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론 연구 최종과제. 빌헬름 바이셰델, 『철학자들의 신』3장 요약 및 보충.>

 

   철학적 신학으로서의 중세철학

 

서양의 중세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듯이 기독교가 유럽 지역에 살던 사람들의 정신적 세계를 지배하던 시기였다. 따라서 기독교의 신은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개념이 되었다. 기독교의 체계에서 진리는 신의 말씀, 즉 성서를 통해 계시라는 형태로 선포된다. 이 사실은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 부정할 수 없는 절대성을 가지는 명백한 사실이다. 또한 이 사실을 자신의 믿음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로 받아들인다는 것이 기독교의 근본적인 내용이다.

그러나 신의 말씀을 진리로서 수용한다고 하면,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의 능력이다. 기독교의 교리가 체계적으로 정립되기 시작한 교부시대 이래로 성서-계시-신앙으로 이어지는 신에 대한 접근법은, 인간에게 고유하다고 여겨지는 진리에 대한 경험-지식-이해로 이어지는 접근법, 즉 이성과 충돌을 일으켰다. 기독교도들에게 진리는 이미 계시와 성서를 통해 주어졌다. 그런데 한편에는 이성은 진리를 탐구하고 또한 진리에 도달하는 인간의 능력이라고 주장되어온 또 다른 전통이 있다. 그럼에도 기독교의 입장에서 보기에 이성은 분명히 인간의 내부에 국한된 능력이고, 따라서 이성을 통해 계시적인 진리에 도달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것은 중세의 거의 모든 신학자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견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이성이 주어져있다면, 그것은 신이 인간을 만들 때 기획한 하나님의 작품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이성은 그것이 생기게 된 원인 또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럴듯하다. 신은 자신의 모상으로서 인간을 만들었으며, 또한 이 세계의 모든 것을 필연적으로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왜 피조물로서의 인간에게 주어졌는가?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며, 또 범위, 대상, 능력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중세의 기독교 철학자들은 여기에 대해 답을 내놓아야했다.

이성과 신앙의 관계를 본격적으로 논한다는 것은, 그 문제에 접근할 수 있는 많은 방법 그리고 그 문제에 관한 다양한 시각이 등장한다는 점을 암시한다. 특히 방법으로서 주목할만한 것은, ‘신의 존재에 대한 논증적 증명이다. 이것은 신앙와 이성의 영역에 동시에 걸쳐진 과제로서 중세의 철학자들 사이에서 가장 큰 화두였다. 이 증명을 시도한다는 것은,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이라고 부를만한 권위와 신앙에 의존하여 신을 접하는 것이 아니라, 성서 없이 신을 증명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만약 신의 존재에 대한 증명이 완결된 형태로 제시될 수 있다면, 이성을 소유한 모든 인간이라면 성서의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신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모든 인간이 진리에 접근할 수 있다는 점을 암시한다. 특히 이성을 가지고 있지만 신을 믿지 않는 이른바 어리석은 자들에게는 더욱 더 그렇다. 또한 어떤 신의 존재를 논증적으로 증명할 것인가를 묻는다면, 그가 생각하는 신의 본질과 권능, 삼위일체의 명증함 등에 관한 정의 또한 내려야할 것이다. 따라서 그 증명을 하는 사람은, 또한 신이 무엇인가에 관한 올바른 규정과 이해의 방식 또한 고려하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것 역시 증명 자체 못지 않게 매우 중요한 신학적 작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유념해야할 것은 이들이 실제로 딛고 있는 뿌리, 즉 신앙이라는 기반을 결코 잊어버린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중세철학의 대가들은 신앙과 이성이 서로 결합되어있다는 원칙을 아주 강력하게 지지하고 실현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의 합리주의적인 주장만큼은 단호히 부인했다는 점에서 다른 (시대의) 철학자들과 구별된다. , 그들은 증명을 하려하기보다는 적절한 이유를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중세의 신학은 철학적 신학이다. ‘이성을 사용하여 신에 대해 사유할 수 있는가?’ 가 신 개념을 철학적으로 사유하는 일, 그리고 그 일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일을 촉발시키기 위한 질문이라면, 그것은 철학적 신학의 시작을 위한 질문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중세철학은 철학적 신학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중세의 철학적 신학에는 다양한 입장이 존재한다. 특히 극단적인 입장들이 있다. 예를 들어, 브라반트의 시제Siger of Brabant그것을 통해 우리가 근원을 그 본질에 걸맞게 인식할 수 있는 그러한 인식이 존재한다.”고 한다. 이성의 결론과 신앙의 자료 사이에 피할 수 없는 모순이 있음을 인정할 때, 전자는 버리고 후자는 인정할 수밖에 없게 했으면서도 실상을 따지고 보면 이성적 탐구의 길을 좇아서 궁극적인 결과에 도달해야 하는 것이 철학의 권위라고 항상 고집하였다는 것이다. 반면, 페트루스 다미아니Petrus Damiani에게 철학자의 지혜가 그 논증의 어두운 안개를 통해 맑은 신앙의 근거를 포기하고, 따라서 철학은 가장 철저하게 종속적인 의미로 신학의 시녀가 되어야할 뿐이다.

그러나 중세의 모든 철학자들이 이러한 극단적인 입장을 취하지는 않았다. 그들의 입장은 저 양 극단의 중간 어딘가에 위치하고 있을 것이다. 신앙과 이성의 양립을 추구한 학문적 목표를 기준으로 중세의 철학자들을 나누어보면, 다음과 같이 세 갈래가 나타난다. 첫째, 이성과 신앙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하고 이성의 의미를 강조하는 데 초점을 둔 캔터베리의안셀무스Anselm of Cantebury와 그를 비롯해 이성의 역할을 다소 강조하는 이들이 있다. 둘째, 11세기 이후 유럽으로 유입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신앙을 결합시키면서 나타난 이른바 아베로에스주의자들이 있다. 여기에는 아벨라르Peter Abelard, 헤일스의 알렉산더Alexander of Hails,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그리고 사실상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요소들을 포기하는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와 오컴Ockham of William 등이 포함된다. 마지막으로는 이성의 의미를 제한하고 신앙으로 도약하는 것을 강조하는 신비주의 학파인데, 요하네스 스코투스 에리우게나Johannes Scotus Eriugena,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Bernard of Clairvaux, 빅토르St.Victor 학파와 보나벤투라Bonaventure, 그리고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와 니콜라우스 쿠자누스Nicolaus of Cues 등이 여기에 속한다.

 

신앙의 기반 위에 있는 이성

 

이런 논점들에 관해 인상적인 의견을 제시한 철학자는 캔터베리의 안셀무스(1033~1109)이다. 이성과 신앙의 관계에 대해서, 그는 이성은 언제나 신앙에 기초해 그 능력을 발휘해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그의 입장은 두 가지 슬로건으로 요약된다. 하나는 통찰을 추구하는 신앙fides quaerens intellectum”이고, 나머지 하나는 저는 믿기 위하여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기 위하여 믿습니다neque enim quaero intellige-re ut credam, sed credo ut intelligam”이다. 이런 슬로건을 통해서 안셀무스가 성취하려는 바는 성서에서 그 근거를 찾지 않고 오로지 이성을 통해서만 근거를 찾는다는 것이다.

이런 증명이 필요한 이유는 안셀무스 스스로가 자신의 신앙의 근거를 이성에 입각해서 찾아보기 위해서일수도 있지만, 신이 없다고 믿는 자들에게 성서 없이도 신을 보여주기 위한 시도라는 점이 더욱 중요하다. 따라서 그의 증명은 신자로서는 매우 불쾌한 태도를 취할 수 밖에 없는데, 그것은 모든 논증과 설명의 제1전제로서의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 같은 상황을 가정하여 자신의 논증을 펼치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성서의 권위에 따라 설득되어서는 안되었다. 대신 개별적인 탐구를 통해 얻어지는 결론이 주장하는 내용은 무엇이든지 명확한 형식과 일반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논증, 단순한 설명을 통해서, 이성적 필연성을 간결하게 강조할 뿐만 아니라 진리의 필연성을 명백하게 보여주어야 했다.” 이러한 입장에서 그는 신의 개념에 대한 전제적인 믿음을 배제한 채, 이성적 능력 즉 논증을 통해서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시도한다. 그 증명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첫째, 인간은 이 세상에 선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것을 선하게 만들어주는 근거가 있을 것이다. 따라서 선하다는 단일한 것, 단 하나의 선한 것, 따라서 최고의 선이 모든 선한 것을 선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그 최고의 선이 바로 신이다. 둘째, 인간은 여러 대상들의 본질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차이들은 더 중요하거나 덜 중요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그 본질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신이다. 셋째, 인간 외부의 대상들을 바라보지 않고 좀 더 내적으로 성찰해보았을 때, 인간은 자신에게 최고의 존재에 대한 개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개념은 인간의 내부에만 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 개념이다. 만약 이성에만 의존한다면, 어떤 존재라도 그것보다 더 높은 존재를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개념이 있다는 것은 진짜로 최고의 존재가 있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다. 최고의 존재가 바로 신이다.

안셀무스가 떠안고 있던 과제는, 일반적으로 생각해볼 때와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 이중적이다. 그는 신학자이자 철학자이기 이전에 여전히 신앙인이었고, 기독교의 근본 믿음에 관한 그의 신뢰는 매우 확고했다. 안셀무스에 대해서 생각할 때는 이 점을 반드시 고려해야만 하며, 그러지 않았을 때에는 그를 극단적인 합리주의자라고 쉽게 단정해 버릴 수 있다. 그의 이중성은 오히려 이 부분에서 더 잘 드러난다. 그는 왜 신은 인간이 되었는가Cur Deus homo에서 내가 그것을 이성으로 입증하였다고 보일지라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더 좋은 것으로 깨우쳐 주실 때까지는 지금 내가 이런 방식으로 그 문제를 보고 있다는 사실로만 입증될 뿐이지 그보다 더한 것으로는 다루어지지 말기를 바랍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실제로는 이성이 신비 앞에서 굴복한다기보다 오히려 더 명확한 통찰, 더 강력한 논증 앞에서만 굴복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 때까지는 (잠정적으로, 그 사이에는 당분간) 이성에게 임시적으로 보이는 그대로를 주장한다는 것을 말한다.

보나벤투라(1218~1274)와 로저 베이컨Roger Bacon(1214~1294)은 안셀무스의 이중성 가운데 이성은 신앙의 기반 위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야한다는 한 측면을 더욱 강한 형태로 주장했다. 다시 말해, 이성과 철학에만 기대어서는 결코 계시적 진리, 참된 지식에 이를 수가 없다고 말한 것이다. 하지만 신앙의 기반 위에 있는 철학은 얼마든지 허용되며, 신앙의 실체를 명확하게 규명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전통적인 철학자들이 탐구한 주제들은 결코 신학에서 설명해야하는 과제들과 다르지 않다. 보나벤투라는 이것을 이성의 빛신앙의 빛이라는 두 개념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그러나 보나벤투라는 이른바 이성의 빛에 따르는 진리의 인식에 분명히 회의적이었다. “그러한 진리는 철학자에겐 감추어진 질문, 말하자면 세계 창조에 대한 질문, 신의 힘과 지혜에 대한 질문과 같은, 최고의 그리고 가장 고귀한 질문들에 의해 드러난다.” 물론 이성은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기 때문에 선하다고 할 수 있으며, 철학은 일정한 유형의 지식을 획득하기에 필요한 수단이며 좋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어느 철학이라도 자체적으로 자율적이며 자체적으로 목적을 이룬다고 하는 주장은 오류일 수 밖에 없다.

베이컨은 철학의 전통에서 거론된 모든 진리를 모두 포함하는 진정한 지식은 성서에 담겨있다고 주장하였다. 철학은 완전한 지혜를 향해야만 하고, 그것도 매우 그래야 한다. 따라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다. “전체 철학의 힘은 성서안에 전적으로 포함되어 있다.” 철학의 과제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위해 증명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렇게 그의 철학은 진술된 의미에 있어 신학의 시녀이다. 특히 신학은 명백히 신앙의 학문, “다른 지배적인 학문을 능가하는 학문으로서의 영역을 간직한다.

 

신앙과 이성의 분열

 

아벨라르(1079~1142)와 헤일스의 알렉산더(1185~1245)는 신앙에서 이성의 역할을 더욱 강조하였다. 아벨라르의 경우,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사용되는 철학적 방법인 변증술을 신앙의 방법으로 이용하는 데 매우 적극적이었다. 계속 질문하고 토론함으로써, 의심스러운 것에 대해서는 정당하게 의심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의 주저 가운데 하나인 예와 아니오Sic et non158개의 질문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보는 권위의 대답과 여기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를 수록하였다. 이를 통해 그는 신학적 주제에 얽힌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점들을 정확하게 밝혀내려했으며, 또한 독자들에게 이러한 방향의 성경해석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해줄 것을 당부하였다.

또한 신앙의 철학적 방법으로서 논리를 매우 강조하였다. 그에게 논리학이란 매우 현대적인 의미로, 언어 표현을 가지고 의식 내용들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도구였다. 인간은 철학적 방법과 그 방법을 통해 획득한 지식으로 진리의 어렴풋한 모습을 파악할 수도 있다. 이것을 명증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도약을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신앙이다. 나아가서 그는 본래 신학적인 영역 안에서 이성이 해낼 수 있는 문제들이란, 특히 이성의 형식 논리적 법칙이 적용될 수 있는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시험해보는 것을 자신의 과제로 삼았다.

헤일스의 알렉산더는 아예 신앙과 이성의 영역을 나눈다. 신앙을 정교하게 구축한 학문은 신학이며, 이성을 사용한 정교한 학문은 형이상학인데, 그가 보기에 이 두 학문은 모두 신에 대한 지식, 진리를 추구한다. 따라서 인간은 이성을 통해서도 신에 대한 인식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는 신학이란 지적 체계를 갖추고서 하나님과 우주를 해석하는 활동이라고 하지 않았다. 신학은 원인과 결과를 연구하는 과학이 아니다. 오히려 신학은 원인의 원인을 밝히는 지혜로서, 인간의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데 있지 않고 사랑에 따라서 영혼을 완성시키고 경외와 사랑의 원리를 따라서 선으로 움직여 가는 것이다라고 했다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신앙과 이성의 의미

 

신앙와 이성 사이의 관계를 더욱 명확하게 구분하고, 이성으로 신을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더욱 긍정적으로 답한 학자는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이다. 물론 그 또한 신학자인 만큼 이성만으로 진리에 다다를 수 있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성은 신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신이 단일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반면 신앙은 이런 존재하는 신이 정말 어떤 존재인가’, 즉 신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해 알게 해준다. 따라서 이 두 능력은 인간이 신을 인식하는 각기 다른 방법과 영역을 가지고 있다. 더욱 구체적으로는, 이성은 이 세계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신에 대한 인식에 다다르는 능력이고, 반대로 신앙은 신에 대한 믿음에서 이 세계에 대한 지식을 도출해내는 능력이다. “신학은 계시의 증명을 논의 없이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이성의 논술방식도 채택한다. 신학은 실상 어떤 것을 인정하는 자들과 더불어 그들이 인정하는 그것에 기초해서 토론하고,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을 논박하면서 그들의 반론을 해결한다.” 신학이 계시를 통해서 알 수 있는 진리들을 철학은 이성을 통해서 알려고 한다.

그렇다면 이 세계에 대한 지식은 어떻게 신에 대한 인식을 보장해줄 수 있는가? 아퀴나스는 이에 대해 이 세계의 존재자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 사실을 인간이 눈 앞에서 목도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너무나도 명확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이러한 상황에 처해있다는 것이 그에게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다. 인간이 이러한 조건에 처해진 이유는, 다름 아닌 신 때문이다. 신은 이 세계의 모든 존재자들을 창조하였고, 인간 또한 그 존재자들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인간은 모든 존재자들의 피조성을 인식할 수 있다. 이 피조성은, 존재자들의 존재로부터 도출되는 가장 기본적인 원리인 동시에 모든 존재자들의 존재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이다. 이것을 그는 자연의 빛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각적인 자료를 출발점으로 삼아서 실재에 대한 지식에 이를 수 있다.우리의 지성적 인식들은 감각적 사물들로부터 온다. 외감으로부터 감각상이 환상에 들어오게 되고 그 위에서 능동 지성이 작업하는 것이다. 환상의 감각상 없이는 이승의 인간 지성은, 뇌 손상을 입은 자가 그렇듯, 사물들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조차 없게 되고 만다. 바로 이 때문에 교육은 사례들을 통해 환히 비춰지고, 또 수학자는 자신의 머리 속에서 상상적 공식들과 도형을 가지고 작업할 수 있는 것이다.” 감각적 사물들로부터 실재로 나아가는 매개는 인간의 본질에 주어진 능력인 능동적인 지성이다. 환상은 구체적이며 일시적인 대상에 대한 모습이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참된 지식이 사물의 실재를 말한다는 의미에서 참된 지식은 아니다. 지성은 환상으로부터 실재에 부합되는 것들을 추출해낸다. 신의 존재를 아는 것은, 바로 신과 같은 빗물질적인(지적인) 세계가 존재한다고 증언해주는 물질적인 실체를 앎으로써 깨닫게 되는 것이다. “비물질적인 우리 지성은 비물질적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그 자체 물질적이기 때문에 물질적으로 인식하는 외감들을 필요로 하므로, 우리 지성은 감각상들로부터 추상을 통해서 비물질적으로 인식한다 즉 물질적이고 가변적인 것들을 무시하고 항구하고 형상적인 관념들만 포착함으로써.”

그러나 아퀴나스도 여전히 세계에 대한 지식과 이것을 얻는데 필요한 이성보다는, 신앙을 통해서 신을 직접 인식하고 진리 그 자체에 다가가는 것이 진리에 다가가는 훨씬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직접 증명하는 것 또한 중요한 문제이다. 그는 안셀무스의 증명을 개념으로 존재하는 것과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혼동한 결과라고 비판한다. , 개념으로 존재하는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이 자명하다는 사실을 거부한 것이다. “신이 실존한다는 표현은 참되긴 하지만 명증적인 것은 아니다.” 그리고 신에 대해서는 실존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겠는데, 신이 무엇인지는 우리로서는 알 수 없다.” 따라서 우리의 신 존재 증명은 세계에 관한 지식에서부터 나아가는 방식을 택해야한다. 그의 신 존재 증명을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로 제시된다.

첫째, 어떤 운동이 있다면, 그 운동은 다른 운동하는 것에 의해 유발된 것이다. “이 세상에 계속적인 변화가 있다는 것은 명증적이다.” 그렇게 계속해서 운동의 원인이 되는 운동자들을 추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무한히 계속될 수는 없으며, 따라서 최초의 운동자primum movens가 반드시 전제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신이다. 둘째, 어떤 작용이 벌어졌다면 우리는 그것의 원인causa efficiens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역시나 원인 또한 무한히 추적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고, 최초의 원인causa prima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신이다. 셋째, 이 세계의 존재자들은 존재하지 않고 소멸될 가능성이 있는 존재들이다. 그렇다면 모든 존재자들이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는데, 이것은 명백하게 오류이다. 따라서 이 세계의 존재자들이 필연적으로 존재ens necessarium하게 하는 원인이 있어야하는데, 이것이 신이다. 넷째, 우리는 고귀한 것, 소중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더 고귀한 것, 더 소중한 것을 생각해볼 수 있는데, 무한히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최고로 소중한 것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신이다. 다섯째, 모든 존재자들은 완벽한 상태가 되기 위해서 운동한다. 이렇게 완벽하게 되려고 하는 것은 모든 존재자들의 목적이다. 그러나 언제나 이 목적을 향해있도록 만드는 존재가 있지 않다면, 모든 존재자들은 아무렇게나 운동할 것이다. 그런데 모든 존재자들은 아무렇게나 운동하지 않으므로, 그런 존재가 있을 것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이것이 바로 신이다.

아퀴나스의 이 논증들은 결함이 많다고 평가받는다. 첫째, 이 논증들은 모든 존재자가 목적을 내포하며 이것을 향해 운동한다는 목적론적 세계관을 가정하고 있다. 둘째, 감각적인 세계와는 구별되는 다른 세계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에 따른 위계를 설정하고 있다. 셋째, 최초의 무엇이 있어야한다고 생각하며 원인/근거와 결과/작용의 연쇄를 자르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넷째, 아퀴나스가 증명한 것은 신에 대한 증명이 아니라 최초의 원인, 최고의 존재자이다. , 그의 논증이 최초의 원인이나 최고의 존재에 대한 증명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신앙에서 말하는 그 신인지는 증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 이후 신앙과 이성의 관계

 

위와 같은 결론은, 이성의 영역을 확고하게 자리매김하려는 토마스의 의도와는 반대로, 끝내 신앙과 이성과의 관계를 설정하는 작업에서 이성의 영역을 축소시키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둔스 스코투스(1265~1308)는 철학에서의 형이상학을 이용하여 신에 대한 인식에 다다르려는 노력은 실패할 수 밖에 없다고 보았다. 형이상학의 대상, 이성의 대상은 신이 아니라 존재 자체이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의 사유는 최초의 원인, 최고의 존재에 도달할 뿐이며, 그것이 신이라고 인식하는 도약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신앙이다.

신이 전능하고 측정할 수 없으며 무소부재하다는 것, 혹은 그가 모든 피조물을 위해, 특별히 정신적인 피조물을 위해 계시로서 작용한다는 것 등은 자연적 이성을 통해 해명되는 형이상학적 진술에 속하지 않는다. 그에게서는 분명히 철학(즉 형이상학)의 대상은 바로 존재 또는 존재자들이다. 이전의 신 존재 증명이 그에게 문제가 되는 점은, 바로 이 존재자들로부터 최고의 존재자 또는 존재 자체를 도출해낼 수 있는 것과 신을 인식한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 다시 말해 최고의 존재자(또는 존재)는 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형이상학을 통해 신 존재 증명으로 나아가는 것은 존재의 이중성이라는 문제에 직면한다. 우리는 존재의 의미를 우리 주변의 존재자들을 통해서 파악한다. 이것은 토마스의 사상에서 가장 핵심적이다. 존재자들의 추상이 최고의 존재를 산출하고, 그것이 곧 신에 관한 인식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규정하는 신은 존재하는가? 신은 분명 우리 주변의 존재자들과 같은 양식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신은 존재한다고 이같은 방식으로 말한다면, 우리가 신의 존재를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단지 신이 존재자들과 같은 양식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렇다면 신은 결국 이성에 의해 두 가지 모순되는 존재방식을 가지게 되는데, 이것은 성립될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의 이성은 세계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것(결국 신을 인식하는 것과 같은 뜻)에 좌절하고 실패한다. 그는 이 원인을 두 가지로 지적한다. 하나는 인간의 원죄 때문에 이성이 오염되었기 때문에, 다른 하나는 전혀 이성적이고 합리적이지 않은 신의 자유라는 속성 때문이다. 특히 이성의 문제와 더 중요한 관련이 있는 것은 후자인데, 이성의 원리가 바로 합리성이기 때문이다. 반면 신은 절대적으로 자유롭기 때문에, 그가 행하고 작용을 미치는 모든 것은 근본적으로 비필연적인 성격, 곧 특정한 의미에서 우연적인 성격을 가진다. 둔스 스코투스가 설정한 이런 관계 아래서는, 이성과 신은 어떤 접점도 형성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인간의 이성은 신의 자유로운 행동으로부터 산출되어 나오는 어떤 것도 연역이나 논증을 통해 도달할 수 없고, “그 자체로의미 있다거나 심지어 필연적이라는 식으로 이해할 수 없다.

윌리엄 오컴(1288~1348)은 한 발 더 나아가서, 신앙은 학문적 체계로 만들어질 수조차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는 듯하다. 신에 대한 인식은 학문적 인식과 같은 방법이나 구조일 수 없다. 신이 인간적 학문의 대상들처럼 명백하게 알려진다면, 그것 자체가 신의 속성에 어긋나는 일이 되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적 사유를 통해 신에게 접근하는 것은, 어렴풋한 개념으로 접근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신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앙이며, 이성은 이 과정에 전혀 관여할 수 없다는 입장을 폈다.

그가 이렇게 주장했던 까닭은, 자유로운 신이라는 둔스 스코투스의 입장을 더욱 강화시켜 자신의 신학의 중심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신이 이 세계를 이렇게 만든것에 아무런 이유가 없다면, 이것의 필연성을 탐구하는 것은 덧없는 일이 될 수 밖에 없다. 인간은 순전히 사실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에 의존하는 수밖에 다른 길이 없으며, 꼭 있는 모습 그대로 있어야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신비주의자들

 

이 맥락에서 시대를 거슬러 신비주의적 전통을 살펴보는 이유는, 신앙과 이성이 명백하게 구분된다는 오컴의 주장이 인간과 신의 단절을 주장하는 영지주의적 전통 내지는 신플라톤주의자들의 입장과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이 두 전통은 중세 신학에서 신비주의 전통이라는 흐름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경향을 보여준 철학자들로는 요하네스 스코투스 에리우게나(815~877),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1090~1153), 생빅토르의 후고(1096~1141), 생빅토르의 리카르트(?~?), 보나벤투라 등이 있다.

에리우게나의 출발점은 신앙과 이성의 관계에 대해 질문을 던졌던 여러 철학자들의 출발점과 유사하다. 이성은 신앙의 영역 안에서 발휘되어야만 한다. 그런데 신비주의적 전통에 속하는 사람들은, 신과 인간은 개념적으로도 현실적으로 근본적으로 단절되어 있다는 고대의 전통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인간이 신을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신은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신과 하나되는 체험을 통해 느끼는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성은, 논리적으로 사유하는 능력이 아니라 신적인 체험을 향해 나아가는 사유능력으로 간주된다. 또한 이성은 신앙의 영역 안에서 발휘된다는 것은, 이성이 신앙의 형태라는 뜻으로 바뀐다. 이후의 신비주의자들은 신앙 안에서 신과 하나되는 인간의 능력을 이성과는 다른 직관으로 파악함으로써, 그 의미를 더 명확하게 한다.

그러므로 에리우게나를 비롯한 이후의 신비주의 전통에서 강조되는 것은,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기타로부터 비롯되는 부정신학과 부정철학의 성향이다. 신비주의 전통에서는 신 자신이 우리에게 이름을 계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신에 알맞은 어떤 이름도 신에게 부여할 수 없다는 분명히 성서적인 명제가 설정된다. 물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인간의 언어를 통해 신을 선포해야하지만, 그것은 그 선포된 언어를 거부하고 그럼으로써 다시 넘어서는 것까지 가야만 올바르게 된다. 예를 들어, 신이 정의롭다고 말하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나, 이 적극적인 진술은 동시에, 이 명제가 거짓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이에 상응하는 부정을 통해 교정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정의라는 개념은 우리에게만 통용되는 경험 세계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해야 할 것이 있음을 뜻한다. 그러나 신은 해야하는 무엇에 종속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신을 규정하는 우리의 언어는 동시에 부정되어야만 신에 관해 올바르게 통찰하는 진술이 된다.

신비주의적 전통이 보여주는 또 다른 특징은, 인식의 단계를 명확하게 설정한다는 점이다. 우선 생 빅토르의 후고는 인식의 단계를 육체의 눈, 이성의 눈, 명상의 눈이라는 세 가지 단계로 구분했다. 또한 리카르트와 보나벤투라의 견해를 참고해보면, 인식은 크게 세 가지 층위로 나누어진다. 가장 낮은 수준에서 우리는 우리 주변의 존재자들을 인식한다. 이 존재자들은 그 자체로 각각 신을 반영하고 있는 신의 현현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는데, 이러한 사고작용이 우리에게 단순한 존재자들 뿐만이 아니라 무형적인 것, 작용하는 것 등이 있다는 것 또한 일러준다. 또한 이러한 것들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으로서의 정신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일러주는데, 이것이 두 번째 수준의 인식이다. 그 다음 내적 반성을 통해 이 정신이 신의 반영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는데, 우리의 구조가 신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혼이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여섯 단계에 상응하는 여섯 가지의 기능 또는 능력이 영혼 안에 있는데, 그것들로 인해, 우리는 깊이로부터 높이로, 외부적인 것드로부터 내부적인 것으로, 유한한 것들로부터 영원한 것들로 감각, 상상, 이성, 이해intellect, 지성intelligent, 그리고 최종적으로 정점인 영혼에 이른다.”

여기에서 우리는 신을 향해 넘어가는 정신의 고양을 경험한다. 신비주의적 체험 신학은 이렇게 완성된다. “이 경험은 너무나 신비하고 숭고해서, 그를 제외한 어느 누구도, 갈망하였지만 그것에 대해 알지 못하고 받지 못했다. 이러한 추구는 그의 존재가 그리스도가 이 따에 보내주신 성령의 불에 의해 타오른 자에게만 온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도가 말하듯이 하나님의 숨겨진 것들이 성령에 의해 드러난 것이다.” 이 경우, 신앙은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않으므로 믿는 것은 의지의 활동이며 이성의 작동은 아니다. 신학의 주된 과제는 믿음에 관한 것이며, 믿음은 우선적으로 의지의 정서에 의존하기 때문에 신학은 학문 그 이상의 어떤 것, 즉 지혜sapientia이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1260~1327) 또한 신비주의적 전통에 속하는 철학자이다. 그의 독특함은 인식의 단계에 대한 정의와 신적 체험을 향해 가는 방법론에 있다. 신플라톤주의나 영지주의 때부터 그러했듯, 신비주의자들은 대개 상승이나 도약, 고양같은, 위계성이 갖춰져있고 계속해서 위를 향해 올라가는 은유를 사용한다. 에크하르트는 반대로 아래로 향하는 은유, 이 세계로부터 자신의 내면으로 점점 향하는 방법론을 제시한다. , 자신과 자신의 정신을 구성하고 있는 여러 존재자들로부터 자신의 내면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거대한 양의 에너지를 소비하지 않고서는 이 탄생의 경험을 확신하거나 그것에 접근할 수 없다. 그것은 사물들로부터 감각의 완전한 철수가 없이는 불가능하며 영혼의 모든 기능을 정복하고 그들이 작동하는 것을 중지시키는 데에 거대한 힘이 필요하다.”

이것을 격리성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조건을 파악하는 방법으로, 나 자신 이외의 모든 것을 정신의 고려사항에서 배제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모든 존재자들이 추방된 정신 그 자체가 발견된다. “그러므로 너는 하나님을 어떤 피조물의 학문이나 네 자신의 지혜를 통해서 알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만일 네가 하나님을 거룩하게 알고자 한다면, 너 자신의 지식은 순전히 무지와 같이 되어야 한다. 그 안에서 너는 자신과 다른 모든 피조물을 잊는다.” 그런데 이 과정을 다르게 표현하면, 정신이 피조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것, 다시 말해 신적인 영역으로 자신을 옮겨가는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발견된 정신 그 자체가 바로 신이며, 이 정신에 대한 체험이 신에 대한 인식이다. “무엇보다, 스스로를 위해 아무 것도 주장하지 말라. 너는 독특하게 네 자신의 것이었던 모든 것을 상실한 사막과 같기 때문이다. 성경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리의 소리에 관해서 말한다. 이 소리가 네 안에서 마음대로 외치게 하라!”

나의 정신 그 자체가 바로 신이라는 인식은, 다른 모든 존재자들 또한 마찬가지로 바로 신이라는 인식으로 유비될 수 있다. 물론 모든 존재자들의 총합이 신이 되는 것은 아니다. 신은 지금 존재하는 존재자들 뿐만이 아니라, 가능한 모든 존재자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신은 지금의 세계를 뛰어넘는다. 이런 의미에서 신은 모든 존재자들의 존재, 존재성으로 설명될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사물들은 신 자신이다.”

이 존재성은 마치 내가 나의 내면에 깊이 들어감으로써 신을 체험하듯이, 신이 모든 존재자들을 체험함으로써 가능하다. 이것을 에크하르트는 통찰intelligere’이라고 표현한다. “신의 올바른 존재 방식은 통찰이다. 신은 자신의 통찰 자체이며, 또한 자신의 존재이다.” 그러나 이러한 통찰은, 인간이 격리성을 통해 체험할 수는 있으나, 규정할 수는 없다. 도저히 언어로 규정될 수 없는 그 무엇에 대한 체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에 대한 인식은 기술될 뿐, 설명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에크하르트는 신비주의 전통의 가장 중요한 특징, 즉 신은 규정될 수 없고 무엇이 아니다라는 방식으로만 설명될 수 있다는 부정신학의 주된 성격들을 공유한다. “당신이 신을 사랑한다면 그가 어떻게 신인지, 어떻게 정신인지, 어떻게 인격인지, 어떻게 형상인지, 이 모든 것을 버려야한다. 당신은 그를 있는 그대로, 즉 비신, 비정신, 비인격, 비형상으로 사랑해야만 한다. 아가신이 모든 이중성으로부터 벗어난 청명하고순수하며 명료한 일자성이듯이, 이러한 일자성 안에서 우리는 무에서 무로 영원히 침잠해야 한다.”


니콜라우스 쿠자누스의 신비주의

 

신을 설명하려는 노력이 번번히 좌절된다는 신비주의의 전통은 니콜라우스 쿠자누스(1401~1464)의 철학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신은 절대적인 존재이다. 그러므로 자신과 대립하는 어떤 대상을 가질 수 없는, 단 하나이다. 그러므로 유한한 존재자들은 신의 피조물로서 독립해 신과 대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신 자신의 안에 구현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절대적 무한성은 모든 것을 포함하고, 모든 것을 포괄하기 때문이다.의지하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당신, 사랑스러운 하나님 안에 포옹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신을 이러한 방식으로 이해하기에, 그는 신에 관한 정의에서 모순적인 말들을 자주 내뱉는다. “왜냐하면 그것이 최대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암 것도 그것에 반대되지 않기 때문에, 동시에 최소한이 그것과 일치한다. 그때 그것은 실제로 모든 가능한 존재이며, 사물들로부터 아무 제한도 겪지 않으며 모든 것 위에 제한을 부과한다.”

더욱 주목할 것은, 그 안에 비단 현재뿐만이 아닌, 과거와 미래의 모든 유한한 존재자들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은 거대한 가능성의 덩어리로서 이해될 수 있다. 이것은 타자가 없는 존재, 즉 비-타자로서의 신만이 가질 수 있는 특징이다. 가능성이 끊임없이 현실로 드러나면서 변화하는 존재인 신은, 그래서 인간의 개념에 포착될 수 없고 따라서 가능성 그 자체라는 묘사 이외의 설명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인간의 신의 인식과 관련해서, -타자라는 속성은 신에 관한 부정적인(소극적인) 규정과 맞닿는 계기가 된다.

이런 신학적인 입장에서는, 중세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인 입장 가운데 하나인 삼위일체설이 문제가 된다. 신은 부정적으로만 정의될 수 있다면, 성부와 성자와 성모가 하나라는 삼위일체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는 이것을 통일성, 동일성, 연결성 등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묘사한다. 중요한 것은 기존의 삼위일체에 관한 도상적이고 도식적인 해석을 신비주의적 방식으로 이해했다는 점이다. 그는 삼위일체의 관계를 신의 내적 역동성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본다.

인간의 이성을 통해서 신을 인식하는 것은 신비주의의 모든 전통과 더불어 불가능하다. 절대적인 존재는 이성의 규칙인 모순율마저도 뛰어넘는데, 왜냐하면 신에 대립하는, 즉 모순된 무엇을 생각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성은 신을 인식하는 능력이 아니다. 그는 신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 그에 대해 알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신에 대한 가장 정확한 인식이라고 밝힌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모른다, 혹은 신에 관한 인식을 포기함으로써 세계 전체에 관한 총제적 지식을 포기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소크라테스에게 그가 그의 무지 밖에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것처럼, 그리고 매우 현명한 솔로몬도 모든 것은 어렵고 말로 해결할 수 없다고 단언했던 것 처럼 우리는 신에 관해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안에 있는 거룩한 것은 틀림없이 공허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학식 있는 무지docta ignorantia를 얻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적극적인 긍정신학이든 부정신학이든 우리는 신에 관해 인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말 속에서 쿠자누스는 지금까지 전해진 모든 신학의 전통을 해체한다. 신에 관한 진술은 긍정과 부정 사이의 모순되는 부유 안에서 보존되어야 한다.

그가 인식을 대신하여 신에게 접근하는 방법으로 제시한 것은 다름아닌 체험이다. 신은 체험을 통해 인간에게 다가오고, 그 체험을 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태도는 연모 즉 신앙이다. 그는 이 신앙을, 이성적(즉 인간적) 요소를 모두 배제한 순수한 바라봄이라는 뜻에서 관조라고 말한다. 이 관조 속에서 신은 인간에게 다가오며, 여기에서 인간은 수동적인 존재로 설정된다. 신은 어두움 안에서만 보여지며, 확실히 파악할 수 없는 관조 안에서 마치 순간적인 황홀경의 길에서와 같이 일어난다.

그러나 이러한 신비체험이 철학의 주제가 될 수 있는가? 또는 철학을 시작할 수 있는 단초가 될 수 있는가? 이 문제는, 단적으로 말해 신비주의자들이 철학, 즉 철학적 신학을 한 철학자들인지 되묻는 것이다. 신에 대한 고찰이 체험이나 믿음의 영역으로 돌려지는 순간, ‘철학적신학은 포기되는 것이나 다름없다. 중세의 신비주의자들은 이러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신에 대한 중세적 사유를 끝맺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 참고문헌

 

레이 페트리 편, 중세 후기 신비주의(류금주 옮김), 두란노아카데미, 2011

빌헬름 바이셰델, 철학자들의 신(최상욱 옮김), 동문선, 2003

요셉 피퍼, 중세 스콜라 철학(김진태 옮김), 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07

유진 페어웨더 편, 스콜라 신학 선집(김도훈, 최영근 옮김), 두란노아카데미, 2011

지아코모 달 싸소·로베르토 코지, 신학대전 요약(이재룡, 이동익, 조규만 옮김), 가톨릭대학교출판부, 1995

캔터베리의 안셀무스, 모놀로기온·프로슬로기온(박승찬 옮김), 아카넷, 2002

후스토 곤잘레스, 기독교 사상사 2 : 중세편(이형기, 차종순 옮김), 한국장로교출판사,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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