 뉴런을 보고하고 있었을 뿐이다. 우리가 대용어구에 그렇게 오랫동안 매달려 있었다는 것은 우리 문화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일 뿐이다. 이는 우리가 지상에 관련된 많은 학문분야를 완성시키는 동안 천문학에는 등한시했으며, 천상에 대한 우리의 생각에는 여전히 프톨레마이오스 이전의 요소가 남이 있었던 것과도 같다."

 

  이 지점에서 어떤 사람들은 정신적인 것의 특징은 확고부동함이 아니라 불완전함이라는 반론을 편다. 이들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인과적으로 짜여져있는 신경과 감각체계는 잘못을 할 수가 없는데(즉 완전한데), 대상에 관한 인간의 표상은 언제나 불완전한 요소를 띄고 있다는 것이다. 유물론적인 입장을 따르면 이런 불완전한 표상에 대한 설명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표상은 신경과 감각체계가 아닌 다른 것, 즉 마음에 있는(정신적인) 것이다. “사물들이 단지 물질적인 체계 속에만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가능한가? 불완전한 이해라는 행위가 존재론적으로 중립적인 것으로 보일 수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가 마음에 속하는 것(정신적인 것)과 몸에 속하는 것을 가리는 기준은 불완전함과 완전함 뿐인가? 따라서 이는 적당하지 못하다.

 

  정신적인 것에 관해 ‘확고부동함’이라는 정의를 내렸기 때문에, 우리는 현상적인 속성의 정의 또한 ‘확고부동함’과 연관해서 내려야 한다. 그 정의는 “(P) 우리가 우리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확고부동한 보고를 할 때마다, 우리가 그러한 보고를 하게 되는 어떤 속성이 있어야 한다.”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살펴볼 때, 우리는 정신적인 것에 관해 정말 그 ‘확고부동’함을 주장할 수 있는가? “별과 같은 것을 잘못 기술한다는 것과 아픔과 같은 것을 잘못 기술한다는 것 사이에는 정확히 어떤 차이가 있는가? 왜 전자는 분명히 가능한 것처럼 보이지만, 후자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것처럼 보이는가?” 이는 데카르트와 같은 존재론적 이원론에 기반한 우리의 직관에서 이끌어낼 수 있는 결론이다. 하지만 이는 대척행성인들에게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생각이며 논의이다. 마음이 꼭 있어야 할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이것이 대척행성인들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의 핵심이다. 즉, 인간의 내면에 우리가 “내면”이라고 부를만한 정신적인 것의 영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구인 유물론자들의 경우에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들의 논증을 살펴보았을 때도, 정신적인 것을 주장하는 이원론자들의 ‘확고부동함’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인과적으로 외부의 주어진 것들을 잘 반영할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있다. 그래서 그들은 불완전한 이해와 인식에 관해 논한다. 하지만 불완전한 인식이 드러나는 순간은 인과적으로 확립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과적으로 그런 것은 그저 그런 것일 뿐, 불완전하다는 말을 붙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완전함의 증거는 심리-물리적인 것이 아닌 정신적인 것이 될테고, 그렇다면 다시 마음에 관해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에 대해, 대척행성인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할 것이라고 로티는 서술하고 있다.

 

"그들은 “이해작용”, “인지상태”, “느낌”과 같은 지구인들의 어휘 전체는 언어가 떠안은 불행한 일로 생각한다. (중략) 대척행성의 유물론자들은 “마음과 물질”이라는 우리의 개념이 언어가 잘못 발전했음을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대척행성의 부수현상론자들은 “C-신경섬유의 보고뿐만 아니라 아픔의 보고를 산출할 때, 지구인들의 언어중추에는 어떤 신경 입력이 가해지는가?”라는 질문에 당혹스러워하고 있다. 대척행성인들에게 느낌이 있다고 생각하는 지구의 철학자들은 대척행성인의 언어가 “실재에 대해서 충전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대척행성인들에게 느낌이 없다고 생각하는 지구의 철학자들은 언어발전 이론에 의존하고 있다. 그 이론에 따르면 첫 번째로 명명된 사물들은 “우리에게 더 잘 알려지는”- 즉 원느낌 - 것들이므로 느낌에 대한 이름이 없다는 것은 느낌이 없다는 것을 함축한다."

 

 

3. 확고부동성과 원느낌

 

  로티에 따르면, 어떤 현상을 기술하는 단어들의 의미가 확정되지 않았다고 생각이 될 때, 우리는 언어분석을 시작한다. 그러나 그 언어분석이 한계에 다다르고 더 이상 각 분석 간에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 봉착했을 때, 그 사이를 중재하는 것은 흔히 철학의 역할로 간주된다. 철학은 그 단어들이 쓰이는 맥락-체계를 재구성하여 어느 한 쪽을 제거하거나, (더 많은 사례로는) 이 둘이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는 정도의 체계를 구축하여 각 분석 간의 분쟁을 화해하고 조정한다. 철학사 속에서 이 화해의 매개가 된 단어들은 대개 “세계”, “물자체”, “감각될 수 있는 다양한 것”, “자극” 등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런 단어들이 실제로 어떤 대상을 지칭하고 있는가 질문을 던진다면, 답을 하기는 매우 힘들어진다. 이들은 “냉정하게 중립을 지킨다는 것 말고는 아무런 흥미로운 특징도 없는 존재자들을 명명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용어이기 때문이다.” 어떤 심리철학자들은 이런 전략을 사용해서,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의 구분을 다른 대상의 두 측면으로 여기려고 한다. 이같은 것에 관해 로티는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때때로 우리는 이 실재가 직관된다거나(베르그송) 혹은 감각의 기초 내용과 동일하다는(러셀, 에이어) 등의 이야기를 들어왔다. 그러나 때때로 그것은 단지 인식론적 회의주의를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제안되었을 뿐이라고도 한다(제임스, 듀이). 어떤 경우에서도 “우리가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있다”거나 혹은 이성(즉 철학적 딜레마를 피해야 하는 필요성)이 그것을 요청한다는 등의 주장을 제외하고는 우리는 아무 것도 들은 바가 없다. 중립적 일원론자들은 마치 과학자들이 요소들 속에서 분자들을 그리고 분자들 속에서 원자들을…… 등을 찾아낸 것과 마찬가지로, 철학은 기반이 되는 토대들을 발견하거나 혹은 찾아내야만 한다고 즐겨 제안해왔다. 그러나 사실 정신적인 것도 아니고 물질적인 것도 아닌 “중성적인 구성성분”은 그것이 가진 고유한 힘이나 속성이 밝혀지지 않은 채, 다만 제안되고 잊혀질(혹은 똑같은 내용이 되겠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정보의 역할이 부여될) 뿐이었다."

 

  이 지점에서 대척행성인들에 관한 문제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그 문제란, "① 원느낌이 확고부동하게 알려질 수 있다는 점은 원느낌에 대해서 본질적이다. ② 대척행성인들 스스로가 확고부동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없다. 에서 ③ 대척행성인들은 원느낌을 가지지 않는다. ④ 대척행성인들은 자신들이 가진 확고부동한 지식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는 결론 둘 중에 하나가 도출된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③은 쉽게 거부된다. 원느낌을 가지는 우리 인간들과 원느낌에 대한 모든 상황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척행성인들은 뭔가를 ‘모르고 있다’는 ④를 채용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들은 또한 자신들의 언어인 C-신경섬유의 상태를 우리의 언어인 ‘아프다’로 바꾸어 말하도록 훈련받을 수 있으므로, 만약 그럴 경우 지구인과 대척행성인 사이의 외형적인 차이는 거의 없어지게 된다. 만약 지구인이 대척행성인의 ‘아프다’가 실제로는 ‘아프다’가 아니라는 것을 지적한다면, 그것은 “특권적인 접근”을 주장하는 것이다. 대척행성인은 모른다고 하는 것을 인간은 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상황은 이상하다. 대척행성인은, 한편으로는 C-신경섬유가 자극을 받았기 때문에 아프다고 한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C-신경섬유가 자극을 받지 않는다면 ‘아픔’은 결코 생겨나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 지구인이 그것은 ‘아픔’이 아니라고 주장할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그들은 C-신경섬유가 자극을 받았을 때에만 ‘아프다’라고 말하도록 훈련받았는데, 그렇다면 ‘아픔’에 대해서 그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전부이고, 그것을 벗어나서 말할 수는 없다.

  여기에서 지구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아픔을 느끼다’와 ‘아프다’의 차이인 것으로 보인다. 앞쪽은 ‘아픔’이라는 정신적인 것을 내가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며, 뒤쪽은 마치 대척행성인들처럼 내가 이러저러한 상태에 있다는 의미이다. 앞쪽은 정신적인 것의 존재를 가정해야 가능한 서술이지만, 뒤쪽은 그렇지 않다. 그리고 고전적인 철학적 전통에 따라, ‘아픔을 느끼는 것’은 인식적 주체에게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지만, 반대로 ‘아프다’는 것은 종종 불확실하다.

 

  하지만 우리가 ‘아픔을 느끼는’ 상태에 있는지, 또는 ‘아픈’ 상태에 있는지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은, 적어도 마음의 존재를 상정하는 철학적 전통을 벗어난다면, 명확하지 않다. 로티에 다르면, 이 둘을 구분할 수 있으려면, 어떤 사람이 어떤 것에 관해 보고하는 것은 상태에 관한 기술이 아니라 인식주체와 직접 대면하는 원느낌에 관한 보고라는 생각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것은 로티가 말하는 ‘거울의 이미지’에 고스란히 반영되어있는 생각이기도 하다. 만약 우리가 이런 철학적 전통에 따라서 대척행성인에 관해 판단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마음이 있는 존재로서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이들에게 마음이 있다고 우리가 판단하는 근거들은 그들의 행동과 보고이므로,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마음 역시 행동주의적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다는 역설적인 결론에 이른다. 로티는 이를 통해, 대척행성인들에게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 우리가 판단할 수 없다고 생각하거나, 더 나아가서 그들에게 정신이 없다 – 그들에게 정신이 있는지 없는지 논의하는 자체가 무의미하다 – 고 주장하는 듯 하다.

 

  어쨌든 로티는 우리가 이런 거울의 이미지를 인정할 경우, 우리에게 주어지는 선택지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첫째는 “이러저러하게 보인다는 언급을 포함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모든 존재는 우리처럼 거울 같은 본질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행동주의자이다. 둘째는 만약 그런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의 마음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솔직하다고 생각하는 “피론 식의 회의주의자”이다. 셋째는 우리가 그런 거울의 이미지 같은 것을 본질로서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하는 유물론자이다.

 

  그러나 로티가 최종적으로 선택하고자 하는 입장은 거울의 이미지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다. 확고부동, 명석판명, 의심불가능 등의 형용사를 유발하는 거울의 이미지 자체가 데카르트 이래로 철학을 지배해왔던 특정한 언어놀이의 맥락으로부터 파생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의 진짜 문제 – 즉 보편적이고 일반적이며 영구적인 문제라고 생각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저런 형용사들은 정신과 인식주체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 형용사가 아니라, 그 말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회적 맥락과 그 말들 사이의 관계에 의해 의미가 확정되는 형용사들이다. 이런 로티의 논의를 따라가면, 원느낌과 행위 사이의 문제와 마음과 몸 사이의 문제는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 맥락에 따라 함께 제기되었다는 결론에 이른다.

 


4. 행동주의

 

  그렇다면 로티는 지금까지 제기됐던 심리철학의 대표적인 경향들이 어떻게 거울의 이미지 아래 묶여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며, 또 거울의 이미지를 거부하는 자신의 입장이 그 경향들과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 설명해야 한다. 그가 자신의 입장과 비교하는 첫 경향은 행동주의이다. 그는 행동주의를 다음과 같아 정리한다.

 

  행동주의는 두 가지 동기와 의도에서 시작되었다. 첫째, 마음 개념을 거부하기 위해서. 둘째, 타인의 성향과 나의 성향이 동일하다는 것을 확증하기 위해서. “느낌에 대한 보고는 비물리적인 존재자를 지시한다고 여겨져서는 안되며, 아마도 그것은 몸부림 또는 몸부림치려는 성향 이외 그 어떠한 존재자도 지시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 행동주의의 기본적인 성향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세 가지 전형적인 반론에 부딪힌다. 첫째, 어떤 성향을 나타내는 몸부림의 종류가 무한하다. 어떤 성향을 가진 사람이 그 무한한 것들 가운데 어떤 행동을 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둘째, 그러므로 성향과 행동이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이를 결정할 내적 상태를 가정해야만 그 행동의 필연성이 설명된다. 셋째, 이는 마음 개념을 거부하려는 의도적인 움직임 자체에서 비롯한 것이며, 그 자체로 논증된 것이 결코 아니다.

 

  물론 행동주의는 대척행성인들의 태도를 설명할 수 있는 좋은 이론이라는 점에서 좋으며, 또한 마음과 몸의 문제가 영구적인 철학적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효과적인 시도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러나 로티에 따르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행동주의는 그 방향이 잘못되었다. 행동주의자 라일(주: 길버트 라일(1900~1976). 철학적(논리적) 행동주의를 정립한 영국의 철학자.)은 “어떤 형태의 행동이 원느낌을 귀속시키는 데 필요한 필요충분조건을 구성하며 이는 “우리의 언어”에 관한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행동과 “우리의 언어”가 관계가 있다고 할 경우, “우리의 언어”는 마음을 독립적인 실체라고 인정하는 것을 뒷받침하기 때문에 우리의 행동 역시 마음에서 비롯한 것으로 설명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는 것이다. 원느낌에 관한 언어 - ‘~인 것처럼 보인다’ - 를 우리가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 원느낌의 존재를 확인시켜준다면, 그런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마음 즉 정신적인 것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이는 대척행성인에게 마음이 있다는 결론으로도 연결된다. 그러나 이는 행동주의자들의 의도와 목표와는 모순된다.

 

  라일은 이런 귀결에 다다르는 것을 거부하기 위해 확고부동, 의심불가능한 발견이라는 것을 거부해야만 했으나, 그것은 마음의 상태가 행동으로 환원된다는 ‘확고부동한’ 믿음(“내가 나 자신에 대해서 발견할 수 있는 것들은 내가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발견할 수 있는 것과 똑같으며, 그러한 것들을 발견하는 방법 역시 완전히 동일하다”)과 모순을 일으켰다. 따라서 그는 형이상학적으로 마음과 몸을 독립적으로 보거나, 혹은 마음이 몸으로 환원된다는 두 의견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이런 라일의 입장을 로티는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 “행동에는 성향이 있다는 것과 내적인 상태가 있다는 것 사이에 “필연적인 연관”이 있음을 보여줄 수 있다면, 사실상 내적인 상태라는 것은 없음을 보여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것은 논리적 비약이다. 예를 들어, 내가 물을 마시려는 성향과 목마른 상태 사이에 필연적인 연관이 있다고 해서, 내가 물을 마시려고 할 때 목마른 상태 자체가 없는 것은 아니다.

 

  로티의 분석에 따르면 라일은 결국 데카르트의 이원론적인 성향을 배태한 더욱 심층적인 이미지, 즉 거울의 이미지를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다. 단지 확고부동하게 인식되는 대상이 무엇인지만 다를 뿐이다. 데카르트의 경우에는 정신적인 것이며, 라일의 경우에는 행동이다. “데카르트주의자들은 정신적인 상태만이 유일하게 의식에 즉각적으로 주어지기에 자연적으로 적합한 존재자라고 생각했다. 행동주의자들은 인식론적으로 최선을 다한다고 해도 의식에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유일한 종류의 존재자는 물리적 대상의 상태라고 생각했다.” 이들 양쪽은 모두 다 플라톤의 원리, “가장 잘 알려지는 것이 가장 실재적인 것이라는” 전제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셈이다.

 

  이런 거울의 이미지와 대척행성인의 모습을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은 차이가 드러난다. 거울의 이미지에서 잘 알려지는 것이란, 특정한 성질을 가진 존재자들에 접근하는 것이다. 로티는 이것을 셀라스의 말을 인용해 “소여의 신화(myth of the given)”라고 부른다.(주: 윌프리드 셀라스(1912~1989). 20세기 중반 미국의 철학자. 소여의 신화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전통적인 인식론은 지식이 위계적으로 구조화되어있다고 가정했다. 여러 추론적 방법들에 의해 우리의 지식이 놓일 곳으로 만들어진 견고한 토대로서 제공되는 실재에 직접 접촉하는 어떤 인지적인 상태들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믿어졌다. 지식에 관한 이런 토대주의적인 그림은 지식에 관해 두 가지 필수조건을 부과했다. (1) 모든 다른 인지적인 상태들에 관해 독립적인 어떤 적극적인 인식적 지위를 가진다는 의미에서 기본적인 인지적 상태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이것은 인식적 독립성 필수조건(Epistemic Independency Requirement)이라 불린다. 적극적인 인식적 지위들 중에는 지식이 되는 것, 정당화되는 것, 또는 단지 그에 걸맞는 어떤 가정들을 가지는 것이 있다.(기본적인 인지들은 반드시 논의의 여지가 없는 인식적 보증을 소유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일반적이다 – 확실성, 무교정성, 또는 심지어 무오류성 – 그러나 이들은 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인식적 관계들은 연역적인 그리고 귀납적인 함축을 포함한다. (2) 모든 기본적이지 않은 인지적인 상태는 직간접적으로 기본적인 인지적 상태들을 낳는 인식적인 관계들 때문에만 적극적인 인식적 지위를 소유할 수 있다. 따라서 그 기본적인 상태들은 인식적 유효 필수조건(Epistemic Efficacy Requirement)이라고 불리는, 우리의 지식이 놓이는 자리를 위한 궁극적인 지원을 반드시 제공해야만 한다. 이러한 기본적이고 독립적이며 유효한 인지적인 상태들은 주어진 것이 될 것이다(would be the given). 많은 철학자들은 만약 전적으로 지식이 되는 그런 것이 있다면, 이러한 주어진 것이 있어야만 한다고 믿어왔다. (중략)  이런 주어진 것은 신화라는 셀라스의 논증은 다음과 같다.  (1) 인지적인 상태는 그것이 어떤 다른 인지적인 상태로부터 추론되거나 추론될 수 있음에 대해 독립적인 인식적 지위를 소유하는 경우에 인식적으로 독립적이다. [인식적 독립의 정의]  (2) 인지적인 상태는 그러한 다른 상태들의 인식적인 지위가 그것의 인식적인 지위로부터 (형식적으로 또는 실질적으로) 타당하게 추론될 수 있는 경우 인식적으로 유효하다 - 즉 다른 인지적인 상태들을 인식적으로 지지해줄 능력이 있다 [인식적 유효의 정의]  (3) 주어진 것이라는 교설(doctrine)은 p에 관한 모든 경험적인 지식이 어떤 기본적인(다시 말해 인식적으로 독립적인) 지식(p의 측면에서 인식적으로 유효한)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주어진 것의 교설의 정의]  (4) 추론적 관계는 언제나 명제적인 형식을 가진 항목들 사이에 존재한다. [추론의 본성에 의하여]  (5) 그러므로, 비명제적 항목들(감각자료같은 것들)은 인식적으로 무효하며 또한 주어진 것으로서 지지될 수 없다. [2,4에서]  (6) 추론적으로 획득되지 않으면, 명제적으로 구조화된 정신적 상태는 인식적으로 독립적이다. [1에서]  (7) 비추론적으로 획득된 것에 관한 다양한 방식들의 설명, 즉 명제적으로 구조화된 인지적인 상태들은 그들의 인식적인 지위들이, 특수하고 일반적인 경험적 참들 모두를 포함하는 다른 경험적인 지식에 관해 아는 주체에 의한 소유를 가정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감각 자료와 외양에 관한 진술들에 관한 분석과 인식적 권위에 관한 분석으로부터]  (8) 이 가정은 인식적이며 그러므로 추론적인 관계이다.  (9) 다른 경험적 지식에 관해 아는 주체에 의한 소유가 가정된 비추론적으로 획득된 경험적인 지식은 인식적으로 독립적이지 않다. [1,7,8에서]  (10) 모든 경험적, 명제적인 인지는 추론적으로 또는 비추론적 둘 중에 하나로 획득된다.  (11) 그러므로, 명제적으로 구조화된 인지는, 추론적으로 획득되었든 비추론적으로 획득되었든, 인식적으로 독립적일 수 없으며 또한 주어진 것으로서 지지할 수 없다. [6.9.10, 구성적 딜레마]  (12) 모든 인지는 명제적으로 구조화되거나 그렇지 않다.  (13) 그러므로, 경험적 지식에 관한 어떤 항목도 주어진 것에 관한 기능을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을 믿는 것은 합리적이다. [5,11,12, 구성적 딜레마]” (스탠퍼드 철학백과 Wilfred Sellars 항목, http://plato.stanford.edu/)) 그러나 이런 존재자들에 접근하는 것 말고도 우리에게 잘 알려지는 것들은 많다. 그것은 사회적 맥락에 의해서 알려지는 것들이다. 이른바, “모든 대척행성인들은 자신들의 신경상태에 대해서 친숙하며 모든 지구인들은 자신들의 원느낌에 대해서 친숙하다.” 로티는, 이렇게 사회적인 맥락을 벗어나서 확고부동하게 알려지는 것(즉 친숙한 것)을 규명하려는 시도는 무의미하며, 어떤 문화에서 확고부동한 것은 다른 문화에서는 왜 그것이 그렇게 이해되는지 의아한 대상이 될 뿐일 것이라고 말한다.

 


5. 타인의 정신에 대한 회의주의

 

  거울의 이미지가 반영되어있는 심리철학의 다른 한 사조는 자신의 마음에 관해서는 답을 유보하더라도 적어도 다른 사람의 마음에 관해서는 모른다는 이른바 ‘회의주의’이다. 이들은 어떤 존재자들 사이에 존재의 서열이나 우위를 가정하지 않으므로, 정신적인 것이라고 불리는 것은 이 세계의 다른 존재자들과 다를 것이 없는 ‘그저 존재하는 것’일 뿐이다. 그것은 아직 어떤 속성인지 파악되지 않고, 후보로서만 머물고 있다. 그러나 회의주의에 ‘정확한 표상적 반영’을 핵심으로 하는 거울의 이미지가 뒤섞일 경우, 이것은 "① 우리는 우리가 아는 다른 어떤 것보다 우리의 마음을 잘 알고 있다. ② 우리가 다른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고 해도 우리 마음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알 수 있다. ③ 어떤 것이 정신을 가졌는가를 안다는 것은 그것이 마음이 알고 있는 대로 그 마음을 알고 있는가의 문제이다." 가운데서 ②와 ③을 인정하는 결과를 낳는다. 우리가 마음을 직접적으로 대면한다는 거울의 이미지는 ①을 ②로 만드는 전제가 된다. 또한 ③처럼, 우리는 다른 이가 마음을 가졌는지 알기 위해서는, 그 다른 이가 ‘내겐 마음(정신적인 것)이 있다.’ 고 말할 때 그의 마음과 그 사이의 관계에 관해 알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이에 관해 알 수 있는 것은 행동적이거나 사회적인 것들(즉 정신적이지 않은 것들) 뿐이다. 따라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그림은 다른 이가 마음과 몸이 함께 있는 그림이 아니라, 우리가 다른 이에 관한 것이라고 부르는 자료들이 우리의 마음 주변을 떠돌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신적인 것, 내 마음의 주변을 떠돌고 있는 것에 관해 상상할 수 있게 된다. 이 경우, “여기에서도 인식론이 먼저 나서서 우리를 형이상학으로 들어가도록 유인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우리의 과제는 회의주의자의 건전함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거울의 이미지를 버릴 수 있는 방법을 탐색하는 것으로 바뀐다. 이를 위해 로티는 사적인 것과 직접적인 것이라는 두 가지 속성에 관한 비트겐슈타인의 논박을 검토한다. 비트겐슈타인은 두 속성 모두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정신적인 것(즉 마음)은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반면, 회의주의자들은 이 두 속성 모두가 가능하기 때문에 한 사람은 자신의 마음 이외에 다른 이의 마음에 접근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두 가지는 구별해서 생각해야 하는 것으로서, (앞장에서 살폈듯이) 특권적인 접근(즉 아주 잘 아는 것)을 할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꼭 정신적인 것이어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로티는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고통에 대해서 특권적인 접근을 할 수 있다.” 와 “우리는 순전히 정신적 상태의 감각된 특별한 성질만을 통해서 우리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안다.” 를 구분한다면, 우리는 역설을 피할 수 있으며 감각을 탁자와 같은 어떤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전자의 주장은 단지 누군가 고통스러워하고 있는가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그에게 물어보는 것 이상의 방법이 없으며, 또한 어떤 경우에도 그 자신의 진지한 보고를 기각해버릴 수 없다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후자는 이러한 특권이 가능한 것은 그 자신의 정신적 상태가 가진 “현상학적인 속성”을 그가 내성을 통해 알아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면서 자신의 입장과 거울의 이미지를 받아들인 입장의 차이를 요약하고 있다. 다시 말해, 무언가를 ‘사적이고 직접적으로’ 알기 위해서 꼭 그 대상이 ‘정신적인 것’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로티가 볼 때, 비트겐슈타인은, 내가 ‘아픈’ 것과 다른 이가 ‘아픈’ 것이 각각 다른 내적 상태를 가리키고 있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내적 상태가 어떤지에 관한 판단은 유보한 채 언어의 동일성 - 여기에서는 ‘아픔’ - 으로 정신적인 것을 환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사람들이 다양한 내적인 상태를 가리키기 위한 도구로서 언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그의 기본적인 견해 때문이다. 마음이 없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견해는 이상하게 여겨질 것이라고 로티는 말한다. 그들에게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사적이라든가 직접적이라든가 하는 형용사들이 이해되기 어렵다. 이들의 입장에서 인간들이 범하고 있는 오류는, 내가 아픈 것에 관해 ‘나만’ 알고 있다고 하는 것이 아픔에 관해 내가 ‘가장 잘’ 안다는 것을 함축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게다가, 대척행성인들의 견해에서는, ‘나만’ 안다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 명제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조차 파악하기 어렵다.

 

  마지막으로 로티는 이런 회의주의는 실생활에서 전혀 쓸모가 없으며, 유용하지도 않기 때문에 무효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마치 “종교가 제공하는 완전함에 대한 충고가 주중에는 주의를 끌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철학적(그리고 시적) 전통을 산출하는 이미지들은 학문 이외의 영역에서는 주목받지 못”하는 것과 같다.

 

6. 심신동일성이 없는 유물론

 

  흔히 유물론은 심신동일론을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일종의 환원론으로서, 정신적인 상태 모두가 심리-물리적인 상태로 기술 가능하며 또한 정신적인 상태 모두가 ‘사실은’ 심리-물리적인 상태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입장에 따르면 원느낌이나 감각 등도 심리-물리적인 상태이다. 지금은 사람들에게 이 상태가 완벽하게 밝혀지지 않았기에 우리가 알고 있는대로 정신적인 상태를 지칭하는 단어들을 동원해서 이를 설명한다. 그러나 만약 신경에 관한 우리의 과학적인 연구가 더 발달할 경우, 이들은 우리의 정신적인 상태 전부를 심리-물리적인 상태로 - 마치 대척행성인들의 언어처럼 -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입장을 취한다. 이런 입장에서 행동주의는 유물론이라는 큰 흐름 안에 있는 한 지류가 된다.

 

  암스트롱과 스마트의 주제중립적(주: 주제중립적이라는 말은 길버트 라일의 용어를 스마트가 차용한 것이다. 이는 논증이나 대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주제와 상관없는 단어, 즉 다시 말해 특별한 뜻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에는 ‘만약’, ‘또는’, ‘또한’ 등의 논리적 연결어들이 포함된다.) 분석은, 정신적 상태와 물리적 상태 간의 구분이 무의미함을 지적하고자 하는 유물론자들의 시도이다. 즉, ‘어떤 행동이나 행동 성향을 일으키는 모든 것’은 구분불가능하다는 것, 더 정확히 말해서 ‘~인 모든 것’은 주제중립적인 표현이기 때문에 특정한 의미가 있지 않다는 것이 주제중립적 분석의 결론이다. 그러나 우리의 언어와 전통은 ‘~를 일으키는 정신적 상태’와 ‘~를 일으키는 물리적 상태’가 구분된다는 직관을 포함하고 있고, 그러므로 이들의 주제중립적인 분석은 유물론과 심신평행론 사이에 어떤 것을 선택하는 것이 더 나은지에 관한 기준을 제공해주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다. 나아가서 ““정신”에 대한 우리의 개념이 주제중립적인 분석이 말하는 바와 같다면 심신 문제의 존재를 설명하기가 매우 어려워진다.” 다시 말해 주제중립적 설명을 채용하는 유물론은 마음은 없고 몸만 있다고 설명하는 것을 목표로 삼으면서 동시에 마음과 몸 둘 다 무의미하다는 논증을 펴고 있는 것이다.

 

  로티는 자신이 인용하고 있는 여러 학자들의 주장 사이의 차이를 드러내기 위해 다음과 같은 이원론 논증을 제시한다.

 

"① “나는 고통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있다”는 형식의 몇몇 언명은 참이다. ② 고통의 감각은 정신적 상태이다. ③ 신경 과정은 물리적 상태이다. ④ “정신적”과 “물리적”은 양립불가능한 술어이다. ⑤ 고통의 어떤 감각도 신경적 사건이 아니다. ⑥ 몇몇 비물리적 사건이 있다.

 

라일주의자들과 몇몇 비트겐슈타인주의자들은 정신성이 특권적 접근에의 접근가능성에 있다고 생각하며, 스트로슨의 소위 “사밀성에의 적의”라는 것에 탐닉하기 때문에 ②를 부정한다. 스마트나 암스트롱같은 “환원적” 유물론자들은 정신주의적 용에 대한 “주제중립적” 분석을 제시하면서 ④에 도전한다. 파이어아벤트나 콰인 같은 “제거적” 유물론자들은 ①을 부정한다."

 

  이 가운데 로티가 지지하는 입장은 가장 마지막의 “제거적” 유물론이다. 제거적 유물론은 인간에게 정신적인 것, 즉 “감각”은 없다고 말하는 주장이다. 로티에 따르면 제거적 입장은 형이상학을 하지 않으면서도 일원론적일 수 있으며, 또한 환원적 입장을 포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또한 “감각”은 없다고 말하지만, 사람들이 “감각이라고 부르는 것”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옹호한다. 정신적인 것에 관한 설명은 참으로 ‘간주되는’ 것들이며, 이는 우리의 입장에서 대척행성인을 이해할 수 있게, 또한 대척행성인들이 우리를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입장이 된다. 대척행성인들에게는 우리가 정신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들이 있을 수 있지만, 이들이 ‘실제로’ 있다고 주장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로티가 더욱 지지하고 싶어하는 입장은 ‘심신동일성 문제 자체가 특수한 맥락에서부터 도출되는 문제이다.’ 라는 것으로 보인다. 마음과 몸 문제에 관한 다양한 입장, 특히 일원론적인 입장의 여러 갈래는 사실 대척행성인을 인간중심적으로 해석하려고 드는 지구인들의 어색한 시도에 불과하다. 우리는 이 문제적 맥락을 벗어나서, “유물론자는 대척행성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형이상학을 동원하여 다루어서는 안되며, 설령 그렇게 한다고 해도 “우리가 사는 동안 내내 대척행성인의 언어를 말했다고 해도 예측력, 설명력 혹은 기술력을 전혀 잃어버리지 않았을 것이다”는 식의 주장에만 국한시켜야 한다.”

 

  우리에게 있는 심신동일성의 문제가 대척행성인에게 없는 이유는, 우리가 철학적인 전통 속에서 ‘존재론적인 지위’에 관해 우리가 관심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며, 반면 대척행성인에게는 그러한 전통이 없었기 때문이다. ““존재론적인 지위”라는 개념에 많은 관심을 가진 철학자가 아니라면, 확고부동하게 보고될 수 있는 고통이 “정말로” 고통인지 아니면 자극받은 C-신경섬유인지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없다. 이른바 정신적인 것이란 무언가에 관해 우리의 언어가 표현하는 방식이며, 대척행성인은 대척행성인의 방식이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 본 바에 따르면 정신적인 것과 관련된 문제는 우리의 언어 속에서만 특별하게 드러난다.

 

  우리의 언어에서 이러한 문제가 드러나는 궁극적인 이유, 다시 말해 심신문제가 우리의 언어에서 생겨나는 이유 혹은 우리가 각각의 방식들이 표현하는 공통적인 대상(즉 정신적인 것)이 있다고 가정하는 문제가 생겨나는 이유는, 로티가 보기에 우리가 거울의 이미지를 모든 경우에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로티의 결정적인 말을 직접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다.

 

"대립하고 있는 이러한 개념들(물질/정신, 과학/내면)은 지구의 17세기로부터 물려받은 한 무더기의 이미지가 없다면 전혀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기계는 사실은 아픔을 느끼지 않으며 매우 끔찍하게도 단지 그렇게 보일 뿐이다.” 라고 말한다고 해도, 직업상 이러한 이미지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철학자들을 제외한 누구도 화를 내거나 질색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가능한 경험적인 발견과 문화발전을 별다른 부담 없이 분류할 수 있는 영속적인 범주구조를 철학이 제공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우리는 “정신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정신의 본성에 대해서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가?”, “‘원느낌’이라고 부르는 것은 없다고 말하는 대척행성인들이 옳은가?” 등의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을 하게 된다."

 

"이러한 소위 존재론적 범주는 단지 여러 다양한 역사적인 원천에서 생긴 이질적인 개념들을 한데 묶는 방식일 뿐이다. 이는 데카르트 자신의 의도에서 볼 때 매우 용이한 방식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의 의도와 우리의 의도는 다르다. 철학자들은 자신의 인공적인 복합물을 마치 이미 존재하고 있는 어떤 것들을 발견한 것이라고 - “직관적” 혹은 “개념적” 혹은 “범주적” 등이 과학과 철학의 영속적인 매개변수를 결정하기 때문에 그것을 발견이라고 - 생각해서는 안된다."

 

 

7. 인식론과 “심리철학”

 

  마음과 몸의 관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이후이다. 우리는 철학의 역사를 통해서, 그 이전에는 이러한 문제가 아예 제기되지 않았거나 다른 방식으로 제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더 주목해야 할 것은, 마음이 독립적인 (연구) 영역으로 대두되면서, 이 마음이 담당하고 있다고 간주되는 인식의 문제 역시 제기되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이 시기의 철학자들은 마음의 인과적 작용을 잘 밝힌다면, 우리의 인식에 대해서도 잘 평가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들에게 마음의 인식적 작용이란, 다름아닌 ‘거울의 이미지’를 통해서 대상을(또는 관념을) 인식주체가 얼마나 잘 반영하고 알고 있느냐 하는 문제로 귀결되었다. 더욱 큰 문제는 후대의 철학자들이 이것을 당시의 철학적 맥락에서 제기된 문제가 아니라, 보편적인 그 무엇에 관한 문제로서 생각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가 도출된다. 즉, 마음 또는 정신적인 것 없이도 우리는 인식론적인 입장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로티는 “이 책의 제2부에서는 이성에 대한 문제의 근대판 - 즉, “인식론”이라고 불리는 학문영역이 관심을 기울였던 정확한 표상의 가능성 혹은 범위에 대한 문제가 있다는 생각 - 을 해소하려고 시도할 것”이며, 또한 “인간의 지식을 자연의 거울 속에 표상된 것의 집합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고, 우리의 거울 같은 본질이라는 개념 없이도 잘해나갈 수 있다는 제1부의 주장을 강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이런 마음의 개념은 인간의 도덕적 지위를 정당화하는 데 동원되는 개념이기도 하다. 따라서 ‘거울의 이미지’에 따르는 마음 개념을 비판하는 일은 인간의 도덕적 지위에 관한 전통적인 생각에 대한 공격이다. 이를 통해 로티는 앞으로 “개인이 어떤 존재자이며, 어떤 “객관적인 기준” - 예를 들면 거울 같은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식의 - 을 근거로 하여 도덕적 존엄성을 설명하려고 했던 매우 철학적인 기획이 과학과 윤리학을 혼동하고 있음을 밝히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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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론 연구 최종과제. 빌헬름 바이셰델, 『철학자들의 신』3장 요약 및 보충.>

 

   철학적 신학으로서의 중세철학

 

서양의 중세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듯이 기독교가 유럽 지역에 살던 사람들의 정신적 세계를 지배하던 시기였다. 따라서 기독교의 신은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개념이 되었다. 기독교의 체계에서 진리는 신의 말씀, 즉 성서를 통해 계시라는 형태로 선포된다. 이 사실은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 부정할 수 없는 절대성을 가지는 명백한 사실이다. 또한 이 사실을 자신의 믿음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로 받아들인다는 것이 기독교의 근본적인 내용이다.

그러나 신의 말씀을 진리로서 수용한다고 하면,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의 능력이다. 기독교의 교리가 체계적으로 정립되기 시작한 교부시대 이래로 성서-계시-신앙으로 이어지는 신에 대한 접근법은, 인간에게 고유하다고 여겨지는 진리에 대한 경험-지식-이해로 이어지는 접근법, 즉 이성과 충돌을 일으켰다. 기독교도들에게 진리는 이미 계시와 성서를 통해 주어졌다. 그런데 한편에는 이성은 진리를 탐구하고 또한 진리에 도달하는 인간의 능력이라고 주장되어온 또 다른 전통이 있다. 그럼에도 기독교의 입장에서 보기에 이성은 분명히 인간의 내부에 국한된 능력이고, 따라서 이성을 통해 계시적인 진리에 도달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것은 중세의 거의 모든 신학자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견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이성이 주어져있다면, 그것은 신이 인간을 만들 때 기획한 하나님의 작품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이성은 그것이 생기게 된 원인 또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럴듯하다. 신은 자신의 모상으로서 인간을 만들었으며, 또한 이 세계의 모든 것을 필연적으로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왜 피조물로서의 인간에게 주어졌는가?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며, 또 범위, 대상, 능력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중세의 기독교 철학자들은 여기에 대해 답을 내놓아야했다.

이성과 신앙의 관계를 본격적으로 논한다는 것은, 그 문제에 접근할 수 있는 많은 방법 그리고 그 문제에 관한 다양한 시각이 등장한다는 점을 암시한다. 특히 방법으로서 주목할만한 것은, ‘신의 존재에 대한 논증적 증명이다. 이것은 신앙와 이성의 영역에 동시에 걸쳐진 과제로서 중세의 철학자들 사이에서 가장 큰 화두였다. 이 증명을 시도한다는 것은,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이라고 부를만한 권위와 신앙에 의존하여 신을 접하는 것이 아니라, 성서 없이 신을 증명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만약 신의 존재에 대한 증명이 완결된 형태로 제시될 수 있다면, 이성을 소유한 모든 인간이라면 성서의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신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모든 인간이 진리에 접근할 수 있다는 점을 암시한다. 특히 이성을 가지고 있지만 신을 믿지 않는 이른바 어리석은 자들에게는 더욱 더 그렇다. 또한 어떤 신의 존재를 논증적으로 증명할 것인가를 묻는다면, 그가 생각하는 신의 본질과 권능, 삼위일체의 명증함 등에 관한 정의 또한 내려야할 것이다. 따라서 그 증명을 하는 사람은, 또한 신이 무엇인가에 관한 올바른 규정과 이해의 방식 또한 고려하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것 역시 증명 자체 못지 않게 매우 중요한 신학적 작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유념해야할 것은 이들이 실제로 딛고 있는 뿌리, 즉 신앙이라는 기반을 결코 잊어버린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중세철학의 대가들은 신앙과 이성이 서로 결합되어있다는 원칙을 아주 강력하게 지지하고 실현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의 합리주의적인 주장만큼은 단호히 부인했다는 점에서 다른 (시대의) 철학자들과 구별된다. , 그들은 증명을 하려하기보다는 적절한 이유를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중세의 신학은 철학적 신학이다. ‘이성을 사용하여 신에 대해 사유할 수 있는가?’ 가 신 개념을 철학적으로 사유하는 일, 그리고 그 일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일을 촉발시키기 위한 질문이라면, 그것은 철학적 신학의 시작을 위한 질문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중세철학은 철학적 신학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중세의 철학적 신학에는 다양한 입장이 존재한다. 특히 극단적인 입장들이 있다. 예를 들어, 브라반트의 시제Siger of Brabant그것을 통해 우리가 근원을 그 본질에 걸맞게 인식할 수 있는 그러한 인식이 존재한다.”고 한다. 이성의 결론과 신앙의 자료 사이에 피할 수 없는 모순이 있음을 인정할 때, 전자는 버리고 후자는 인정할 수밖에 없게 했으면서도 실상을 따지고 보면 이성적 탐구의 길을 좇아서 궁극적인 결과에 도달해야 하는 것이 철학의 권위라고 항상 고집하였다는 것이다. 반면, 페트루스 다미아니Petrus Damiani에게 철학자의 지혜가 그 논증의 어두운 안개를 통해 맑은 신앙의 근거를 포기하고, 따라서 철학은 가장 철저하게 종속적인 의미로 신학의 시녀가 되어야할 뿐이다.

그러나 중세의 모든 철학자들이 이러한 극단적인 입장을 취하지는 않았다. 그들의 입장은 저 양 극단의 중간 어딘가에 위치하고 있을 것이다. 신앙과 이성의 양립을 추구한 학문적 목표를 기준으로 중세의 철학자들을 나누어보면, 다음과 같이 세 갈래가 나타난다. 첫째, 이성과 신앙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하고 이성의 의미를 강조하는 데 초점을 둔 캔터베리의안셀무스Anselm of Cantebury와 그를 비롯해 이성의 역할을 다소 강조하는 이들이 있다. 둘째, 11세기 이후 유럽으로 유입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신앙을 결합시키면서 나타난 이른바 아베로에스주의자들이 있다. 여기에는 아벨라르Peter Abelard, 헤일스의 알렉산더Alexander of Hails,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그리고 사실상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요소들을 포기하는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와 오컴Ockham of William 등이 포함된다. 마지막으로는 이성의 의미를 제한하고 신앙으로 도약하는 것을 강조하는 신비주의 학파인데, 요하네스 스코투스 에리우게나Johannes Scotus Eriugena,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Bernard of Clairvaux, 빅토르St.Victor 학파와 보나벤투라Bonaventure, 그리고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와 니콜라우스 쿠자누스Nicolaus of Cues 등이 여기에 속한다.

 

신앙의 기반 위에 있는 이성

 

이런 논점들에 관해 인상적인 의견을 제시한 철학자는 캔터베리의 안셀무스(1033~1109)이다. 이성과 신앙의 관계에 대해서, 그는 이성은 언제나 신앙에 기초해 그 능력을 발휘해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그의 입장은 두 가지 슬로건으로 요약된다. 하나는 통찰을 추구하는 신앙fides quaerens intellectum”이고, 나머지 하나는 저는 믿기 위하여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기 위하여 믿습니다neque enim quaero intellige-re ut credam, sed credo ut intelligam”이다. 이런 슬로건을 통해서 안셀무스가 성취하려는 바는 성서에서 그 근거를 찾지 않고 오로지 이성을 통해서만 근거를 찾는다는 것이다.

이런 증명이 필요한 이유는 안셀무스 스스로가 자신의 신앙의 근거를 이성에 입각해서 찾아보기 위해서일수도 있지만, 신이 없다고 믿는 자들에게 성서 없이도 신을 보여주기 위한 시도라는 점이 더욱 중요하다. 따라서 그의 증명은 신자로서는 매우 불쾌한 태도를 취할 수 밖에 없는데, 그것은 모든 논증과 설명의 제1전제로서의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 같은 상황을 가정하여 자신의 논증을 펼치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성서의 권위에 따라 설득되어서는 안되었다. 대신 개별적인 탐구를 통해 얻어지는 결론이 주장하는 내용은 무엇이든지 명확한 형식과 일반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논증, 단순한 설명을 통해서, 이성적 필연성을 간결하게 강조할 뿐만 아니라 진리의 필연성을 명백하게 보여주어야 했다.” 이러한 입장에서 그는 신의 개념에 대한 전제적인 믿음을 배제한 채, 이성적 능력 즉 논증을 통해서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시도한다. 그 증명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첫째, 인간은 이 세상에 선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것을 선하게 만들어주는 근거가 있을 것이다. 따라서 선하다는 단일한 것, 단 하나의 선한 것, 따라서 최고의 선이 모든 선한 것을 선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그 최고의 선이 바로 신이다. 둘째, 인간은 여러 대상들의 본질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차이들은 더 중요하거나 덜 중요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그 본질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신이다. 셋째, 인간 외부의 대상들을 바라보지 않고 좀 더 내적으로 성찰해보았을 때, 인간은 자신에게 최고의 존재에 대한 개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개념은 인간의 내부에만 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 개념이다. 만약 이성에만 의존한다면, 어떤 존재라도 그것보다 더 높은 존재를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개념이 있다는 것은 진짜로 최고의 존재가 있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다. 최고의 존재가 바로 신이다.

안셀무스가 떠안고 있던 과제는, 일반적으로 생각해볼 때와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 이중적이다. 그는 신학자이자 철학자이기 이전에 여전히 신앙인이었고, 기독교의 근본 믿음에 관한 그의 신뢰는 매우 확고했다. 안셀무스에 대해서 생각할 때는 이 점을 반드시 고려해야만 하며, 그러지 않았을 때에는 그를 극단적인 합리주의자라고 쉽게 단정해 버릴 수 있다. 그의 이중성은 오히려 이 부분에서 더 잘 드러난다. 그는 왜 신은 인간이 되었는가Cur Deus homo에서 내가 그것을 이성으로 입증하였다고 보일지라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더 좋은 것으로 깨우쳐 주실 때까지는 지금 내가 이런 방식으로 그 문제를 보고 있다는 사실로만 입증될 뿐이지 그보다 더한 것으로는 다루어지지 말기를 바랍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실제로는 이성이 신비 앞에서 굴복한다기보다 오히려 더 명확한 통찰, 더 강력한 논증 앞에서만 굴복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 때까지는 (잠정적으로, 그 사이에는 당분간) 이성에게 임시적으로 보이는 그대로를 주장한다는 것을 말한다.

보나벤투라(1218~1274)와 로저 베이컨Roger Bacon(1214~1294)은 안셀무스의 이중성 가운데 이성은 신앙의 기반 위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야한다는 한 측면을 더욱 강한 형태로 주장했다. 다시 말해, 이성과 철학에만 기대어서는 결코 계시적 진리, 참된 지식에 이를 수가 없다고 말한 것이다. 하지만 신앙의 기반 위에 있는 철학은 얼마든지 허용되며, 신앙의 실체를 명확하게 규명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전통적인 철학자들이 탐구한 주제들은 결코 신학에서 설명해야하는 과제들과 다르지 않다. 보나벤투라는 이것을 이성의 빛신앙의 빛이라는 두 개념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그러나 보나벤투라는 이른바 이성의 빛에 따르는 진리의 인식에 분명히 회의적이었다. “그러한 진리는 철학자에겐 감추어진 질문, 말하자면 세계 창조에 대한 질문, 신의 힘과 지혜에 대한 질문과 같은, 최고의 그리고 가장 고귀한 질문들에 의해 드러난다.” 물론 이성은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기 때문에 선하다고 할 수 있으며, 철학은 일정한 유형의 지식을 획득하기에 필요한 수단이며 좋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어느 철학이라도 자체적으로 자율적이며 자체적으로 목적을 이룬다고 하는 주장은 오류일 수 밖에 없다.

베이컨은 철학의 전통에서 거론된 모든 진리를 모두 포함하는 진정한 지식은 성서에 담겨있다고 주장하였다. 철학은 완전한 지혜를 향해야만 하고, 그것도 매우 그래야 한다. 따라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다. “전체 철학의 힘은 성서안에 전적으로 포함되어 있다.” 철학의 과제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위해 증명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렇게 그의 철학은 진술된 의미에 있어 신학의 시녀이다. 특히 신학은 명백히 신앙의 학문, “다른 지배적인 학문을 능가하는 학문으로서의 영역을 간직한다.

 

신앙과 이성의 분열

 

아벨라르(1079~1142)와 헤일스의 알렉산더(1185~1245)는 신앙에서 이성의 역할을 더욱 강조하였다. 아벨라르의 경우,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사용되는 철학적 방법인 변증술을 신앙의 방법으로 이용하는 데 매우 적극적이었다. 계속 질문하고 토론함으로써, 의심스러운 것에 대해서는 정당하게 의심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의 주저 가운데 하나인 예와 아니오Sic et non158개의 질문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보는 권위의 대답과 여기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를 수록하였다. 이를 통해 그는 신학적 주제에 얽힌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점들을 정확하게 밝혀내려했으며, 또한 독자들에게 이러한 방향의 성경해석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해줄 것을 당부하였다.

또한 신앙의 철학적 방법으로서 논리를 매우 강조하였다. 그에게 논리학이란 매우 현대적인 의미로, 언어 표현을 가지고 의식 내용들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도구였다. 인간은 철학적 방법과 그 방법을 통해 획득한 지식으로 진리의 어렴풋한 모습을 파악할 수도 있다. 이것을 명증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도약을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신앙이다. 나아가서 그는 본래 신학적인 영역 안에서 이성이 해낼 수 있는 문제들이란, 특히 이성의 형식 논리적 법칙이 적용될 수 있는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시험해보는 것을 자신의 과제로 삼았다.

헤일스의 알렉산더는 아예 신앙과 이성의 영역을 나눈다. 신앙을 정교하게 구축한 학문은 신학이며, 이성을 사용한 정교한 학문은 형이상학인데, 그가 보기에 이 두 학문은 모두 신에 대한 지식, 진리를 추구한다. 따라서 인간은 이성을 통해서도 신에 대한 인식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는 신학이란 지적 체계를 갖추고서 하나님과 우주를 해석하는 활동이라고 하지 않았다. 신학은 원인과 결과를 연구하는 과학이 아니다. 오히려 신학은 원인의 원인을 밝히는 지혜로서, 인간의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데 있지 않고 사랑에 따라서 영혼을 완성시키고 경외와 사랑의 원리를 따라서 선으로 움직여 가는 것이다라고 했다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신앙과 이성의 의미

 

신앙와 이성 사이의 관계를 더욱 명확하게 구분하고, 이성으로 신을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더욱 긍정적으로 답한 학자는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이다. 물론 그 또한 신학자인 만큼 이성만으로 진리에 다다를 수 있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성은 신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신이 단일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반면 신앙은 이런 존재하는 신이 정말 어떤 존재인가’, 즉 신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해 알게 해준다. 따라서 이 두 능력은 인간이 신을 인식하는 각기 다른 방법과 영역을 가지고 있다. 더욱 구체적으로는, 이성은 이 세계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신에 대한 인식에 다다르는 능력이고, 반대로 신앙은 신에 대한 믿음에서 이 세계에 대한 지식을 도출해내는 능력이다. “신학은 계시의 증명을 논의 없이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이성의 논술방식도 채택한다. 신학은 실상 어떤 것을 인정하는 자들과 더불어 그들이 인정하는 그것에 기초해서 토론하고,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을 논박하면서 그들의 반론을 해결한다.” 신학이 계시를 통해서 알 수 있는 진리들을 철학은 이성을 통해서 알려고 한다.

그렇다면 이 세계에 대한 지식은 어떻게 신에 대한 인식을 보장해줄 수 있는가? 아퀴나스는 이에 대해 이 세계의 존재자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 사실을 인간이 눈 앞에서 목도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너무나도 명확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이러한 상황에 처해있다는 것이 그에게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다. 인간이 이러한 조건에 처해진 이유는, 다름 아닌 신 때문이다. 신은 이 세계의 모든 존재자들을 창조하였고, 인간 또한 그 존재자들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인간은 모든 존재자들의 피조성을 인식할 수 있다. 이 피조성은, 존재자들의 존재로부터 도출되는 가장 기본적인 원리인 동시에 모든 존재자들의 존재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이다. 이것을 그는 자연의 빛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각적인 자료를 출발점으로 삼아서 실재에 대한 지식에 이를 수 있다.우리의 지성적 인식들은 감각적 사물들로부터 온다. 외감으로부터 감각상이 환상에 들어오게 되고 그 위에서 능동 지성이 작업하는 것이다. 환상의 감각상 없이는 이승의 인간 지성은, 뇌 손상을 입은 자가 그렇듯, 사물들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조차 없게 되고 만다. 바로 이 때문에 교육은 사례들을 통해 환히 비춰지고, 또 수학자는 자신의 머리 속에서 상상적 공식들과 도형을 가지고 작업할 수 있는 것이다.” 감각적 사물들로부터 실재로 나아가는 매개는 인간의 본질에 주어진 능력인 능동적인 지성이다. 환상은 구체적이며 일시적인 대상에 대한 모습이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참된 지식이 사물의 실재를 말한다는 의미에서 참된 지식은 아니다. 지성은 환상으로부터 실재에 부합되는 것들을 추출해낸다. 신의 존재를 아는 것은, 바로 신과 같은 빗물질적인(지적인) 세계가 존재한다고 증언해주는 물질적인 실체를 앎으로써 깨닫게 되는 것이다. “비물질적인 우리 지성은 비물질적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그 자체 물질적이기 때문에 물질적으로 인식하는 외감들을 필요로 하므로, 우리 지성은 감각상들로부터 추상을 통해서 비물질적으로 인식한다 즉 물질적이고 가변적인 것들을 무시하고 항구하고 형상적인 관념들만 포착함으로써.”

그러나 아퀴나스도 여전히 세계에 대한 지식과 이것을 얻는데 필요한 이성보다는, 신앙을 통해서 신을 직접 인식하고 진리 그 자체에 다가가는 것이 진리에 다가가는 훨씬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직접 증명하는 것 또한 중요한 문제이다. 그는 안셀무스의 증명을 개념으로 존재하는 것과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혼동한 결과라고 비판한다. , 개념으로 존재하는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이 자명하다는 사실을 거부한 것이다. “신이 실존한다는 표현은 참되긴 하지만 명증적인 것은 아니다.” 그리고 신에 대해서는 실존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겠는데, 신이 무엇인지는 우리로서는 알 수 없다.” 따라서 우리의 신 존재 증명은 세계에 관한 지식에서부터 나아가는 방식을 택해야한다. 그의 신 존재 증명을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로 제시된다.

첫째, 어떤 운동이 있다면, 그 운동은 다른 운동하는 것에 의해 유발된 것이다. “이 세상에 계속적인 변화가 있다는 것은 명증적이다.” 그렇게 계속해서 운동의 원인이 되는 운동자들을 추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무한히 계속될 수는 없으며, 따라서 최초의 운동자primum movens가 반드시 전제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신이다. 둘째, 어떤 작용이 벌어졌다면 우리는 그것의 원인causa efficiens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역시나 원인 또한 무한히 추적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고, 최초의 원인causa prima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신이다. 셋째, 이 세계의 존재자들은 존재하지 않고 소멸될 가능성이 있는 존재들이다. 그렇다면 모든 존재자들이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는데, 이것은 명백하게 오류이다. 따라서 이 세계의 존재자들이 필연적으로 존재ens necessarium하게 하는 원인이 있어야하는데, 이것이 신이다. 넷째, 우리는 고귀한 것, 소중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더 고귀한 것, 더 소중한 것을 생각해볼 수 있는데, 무한히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최고로 소중한 것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신이다. 다섯째, 모든 존재자들은 완벽한 상태가 되기 위해서 운동한다. 이렇게 완벽하게 되려고 하는 것은 모든 존재자들의 목적이다. 그러나 언제나 이 목적을 향해있도록 만드는 존재가 있지 않다면, 모든 존재자들은 아무렇게나 운동할 것이다. 그런데 모든 존재자들은 아무렇게나 운동하지 않으므로, 그런 존재가 있을 것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이것이 바로 신이다.

아퀴나스의 이 논증들은 결함이 많다고 평가받는다. 첫째, 이 논증들은 모든 존재자가 목적을 내포하며 이것을 향해 운동한다는 목적론적 세계관을 가정하고 있다. 둘째, 감각적인 세계와는 구별되는 다른 세계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에 따른 위계를 설정하고 있다. 셋째, 최초의 무엇이 있어야한다고 생각하며 원인/근거와 결과/작용의 연쇄를 자르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넷째, 아퀴나스가 증명한 것은 신에 대한 증명이 아니라 최초의 원인, 최고의 존재자이다. , 그의 논증이 최초의 원인이나 최고의 존재에 대한 증명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신앙에서 말하는 그 신인지는 증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 이후 신앙과 이성의 관계

 

위와 같은 결론은, 이성의 영역을 확고하게 자리매김하려는 토마스의 의도와는 반대로, 끝내 신앙과 이성과의 관계를 설정하는 작업에서 이성의 영역을 축소시키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둔스 스코투스(1265~1308)는 철학에서의 형이상학을 이용하여 신에 대한 인식에 다다르려는 노력은 실패할 수 밖에 없다고 보았다. 형이상학의 대상, 이성의 대상은 신이 아니라 존재 자체이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의 사유는 최초의 원인, 최고의 존재에 도달할 뿐이며, 그것이 신이라고 인식하는 도약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신앙이다.

신이 전능하고 측정할 수 없으며 무소부재하다는 것, 혹은 그가 모든 피조물을 위해, 특별히 정신적인 피조물을 위해 계시로서 작용한다는 것 등은 자연적 이성을 통해 해명되는 형이상학적 진술에 속하지 않는다. 그에게서는 분명히 철학(즉 형이상학)의 대상은 바로 존재 또는 존재자들이다. 이전의 신 존재 증명이 그에게 문제가 되는 점은, 바로 이 존재자들로부터 최고의 존재자 또는 존재 자체를 도출해낼 수 있는 것과 신을 인식한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 다시 말해 최고의 존재자(또는 존재)는 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형이상학을 통해 신 존재 증명으로 나아가는 것은 존재의 이중성이라는 문제에 직면한다. 우리는 존재의 의미를 우리 주변의 존재자들을 통해서 파악한다. 이것은 토마스의 사상에서 가장 핵심적이다. 존재자들의 추상이 최고의 존재를 산출하고, 그것이 곧 신에 관한 인식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규정하는 신은 존재하는가? 신은 분명 우리 주변의 존재자들과 같은 양식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신은 존재한다고 이같은 방식으로 말한다면, 우리가 신의 존재를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단지 신이 존재자들과 같은 양식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렇다면 신은 결국 이성에 의해 두 가지 모순되는 존재방식을 가지게 되는데, 이것은 성립될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의 이성은 세계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것(결국 신을 인식하는 것과 같은 뜻)에 좌절하고 실패한다. 그는 이 원인을 두 가지로 지적한다. 하나는 인간의 원죄 때문에 이성이 오염되었기 때문에, 다른 하나는 전혀 이성적이고 합리적이지 않은 신의 자유라는 속성 때문이다. 특히 이성의 문제와 더 중요한 관련이 있는 것은 후자인데, 이성의 원리가 바로 합리성이기 때문이다. 반면 신은 절대적으로 자유롭기 때문에, 그가 행하고 작용을 미치는 모든 것은 근본적으로 비필연적인 성격, 곧 특정한 의미에서 우연적인 성격을 가진다. 둔스 스코투스가 설정한 이런 관계 아래서는, 이성과 신은 어떤 접점도 형성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인간의 이성은 신의 자유로운 행동으로부터 산출되어 나오는 어떤 것도 연역이나 논증을 통해 도달할 수 없고, “그 자체로의미 있다거나 심지어 필연적이라는 식으로 이해할 수 없다.

윌리엄 오컴(1288~1348)은 한 발 더 나아가서, 신앙은 학문적 체계로 만들어질 수조차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는 듯하다. 신에 대한 인식은 학문적 인식과 같은 방법이나 구조일 수 없다. 신이 인간적 학문의 대상들처럼 명백하게 알려진다면, 그것 자체가 신의 속성에 어긋나는 일이 되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적 사유를 통해 신에게 접근하는 것은, 어렴풋한 개념으로 접근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신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앙이며, 이성은 이 과정에 전혀 관여할 수 없다는 입장을 폈다.

그가 이렇게 주장했던 까닭은, 자유로운 신이라는 둔스 스코투스의 입장을 더욱 강화시켜 자신의 신학의 중심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신이 이 세계를 이렇게 만든것에 아무런 이유가 없다면, 이것의 필연성을 탐구하는 것은 덧없는 일이 될 수 밖에 없다. 인간은 순전히 사실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에 의존하는 수밖에 다른 길이 없으며, 꼭 있는 모습 그대로 있어야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신비주의자들

 

이 맥락에서 시대를 거슬러 신비주의적 전통을 살펴보는 이유는, 신앙과 이성이 명백하게 구분된다는 오컴의 주장이 인간과 신의 단절을 주장하는 영지주의적 전통 내지는 신플라톤주의자들의 입장과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이 두 전통은 중세 신학에서 신비주의 전통이라는 흐름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경향을 보여준 철학자들로는 요하네스 스코투스 에리우게나(815~877),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1090~1153), 생빅토르의 후고(1096~1141), 생빅토르의 리카르트(?~?), 보나벤투라 등이 있다.

에리우게나의 출발점은 신앙과 이성의 관계에 대해 질문을 던졌던 여러 철학자들의 출발점과 유사하다. 이성은 신앙의 영역 안에서 발휘되어야만 한다. 그런데 신비주의적 전통에 속하는 사람들은, 신과 인간은 개념적으로도 현실적으로 근본적으로 단절되어 있다는 고대의 전통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인간이 신을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신은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신과 하나되는 체험을 통해 느끼는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성은, 논리적으로 사유하는 능력이 아니라 신적인 체험을 향해 나아가는 사유능력으로 간주된다. 또한 이성은 신앙의 영역 안에서 발휘된다는 것은, 이성이 신앙의 형태라는 뜻으로 바뀐다. 이후의 신비주의자들은 신앙 안에서 신과 하나되는 인간의 능력을 이성과는 다른 직관으로 파악함으로써, 그 의미를 더 명확하게 한다.

그러므로 에리우게나를 비롯한 이후의 신비주의 전통에서 강조되는 것은,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기타로부터 비롯되는 부정신학과 부정철학의 성향이다. 신비주의 전통에서는 신 자신이 우리에게 이름을 계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신에 알맞은 어떤 이름도 신에게 부여할 수 없다는 분명히 성서적인 명제가 설정된다. 물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인간의 언어를 통해 신을 선포해야하지만, 그것은 그 선포된 언어를 거부하고 그럼으로써 다시 넘어서는 것까지 가야만 올바르게 된다. 예를 들어, 신이 정의롭다고 말하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나, 이 적극적인 진술은 동시에, 이 명제가 거짓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이에 상응하는 부정을 통해 교정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정의라는 개념은 우리에게만 통용되는 경험 세계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해야 할 것이 있음을 뜻한다. 그러나 신은 해야하는 무엇에 종속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신을 규정하는 우리의 언어는 동시에 부정되어야만 신에 관해 올바르게 통찰하는 진술이 된다.

신비주의적 전통이 보여주는 또 다른 특징은, 인식의 단계를 명확하게 설정한다는 점이다. 우선 생 빅토르의 후고는 인식의 단계를 육체의 눈, 이성의 눈, 명상의 눈이라는 세 가지 단계로 구분했다. 또한 리카르트와 보나벤투라의 견해를 참고해보면, 인식은 크게 세 가지 층위로 나누어진다. 가장 낮은 수준에서 우리는 우리 주변의 존재자들을 인식한다. 이 존재자들은 그 자체로 각각 신을 반영하고 있는 신의 현현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는데, 이러한 사고작용이 우리에게 단순한 존재자들 뿐만이 아니라 무형적인 것, 작용하는 것 등이 있다는 것 또한 일러준다. 또한 이러한 것들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으로서의 정신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일러주는데, 이것이 두 번째 수준의 인식이다. 그 다음 내적 반성을 통해 이 정신이 신의 반영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는데, 우리의 구조가 신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혼이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여섯 단계에 상응하는 여섯 가지의 기능 또는 능력이 영혼 안에 있는데, 그것들로 인해, 우리는 깊이로부터 높이로, 외부적인 것드로부터 내부적인 것으로, 유한한 것들로부터 영원한 것들로 감각, 상상, 이성, 이해intellect, 지성intelligent, 그리고 최종적으로 정점인 영혼에 이른다.”

여기에서 우리는 신을 향해 넘어가는 정신의 고양을 경험한다. 신비주의적 체험 신학은 이렇게 완성된다. “이 경험은 너무나 신비하고 숭고해서, 그를 제외한 어느 누구도, 갈망하였지만 그것에 대해 알지 못하고 받지 못했다. 이러한 추구는 그의 존재가 그리스도가 이 따에 보내주신 성령의 불에 의해 타오른 자에게만 온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도가 말하듯이 하나님의 숨겨진 것들이 성령에 의해 드러난 것이다.” 이 경우, 신앙은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않으므로 믿는 것은 의지의 활동이며 이성의 작동은 아니다. 신학의 주된 과제는 믿음에 관한 것이며, 믿음은 우선적으로 의지의 정서에 의존하기 때문에 신학은 학문 그 이상의 어떤 것, 즉 지혜sapientia이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1260~1327) 또한 신비주의적 전통에 속하는 철학자이다. 그의 독특함은 인식의 단계에 대한 정의와 신적 체험을 향해 가는 방법론에 있다. 신플라톤주의나 영지주의 때부터 그러했듯, 신비주의자들은 대개 상승이나 도약, 고양같은, 위계성이 갖춰져있고 계속해서 위를 향해 올라가는 은유를 사용한다. 에크하르트는 반대로 아래로 향하는 은유, 이 세계로부터 자신의 내면으로 점점 향하는 방법론을 제시한다. , 자신과 자신의 정신을 구성하고 있는 여러 존재자들로부터 자신의 내면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거대한 양의 에너지를 소비하지 않고서는 이 탄생의 경험을 확신하거나 그것에 접근할 수 없다. 그것은 사물들로부터 감각의 완전한 철수가 없이는 불가능하며 영혼의 모든 기능을 정복하고 그들이 작동하는 것을 중지시키는 데에 거대한 힘이 필요하다.”

이것을 격리성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조건을 파악하는 방법으로, 나 자신 이외의 모든 것을 정신의 고려사항에서 배제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모든 존재자들이 추방된 정신 그 자체가 발견된다. “그러므로 너는 하나님을 어떤 피조물의 학문이나 네 자신의 지혜를 통해서 알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만일 네가 하나님을 거룩하게 알고자 한다면, 너 자신의 지식은 순전히 무지와 같이 되어야 한다. 그 안에서 너는 자신과 다른 모든 피조물을 잊는다.” 그런데 이 과정을 다르게 표현하면, 정신이 피조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것, 다시 말해 신적인 영역으로 자신을 옮겨가는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발견된 정신 그 자체가 바로 신이며, 이 정신에 대한 체험이 신에 대한 인식이다. “무엇보다, 스스로를 위해 아무 것도 주장하지 말라. 너는 독특하게 네 자신의 것이었던 모든 것을 상실한 사막과 같기 때문이다. 성경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리의 소리에 관해서 말한다. 이 소리가 네 안에서 마음대로 외치게 하라!”

나의 정신 그 자체가 바로 신이라는 인식은, 다른 모든 존재자들 또한 마찬가지로 바로 신이라는 인식으로 유비될 수 있다. 물론 모든 존재자들의 총합이 신이 되는 것은 아니다. 신은 지금 존재하는 존재자들 뿐만이 아니라, 가능한 모든 존재자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신은 지금의 세계를 뛰어넘는다. 이런 의미에서 신은 모든 존재자들의 존재, 존재성으로 설명될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사물들은 신 자신이다.”

이 존재성은 마치 내가 나의 내면에 깊이 들어감으로써 신을 체험하듯이, 신이 모든 존재자들을 체험함으로써 가능하다. 이것을 에크하르트는 통찰intelligere’이라고 표현한다. “신의 올바른 존재 방식은 통찰이다. 신은 자신의 통찰 자체이며, 또한 자신의 존재이다.” 그러나 이러한 통찰은, 인간이 격리성을 통해 체험할 수는 있으나, 규정할 수는 없다. 도저히 언어로 규정될 수 없는 그 무엇에 대한 체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에 대한 인식은 기술될 뿐, 설명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에크하르트는 신비주의 전통의 가장 중요한 특징, 즉 신은 규정될 수 없고 무엇이 아니다라는 방식으로만 설명될 수 있다는 부정신학의 주된 성격들을 공유한다. “당신이 신을 사랑한다면 그가 어떻게 신인지, 어떻게 정신인지, 어떻게 인격인지, 어떻게 형상인지, 이 모든 것을 버려야한다. 당신은 그를 있는 그대로, 즉 비신, 비정신, 비인격, 비형상으로 사랑해야만 한다. 아가신이 모든 이중성으로부터 벗어난 청명하고순수하며 명료한 일자성이듯이, 이러한 일자성 안에서 우리는 무에서 무로 영원히 침잠해야 한다.”


니콜라우스 쿠자누스의 신비주의

 

신을 설명하려는 노력이 번번히 좌절된다는 신비주의의 전통은 니콜라우스 쿠자누스(1401~1464)의 철학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신은 절대적인 존재이다. 그러므로 자신과 대립하는 어떤 대상을 가질 수 없는, 단 하나이다. 그러므로 유한한 존재자들은 신의 피조물로서 독립해 신과 대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신 자신의 안에 구현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절대적 무한성은 모든 것을 포함하고, 모든 것을 포괄하기 때문이다.의지하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당신, 사랑스러운 하나님 안에 포옹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신을 이러한 방식으로 이해하기에, 그는 신에 관한 정의에서 모순적인 말들을 자주 내뱉는다. “왜냐하면 그것이 최대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암 것도 그것에 반대되지 않기 때문에, 동시에 최소한이 그것과 일치한다. 그때 그것은 실제로 모든 가능한 존재이며, 사물들로부터 아무 제한도 겪지 않으며 모든 것 위에 제한을 부과한다.”

더욱 주목할 것은, 그 안에 비단 현재뿐만이 아닌, 과거와 미래의 모든 유한한 존재자들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은 거대한 가능성의 덩어리로서 이해될 수 있다. 이것은 타자가 없는 존재, 즉 비-타자로서의 신만이 가질 수 있는 특징이다. 가능성이 끊임없이 현실로 드러나면서 변화하는 존재인 신은, 그래서 인간의 개념에 포착될 수 없고 따라서 가능성 그 자체라는 묘사 이외의 설명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인간의 신의 인식과 관련해서, -타자라는 속성은 신에 관한 부정적인(소극적인) 규정과 맞닿는 계기가 된다.

이런 신학적인 입장에서는, 중세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인 입장 가운데 하나인 삼위일체설이 문제가 된다. 신은 부정적으로만 정의될 수 있다면, 성부와 성자와 성모가 하나라는 삼위일체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는 이것을 통일성, 동일성, 연결성 등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묘사한다. 중요한 것은 기존의 삼위일체에 관한 도상적이고 도식적인 해석을 신비주의적 방식으로 이해했다는 점이다. 그는 삼위일체의 관계를 신의 내적 역동성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본다.

인간의 이성을 통해서 신을 인식하는 것은 신비주의의 모든 전통과 더불어 불가능하다. 절대적인 존재는 이성의 규칙인 모순율마저도 뛰어넘는데, 왜냐하면 신에 대립하는, 즉 모순된 무엇을 생각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성은 신을 인식하는 능력이 아니다. 그는 신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 그에 대해 알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신에 대한 가장 정확한 인식이라고 밝힌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모른다, 혹은 신에 관한 인식을 포기함으로써 세계 전체에 관한 총제적 지식을 포기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소크라테스에게 그가 그의 무지 밖에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것처럼, 그리고 매우 현명한 솔로몬도 모든 것은 어렵고 말로 해결할 수 없다고 단언했던 것 처럼 우리는 신에 관해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안에 있는 거룩한 것은 틀림없이 공허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학식 있는 무지docta ignorantia를 얻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적극적인 긍정신학이든 부정신학이든 우리는 신에 관해 인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말 속에서 쿠자누스는 지금까지 전해진 모든 신학의 전통을 해체한다. 신에 관한 진술은 긍정과 부정 사이의 모순되는 부유 안에서 보존되어야 한다.

그가 인식을 대신하여 신에게 접근하는 방법으로 제시한 것은 다름아닌 체험이다. 신은 체험을 통해 인간에게 다가오고, 그 체험을 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태도는 연모 즉 신앙이다. 그는 이 신앙을, 이성적(즉 인간적) 요소를 모두 배제한 순수한 바라봄이라는 뜻에서 관조라고 말한다. 이 관조 속에서 신은 인간에게 다가오며, 여기에서 인간은 수동적인 존재로 설정된다. 신은 어두움 안에서만 보여지며, 확실히 파악할 수 없는 관조 안에서 마치 순간적인 황홀경의 길에서와 같이 일어난다.

그러나 이러한 신비체험이 철학의 주제가 될 수 있는가? 또는 철학을 시작할 수 있는 단초가 될 수 있는가? 이 문제는, 단적으로 말해 신비주의자들이 철학, 즉 철학적 신학을 한 철학자들인지 되묻는 것이다. 신에 대한 고찰이 체험이나 믿음의 영역으로 돌려지는 순간, ‘철학적신학은 포기되는 것이나 다름없다. 중세의 신비주의자들은 이러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신에 대한 중세적 사유를 끝맺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 참고문헌

 

레이 페트리 편, 중세 후기 신비주의(류금주 옮김), 두란노아카데미, 2011

빌헬름 바이셰델, 철학자들의 신(최상욱 옮김), 동문선, 2003

요셉 피퍼, 중세 스콜라 철학(김진태 옮김), 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07

유진 페어웨더 편, 스콜라 신학 선집(김도훈, 최영근 옮김), 두란노아카데미, 2011

지아코모 달 싸소·로베르토 코지, 신학대전 요약(이재룡, 이동익, 조규만 옮김), 가톨릭대학교출판부, 1995

캔터베리의 안셀무스, 모놀로기온·프로슬로기온(박승찬 옮김), 아카넷, 2002

후스토 곤잘레스, 기독교 사상사 2 : 중세편(이형기, 차종순 옮김), 한국장로교출판사,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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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철학특강 발제. 애덤 스미스, 『도덕감정론』 2부 2절 요약>

  Chapter 1. 두 가지 덕의 비교


  스미스는 이 장의 첫 부분에서 보상과 처벌의 대상을 정의한다. 적절한 동기에서 나온, 대체로 자비로운 성향의(beneficent tendency) 행위는 보상의 대상이며, 부적절한 동기에서 나오는 해로운 성향의 행위는 처벌의 대상이다. 보상과 처벌이 어떤 사람의 행동에 대한 도덕적인 판단이 가장 단적으로 드러난 형태라고 본다면, 보상과 처벌의 기준에 행동의 동기와 결과 모두를 결합시키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만약 동기와 결과로 나타난 물리적인 변화 가운데 어느 한 쪽이라도 갖추고 있지 못한 경우에는, 그것이 도덕적인 행위로 평가받지 못하거나, 적어도 보상과 처벌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자비로움는 자유롭게 이루어지며, 강요되지 않는다. 다른 사람에게 자비로움을 행하지 않았다고 처벌을 받지는 않는데, 이는 적극적인 악(positive evil)을 행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비롭지 않았다는 것은 단지 현재 상태를 그대로 유지되게끔 했다는 점에서 간접적 피해일 뿐이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의 기대와 어긋나기 때문에 비난과 부인의 대상이 될 수는 있지만, 원한의 대상은 아니다. 심지어 자비로운 행위를 받은 사람이 베푼 사람에게 베풀지 않아도 그렇다. 스미스는 자비로움을 강제한다면, 오히려 그 강제가 자비로움을 하지 않는 것보다 훨씬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

  반면 상대방의 상태를 직접적으로 나쁘게 하는 행위는 사람들의 원한(resentment)을 산다. 사람들이 원한을 가지면, 나쁘게 된 것을 다시 원래대로 돌려놓으려는 마음이 생기고, 가해자에게 피해를 주어 그런 일을 다시는 못하게 만들려는 마음도 생긴다. 정의는 이러한 원한으로부터 나오며,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것, 즉 불의하다는 것의 반대말이다. 이 둘은 동일하게 적극적인 피해를 대상으로 삼는다. 그래서 스미스는 다른 무엇보다도 정의와 다른 덕목들을 구별하는 기준으로 처벌, 즉 강제성을 내세운다. 사람들은 이 원한 때문에 불의한 사람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은 사람들이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러므로 처벌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뤄진다. 하나는 나쁜 행위를 한 그 사람을 자신이 한 일의 정도에 적절하게 처벌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행위 자체가 이뤄지지 않도록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이다.

  여기에서, 이를테면 ‘직접적, 물리적 피해가 아닌 행위는 처벌할 수 없다.’는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우리의 일반적인 도덕적 태도에 부합하는가? 나아가서, 여러 덕목들을 교육하는데도 활용할 수 있는 관점인가? 우리는 실제로 아이들을 가르칠 때 물리적 강제를 동원하고, 때로는 국가가 그런 법률을 지정하여 사람들에게 착한 행동을 강제한다. 스미스 자신도 8번째 문단에서 이러한 행위는 모든 문명국가의 법에서 의무로 하고 있는 사항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정의의 법은 단순히 사람들의 직접적인 피해만 막는 것뿐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공동의 선을 위해 움직이도록 강제한다는 것이다. 이런 언급은 스미스의 이론적인 일관성을 해치는 것이 아닐까?

  정의와 자비로움을 다시 비교해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이 나누어볼 수 있다. 자비로운 사람, 즉 자비로움이 넘치는 사람은 보상을 받는다. 그러나 자비롭지 않은 사람, 즉 자비로움이 모자라는 사람은 처벌을 받지는 않는다. 반대로, 정의로운 사람, 즉 정의를 잘 실천하는 사람은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한다. 하지만 정의롭지 않은 사람, 즉 정의가 모자라는 사람은 처벌을 받는다.



  Chapter 2. 정의에 대한 감각, 후회(remorse), 잘한 일(merit)에 대한 의식


  정의라는 덕목을 실천하는데는,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가 동반되어야 하므로 매우 조심스럽다. 따라서 명백한 피해에 대한 정당한 분노만이 피해를 주는 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다. 또한 이렇게 정당화되어야지만 다른 사람들 또한 이 피해를 주는 행위에 공감한다. 그런데 인간은 자신에게 가장 집중하고, 자신을 가장 잘 알며 자기 자신에게 만족을 주는 행위를 하려는 경향이 있다. 또한 종종 이런 행위는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히기도 한다. 이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 따라서 정당한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나의 행위를 지켜보는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일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은 각각 자기들의 기호를 가장 먼저 내세우는 입장에서 나의 행동을 지켜볼 것이고, 만약 그렇다면 자신의 행위가 공감할만한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자신에게 집중하고 자신의 이익을 가장 우선적으로 돌보는 태도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 원리에 따라서만 행동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시인받을 수 없다. 이 원리가 아닌 다른 사람들의 기호를 고려하는 원리, 즉 공평한 관찰자가 그렇게 할 법하다고 생각하는 원리들에 기초하였을 때에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연스러운 태도는 용인될 수 있다. 만약 그렇지 못한 경우, 즉 자신의 이익을 내세워 타인을 난폭하게 대하는 경우,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난폭함을 당한 사람에게 공감하고 원한을 가지게 된다.

  스미스는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것의 정도를 구분하여 처벌의 강도를 구분한다. 가장 강하게 처벌해야 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는 것인데, 어떤 사람을 죽이는 것은 그 사람에게 가장 큰 피해를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은 재산과 소유권을 빼앗는 것이다. 이것은 명백하게 어떤 상태에 해를 입히는 것이다. 마지막은 계약을 위반하는 것이다. 계약 위반은 명백한 피해는 아니지만,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을 좌절시키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로 법의 내용과 연결된다.

  이런 법을 위반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감정이 어떠한지에 대해서 공감한다. 위법행위를 할 당시에는 강렬한 정념에 사로잡혀서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공감할 수 없었지만, 행위가 끝나는 것과 동시에 그 정념은 충족되었고 따라서 다른 사람들과 공감할 수 있는 마음의 상태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이 공감을 통해 그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를 원한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비참한 상태에 빠지게 된다. 또한 다른 사람들로부터는 원한의 대상이기 때문에, 자신의 비참한 처지에 대해서 전혀 공감을 얻을 수가 없다. 게다가 자신의 행동에 의해 불행에 빠진 사람에게도 공감하게 되면, 아주 처참한 정신적 상태에 빠지게 된다. 스미스에 따르면, 그 사람들은 이런 비참함을 겪은 뒤에야 자신이 어떤 행위를 한 것인지,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깨닫는데, 이러한 감정을 후회라고 부른다.

  이 부분에서 주목할 것은, 그 사람들이 어떤 감정상태에 빠졌는가 하는 내용보다는, 오히려 그 사람들을 포함한 모든 인간들이 놓여있는 조건에 대한 스미스의 생각이다. 그는 명시적으로 3번째 문단에서 ‘외로움은 사회보다 더욱 무섭다(But Solitude is still more dreadful than society)’고 말한다. 즉, 인간은 본질적으로 사회적인 존재이다. 그러므로 스미스는 죄수가 고통에 빠져드는 이유를 자신이 처해있는 환경에서 비롯한 육체적인 고통 때문이 아니라, 더 이상 사회적 관계망을 회복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상상이 떠오르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정의와 후회가 설명되었다. 스미스가 제목에 명시한 나머지 개념, 즉 잘한 일에 대한 의식은 이런 행동들과 반대되는 행동을 하는 것, 그리고 그 반대되는 행동을 보는 것에서 나오는 반대되는 감정들로 구성된다. 즉, 어떤 사람이 타인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다 주는 것을 지켜보았을 때, 그리고 그 행위가 지켜보는 다른 사람들 또한 그렇게 행동하게끔 만드는 적절한 동기에서부터 이루어졌을 때, 그것은 잘한 일이 된다. 어떤 것이 잘한 일인가에 대한 의식을 내가 갖기 위해서는, 좋은 결과와 적절한 동기 두 가지를 모두 고려하여 행동하면 된다. 또한 이것은 보상받을만한 일이기도 하다.



  Chapter 3. 본성(nature)의 이러한 구성의 유용함(utility)


  스미스는 이 장의 시작에서 더욱 확실하게 인간의 사회적인 측면을 강조한다. 즉, 인간은 사회 안에서만 자신을 유지(subsist)할 수 있으며, 이미 만들어진 사회에 자신을 적응(fitted)시킨다는 것이다. 이러한 언급을 눈여겨보아야 하는 이유는 그의 입장이 이전의 사상가들과 다르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전의 사회철학의 전통에서는 개인이 따로 떨어져서 살아가는 자연적인 상태와 상호교류하며 살아가는 사회적인 상태를 가정했다. 그러나 스미스에게는 인간이 상호교류하며 살아가는 상태 자체가 바로 자연적인 상태이다. 인간은 그 본성에 있어서 사회적인 것이다.

  사람들 사이의 교류의 형태는 이익과 피해 두 가지이다. 이익은 좋은 마음에서 주고받을 수도 있지만, 자신의 이익을 먼저 계산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교류될 수 있다. 따라서 자비로움은 있으면 좋지만, 없다고 해서 사람들 사이의 교류가 없어지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자비로움은 인간의 사회적 삶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하지만 피해를 주거나 받는 것은 상대방을 불신하게 만들며 따라서 인간의 사회적인 삶을 파괴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본성에 어긋난 것이다. 스미스에 따르면, 이런 까닭에 정의는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되는 꼭 필요한 덕목이며, 정의에 대한 감정은 인간에게 본성으로서 주어져있다.

  스미스는 이러한 내용을 건축물에 비유하여, 자비로움은 사회를 꾸미는 장식에 해당하지만, 정의는 사회를 건설하는 데 가장 중요한 기둥이라고 설명한다. 만약 인간이 사회를 이루고 사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면, 사회의 구성에 정의는 필수적이므로 정의에 대한 감각 또한 자연스러운 것이어야 한다. 물론 개인은 자기 자신, 그리고 자신과 특별한 연관이 있는 것에 대해서 더 크게 생각하고, 타인의 불행은 상대적으로 매우 적게 느낀다. 이것 또한 자연스러운 것이다. 따라서 정의에 대한 감각이 없다면, 자신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는 유혹으로부터 빠져나오기 힘들게 되고, 따라서 한 개인은 짐승들의 무리 속에서 살고 있는 것과 다름없게 된다.

  이러한 스미스의 생각은 수단과 목적의 관계라는 다른 방식으로도 논증된다. 예를 들어, 모든 생물은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 자신의 종을 번성하려는 목적에 언제나 이끌린다. 그러나 이런 목적에 이끌리는 활동들이, 명시적으로 이 목적들을 염두에 두고 행해지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또한 시계와 시계공 사이의 관계에서도 유비될 수 있다. 시계에 들어가는 각 부품들은 각자 자신의 고유한 동작을 가지고 있다. 그 부품들은 바로 그 활동을 가장 잘 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러나 이 부품들의 조합이 창출해내는 목적은 정확한 시각을 가리키는 것이다. 스미스의 관점에서는 인간들도 마찬가지이다. 인간들도, 신(자연)에 의해 어떤 목적을 가장 잘 달성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사회에 대해서 생각할 때, 그것을 그렇게 나누어 생각하지 않고, 인간의 능력 즉 이성 자체에 의해 사회가 구성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즉, 사회를 구성하고 정의의 법들을 만드는 것이 합리적 고려의 산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회 자체가 유지되는 것에 관심이 있다. 게다가 개인의 부는 사회의 부와, 개인의 감정은 주변 사람들의 감정과 아주 밀접하게 이어져있기 때문에, 사회 자체가 유지되는 것이 개인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정의롭다. 따라서 정의롭지 못한 행위들, 즉 사회의 유대를 해치는 행위는 일단 처벌하는 것을 더욱 좋아한다. 그러나 스미스가 보기에는 사회 자체의 유지를 위해 정의감이 있다는 것은 부족한 설명이다. 사람들은 행위 뒤에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와 비참한 상태에 빠져있는 가해자에게도 공감하므로, 그에 대해 처벌하지 않는 결정을 내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스미스가 보기에, 사회 자체를 유지하는 것, 즉 사회의 일반적인 관심-이익(general interest of society)에 의지하는 정의는 위와 같은 개인적인 공감을 억제하기 위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스미스의 입장에서 사회의 일반적인 이익에 대한 고려는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특성인 공감을 넘어서지 못한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아무리 범죄자라도, 그가 우리에게 더 이상 피해를 주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할 때, 그에 대해서 관대해진다. 그것은 그의 처지가 우리에게 연민이나 동정심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사회의 일반적인 이익을 고려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경우이다. 개인적으로 그에게 공감하는 것보다는 그에 의해 피해를 입은 사람,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이런 범죄에 의해 피해를 입을 수 있는 사람)들에 훨씬 더 많이 공감하는 것, 그리고 인류 전체에 대한 공감은 범죄자에 대한 공감에서 나오는 여러 덕목들을 상쇄시켜준다. 따라서, 사회의 일반적인 이익에 대한 고려가 공감의 구조에서 파생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둘 중에 공감이 훨씬 근본적인 것이다.

  또한 스미스에 따르면, 직접적으로 피해를 주는 행위가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어떤 행위가 일반적인 규칙에 어긋나는 것보다는 그것을 지키는 행위를 더욱 좋아한다. 젊은 사람들과 반항적인(licentious) 사람들이 이러한 규칙들을 어기는 경우가 있다. 스미스는 이런 사람들의 행동이 단지 내가 보기에 마음에 들지 않아서 싫어한다고 말하는 것은 주관적인 판단이므로, 그것이 적절하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다른 이유가 있어야한다고 말한다. 스미스가 보기에 규칙을 지키는 것을 강요하는 행위, 그것을 지키지 않았을 때 처벌하는 행위의 가장 밑바탕이 되는 것은 그렇게 행위하고 그 행위에 영향을 받는 각 개인들에 대한 관심과 공감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것은 사회 전체의 이익에 대한 고려라거나 사회의 유지, 존속 등의 이유에 의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스미스는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해 다시 한 번 유비 논증을 사용한다. 우리가 100원을 잃어버렸을 때, 그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100원을 10000원의 부분이 아니라 100원 자체로 생각한다. 어떤 사람이 피해를 입었을 때, 그것을 생각하는 까닭은 사회 전체가 입은 피해의 부분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이 입은 피해이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사회를 유지하지 위해서 정의의 법들을 지켜야한다고 말하지만, 스미스가 보기에 그것은 사실 사회 자체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개인들 사이의 특수한 관계들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 관계들에 정의의 법들을 잣대로 내밀 수 있는 이유는, 그 법들의 적용을 받는 이들과 내가 단순한 인간, 즉 동료개체로서 공감하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런 공감에는 특정한 개인에 대한 여러 불만스러운 점들이 개입하더라도, 금방 고려사항에서 제외된다.

  그러나 간혹 사회 전체의 이익을 고려하여 정의의 법이 시행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직접적으로는 특정한 개인에게 해를 끼치는 행위는 아니지만, 그것이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가정해보았을 때, 사회 전체에 여러 부작용이 생길 수 있는 행위들에서 그렇다. 스미스는 경찰(civil police)이나 군대의 기율을 무너뜨리는 행위가 이러한 행위라고 말한다. 이런 행동에 대한 처벌은 언제나 과도해 보이는데, 아마도 처벌의 강도를 설정하는 기준이 되는 직접적인 피해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사회의 일반적인 이익에 대한 고려가 아닌,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것에 대한 처벌을 보는 방식은 이것과 다르다. 그것은 직접적인 원한의 대상이며, 또한 그만큼의 처벌을 반드시 요구한다. 또한 그것은 적절하다. 이러한 처벌의 두 대상에 대한 차이가 중요한 이유는, 이 두 처벌이 단일한 원리에서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스미스에 따르면, 정의에 대한 이러한 믿음은 이 생애(this life)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종교적인 차원에서 다가올 생애(life to come)에까지 적용된다. 만약 정의롭지 못한 행위를 하고서도 이 생애에 처벌을 받지 않는다면, 종교는 그가 다가올 생애에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가르치며 사람들에게 정의에 대한 감각을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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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윤리학연습 발제문. 칸트, 『도덕 형이상학을 위한 기초 놓기』의 제2장 「대중적인 도덕철학에서 도덕형이상학으로의 전이」를 요약.>

  제 2장 「대중적인 도덕철학에서 도덕형이상학으로의 전이」는 크게 일곱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① 왜 경험적 요소가 순수한 도덕철학에서 배제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다루고, ② 여러 용어들을 새롭게 정의하고 그 정의에 따라 인간의 행동의 유형을 나눈다. ③ 정언명법의 도출과정, ④ 도덕적 명령의 내용을 규정하는 원칙으로서의 최종적 목적인 인간, ⑤ 도덕적 명령의 법칙으로서의 위상 ⑥ 도덕성의 사회적 의미에 대한 설명(목적의 왕국) ⑦ 이 장에서 했던 작업들을 요약하고 도덕성에 대한 다른 입장들을 비판하는 부분이다.



  순수한 도덕철학에서 경험적 요소의 위상


  칸트는 1장에서부터 줄곧 도덕성에 대한 엄밀한 철학적인 사고와 원리에는 경험적 요소가 개입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경험적 요소가 개입할 경우, 도덕성은 특수하고 우연적인 것으로 전락해, 결국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2장의 첫 부분에서 경험적 요소가 도덕적 행동에 개입했다는 것을 가려내기는 쉽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특정한 도덕적 행동이 어떤 근거로 행해졌는지는 인간의 내부에서 결정되는 것인데, 그 결정의 과정을 들여다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특히 ‘자기애self-love’는 도덕적인 것으로 보이는 행동을 하게 하는 원인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선한 행동을 함으로써 스스로 또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자기 자신을 드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이것 역시도, 도덕적인(것으로 보이는) 행동이 일어나는 원인을 파악한 것이지, 도덕적인 행동이 왜 일어나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으로는 부족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믿을만한 친구가 없는 세상을 가정하면서, 그렇더라도 친구에게 믿을만해야 한다는 도덕적 원칙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도덕적인 행동의 근거는 단순히 우리가 현재 경험하고 있는 이 세계 뿐만 아니라, 모든 세계의 모든 이성적인 존재들에게서 나와야만 한다는 견해를 쉽게 도출해낼 수 있다. 가장 선한 존재인 신조차도 자신의 도덕성은 이성에 기반하고 있다. 그에게 도덕성은 경험적인 요소들로부터 추상해나가는 것이 아니라, 먼저 선험적(추상적)인 영역에서 먼저 규정된 뒤에 모든 경험적 요소들에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도덕성의 기반은 인간을 둘러싼 외부의 환경이라는 요소에 의해 결정되지 않을 뿐 아니라, 인간의 본성에 의해서도 규정되지 않는다. 물론 인간의 본성은 내부적인 것이고, 또한 이 세계의 이성적 존재인 인간이라면 모두가 지닌 공통적인 성질이기 때문에 보편성을 얻을 수는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이 세계에서의 보편성일 뿐, 만약 가능한 다른 세계에서의 다른 이성적 존재자들이 있다면 인간의 본성에 근거한 도덕성은 결코 적용될 수 없을 것이다. 그 이성적 존재자들의 본성은 인간의 본성과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칸트는 이것을 ‘우연적’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따라서 보편적이고 필연적이어야 하는 도덕성의 근거로서 인간의 본성은 적합하지 않다.

  결론적으로 칸트는 도덕성의 기반을 특수한 경험과 우연적인 조건에 좌우되지 않는 이성에 두어야한다고 주장한다. “아무런 경험적인 유인의 낯선 첨가물과 섞이지 않은, 의무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도덕법칙에 대한 순수한 생각은 이성 혼자만의 방식에 따라 경험적인 영역에서 불려오는 모든 다른 동기들보다 더욱 강하게 인간의 마음에 대한 영향력을 가진다.”(64)



  각종 개념의 정의, 인간 행위의 유형 분류


  “자연 안의 모든 것은 법칙과의 일치 속에서 일한다. 오직 이성적 존재만이 법칙에 대한 표상과의 일치 속에서, 다시 말하면, 원리와의 일치 속에서 행위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즉 의지를 가지고 있다.”(66) 이성적인 존재자들은, 정해진 법칙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원칙을 표상하여 그것과 일치하는 행동을 하는 능력이 있다. 칸트에 따르면 이것이 의지이다. 의지는 이성과 일치할 경우, 선하다. 하지만 의지가 이성이 아닌 다른 원인에 의해 촉발되었을 경우, 의지는 이성과 일치하지 않고 선하지 않다. 따라서 이성은 의지에 대해 일련의 행동들을 강제하는데, 이것이 명령이다. “명령의 형식은 명령법이라고 불린다. 모든 명령법은 ‘-을 해야한다.’로 표현되고, 이것에 의해서 이성의 객관적 법칙과 그 주관적 구성에 의해 그것(이성) 때문에 필연적으로 결정되지는 않는 의지 사이의 관계를 가리킨다.”(66)

  “모든 명령법은 가언적이거나 정언적이다. 전자는 누군가 바라는(또는 누군가가 바라는 것이 적어도 가능하기는 한) 다른 어떤 것을 성취하는 것의 수단으로서의 가능한 행동의 실천적인 필연성을 나타낸다. 정언적 명령법은 아마도 다른 목적에 대한 참고 없이 그 자체의 객관적 필연성으로서의 행동을 나타낼 것이다.”(67) 가언적 명령법은 성취하려는 목적의 성격에 따라서 다시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만약 그 목적이 전혀 일반적이지 않고 단순히 임의적인 의도에 따라 설정된 것이라면, 그 명령법은 개연적이다. 반면에 그 목적이 인간의 본성에 따르는 것이라면 그 명령법은 실연적이다. 칸트는 실연적 명령법의 예로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을 해야한다.’는 것을 들고 있다. 이런 것들은, 선하기는 하지만 도덕적이지는 않다. 도덕성은 우연적이고 조건적인 요소들에 좌우되지 않아야하지만, 이들은 이런 요소들을 명령법에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정언적인) 명령법은 아마도 도덕성의 명령법이라고 불릴 것이다.”(69)

  이런 명령법들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의지를 강제한다. 개연적 명령법은, 특정한 목적을 이루려고 하는 데 필요한 수단을 제시해주고 있다. 따라서 그 목적을 성취하려고 하는 이성적인 존재자라면 누구나 개연적 명령법이 ‘해야한다’고 하는 여러 행위들을 거쳐가야 한다. 실연적 명령법은, 행복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할지 모든 것을 아는 한에서 개인적 명령법과 동일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러나 행복이라는 개념 자체가 내적으로 너무 불확실하기 때문에, 또한 인간의 행복은 외적인 경험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상 실연적 명령은 의지를 강제하지 못한다고 칸트는 주장한다.

  반면 정언적 명령법은 이런 경험적인 요소들을 통해서 그것이 의지를 강제하는지 아닌지 여부를 (초반에서 보았듯이)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오로지 형식적 조건, 즉 정언적 명령법의 정의 자체를 통해서만 의지를 강제할 수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정언명법 : Act only in accordance with that maxim through which you can will that it become a universal law at the same time(73).


  정언적 명령법의 도출과정은 논증이 아닌 일종의 선언이다. “가언적 명령법이라는 것 전부를 생각한다고 해서, 그것이 무엇을 담게 될지 미리 알지는 못한다. 조건이 주어져야 비로소 알게 된다. 그러나 정언적 명령법을 생각한다면 그것이 무엇을 담고 있는지 곧 안다. 왜냐하면 정언적 명령법은 법칙과 이 법칙을 따르라고 하는 준칙의 필연성만을 담고 있는데 그 법칙은 자신을 제한할 조건을 전혀 담고 있지 않아서, 남아 있는 것은 법칙 전부의 보편성 뿐이기 때문이다. 행위의 준칙은 이 보편성에 맞아야 하고, 이렇게 맞아야 한다는 것만으로 정언적 명령법은 진정 필연적이라고 생각된다. / 그러므로 정언적 명령법은 단 하나뿐인데, 그 준칙을 통해서 네가 그것을 동시에 보편적인 법칙으로 삼으려고 할 수 있는 그런 준칙에 따라서만 행위하라는 것이다.” 또한 “마치 네 행위의 준칙이 네 의지에 의해 보편적인 자연 법칙이 되어야 할 것처럼 그렇게 행위하라.”

  칸트는 이 정언적 명령법에 따라서 의무를 부정하려는 사람들의 준칙에 대해 분석을 시도한다. 의무는 크게 “우리 스스로에 대한 의무와 다른 인간 존재자들에 대한 의무, 그리고 완전한 의무와 불완전한 의무”(73)로 나뉜다. 첫째, 힘든 상황을 마주하여 자신에 대한 완전한 의무를 부정하려는 사람들은 자살을 시도한다. 칸트가 보기에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의 행동의 원칙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자살을 시도하라는 결론을 이끌어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삶을 유지하라는 인간의 본성, 즉 자연에 위배된다. 따라서 자기애는 보편적인 원칙이 될 수 없다. 둘째, 거짓 약속으로 돈을 꾸고 갚지 않으려는 사람은 타인에 대한 완전한 의무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 부정의 근거 역시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하여 거짓 약속을 하게 된다면 약속이라는 개념이 사라질 뿐 아니라 거짓 약속을 통해 성취하려고 했던 목표 또한 성취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셋째, 자신에 대한 불완전한 의무를 부정하는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고양시키는 데 신경쓰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이 이런 식의 태도를 취한다고 하더라도 내적인 모순이 생기지는 않는다. 그러나 모든 이성적 존재자는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는 특정한 능력을 계발해야하므로, 세계가 그런 모습이 되기를 바랄 수는 없다. 넷째, 다른 사람에 대한 불완전한 의무를 부정하는 사람은, 자신의 원칙을 모든 사람들이 원칙으로 삼는 세계를 상상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자신이 삶을 살아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들의 많은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은 분명한데, 이 사람은 이런 도움을 받을 가능성을 차단하고 있다. 따라서 자신이 바라는 것에 대해 모순이 생긴다.

  정리해보면, 완전한 의무는 그것을 모든 사람들이 준칙으로 삼는 세계를 상상할 수 없는 세계, 즉 내적인 모순을 안고 있는 준칙이며, 불완전한 의무는 그런 세계를 상상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나 그가 당연히 바라는 것들의 측면에서 모순이 생기는 준칙이다. 칸트에 따르면, 오히려 인간들은 이런 의무들을 부정할 때 자신이 언제나 예외가 되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의무를 부정하는 행위를 할 때마다 역설적으로 그들은 그 의무들이 보편성과 필연성을 띄고 있다는 것이 반증된다.



  목적들의 왕국 : The idea of the will of every rational being as a will giving universal law(81)


  이성적인 존재인 개인이 이성에 따라 세우는 준칙, 곧 도덕적 법칙은, 개인이 자기 스스로에게 법칙을 부여한다는 측면에 있어서는 주관적이지만, 또한 그것이 모든 이성적인 존재에게 선험적으로 같은 형태로 주어진다는 점에서 객관적이다. 이성은 보편화 가능성을 통해 준칙 자체가 내적인 모순을 일으키는지, 또는 그것을 바라는 행위가 모순을 일으키는지에 대해 검토하여 특정한 준칙이 도덕적 법칙으로서 성립되는지에 대한 형식적인 기준을 제공해준다. 또한 이성을 지니고 있는 자신을 이성적인 존재로서, 즉 목적 그 자체로서 사용하라는 내용도 함께 제공해준다.

  따라서 모든 이성적 존재는 각각의 이성이 작동하는 똑같은 방식으로 의지를 지향시킴으로써 도덕적 법칙을 보편적인 것으로 만든다. 이것은 “여기서 지금 보여주는 원칙의 세 번째 형식, 다시 말해 보편적인 법칙을 주는 의지로서의 모든 이성적 존재의 의지라는 이념 안에서 행해진다.”(82) 이런 생각은 단순히 이성적인 존재 개인이 설정하는 도덕적 법칙에 대한 논의 뿐만이 아니라, 이성적인 존재인 개인이 모여서 만들어진 사회 안에서의 도덕적 명령에 대한 논의도 가능하게 해준다. 칸트는 이것을 목적들의 왕국이라고 표현했다. 보편화 정식과 목적으로서의 인간이라는 정식은 이성적인 존재자가 단 하나뿐일지라도(심지어 그런 존재자들이 없다고 할지라도) 이성에 의해 연역적으로 도출될 수 있는 선험적인 조건이었다면, 목적들의 왕국이라는 개념은 이런 존재자들이 모여서 공동체를 형성하고, 그 공동체가 어떤 준칙을 바랄 수 있는지에 대한 선험적인 조건을 함축하고 있다.

  목적들의 왕국이 성립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은, 그 왕국에 참여하는 모든 구성원들이 각각의 준칙을 이성을 통해서 검토하고, 그 가운데 정식에 들어맞는 준칙들만을 법칙으로 삼는다. 따라서 법칙으로 확립된 것은 자신의 준칙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이성의 법칙이기도 하다. 다르게 표현하면 주관적인 준칙은 이성에 따라 동시에 객관적인 법칙이기도 한 것이다. 인간은 그러므로 자신이 세운 법칙에 지배당하는, 자기지배의 상태에 있어야한다. 이것을 칸트는 ‘의지에 고유한 보편법칙 부여’(81)이라고 표현한다. 모든 이성적 존재자가 공동체 내에서 이런 대우를 받는 한 그 존재자들은 자율적이며, 반대로 의지 이외의 다른 것에 의해 보편법칙을 부여받을 경우 그것을 타율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어떤 행위가 도덕적 성격, 즉 도덕성을 띄기 위해서는 의지의 자율성이라는 조건을 만족해야한다. 칸트는 자신의 입장을 더욱 명확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의지의 자율성과 타율성을 대비시킨다. 지금까지의 학설들은, 도덕적 법칙에 대한 완전성에 너무나 집착하거나 그것을 탐색하는 작업을 포기한 나머지, 전자는 결코 인간의 이성에 의해 규정될 수 없는 완전한 선인 신을 도덕성의 근거로 삼거나, 또는 우연하고 조건적인 것을 도덕성의 근거로 삼는 실수를 저질렀다. 칸트의 생각은, 인간은 스스로에게 보편적인 법칙을 부여하여 행동의 원칙을 정하고, 그것은 이성에 따르는 한 보편적이고 필연적이다. 따라서 칸트가 보기에, 신의 완전성에 기대든 또는 여러 경험적 요소에서 추상을 하든 그것은 둘 다 인간의 외부에서 도덕성을 찾아내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이것을 그는 의지의 타율성이라고 부른다. 반면 자신의 입장은 인간의 자율성을 옹호하는 입장으로, 인간은 자기 스스로에게 보편적인 법칙을 부여하고 그에 따를 수 있는 자기입법적, 즉 자율적 존재이다.

  이와 같은 칸트의 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스스로도 밝히고 있듯이 이것은 매우 분석적인 수준의 논의라는 점이다. 그가 이 책의 초반부에 공표했듯이, 자신의 논의는 경험이 완전히 배제된 수준의 논의이며 따라서 그것은 도덕의 기초를 이루는 몇 가지 개념에 대한 의미 분석과 재구성이라는 틀을 일관되게 지키고 있다. 따라서 정말 구체적으로 인간의 의무가 어떻게 형성되는지에 대해 논의하는 것은 이 글의 논의 범위를 벗어난다.



  의문점들

  1. 보편화 정식이 논리적 결론이 아니라 선언에 가깝다는 의문점


  보편화 정식의 핵심은, 어떤 이성적인 존재자의 의지가 표상하는 준칙이 모든 이성적인 존재자들이 표상하는 준칙이 되었을 때를 이성적으로 판단해야한다는 원칙을 담고 있다. 그것이 그러한 표상 자체에서 모순을 일으켜 그런 세계가 구성되는 것이 어떤 방식으로도 불가능할 경우, 그 준칙은 완전한 의무이다. 그런 세계를 상상할 수는 있지만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 불가능할 경우, 그것은 불완전한 의무이다. 내가 제기한 문제는, 단 하나의 정언적 명령법으로 제시한 보편화 정식이 과연 정언적 명령법의 속성에서 연역될 수 있는 단 하나의 논리적 결론인지, 만약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이 타당한가 하는 것이었다. 유성현의 답변은 이것은 형식적으로 올바른 논증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선생님의 답변은 (1) 칸트 또한 정언적 명령법이 실제 어떤 모습인지 표현하는데 매우 고심했을 것, (2) 그리고 똑같은 정식화가 조금씩 다른 어감으로 표현된 부분이 많다는 것 - 따라서 다른 표현들이 논리적으로 수용가능하다면 이 정식 또한 수용가능해야 할 것, 그리고 (3) 엄밀하게 논리형식을 갖춘 결론처럼 보이지는 않을지라도 타당한 논증이라는 것이었다.

  다시 읽어본 뒤, 나의 문제제기는 정언적 명령법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한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정언적 명령법은, (1) 무조건적 명령이라는 정의에서 모든 세계의 모든 이성적 존재에게 적용가능한(다시 말해, 말 그대로 무조건적인) 명령이어야 한다는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으며, (2) 경험적 요소들을 모두 배제한 상태이기 때문에 아직까지 구체적인 세계에서 어떤 준칙을 세워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할 수 없는 단계이다. 따라서 모든 준칙에 적용되는, 메타적인 의미의 명령으로서 모든 세계의 구체적인 준칙을 규제할 명령법은 단 하나밖에 있을 수 없다. 내가 이해한 정언적 명령법은, ‘무엇을 해라’ 라는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문장이었다. 그것은 정언적 명령법이 아니라 의무이다. 칸트는 이 장의 끝 부분에서, 구체적인 의무가 생성되는 과정은 경험적인 요소가 반드시 필요하므로, 도덕형이상학의 연구 과제를 뛰어넘는 부분이라고 밝히고 있다.



  2. 인간을 목적으로 대하라는 정식이 논리적으로 증명된 것이 아니라 가정이라는 의문점, 그리고 칸트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추측되는 일종의 ‘목적론적 세계관’은 증명될 수 없는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세계관을 바탕으로 자신의 논증을 펼치고 있다는 의문점


  인간을 목적으로 대하라는 것이 자명한 사실이나 증명된 것에 대한 진술이 아니라 단지 칸트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가정일 뿐이며, 그것을 어떤 부분에서는 사실로, 어떤 부분에서는 가정이라고 섞어서 쓰고 있다는 것이 나의 두 번째 의문이었다. 이에 대한 선생님의 답변은 (1) 이 가정이 사전에 논의되고 있는 내용일 수도 있다. 혹은 가정이 아닌 방식으로 이미 증명이 되었을 수 있다. (2) 정말 그것이 가정이기 때문에 가정적인 어조로 쓴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을 강조하려는 수사적인 의도로 쓰였을 수 있다. (3) 목적론적 세계관은, 그의 가정일 뿐만 아니라 인간이 도덕적인 존재가 되는데 가장 기초적인 사고방식이다. 이 문제를 다시 살펴보려면, 그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목적론적 세계관을 인정한 뒤에 여기에서 그가 내린 목적으로서의 인간이라는 정식이 연역적으로 도출될 수 있는지 검토해야 한다. 즉, 그의 진짜 의도가 인간의 도덕성을 선험적으로 증명하여 인간을 도덕적 존재로 인정하기 위한 작업이라는 것을 충분히 고려한 뒤 이 부분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인간이 이성적 존재자라는 의미는, 칸트에 따르면 목적과 수단을 임의적으로 설정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목적으로서의 인간이라는 정식은 이성에 대한 정의와 보편화 정식을 조합하여 내릴 수 있는 연역적인 결론인 것으로 보인다. 만약 어떤 이성적 존재자가 다른 이성적 존재자를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간주한다면, 그는 이성적 존재자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스스로 목적과 수단을 설정할 수 있는 능력을 빼앗기며 ‘단순한 수단’으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성적 존재자가 이성적 존재임과 동시에 이성적 존재가 아니라는 결론, 즉 모순을 일으킨다. 따라서 이런 세계는 생각할 수 없다. 또한 자신이 목적을 설정할 수 없는 존재로 대우받는 것을 바랄 수 있는 인간 또한 있을 수 없다.

 

 

덧댐1. 본문에서 괄호 안에 등장하는 쪽수는 케임브리지 대학의 영역본 쪽수다. 독일어는 읽지도 못하는지라 영어는 그래도 아는 언어니 낫지 싶었는데, 영어로 봐도 미친듯이 어려워서 결국 한글로 읽었다.

덧댐2. 또 다른 번역이 있는데 이것은 칸트의 3비판서를 완역한 서울대학교 백종현 선생님의 『윤리형이상학정초』이다. 이 발제문을 쓰고 있는 와중에 정초가 아닌 진짜 『윤리형이상학』이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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