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용주의연구 발제. 리처드 로티, 『철학 그리고 자연의 거울』발제>


  1. 대척행성인들(Antipodeans)

 

  로티는 ‘마음이 없는 사람’들을 가정하고, 자신들에게 ‘마음이 있다’고 간주하는 인간과 비교함으로써 지금까지의 심리철학적 입장들이 어떻게 가능한지 논하려고 한다. 그는 이 ‘마음이 없는 사람’들을 대척행성인(Antipodean)이라고 칭하고 있다. 로티에 따르면 Antipodea는 “데카르트의 이원론에 대항하는 학파 가운데 하나로서, 오스트리아와 뉴질랜드를 중심으로 형성되었지만 이제는 거의 잊혀진 철학 학파”의 이름이다. 대척행성인은 인간과 행동이 완전히 같은데, 단 한가지 차이가 있다 - 마음이 없다. 또한 우리가 흔히 마음의 상태라고 부르는 것들을 심리-물리적 상태로 설명한다는 특징이 있다. 대상을 향한 지향은 그 대상과 대응하는 여러 신경세포들의 흥분상태로 설명된다. 그래서 ““두려움을 느낀다”, 그리고 “놀라움을 느낀다” 등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대척행성인들)은 이러한 것들이 “앉는다”, “감기에 걸렸다”, 그리고 “성적으로 흥분되었다” 등과는 전혀 다른 정신적인(mental) 상태 – 특별하고 분명한 종류의 상태 – 를 의미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따라서 아픔과 같은 정신적인 상태들은 “신경섬유 C가 자극될거야” 식의 명제로 표현된다. 또한 이들에게도 철학은 있지만, 그 내용에 마음과 관련된 단어들 – 이를테면 관념(idea), 혹은 지각(perception), 정신적인 표상(mental representation) - 이 전혀 없으며, 로크가 제기한 “관념의 베일”(주: 관념의 베일이란 경험주의적 인식론에서 발생할 수 있는 대표적인 문제이다. 경험론에 따르면, 인간은 외부의 주어진 것을 대면하면 그에 대응하는 관념을 마음에 떠올린다. 주어진 것은 물질적이고 반면에 관념은 정신적이다. 둘은 같지 않다. 그렇다면 인간이 아는 것(인식하는 것)은 관념인가 아니면 주어진 것인가? 만약에 주어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면, 관념은 어떻게 주어진 것을 정확하게 반영하는지에 관한 설명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것은 설명하기 힘들다. 주어진 것과 관념은 존재론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관념을 인식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인간의 인식의 대상이 관념이라면, 정확한 인식은 어떻게 가능한가? 나아가서, 관념에 대응한다고 하는 주어진 것이 있는지 인간은 확신할 수 있는가? 이것이 관념의 베일이 의미하는 바이다.) 문제 또한 발생하지 않는다. 또한 신화적 단계에서 실증주의적 단계로 바로 넘어간다.(주: 이는 프랑스의 실증주의 사회철학자 콩트의 사회발전 단계를 인용한 것이다. 그는 사회가 3단계로 발전한다고 주장했다. 신화적 단계에서 사람들은 세계가 신들의 힘에 의해 움직인다고 설명한다. 그 다음 형이상학적인 단계에서는 경험적 근거가 없는 논리적 장치들(예를 들어 헤겔의 ‘정신’ 개념)이 세계를 이해하는 핵심적인 매개라고 설명한다. 마지막으로 실증주의적 단계에서는 이 세계의 변화를 실증적 학문(즉 경험과학)을 통해 포착하고 그 결과들로 세계를 설명한다.)

 

  지구의 철학자들은 이들에게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에 관해 토론하기 시작한다. 대척행성인들 또한 이 철학자들이 무슨 논의를 하는지 알고싶어서 그들을 이해하고자 귀를 기울여보았다. 대척행성인들의 마음과 관련한 지구의 철학자들의 의견은 둘로 나누어졌는데, 로티는 이들을 각각 온건한(tender-minded) 사람들과 강경한(tough-minded) 사람이라고 부른다. 온건한 사람들은 그들이 아직 마음의 경지로 들어가지 못한 즉자적인 상태에 있다고 간주하거나(마음의 영역으로 들어가라고 소리치는 내부성이라는 마을의 사무소 직원), 또는 철학사적으로 헤라클레이토스가 이미 성취했으나 플라톤에 의해 잊혀진 생각, 다시 말해 마음은 이미 물질과 결합되어있고 이들을 분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생각이라는 것(플라톤이 우시아(=존재)를 이데아(=관념)에 동화시킴으로써 지구 서양인들의 의식에서 사라져버렸던 폴레모스(=변화, 물질)(주: 그리스 신화에서 전쟁의 신을 뜻하는 말로, 헤라클레이토스가 만물의 근본적인 법칙을 여기에 비유한다.)와 로고스(=불변, 정신, 이성)의 결합을 대척행성인들이 파악했음을 보여준다)을 대척행성인들이 이미 깨달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강경한 사람들은 그들에게 심적인 상태, 예를 들어 ‘아픔’이 과연 있을까를 물었다. 대척행성인들이 이야기하는 ‘아픔’은 언제나 심리-물리적 사실 – C-신경섬유의 자극 - 의 기술일 뿐이다. 이는 심적인 상태가 아니다. 하지만 인간은 심리-물리적 사실이 발생하면 ‘아픔’을 느낀다고 말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아픔’의 상태에 있다고 말할 때 인간이 보이는 행동과 아픔상태가 발생했을 때 대척행성인이 보이는 행동은 완전히 같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된다. “그들의 경험은 우리의 경험과 같은 현상적인 속성을 포함하고 있는가? 혹은 C-신경섬유의 자극은 고통스럽게만 느껴지는가? 혹은 그 자극은 똑같이 무시무시한 것이기는 하지만 어떤 다른 방식으로 느껴지는 것은 아닌가? 아니면 그 자극에는 아무런 느낌이 없는가?”

 

  또한 원느낌의 문제도 제기된다. 특정한 자극을 주면(“남색을 보여주면”) 그에 반응하는 특정한 신경적 상태(“C-692”)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과 대척행성인 모두에게 동일하다. 인간에게 남색을 보여주면, 그는 남색을 마음에 떠올리고 있다고 분명히 답할 것이다. 마음이 있는 인간에게 원느낌은 남색 하나이다. 그렇다면 대척행성인은 어떤가? 만약 그에게 마음이 있다고 한다면, 남색을 보여주었을 때 그는 남색을 표상하는가 아니면 C-692를 표상하는가? 둘 다인가 또는 어느 쪽도 아닌가? 하지만 로티에 따르면, 이런 실험들로는 그들이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에 관해 의미있는 답변을 얻을 수 없었다고 말한다. 원느낌이 남색이라면, 그들이 어떻게 남색을 보고 자신이 C-692의 상태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지의 과정(무의식적 추론?)이 명확하지 않다. 만약 C-692의 상태가 원느낌이라면, 그들은 남색을 보지 않고도 C-692의 상태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환각 같은 것들이 여기에 속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 스스로가 C-692의 상태에 있다(남색을 보고 있다)고 여긴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데, 이를 통해 그 상태에 있다는 것이 현상적 속성을 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이 정의하는 ‘현상적’이라는 말과는 같지 않은데, 인간에게 ‘현상적’이라는 말은 표상, 관념 등의 속성을 가리키는 말이지 신경적 상태의 속성을 가리키는 말은 아니기 때문이다.

 

  
  2. 현상적인 속성

 

  이 부분은 마음과 몸의 이원론을 옹호하는 크립키(주: 솔 크립키(1940~). 언어철학, 논리학에 큰 영향을 끼친 미국의 현대 철학자. 프린스턴대학 명예교수. 가능세계에 관한 양상논리학을 창시하고, 필연성 개념이 형이상학적이며 인식론과는 분리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펴 논리학과 철학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다.(위키피디아 요약))의 글로 시작된다. 그는 감각적인 인식의 경우, 감각을 일으키는 자극과, 그 자극을 수용할 수 있는 감각이라는 두 측면으로 나누어진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자극이 없어도 감각이 작동한다면(예를 들어 꿈을 꾸거나 물에 빠져 죽을 뻔 했을 때를 회상하는 등) 감각하는 주체는 그 자극이 있다고 여기게 되고, 반대로 자극이 있더라도 감각이 작동하지 않는다면(예를 들어 얼어붙은 손을 바늘로 찌른다면) 감각하는 주체는 그 자극을 없는 것으로 여긴다. 즉, 어떤 인식적인 조건을 충족시켰을 때에, 우리는 무언가를 느끼고 그것을 인식의 증거로 삼는다. 그런데 정신적인 현상(예를 들어 아픔)의 경우, 이런 인식적인 조건이 오로지 마음 안에서만 일어나기 때문에 그 이외의 다른 조건을 충족시킬 필요가 없다. 다시 말해, 아픔이 일어나기 위한 조건이 갖추어질 경우 바로 그는 아픔을 느끼며, 아픔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은 아픔이 일어나기 위한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은 경우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아픔은 외부의 환경에 대해서 독립적인 심적 상태이다.

 

  만약 이 논의를 따른다면, 대척행성인들은 아픔을 느낀다고 말할 수 있는가? 우리는 C-신경섬유가 자극받을 때 아프다고 말한다. 그들은 C-신경섬유가 자극받을 때 C-신경섬유가 자극받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와 대척행성인들이 C-신경섬유를 자극받을 때, 똑같은 것을 느끼는가? 같다면 왜 같은지, 또 다르다면 왜 다른지에 관한 해명이 필요하다.

 

  만약 이 둘이 같다고 하려면, 같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에 관한 정확한 정의가 필요하다고 로티는 주장한다. 대척행성인이 C-신경섬유에 관해서 계속 얘기하는 것이 아픔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과, 그렇기 때문에 대척행성인은 아픔에 관해서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미묘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단순히 C-신경섬유가 우리가 정의하는 아픔과 다르다고 하여도 그것을 아픔이 아니라고 단순하게 말할 수는 없다. 또한, 마음의 상태에 관한 기술은 다음과 같은 것을 가정하고 있다고 로티는 주장한다. "(1) 정신적인 것이 그 담지자에 의해서 확고부동하게 알려질 수 있다는 점은 그것이 정신적인 상태이기 위한 조건이다. (2) 우리는 이렇게 확고부동하게 알려질 수 있는 상태를 가지지 못하는 존재가 비물리적인 상태들(가령 믿음)을 문자 그대로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를 축약하자면, 확고부동한 것은 정신적인 것이 가지는 가장 기본적인 속성이다. 로티는 이것이 정신적인 것에 관한 데카르트식의 선입견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고 말한다. 만약 대척행성인들이 C-신경섬유의 상태를 확고부동하게 안다면, 그들에게 마음이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일까? 정신적인 것의 기준이 확고부동함인 한, “그들의 C-신경섬유가 자극받고 있다고 여겨진다는 보고를 할 때 그들은 어떤 느낌(마치 우리가 “아프다!”고 말할 때 보고하는 것과 동일한 느낌)을 보고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어떤 상태에서 뉴런이 촉발하는 어떤 소음을 내고 있을 뿐인가?”라는 질문에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다. 이 질문은 오히려, 우리가 아픔을 표현할 때 단지 뉴런을 보고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관한 반대되는 질문을 제기한다. 다시 말해, 대척행성인들은 왜 우리가 느낌과 마음이라고 부르는 이상한 것들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야 하는지 궁금해할 것이며, 또한

 

"“유물론자” 대척행성인들의 주장이 옳을 경우에 직면해야 할 대비를 해야 할 것이다. 즉 우리는 원느낌을 보고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단지 뉴런을 보고하고 있었을 뿐이다. 우리가 대용어구에 그렇게 오랫동안 매달려 있었다는 것은 우리 문화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일 뿐이다. 이는 우리가 지상에 관련된 많은 학문분야를 완성시키는 동안 천문학에는 등한시했으며, 천상에 대한 우리의 생각에는 여전히 프톨레마이오스 이전의 요소가 남이 있었던 것과도 같다."

 

  이 지점에서 어떤 사람들은 정신적인 것의 특징은 확고부동함이 아니라 불완전함이라는 반론을 편다. 이들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인과적으로 짜여져있는 신경과 감각체계는 잘못을 할 수가 없는데(즉 완전한데), 대상에 관한 인간의 표상은 언제나 불완전한 요소를 띄고 있다는 것이다. 유물론적인 입장을 따르면 이런 불완전한 표상에 대한 설명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표상은 신경과 감각체계가 아닌 다른 것, 즉 마음에 있는(정신적인) 것이다. “사물들이 단지 물질적인 체계 속에만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가능한가? 불완전한 이해라는 행위가 존재론적으로 중립적인 것으로 보일 수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가 마음에 속하는 것(정신적인 것)과 몸에 속하는 것을 가리는 기준은 불완전함과 완전함 뿐인가? 따라서 이는 적당하지 못하다.

 

  정신적인 것에 관해 ‘확고부동함’이라는 정의를 내렸기 때문에, 우리는 현상적인 속성의 정의 또한 ‘확고부동함’과 연관해서 내려야 한다. 그 정의는 “(P) 우리가 우리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확고부동한 보고를 할 때마다, 우리가 그러한 보고를 하게 되는 어떤 속성이 있어야 한다.”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살펴볼 때, 우리는 정신적인 것에 관해 정말 그 ‘확고부동’함을 주장할 수 있는가? “별과 같은 것을 잘못 기술한다는 것과 아픔과 같은 것을 잘못 기술한다는 것 사이에는 정확히 어떤 차이가 있는가? 왜 전자는 분명히 가능한 것처럼 보이지만, 후자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것처럼 보이는가?” 이는 데카르트와 같은 존재론적 이원론에 기반한 우리의 직관에서 이끌어낼 수 있는 결론이다. 하지만 이는 대척행성인들에게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생각이며 논의이다. 마음이 꼭 있어야 할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이것이 대척행성인들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의 핵심이다. 즉, 인간의 내면에 우리가 “내면”이라고 부를만한 정신적인 것의 영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구인 유물론자들의 경우에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들의 논증을 살펴보았을 때도, 정신적인 것을 주장하는 이원론자들의 ‘확고부동함’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인과적으로 외부의 주어진 것들을 잘 반영할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있다. 그래서 그들은 불완전한 이해와 인식에 관해 논한다. 하지만 불완전한 인식이 드러나는 순간은 인과적으로 확립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과적으로 그런 것은 그저 그런 것일 뿐, 불완전하다는 말을 붙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완전함의 증거는 심리-물리적인 것이 아닌 정신적인 것이 될테고, 그렇다면 다시 마음에 관해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에 대해, 대척행성인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할 것이라고 로티는 서술하고 있다.

 

"그들은 “이해작용”, “인지상태”, “느낌”과 같은 지구인들의 어휘 전체는 언어가 떠안은 불행한 일로 생각한다. (중략) 대척행성의 유물론자들은 “마음과 물질”이라는 우리의 개념이 언어가 잘못 발전했음을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대척행성의 부수현상론자들은 “C-신경섬유의 보고뿐만 아니라 아픔의 보고를 산출할 때, 지구인들의 언어중추에는 어떤 신경 입력이 가해지는가?”라는 질문에 당혹스러워하고 있다. 대척행성인들에게 느낌이 있다고 생각하는 지구의 철학자들은 대척행성인의 언어가 “실재에 대해서 충전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대척행성인들에게 느낌이 없다고 생각하는 지구의 철학자들은 언어발전 이론에 의존하고 있다. 그 이론에 따르면 첫 번째로 명명된 사물들은 “우리에게 더 잘 알려지는”- 즉 원느낌 - 것들이므로 느낌에 대한 이름이 없다는 것은 느낌이 없다는 것을 함축한다."

 

 

3. 확고부동성과 원느낌

 

  로티에 따르면, 어떤 현상을 기술하는 단어들의 의미가 확정되지 않았다고 생각이 될 때, 우리는 언어분석을 시작한다. 그러나 그 언어분석이 한계에 다다르고 더 이상 각 분석 간에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 봉착했을 때, 그 사이를 중재하는 것은 흔히 철학의 역할로 간주된다. 철학은 그 단어들이 쓰이는 맥락-체계를 재구성하여 어느 한 쪽을 제거하거나, (더 많은 사례로는) 이 둘이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는 정도의 체계를 구축하여 각 분석 간의 분쟁을 화해하고 조정한다. 철학사 속에서 이 화해의 매개가 된 단어들은 대개 “세계”, “물자체”, “감각될 수 있는 다양한 것”, “자극” 등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런 단어들이 실제로 어떤 대상을 지칭하고 있는가 질문을 던진다면, 답을 하기는 매우 힘들어진다. 이들은 “냉정하게 중립을 지킨다는 것 말고는 아무런 흥미로운 특징도 없는 존재자들을 명명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용어이기 때문이다.” 어떤 심리철학자들은 이런 전략을 사용해서,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의 구분을 다른 대상의 두 측면으로 여기려고 한다. 이같은 것에 관해 로티는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때때로 우리는 이 실재가 직관된다거나(베르그송) 혹은 감각의 기초 내용과 동일하다는(러셀, 에이어) 등의 이야기를 들어왔다. 그러나 때때로 그것은 단지 인식론적 회의주의를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제안되었을 뿐이라고도 한다(제임스, 듀이). 어떤 경우에서도 “우리가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있다”거나 혹은 이성(즉 철학적 딜레마를 피해야 하는 필요성)이 그것을 요청한다는 등의 주장을 제외하고는 우리는 아무 것도 들은 바가 없다. 중립적 일원론자들은 마치 과학자들이 요소들 속에서 분자들을 그리고 분자들 속에서 원자들을…… 등을 찾아낸 것과 마찬가지로, 철학은 기반이 되는 토대들을 발견하거나 혹은 찾아내야만 한다고 즐겨 제안해왔다. 그러나 사실 정신적인 것도 아니고 물질적인 것도 아닌 “중성적인 구성성분”은 그것이 가진 고유한 힘이나 속성이 밝혀지지 않은 채, 다만 제안되고 잊혀질(혹은 똑같은 내용이 되겠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정보의 역할이 부여될) 뿐이었다."

 

  이 지점에서 대척행성인들에 관한 문제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그 문제란, "① 원느낌이 확고부동하게 알려질 수 있다는 점은 원느낌에 대해서 본질적이다. ② 대척행성인들 스스로가 확고부동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없다. 에서 ③ 대척행성인들은 원느낌을 가지지 않는다. ④ 대척행성인들은 자신들이 가진 확고부동한 지식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는 결론 둘 중에 하나가 도출된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③은 쉽게 거부된다. 원느낌을 가지는 우리 인간들과 원느낌에 대한 모든 상황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척행성인들은 뭔가를 ‘모르고 있다’는 ④를 채용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들은 또한 자신들의 언어인 C-신경섬유의 상태를 우리의 언어인 ‘아프다’로 바꾸어 말하도록 훈련받을 수 있으므로, 만약 그럴 경우 지구인과 대척행성인 사이의 외형적인 차이는 거의 없어지게 된다. 만약 지구인이 대척행성인의 ‘아프다’가 실제로는 ‘아프다’가 아니라는 것을 지적한다면, 그것은 “특권적인 접근”을 주장하는 것이다. 대척행성인은 모른다고 하는 것을 인간은 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상황은 이상하다. 대척행성인은, 한편으로는 C-신경섬유가 자극을 받았기 때문에 아프다고 한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C-신경섬유가 자극을 받지 않는다면 ‘아픔’은 결코 생겨나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 지구인이 그것은 ‘아픔’이 아니라고 주장할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그들은 C-신경섬유가 자극을 받았을 때에만 ‘아프다’라고 말하도록 훈련받았는데, 그렇다면 ‘아픔’에 대해서 그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전부이고, 그것을 벗어나서 말할 수는 없다.

  여기에서 지구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아픔을 느끼다’와 ‘아프다’의 차이인 것으로 보인다. 앞쪽은 ‘아픔’이라는 정신적인 것을 내가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며, 뒤쪽은 마치 대척행성인들처럼 내가 이러저러한 상태에 있다는 의미이다. 앞쪽은 정신적인 것의 존재를 가정해야 가능한 서술이지만, 뒤쪽은 그렇지 않다. 그리고 고전적인 철학적 전통에 따라, ‘아픔을 느끼는 것’은 인식적 주체에게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지만, 반대로 ‘아프다’는 것은 종종 불확실하다.

 

  하지만 우리가 ‘아픔을 느끼는’ 상태에 있는지, 또는 ‘아픈’ 상태에 있는지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은, 적어도 마음의 존재를 상정하는 철학적 전통을 벗어난다면, 명확하지 않다. 로티에 다르면, 이 둘을 구분할 수 있으려면, 어떤 사람이 어떤 것에 관해 보고하는 것은 상태에 관한 기술이 아니라 인식주체와 직접 대면하는 원느낌에 관한 보고라는 생각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것은 로티가 말하는 ‘거울의 이미지’에 고스란히 반영되어있는 생각이기도 하다. 만약 우리가 이런 철학적 전통에 따라서 대척행성인에 관해 판단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마음이 있는 존재로서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이들에게 마음이 있다고 우리가 판단하는 근거들은 그들의 행동과 보고이므로,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마음 역시 행동주의적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다는 역설적인 결론에 이른다. 로티는 이를 통해, 대척행성인들에게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 우리가 판단할 수 없다고 생각하거나, 더 나아가서 그들에게 정신이 없다 – 그들에게 정신이 있는지 없는지 논의하는 자체가 무의미하다 – 고 주장하는 듯 하다.

 

  어쨌든 로티는 우리가 이런 거울의 이미지를 인정할 경우, 우리에게 주어지는 선택지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첫째는 “이러저러하게 보인다는 언급을 포함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모든 존재는 우리처럼 거울 같은 본질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행동주의자이다. 둘째는 만약 그런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의 마음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솔직하다고 생각하는 “피론 식의 회의주의자”이다. 셋째는 우리가 그런 거울의 이미지 같은 것을 본질로서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하는 유물론자이다.

 

  그러나 로티가 최종적으로 선택하고자 하는 입장은 거울의 이미지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다. 확고부동, 명석판명, 의심불가능 등의 형용사를 유발하는 거울의 이미지 자체가 데카르트 이래로 철학을 지배해왔던 특정한 언어놀이의 맥락으로부터 파생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의 진짜 문제 – 즉 보편적이고 일반적이며 영구적인 문제라고 생각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저런 형용사들은 정신과 인식주체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 형용사가 아니라, 그 말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회적 맥락과 그 말들 사이의 관계에 의해 의미가 확정되는 형용사들이다. 이런 로티의 논의를 따라가면, 원느낌과 행위 사이의 문제와 마음과 몸 사이의 문제는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 맥락에 따라 함께 제기되었다는 결론에 이른다.

 


4. 행동주의

 

  그렇다면 로티는 지금까지 제기됐던 심리철학의 대표적인 경향들이 어떻게 거울의 이미지 아래 묶여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며, 또 거울의 이미지를 거부하는 자신의 입장이 그 경향들과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 설명해야 한다. 그가 자신의 입장과 비교하는 첫 경향은 행동주의이다. 그는 행동주의를 다음과 같아 정리한다.

 

  행동주의는 두 가지 동기와 의도에서 시작되었다. 첫째, 마음 개념을 거부하기 위해서. 둘째, 타인의 성향과 나의 성향이 동일하다는 것을 확증하기 위해서. “느낌에 대한 보고는 비물리적인 존재자를 지시한다고 여겨져서는 안되며, 아마도 그것은 몸부림 또는 몸부림치려는 성향 이외 그 어떠한 존재자도 지시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 행동주의의 기본적인 성향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세 가지 전형적인 반론에 부딪힌다. 첫째, 어떤 성향을 나타내는 몸부림의 종류가 무한하다. 어떤 성향을 가진 사람이 그 무한한 것들 가운데 어떤 행동을 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둘째, 그러므로 성향과 행동이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이를 결정할 내적 상태를 가정해야만 그 행동의 필연성이 설명된다. 셋째, 이는 마음 개념을 거부하려는 의도적인 움직임 자체에서 비롯한 것이며, 그 자체로 논증된 것이 결코 아니다.

 

  물론 행동주의는 대척행성인들의 태도를 설명할 수 있는 좋은 이론이라는 점에서 좋으며, 또한 마음과 몸의 문제가 영구적인 철학적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효과적인 시도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러나 로티에 따르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행동주의는 그 방향이 잘못되었다. 행동주의자 라일(주: 길버트 라일(1900~1976). 철학적(논리적) 행동주의를 정립한 영국의 철학자.)은 “어떤 형태의 행동이 원느낌을 귀속시키는 데 필요한 필요충분조건을 구성하며 이는 “우리의 언어”에 관한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행동과 “우리의 언어”가 관계가 있다고 할 경우, “우리의 언어”는 마음을 독립적인 실체라고 인정하는 것을 뒷받침하기 때문에 우리의 행동 역시 마음에서 비롯한 것으로 설명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는 것이다. 원느낌에 관한 언어 - ‘~인 것처럼 보인다’ - 를 우리가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 원느낌의 존재를 확인시켜준다면, 그런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마음 즉 정신적인 것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이는 대척행성인에게 마음이 있다는 결론으로도 연결된다. 그러나 이는 행동주의자들의 의도와 목표와는 모순된다.

 

  라일은 이런 귀결에 다다르는 것을 거부하기 위해 확고부동, 의심불가능한 발견이라는 것을 거부해야만 했으나, 그것은 마음의 상태가 행동으로 환원된다는 ‘확고부동한’ 믿음(“내가 나 자신에 대해서 발견할 수 있는 것들은 내가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발견할 수 있는 것과 똑같으며, 그러한 것들을 발견하는 방법 역시 완전히 동일하다”)과 모순을 일으켰다. 따라서 그는 형이상학적으로 마음과 몸을 독립적으로 보거나, 혹은 마음이 몸으로 환원된다는 두 의견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이런 라일의 입장을 로티는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 “행동에는 성향이 있다는 것과 내적인 상태가 있다는 것 사이에 “필연적인 연관”이 있음을 보여줄 수 있다면, 사실상 내적인 상태라는 것은 없음을 보여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것은 논리적 비약이다. 예를 들어, 내가 물을 마시려는 성향과 목마른 상태 사이에 필연적인 연관이 있다고 해서, 내가 물을 마시려고 할 때 목마른 상태 자체가 없는 것은 아니다.

 

  로티의 분석에 따르면 라일은 결국 데카르트의 이원론적인 성향을 배태한 더욱 심층적인 이미지, 즉 거울의 이미지를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다. 단지 확고부동하게 인식되는 대상이 무엇인지만 다를 뿐이다. 데카르트의 경우에는 정신적인 것이며, 라일의 경우에는 행동이다. “데카르트주의자들은 정신적인 상태만이 유일하게 의식에 즉각적으로 주어지기에 자연적으로 적합한 존재자라고 생각했다. 행동주의자들은 인식론적으로 최선을 다한다고 해도 의식에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유일한 종류의 존재자는 물리적 대상의 상태라고 생각했다.” 이들 양쪽은 모두 다 플라톤의 원리, “가장 잘 알려지는 것이 가장 실재적인 것이라는” 전제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셈이다.

 

  이런 거울의 이미지와 대척행성인의 모습을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은 차이가 드러난다. 거울의 이미지에서 잘 알려지는 것이란, 특정한 성질을 가진 존재자들에 접근하는 것이다. 로티는 이것을 셀라스의 말을 인용해 “소여의 신화(myth of the given)”라고 부른다.(주: 윌프리드 셀라스(1912~1989). 20세기 중반 미국의 철학자. 소여의 신화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전통적인 인식론은 지식이 위계적으로 구조화되어있다고 가정했다. 여러 추론적 방법들에 의해 우리의 지식이 놓일 곳으로 만들어진 견고한 토대로서 제공되는 실재에 직접 접촉하는 어떤 인지적인 상태들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믿어졌다. 지식에 관한 이런 토대주의적인 그림은 지식에 관해 두 가지 필수조건을 부과했다. (1) 모든 다른 인지적인 상태들에 관해 독립적인 어떤 적극적인 인식적 지위를 가진다는 의미에서 기본적인 인지적 상태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이것은 인식적 독립성 필수조건(Epistemic Independency Requirement)이라 불린다. 적극적인 인식적 지위들 중에는 지식이 되는 것, 정당화되는 것, 또는 단지 그에 걸맞는 어떤 가정들을 가지는 것이 있다.(기본적인 인지들은 반드시 논의의 여지가 없는 인식적 보증을 소유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일반적이다 – 확실성, 무교정성, 또는 심지어 무오류성 – 그러나 이들은 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인식적 관계들은 연역적인 그리고 귀납적인 함축을 포함한다. (2) 모든 기본적이지 않은 인지적인 상태는 직간접적으로 기본적인 인지적 상태들을 낳는 인식적인 관계들 때문에만 적극적인 인식적 지위를 소유할 수 있다. 따라서 그 기본적인 상태들은 인식적 유효 필수조건(Epistemic Efficacy Requirement)이라고 불리는, 우리의 지식이 놓이는 자리를 위한 궁극적인 지원을 반드시 제공해야만 한다. 이러한 기본적이고 독립적이며 유효한 인지적인 상태들은 주어진 것이 될 것이다(would be the given). 많은 철학자들은 만약 전적으로 지식이 되는 그런 것이 있다면, 이러한 주어진 것이 있어야만 한다고 믿어왔다. (중략)  이런 주어진 것은 신화라는 셀라스의 논증은 다음과 같다.  (1) 인지적인 상태는 그것이 어떤 다른 인지적인 상태로부터 추론되거나 추론될 수 있음에 대해 독립적인 인식적 지위를 소유하는 경우에 인식적으로 독립적이다. [인식적 독립의 정의]  (2) 인지적인 상태는 그러한 다른 상태들의 인식적인 지위가 그것의 인식적인 지위로부터 (형식적으로 또는 실질적으로) 타당하게 추론될 수 있는 경우 인식적으로 유효하다 - 즉 다른 인지적인 상태들을 인식적으로 지지해줄 능력이 있다 [인식적 유효의 정의]  (3) 주어진 것이라는 교설(doctrine)은 p에 관한 모든 경험적인 지식이 어떤 기본적인(다시 말해 인식적으로 독립적인) 지식(p의 측면에서 인식적으로 유효한)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주어진 것의 교설의 정의]  (4) 추론적 관계는 언제나 명제적인 형식을 가진 항목들 사이에 존재한다. [추론의 본성에 의하여]  (5) 그러므로, 비명제적 항목들(감각자료같은 것들)은 인식적으로 무효하며 또한 주어진 것으로서 지지될 수 없다. [2,4에서]  (6) 추론적으로 획득되지 않으면, 명제적으로 구조화된 정신적 상태는 인식적으로 독립적이다. [1에서]  (7) 비추론적으로 획득된 것에 관한 다양한 방식들의 설명, 즉 명제적으로 구조화된 인지적인 상태들은 그들의 인식적인 지위들이, 특수하고 일반적인 경험적 참들 모두를 포함하는 다른 경험적인 지식에 관해 아는 주체에 의한 소유를 가정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감각 자료와 외양에 관한 진술들에 관한 분석과 인식적 권위에 관한 분석으로부터]  (8) 이 가정은 인식적이며 그러므로 추론적인 관계이다.  (9) 다른 경험적 지식에 관해 아는 주체에 의한 소유가 가정된 비추론적으로 획득된 경험적인 지식은 인식적으로 독립적이지 않다. [1,7,8에서]  (10) 모든 경험적, 명제적인 인지는 추론적으로 또는 비추론적 둘 중에 하나로 획득된다.  (11) 그러므로, 명제적으로 구조화된 인지는, 추론적으로 획득되었든 비추론적으로 획득되었든, 인식적으로 독립적일 수 없으며 또한 주어진 것으로서 지지할 수 없다. [6.9.10, 구성적 딜레마]  (12) 모든 인지는 명제적으로 구조화되거나 그렇지 않다.  (13) 그러므로, 경험적 지식에 관한 어떤 항목도 주어진 것에 관한 기능을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을 믿는 것은 합리적이다. [5,11,12, 구성적 딜레마]” (스탠퍼드 철학백과 Wilfred Sellars 항목, http://plato.stanford.edu/)) 그러나 이런 존재자들에 접근하는 것 말고도 우리에게 잘 알려지는 것들은 많다. 그것은 사회적 맥락에 의해서 알려지는 것들이다. 이른바, “모든 대척행성인들은 자신들의 신경상태에 대해서 친숙하며 모든 지구인들은 자신들의 원느낌에 대해서 친숙하다.” 로티는, 이렇게 사회적인 맥락을 벗어나서 확고부동하게 알려지는 것(즉 친숙한 것)을 규명하려는 시도는 무의미하며, 어떤 문화에서 확고부동한 것은 다른 문화에서는 왜 그것이 그렇게 이해되는지 의아한 대상이 될 뿐일 것이라고 말한다.

 


5. 타인의 정신에 대한 회의주의

 

  거울의 이미지가 반영되어있는 심리철학의 다른 한 사조는 자신의 마음에 관해서는 답을 유보하더라도 적어도 다른 사람의 마음에 관해서는 모른다는 이른바 ‘회의주의’이다. 이들은 어떤 존재자들 사이에 존재의 서열이나 우위를 가정하지 않으므로, 정신적인 것이라고 불리는 것은 이 세계의 다른 존재자들과 다를 것이 없는 ‘그저 존재하는 것’일 뿐이다. 그것은 아직 어떤 속성인지 파악되지 않고, 후보로서만 머물고 있다. 그러나 회의주의에 ‘정확한 표상적 반영’을 핵심으로 하는 거울의 이미지가 뒤섞일 경우, 이것은 "① 우리는 우리가 아는 다른 어떤 것보다 우리의 마음을 잘 알고 있다. ② 우리가 다른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고 해도 우리 마음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알 수 있다. ③ 어떤 것이 정신을 가졌는가를 안다는 것은 그것이 마음이 알고 있는 대로 그 마음을 알고 있는가의 문제이다." 가운데서 ②와 ③을 인정하는 결과를 낳는다. 우리가 마음을 직접적으로 대면한다는 거울의 이미지는 ①을 ②로 만드는 전제가 된다. 또한 ③처럼, 우리는 다른 이가 마음을 가졌는지 알기 위해서는, 그 다른 이가 ‘내겐 마음(정신적인 것)이 있다.’ 고 말할 때 그의 마음과 그 사이의 관계에 관해 알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이에 관해 알 수 있는 것은 행동적이거나 사회적인 것들(즉 정신적이지 않은 것들) 뿐이다. 따라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그림은 다른 이가 마음과 몸이 함께 있는 그림이 아니라, 우리가 다른 이에 관한 것이라고 부르는 자료들이 우리의 마음 주변을 떠돌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신적인 것, 내 마음의 주변을 떠돌고 있는 것에 관해 상상할 수 있게 된다. 이 경우, “여기에서도 인식론이 먼저 나서서 우리를 형이상학으로 들어가도록 유인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우리의 과제는 회의주의자의 건전함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거울의 이미지를 버릴 수 있는 방법을 탐색하는 것으로 바뀐다. 이를 위해 로티는 사적인 것과 직접적인 것이라는 두 가지 속성에 관한 비트겐슈타인의 논박을 검토한다. 비트겐슈타인은 두 속성 모두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정신적인 것(즉 마음)은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반면, 회의주의자들은 이 두 속성 모두가 가능하기 때문에 한 사람은 자신의 마음 이외에 다른 이의 마음에 접근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두 가지는 구별해서 생각해야 하는 것으로서, (앞장에서 살폈듯이) 특권적인 접근(즉 아주 잘 아는 것)을 할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꼭 정신적인 것이어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로티는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고통에 대해서 특권적인 접근을 할 수 있다.” 와 “우리는 순전히 정신적 상태의 감각된 특별한 성질만을 통해서 우리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안다.” 를 구분한다면, 우리는 역설을 피할 수 있으며 감각을 탁자와 같은 어떤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전자의 주장은 단지 누군가 고통스러워하고 있는가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그에게 물어보는 것 이상의 방법이 없으며, 또한 어떤 경우에도 그 자신의 진지한 보고를 기각해버릴 수 없다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후자는 이러한 특권이 가능한 것은 그 자신의 정신적 상태가 가진 “현상학적인 속성”을 그가 내성을 통해 알아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면서 자신의 입장과 거울의 이미지를 받아들인 입장의 차이를 요약하고 있다. 다시 말해, 무언가를 ‘사적이고 직접적으로’ 알기 위해서 꼭 그 대상이 ‘정신적인 것’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로티가 볼 때, 비트겐슈타인은, 내가 ‘아픈’ 것과 다른 이가 ‘아픈’ 것이 각각 다른 내적 상태를 가리키고 있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내적 상태가 어떤지에 관한 판단은 유보한 채 언어의 동일성 - 여기에서는 ‘아픔’ - 으로 정신적인 것을 환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사람들이 다양한 내적인 상태를 가리키기 위한 도구로서 언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그의 기본적인 견해 때문이다. 마음이 없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견해는 이상하게 여겨질 것이라고 로티는 말한다. 그들에게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사적이라든가 직접적이라든가 하는 형용사들이 이해되기 어렵다. 이들의 입장에서 인간들이 범하고 있는 오류는, 내가 아픈 것에 관해 ‘나만’ 알고 있다고 하는 것이 아픔에 관해 내가 ‘가장 잘’ 안다는 것을 함축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게다가, 대척행성인들의 견해에서는, ‘나만’ 안다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 명제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조차 파악하기 어렵다.

 

  마지막으로 로티는 이런 회의주의는 실생활에서 전혀 쓸모가 없으며, 유용하지도 않기 때문에 무효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마치 “종교가 제공하는 완전함에 대한 충고가 주중에는 주의를 끌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철학적(그리고 시적) 전통을 산출하는 이미지들은 학문 이외의 영역에서는 주목받지 못”하는 것과 같다.

 

6. 심신동일성이 없는 유물론

 

  흔히 유물론은 심신동일론을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일종의 환원론으로서, 정신적인 상태 모두가 심리-물리적인 상태로 기술 가능하며 또한 정신적인 상태 모두가 ‘사실은’ 심리-물리적인 상태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입장에 따르면 원느낌이나 감각 등도 심리-물리적인 상태이다. 지금은 사람들에게 이 상태가 완벽하게 밝혀지지 않았기에 우리가 알고 있는대로 정신적인 상태를 지칭하는 단어들을 동원해서 이를 설명한다. 그러나 만약 신경에 관한 우리의 과학적인 연구가 더 발달할 경우, 이들은 우리의 정신적인 상태 전부를 심리-물리적인 상태로 - 마치 대척행성인들의 언어처럼 -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입장을 취한다. 이런 입장에서 행동주의는 유물론이라는 큰 흐름 안에 있는 한 지류가 된다.

 

  암스트롱과 스마트의 주제중립적(주: 주제중립적이라는 말은 길버트 라일의 용어를 스마트가 차용한 것이다. 이는 논증이나 대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주제와 상관없는 단어, 즉 다시 말해 특별한 뜻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에는 ‘만약’, ‘또는’, ‘또한’ 등의 논리적 연결어들이 포함된다.) 분석은, 정신적 상태와 물리적 상태 간의 구분이 무의미함을 지적하고자 하는 유물론자들의 시도이다. 즉, ‘어떤 행동이나 행동 성향을 일으키는 모든 것’은 구분불가능하다는 것, 더 정확히 말해서 ‘~인 모든 것’은 주제중립적인 표현이기 때문에 특정한 의미가 있지 않다는 것이 주제중립적 분석의 결론이다. 그러나 우리의 언어와 전통은 ‘~를 일으키는 정신적 상태’와 ‘~를 일으키는 물리적 상태’가 구분된다는 직관을 포함하고 있고, 그러므로 이들의 주제중립적인 분석은 유물론과 심신평행론 사이에 어떤 것을 선택하는 것이 더 나은지에 관한 기준을 제공해주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다. 나아가서 ““정신”에 대한 우리의 개념이 주제중립적인 분석이 말하는 바와 같다면 심신 문제의 존재를 설명하기가 매우 어려워진다.” 다시 말해 주제중립적 설명을 채용하는 유물론은 마음은 없고 몸만 있다고 설명하는 것을 목표로 삼으면서 동시에 마음과 몸 둘 다 무의미하다는 논증을 펴고 있는 것이다.

 

  로티는 자신이 인용하고 있는 여러 학자들의 주장 사이의 차이를 드러내기 위해 다음과 같은 이원론 논증을 제시한다.

 

"① “나는 고통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있다”는 형식의 몇몇 언명은 참이다. ② 고통의 감각은 정신적 상태이다. ③ 신경 과정은 물리적 상태이다. ④ “정신적”과 “물리적”은 양립불가능한 술어이다. ⑤ 고통의 어떤 감각도 신경적 사건이 아니다. ⑥ 몇몇 비물리적 사건이 있다.

 

라일주의자들과 몇몇 비트겐슈타인주의자들은 정신성이 특권적 접근에의 접근가능성에 있다고 생각하며, 스트로슨의 소위 “사밀성에의 적의”라는 것에 탐닉하기 때문에 ②를 부정한다. 스마트나 암스트롱같은 “환원적” 유물론자들은 정신주의적 용에 대한 “주제중립적” 분석을 제시하면서 ④에 도전한다. 파이어아벤트나 콰인 같은 “제거적” 유물론자들은 ①을 부정한다."

 

  이 가운데 로티가 지지하는 입장은 가장 마지막의 “제거적” 유물론이다. 제거적 유물론은 인간에게 정신적인 것, 즉 “감각”은 없다고 말하는 주장이다. 로티에 따르면 제거적 입장은 형이상학을 하지 않으면서도 일원론적일 수 있으며, 또한 환원적 입장을 포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또한 “감각”은 없다고 말하지만, 사람들이 “감각이라고 부르는 것”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옹호한다. 정신적인 것에 관한 설명은 참으로 ‘간주되는’ 것들이며, 이는 우리의 입장에서 대척행성인을 이해할 수 있게, 또한 대척행성인들이 우리를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입장이 된다. 대척행성인들에게는 우리가 정신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들이 있을 수 있지만, 이들이 ‘실제로’ 있다고 주장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로티가 더욱 지지하고 싶어하는 입장은 ‘심신동일성 문제 자체가 특수한 맥락에서부터 도출되는 문제이다.’ 라는 것으로 보인다. 마음과 몸 문제에 관한 다양한 입장, 특히 일원론적인 입장의 여러 갈래는 사실 대척행성인을 인간중심적으로 해석하려고 드는 지구인들의 어색한 시도에 불과하다. 우리는 이 문제적 맥락을 벗어나서, “유물론자는 대척행성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형이상학을 동원하여 다루어서는 안되며, 설령 그렇게 한다고 해도 “우리가 사는 동안 내내 대척행성인의 언어를 말했다고 해도 예측력, 설명력 혹은 기술력을 전혀 잃어버리지 않았을 것이다”는 식의 주장에만 국한시켜야 한다.”

 

  우리에게 있는 심신동일성의 문제가 대척행성인에게 없는 이유는, 우리가 철학적인 전통 속에서 ‘존재론적인 지위’에 관해 우리가 관심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며, 반면 대척행성인에게는 그러한 전통이 없었기 때문이다. ““존재론적인 지위”라는 개념에 많은 관심을 가진 철학자가 아니라면, 확고부동하게 보고될 수 있는 고통이 “정말로” 고통인지 아니면 자극받은 C-신경섬유인지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없다. 이른바 정신적인 것이란 무언가에 관해 우리의 언어가 표현하는 방식이며, 대척행성인은 대척행성인의 방식이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 본 바에 따르면 정신적인 것과 관련된 문제는 우리의 언어 속에서만 특별하게 드러난다.

 

  우리의 언어에서 이러한 문제가 드러나는 궁극적인 이유, 다시 말해 심신문제가 우리의 언어에서 생겨나는 이유 혹은 우리가 각각의 방식들이 표현하는 공통적인 대상(즉 정신적인 것)이 있다고 가정하는 문제가 생겨나는 이유는, 로티가 보기에 우리가 거울의 이미지를 모든 경우에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로티의 결정적인 말을 직접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다.

 

"대립하고 있는 이러한 개념들(물질/정신, 과학/내면)은 지구의 17세기로부터 물려받은 한 무더기의 이미지가 없다면 전혀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기계는 사실은 아픔을 느끼지 않으며 매우 끔찍하게도 단지 그렇게 보일 뿐이다.” 라고 말한다고 해도, 직업상 이러한 이미지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철학자들을 제외한 누구도 화를 내거나 질색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가능한 경험적인 발견과 문화발전을 별다른 부담 없이 분류할 수 있는 영속적인 범주구조를 철학이 제공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우리는 “정신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정신의 본성에 대해서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가?”, “‘원느낌’이라고 부르는 것은 없다고 말하는 대척행성인들이 옳은가?” 등의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을 하게 된다."

 

"이러한 소위 존재론적 범주는 단지 여러 다양한 역사적인 원천에서 생긴 이질적인 개념들을 한데 묶는 방식일 뿐이다. 이는 데카르트 자신의 의도에서 볼 때 매우 용이한 방식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의 의도와 우리의 의도는 다르다. 철학자들은 자신의 인공적인 복합물을 마치 이미 존재하고 있는 어떤 것들을 발견한 것이라고 - “직관적” 혹은 “개념적” 혹은 “범주적” 등이 과학과 철학의 영속적인 매개변수를 결정하기 때문에 그것을 발견이라고 - 생각해서는 안된다."

 

 

7. 인식론과 “심리철학”

 

  마음과 몸의 관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이후이다. 우리는 철학의 역사를 통해서, 그 이전에는 이러한 문제가 아예 제기되지 않았거나 다른 방식으로 제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더 주목해야 할 것은, 마음이 독립적인 (연구) 영역으로 대두되면서, 이 마음이 담당하고 있다고 간주되는 인식의 문제 역시 제기되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이 시기의 철학자들은 마음의 인과적 작용을 잘 밝힌다면, 우리의 인식에 대해서도 잘 평가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들에게 마음의 인식적 작용이란, 다름아닌 ‘거울의 이미지’를 통해서 대상을(또는 관념을) 인식주체가 얼마나 잘 반영하고 알고 있느냐 하는 문제로 귀결되었다. 더욱 큰 문제는 후대의 철학자들이 이것을 당시의 철학적 맥락에서 제기된 문제가 아니라, 보편적인 그 무엇에 관한 문제로서 생각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가 도출된다. 즉, 마음 또는 정신적인 것 없이도 우리는 인식론적인 입장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로티는 “이 책의 제2부에서는 이성에 대한 문제의 근대판 - 즉, “인식론”이라고 불리는 학문영역이 관심을 기울였던 정확한 표상의 가능성 혹은 범위에 대한 문제가 있다는 생각 - 을 해소하려고 시도할 것”이며, 또한 “인간의 지식을 자연의 거울 속에 표상된 것의 집합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고, 우리의 거울 같은 본질이라는 개념 없이도 잘해나갈 수 있다는 제1부의 주장을 강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이런 마음의 개념은 인간의 도덕적 지위를 정당화하는 데 동원되는 개념이기도 하다. 따라서 ‘거울의 이미지’에 따르는 마음 개념을 비판하는 일은 인간의 도덕적 지위에 관한 전통적인 생각에 대한 공격이다. 이를 통해 로티는 앞으로 “개인이 어떤 존재자이며, 어떤 “객관적인 기준” - 예를 들면 거울 같은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식의 - 을 근거로 하여 도덕적 존엄성을 설명하려고 했던 매우 철학적인 기획이 과학과 윤리학을 혼동하고 있음을 밝히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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