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용주의연구 발제. 리처드 로티, 『철학 그리고 자연의 거울』2장 요약의 요약>

  이 장에서 로티는 마음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사고실험을 통해 우리가 우리의 내면, 즉 정신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그것이 정말로 존재하는 것에 관한 언급인지를 살펴보려 한다. 대척행성인은 우리와 모든 행동이 똑같지만, 마음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마음에 관해 표현하는 언어도 없다. 우리가 흔히 마음의 상태(정신적 상태)라고 칭하는 것들을 그 사람들은 곧장 특정한 신경적 상태로 표현한다. 지구인이(우리가) 이들을 만난다면, 우리는 이들에게 마음이 있는가 없는가에 관해서 토론하게 될 것이며, 여러 입장이 상충할 것이라고 로티는 주장한다.

  그러나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에 관한 여러 실험들이 이들에게는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 데카르트 이래로 마음 또는 정신적인 것의 특징으로 간주되는 것은 확고부동함(틀릴 수 없음, incorrigibility)이다. 마음에 떠오르는 것은 너무나도 명확하게 알려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확실하게 알려지는 마음 바깥에 있는 것과는 다르다. 그러나 대척행성인들에게는 신경세포의 반응이 너무나도 명확하게 알려진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반응은 물리적인 과정에 대한 설명이지 정신적인 것에 관한 규명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 지구인은 대척행성인들에게도 마음이 있지만 그들은 그것에 관해서 알지 못한다고 간주하거나, 또는 우리 지구인과 대척행성인 모두에게 마음이 없다고 하고, 우리가 정신적인 것에 관해 표현하는 것들이 무의미한 표현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어느 쪽으로 결론을 맺든 우리 지구인이 전통적으로 생각해온 마음 개념과는 다른 해석이 나올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문제로 부각된다. 대척행성인에게도 마음이 있다고 가정할 경우, 그들에게 적용되는 마음의 개념은 우리 지구인에게 적용되는 마음의 개념과 다를 수 밖에 없다. 마음의 개념에 핵심적인 것은 확고부동함인데, 그들에게는 신경적 상태가 확고부동하게 알려지기 때문이다. 우리 지구인과 대척행성인 모두에게 마음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마음과 정신적 상태에 관해 사용하고 있던 수많은 표현들을 폐기해야 하는 상황에 다다르게 된다. 이 둘을 중재하기 위해 철학사 속에서 여러 시도들이 있긴 했지만, 로티는 그들이 중립적이라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특징도 없는 시도들이라고 평가한다.

  마음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없다고 생각하는 것, 둘을 중재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들, 이 모든 노력들은, 가장 명백한 것이 가장 실재적이라는 플라톤의 원리 그리고 그 명백한 실재들을 인간이 고스란히 반영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울의 이미지에서 파생되었다고 로티는 주장한다. 여기에서부터 현대에 등장한 다양한 마음과 몸 문제에 관한 입장들을 검토해야 할 필요성이 생겨난다. 로티에게 분석의 대상이 되는 주요한 입장들은 행동주의, 회의주의, 유물론의 세 가지다.

  행동주의와 거울의 이미지는, 인간의 행동이 마음의 상태를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다는 가정 때문에 관련이 있다. 그러나 행동과 마음 사이에는 수많은 대응관계가 있다는 것이 너무 명백하기 때문에, 행동주의자들은 행동과 마음 사이를 매개하는 필연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을 지적해왔다. 예를 들어 그것은 우리의 언어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언어는 마음에 관한 표현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마음을 거부하는 데 쓰일 수 있는 도구가 아니다. 게다가, 이런 필연성이 보장된다고 해도 행동주의는 마음을 파악하는 데 올바른 입장일 수는 없다고 로티는 주장한다. 마음과 행동 사이에 필연적인 연결이 있다고 해서, 마음이 없다고 주장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회의주의자들은 나와 정신 사이의 관계, 즉 확고부동함이 성립하는 관계가 다른 사람과 다른 사람의 정신 사이에도 성립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정신의 존재에 관해서 확신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부류이다. 그러나 확고부동함을 구성하는 두 가지 속성, 즉 사적인 것과 직접적인 것이 필연적으로 연결되어있다고 주장할 때에만 이런 주장이 가능하다. 비트겐슈타인은 사적 언어의 불가능성에 관한 논증을 통해 이런 확고부동함이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회의주의자들은 이런 확고부동함 때문에 정신적인 것은 있다고 주장했다. 로티는 이 두 주장을 검토하면서, 사밀함을 거부한 비트겐슈타인을 높게 평가하면서도 각각 다른 직접적 상태를 언어로 환원하여 그 사람의 상태에 대해 직접 판단할 수 있다는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에 관해서는 비판적이다.

  심신동일론에도 여러 부류가 있다. 그 가운데 몸의 상태와 마음의 상태를 구분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주제중립적’ 분석에 의거한 논증이 있는데, 이는 몸과 마음 가운데 어떤 것을 우리가 선택해야하는지에 관해서는 알려주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다. 그러므로 이 논증에 의거해 유물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유물론이라는 형이상학적 가정을 이미 전제하고 있는 셈이다. 로티가 궁극적으로 지지하는 입장은 제거적 유물론인데, 이는 정신적인 상태가 있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 입장이다. 로티는 이것이 우리 지구인의 철학과 사상의 역사적 맥락에서 나온 특수한 문제 또는 특수한 은유법이라고 주장하고, 존재론적인 지위라는 모호한 말에 큰 관심을 가지는 과정 속에서만 나올 수 있는 문제라고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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