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주의에 대한 전형적인 두 가지 비판이 있다. 하나는 공화주의가 과거회귀적이며, 전지구적으로 연결된 현대사회에서는 실현불가능한 이념이라는 입장이다. 이것은 공화주의 공공철학의 이념의 역사를 살펴보았을 때, 일리가 있다. 다른 하나는 공화주의가 바람직하지 않으며, 배제와 억압의 정치학으로 기능한다는 것이다. 특정한 정체성을 중심으로 구성된다고 해서 배제가 필연적인 것은 아니나, 현대사회의 특징 덕분에 공화주의적 이념이 억압으로 작동할 가능성은 높아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전형적인 억압적 공화주의자인 루소와 열린 공화주의자인 토크빌의 차이에 주목해보면, 공화주의가 반드시 억압을 동반하는 것만도 아니다. 즉, 공화주의 공동체란 동질성이 강한 시민권자격자들로 뭉친 집단이 아니라, 민주적 과정에 대한 이해와 공적 참여에 대한 강한 마음가짐을 가진 사람들로 이뤄진 연대체다.


  절차적 공화정은 우연적인 도덕적 의무를 소홀히 하며, 그에 따른 두 가지 징후(결과)를 만들어냈다. 하나는 절차적 공화정이 회피한 도덕적 문제들에 대해 이상한 해답을 유도해내는 잘못된 도덕주의를 향한 운동이다. 다른 하나는 개인을 둘러싼 도덕 공동체에 더 이상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의미에서의 지배(자기-지배)의 상실이다. 공화주의는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한 처방으로 적절한 것처럼 보인다.


  이런 경향은 1970년대 이후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고 나타나기 시작했다. 보수주의자들의 경우 복지프로그램을 축소시키면서 시민적 노선에 속하는 이유를 들었다. 즉, 공짜로 주어지는 복지프로그램이 수혜자들의 근로의욕을 감소시키고 노력 없는 댓가에 길들임으로써 도덕적으로 타락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도덕적 타락에 의거한 사회개혁의 필요성에 대한 언어와 논증은 1990년대에 이르러 공화당에서 민주당으로까지 옮겨갔다.


  반면 진보주의자들 또한 시민적 노선에 서서 불평등을 비판했다. 이전의 불평등 비판은 권리와 자유의 축소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면, 최근의 불평등 비판은 가난이 인격을 파괴하기 때문이라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또한 극심한 불평등은 계층 사이의 공간적-시간적 분리 또한 가속화시키는데, 이런 경향은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어울려 살아가면서 익혀야 할 현대사회에서의 시민적 덕의 학습 기회를 사람들로부터 빼앗아간다. 이런 분리는 사람들을 사적인 영역으로 몰아넣으며, 공적인 것에 대한 고려 또는 상상의 능력을 지워버린다. 이런 주장은 약간은 역설적이게도 90년대 중반 민주당 정부의 노동부 장관이었던 라이히에게서 나왔다.


  정부 주요 각료들의 담론 이외에도 공화주의적 경향이 확대되고 있다는 증거가 있다. 지역개발조합의 재조명, 20세기 초반에 사라졌던 반체인법을 연상시키는 스프롤 버스터 기업형 슈퍼마켓 반대운동, 공공성을 띈 기관들을 중심으로 도시를 재조직하는 신도시기획운동, 종교공동체나 마을회관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삼은 지역사회 공공부조조직인 산업지역재단의 발흥이 이런 경향을 보여주는 사례다. 이들의 운동의 동기와 활동방식은, 자기지배를 학습하는 시민화 프로그램으로서의 소규모 공동체라는 미국 건국시기의 이상을 닮아있다.


  그러나 이런 소규모 공동체 안에서의 시민적 덕성의 함양이라는 사회 모델이 전지구적 네트워크가 이미 형성된 현대사회에도 유효할까? 이 질문은 특히 국민국가 단위로 조직된 정치체에 비해 너무나도 비대해져버린 초국적 경제권력의 전횡에 시민적 노선이 유효한 대답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으로 연결된다. 우리는 현재 EU가 겪고 있는 여러 가지 정치적 난항으로부터, 그리고 1930년대 미국에서 있었던 경제구조 조직 논쟁으로부터 현 상황에 대한 대응을 유추해볼 수 있다. 이런 대응으로서 등장한 것이 세계시민윤리라는 노선이다. 이 노선의 옹호자들은, 마치 경제규모에 대항해서 정치규모를 키워야 한다고 말하듯이 전지구적 거대 경제조직에 대항하는 정치운동의 인격적 기반은 세계시민적 태도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자발주의적 자유주의의 절차적 공화정에서 추상적 인간의 모델이 윤리의 기반으로서 실패하듯이 실패할 수 밖에 없다. 결국 세계시민으로서의 나의 정체성이란, 자유주의자들이 머리에 그렸던 인간으로서의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세계시민 정체성으로서의 윤리보다는 지역공동체성을 살리는 것이 오히려 이 시대에 더 요청된다. 세계시민적 태도보다는 정치에 대한 통제의 경험이 훨씬 더 참여와 변화에 대한 동력을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다양한 형태의 소규모 공동체의 조직과 그 증가가 사회를 전체적으로 고양시킨다. 미국은 연방주의 논쟁의 과정에서 소규모 공동체의 조직과 그들 사이의 관계, 그리고 그 공동체들과 주권국가 사이의 관계에 대한 숙고의 경험을 지니고 있다. 하부의 소규모 공동체들로 주권을 일부 이양하면서 공동체적 경험과 잘 조직된 연방정부를 동시에 만들고자 노력했던 역사를 지닌 것이다. 또한 흑인민권운동도 이런 차원에서 파악할 수 있다. 이 운동이 단순히 권리에 대한 청원이 아니라 문화적 변혁과 영적 고양을 목표로 삼은 운동이었다는 것은, 운동의 지도자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여러 코멘트에서 쉽게 알 수 있다.


  많은 자유주의자들의 우려와 달리, 그래서 공화주의적 공동체 또한 다중적인 정체성을 묵과하지 않는다. 특정한 공동체 내부와 외부에 수많은 정체성들을 놓고 고민하고 토의하며 결정하는 과정이야말로 시민적 덕성의 고양의 과정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다중적인 정체성의 공화주의를 위협하는 두 가지 잠재적 요소가 있다. 하나는 다중성 자체를 부정하는 근본주의적 움직임이고, 다른 하나는 다중적 정체성 사이에서 나와 우리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는 부유하는 상태로 빠져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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