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특강 발제. 애덤 스미스, 『도덕감정론』 2부 2절 요약>

  Chapter 1. 두 가지 덕의 비교


  스미스는 이 장의 첫 부분에서 보상과 처벌의 대상을 정의한다. 적절한 동기에서 나온, 대체로 자비로운 성향의(beneficent tendency) 행위는 보상의 대상이며, 부적절한 동기에서 나오는 해로운 성향의 행위는 처벌의 대상이다. 보상과 처벌이 어떤 사람의 행동에 대한 도덕적인 판단이 가장 단적으로 드러난 형태라고 본다면, 보상과 처벌의 기준에 행동의 동기와 결과 모두를 결합시키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만약 동기와 결과로 나타난 물리적인 변화 가운데 어느 한 쪽이라도 갖추고 있지 못한 경우에는, 그것이 도덕적인 행위로 평가받지 못하거나, 적어도 보상과 처벌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자비로움는 자유롭게 이루어지며, 강요되지 않는다. 다른 사람에게 자비로움을 행하지 않았다고 처벌을 받지는 않는데, 이는 적극적인 악(positive evil)을 행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비롭지 않았다는 것은 단지 현재 상태를 그대로 유지되게끔 했다는 점에서 간접적 피해일 뿐이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의 기대와 어긋나기 때문에 비난과 부인의 대상이 될 수는 있지만, 원한의 대상은 아니다. 심지어 자비로운 행위를 받은 사람이 베푼 사람에게 베풀지 않아도 그렇다. 스미스는 자비로움을 강제한다면, 오히려 그 강제가 자비로움을 하지 않는 것보다 훨씬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

  반면 상대방의 상태를 직접적으로 나쁘게 하는 행위는 사람들의 원한(resentment)을 산다. 사람들이 원한을 가지면, 나쁘게 된 것을 다시 원래대로 돌려놓으려는 마음이 생기고, 가해자에게 피해를 주어 그런 일을 다시는 못하게 만들려는 마음도 생긴다. 정의는 이러한 원한으로부터 나오며,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것, 즉 불의하다는 것의 반대말이다. 이 둘은 동일하게 적극적인 피해를 대상으로 삼는다. 그래서 스미스는 다른 무엇보다도 정의와 다른 덕목들을 구별하는 기준으로 처벌, 즉 강제성을 내세운다. 사람들은 이 원한 때문에 불의한 사람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은 사람들이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러므로 처벌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뤄진다. 하나는 나쁜 행위를 한 그 사람을 자신이 한 일의 정도에 적절하게 처벌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행위 자체가 이뤄지지 않도록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이다.

  여기에서, 이를테면 ‘직접적, 물리적 피해가 아닌 행위는 처벌할 수 없다.’는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우리의 일반적인 도덕적 태도에 부합하는가? 나아가서, 여러 덕목들을 교육하는데도 활용할 수 있는 관점인가? 우리는 실제로 아이들을 가르칠 때 물리적 강제를 동원하고, 때로는 국가가 그런 법률을 지정하여 사람들에게 착한 행동을 강제한다. 스미스 자신도 8번째 문단에서 이러한 행위는 모든 문명국가의 법에서 의무로 하고 있는 사항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정의의 법은 단순히 사람들의 직접적인 피해만 막는 것뿐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공동의 선을 위해 움직이도록 강제한다는 것이다. 이런 언급은 스미스의 이론적인 일관성을 해치는 것이 아닐까?

  정의와 자비로움을 다시 비교해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이 나누어볼 수 있다. 자비로운 사람, 즉 자비로움이 넘치는 사람은 보상을 받는다. 그러나 자비롭지 않은 사람, 즉 자비로움이 모자라는 사람은 처벌을 받지는 않는다. 반대로, 정의로운 사람, 즉 정의를 잘 실천하는 사람은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한다. 하지만 정의롭지 않은 사람, 즉 정의가 모자라는 사람은 처벌을 받는다.



  Chapter 2. 정의에 대한 감각, 후회(remorse), 잘한 일(merit)에 대한 의식


  정의라는 덕목을 실천하는데는,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가 동반되어야 하므로 매우 조심스럽다. 따라서 명백한 피해에 대한 정당한 분노만이 피해를 주는 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다. 또한 이렇게 정당화되어야지만 다른 사람들 또한 이 피해를 주는 행위에 공감한다. 그런데 인간은 자신에게 가장 집중하고, 자신을 가장 잘 알며 자기 자신에게 만족을 주는 행위를 하려는 경향이 있다. 또한 종종 이런 행위는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히기도 한다. 이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 따라서 정당한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나의 행위를 지켜보는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일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은 각각 자기들의 기호를 가장 먼저 내세우는 입장에서 나의 행동을 지켜볼 것이고, 만약 그렇다면 자신의 행위가 공감할만한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자신에게 집중하고 자신의 이익을 가장 우선적으로 돌보는 태도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 원리에 따라서만 행동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시인받을 수 없다. 이 원리가 아닌 다른 사람들의 기호를 고려하는 원리, 즉 공평한 관찰자가 그렇게 할 법하다고 생각하는 원리들에 기초하였을 때에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연스러운 태도는 용인될 수 있다. 만약 그렇지 못한 경우, 즉 자신의 이익을 내세워 타인을 난폭하게 대하는 경우,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난폭함을 당한 사람에게 공감하고 원한을 가지게 된다.

  스미스는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것의 정도를 구분하여 처벌의 강도를 구분한다. 가장 강하게 처벌해야 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는 것인데, 어떤 사람을 죽이는 것은 그 사람에게 가장 큰 피해를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은 재산과 소유권을 빼앗는 것이다. 이것은 명백하게 어떤 상태에 해를 입히는 것이다. 마지막은 계약을 위반하는 것이다. 계약 위반은 명백한 피해는 아니지만,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을 좌절시키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로 법의 내용과 연결된다.

  이런 법을 위반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감정이 어떠한지에 대해서 공감한다. 위법행위를 할 당시에는 강렬한 정념에 사로잡혀서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공감할 수 없었지만, 행위가 끝나는 것과 동시에 그 정념은 충족되었고 따라서 다른 사람들과 공감할 수 있는 마음의 상태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이 공감을 통해 그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를 원한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비참한 상태에 빠지게 된다. 또한 다른 사람들로부터는 원한의 대상이기 때문에, 자신의 비참한 처지에 대해서 전혀 공감을 얻을 수가 없다. 게다가 자신의 행동에 의해 불행에 빠진 사람에게도 공감하게 되면, 아주 처참한 정신적 상태에 빠지게 된다. 스미스에 따르면, 그 사람들은 이런 비참함을 겪은 뒤에야 자신이 어떤 행위를 한 것인지,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깨닫는데, 이러한 감정을 후회라고 부른다.

  이 부분에서 주목할 것은, 그 사람들이 어떤 감정상태에 빠졌는가 하는 내용보다는, 오히려 그 사람들을 포함한 모든 인간들이 놓여있는 조건에 대한 스미스의 생각이다. 그는 명시적으로 3번째 문단에서 ‘외로움은 사회보다 더욱 무섭다(But Solitude is still more dreadful than society)’고 말한다. 즉, 인간은 본질적으로 사회적인 존재이다. 그러므로 스미스는 죄수가 고통에 빠져드는 이유를 자신이 처해있는 환경에서 비롯한 육체적인 고통 때문이 아니라, 더 이상 사회적 관계망을 회복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상상이 떠오르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정의와 후회가 설명되었다. 스미스가 제목에 명시한 나머지 개념, 즉 잘한 일에 대한 의식은 이런 행동들과 반대되는 행동을 하는 것, 그리고 그 반대되는 행동을 보는 것에서 나오는 반대되는 감정들로 구성된다. 즉, 어떤 사람이 타인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다 주는 것을 지켜보았을 때, 그리고 그 행위가 지켜보는 다른 사람들 또한 그렇게 행동하게끔 만드는 적절한 동기에서부터 이루어졌을 때, 그것은 잘한 일이 된다. 어떤 것이 잘한 일인가에 대한 의식을 내가 갖기 위해서는, 좋은 결과와 적절한 동기 두 가지를 모두 고려하여 행동하면 된다. 또한 이것은 보상받을만한 일이기도 하다.



  Chapter 3. 본성(nature)의 이러한 구성의 유용함(utility)


  스미스는 이 장의 시작에서 더욱 확실하게 인간의 사회적인 측면을 강조한다. 즉, 인간은 사회 안에서만 자신을 유지(subsist)할 수 있으며, 이미 만들어진 사회에 자신을 적응(fitted)시킨다는 것이다. 이러한 언급을 눈여겨보아야 하는 이유는 그의 입장이 이전의 사상가들과 다르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전의 사회철학의 전통에서는 개인이 따로 떨어져서 살아가는 자연적인 상태와 상호교류하며 살아가는 사회적인 상태를 가정했다. 그러나 스미스에게는 인간이 상호교류하며 살아가는 상태 자체가 바로 자연적인 상태이다. 인간은 그 본성에 있어서 사회적인 것이다.

  사람들 사이의 교류의 형태는 이익과 피해 두 가지이다. 이익은 좋은 마음에서 주고받을 수도 있지만, 자신의 이익을 먼저 계산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교류될 수 있다. 따라서 자비로움은 있으면 좋지만, 없다고 해서 사람들 사이의 교류가 없어지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자비로움은 인간의 사회적 삶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하지만 피해를 주거나 받는 것은 상대방을 불신하게 만들며 따라서 인간의 사회적인 삶을 파괴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본성에 어긋난 것이다. 스미스에 따르면, 이런 까닭에 정의는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되는 꼭 필요한 덕목이며, 정의에 대한 감정은 인간에게 본성으로서 주어져있다.

  스미스는 이러한 내용을 건축물에 비유하여, 자비로움은 사회를 꾸미는 장식에 해당하지만, 정의는 사회를 건설하는 데 가장 중요한 기둥이라고 설명한다. 만약 인간이 사회를 이루고 사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면, 사회의 구성에 정의는 필수적이므로 정의에 대한 감각 또한 자연스러운 것이어야 한다. 물론 개인은 자기 자신, 그리고 자신과 특별한 연관이 있는 것에 대해서 더 크게 생각하고, 타인의 불행은 상대적으로 매우 적게 느낀다. 이것 또한 자연스러운 것이다. 따라서 정의에 대한 감각이 없다면, 자신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는 유혹으로부터 빠져나오기 힘들게 되고, 따라서 한 개인은 짐승들의 무리 속에서 살고 있는 것과 다름없게 된다.

  이러한 스미스의 생각은 수단과 목적의 관계라는 다른 방식으로도 논증된다. 예를 들어, 모든 생물은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 자신의 종을 번성하려는 목적에 언제나 이끌린다. 그러나 이런 목적에 이끌리는 활동들이, 명시적으로 이 목적들을 염두에 두고 행해지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또한 시계와 시계공 사이의 관계에서도 유비될 수 있다. 시계에 들어가는 각 부품들은 각자 자신의 고유한 동작을 가지고 있다. 그 부품들은 바로 그 활동을 가장 잘 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러나 이 부품들의 조합이 창출해내는 목적은 정확한 시각을 가리키는 것이다. 스미스의 관점에서는 인간들도 마찬가지이다. 인간들도, 신(자연)에 의해 어떤 목적을 가장 잘 달성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사회에 대해서 생각할 때, 그것을 그렇게 나누어 생각하지 않고, 인간의 능력 즉 이성 자체에 의해 사회가 구성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즉, 사회를 구성하고 정의의 법들을 만드는 것이 합리적 고려의 산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회 자체가 유지되는 것에 관심이 있다. 게다가 개인의 부는 사회의 부와, 개인의 감정은 주변 사람들의 감정과 아주 밀접하게 이어져있기 때문에, 사회 자체가 유지되는 것이 개인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정의롭다. 따라서 정의롭지 못한 행위들, 즉 사회의 유대를 해치는 행위는 일단 처벌하는 것을 더욱 좋아한다. 그러나 스미스가 보기에는 사회 자체의 유지를 위해 정의감이 있다는 것은 부족한 설명이다. 사람들은 행위 뒤에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와 비참한 상태에 빠져있는 가해자에게도 공감하므로, 그에 대해 처벌하지 않는 결정을 내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스미스가 보기에, 사회 자체를 유지하는 것, 즉 사회의 일반적인 관심-이익(general interest of society)에 의지하는 정의는 위와 같은 개인적인 공감을 억제하기 위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스미스의 입장에서 사회의 일반적인 이익에 대한 고려는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특성인 공감을 넘어서지 못한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아무리 범죄자라도, 그가 우리에게 더 이상 피해를 주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할 때, 그에 대해서 관대해진다. 그것은 그의 처지가 우리에게 연민이나 동정심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사회의 일반적인 이익을 고려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경우이다. 개인적으로 그에게 공감하는 것보다는 그에 의해 피해를 입은 사람,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이런 범죄에 의해 피해를 입을 수 있는 사람)들에 훨씬 더 많이 공감하는 것, 그리고 인류 전체에 대한 공감은 범죄자에 대한 공감에서 나오는 여러 덕목들을 상쇄시켜준다. 따라서, 사회의 일반적인 이익에 대한 고려가 공감의 구조에서 파생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둘 중에 공감이 훨씬 근본적인 것이다.

  또한 스미스에 따르면, 직접적으로 피해를 주는 행위가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어떤 행위가 일반적인 규칙에 어긋나는 것보다는 그것을 지키는 행위를 더욱 좋아한다. 젊은 사람들과 반항적인(licentious) 사람들이 이러한 규칙들을 어기는 경우가 있다. 스미스는 이런 사람들의 행동이 단지 내가 보기에 마음에 들지 않아서 싫어한다고 말하는 것은 주관적인 판단이므로, 그것이 적절하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다른 이유가 있어야한다고 말한다. 스미스가 보기에 규칙을 지키는 것을 강요하는 행위, 그것을 지키지 않았을 때 처벌하는 행위의 가장 밑바탕이 되는 것은 그렇게 행위하고 그 행위에 영향을 받는 각 개인들에 대한 관심과 공감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것은 사회 전체의 이익에 대한 고려라거나 사회의 유지, 존속 등의 이유에 의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스미스는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해 다시 한 번 유비 논증을 사용한다. 우리가 100원을 잃어버렸을 때, 그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100원을 10000원의 부분이 아니라 100원 자체로 생각한다. 어떤 사람이 피해를 입었을 때, 그것을 생각하는 까닭은 사회 전체가 입은 피해의 부분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이 입은 피해이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사회를 유지하지 위해서 정의의 법들을 지켜야한다고 말하지만, 스미스가 보기에 그것은 사실 사회 자체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개인들 사이의 특수한 관계들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 관계들에 정의의 법들을 잣대로 내밀 수 있는 이유는, 그 법들의 적용을 받는 이들과 내가 단순한 인간, 즉 동료개체로서 공감하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런 공감에는 특정한 개인에 대한 여러 불만스러운 점들이 개입하더라도, 금방 고려사항에서 제외된다.

  그러나 간혹 사회 전체의 이익을 고려하여 정의의 법이 시행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직접적으로는 특정한 개인에게 해를 끼치는 행위는 아니지만, 그것이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가정해보았을 때, 사회 전체에 여러 부작용이 생길 수 있는 행위들에서 그렇다. 스미스는 경찰(civil police)이나 군대의 기율을 무너뜨리는 행위가 이러한 행위라고 말한다. 이런 행동에 대한 처벌은 언제나 과도해 보이는데, 아마도 처벌의 강도를 설정하는 기준이 되는 직접적인 피해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사회의 일반적인 이익에 대한 고려가 아닌,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것에 대한 처벌을 보는 방식은 이것과 다르다. 그것은 직접적인 원한의 대상이며, 또한 그만큼의 처벌을 반드시 요구한다. 또한 그것은 적절하다. 이러한 처벌의 두 대상에 대한 차이가 중요한 이유는, 이 두 처벌이 단일한 원리에서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스미스에 따르면, 정의에 대한 이러한 믿음은 이 생애(this life)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종교적인 차원에서 다가올 생애(life to come)에까지 적용된다. 만약 정의롭지 못한 행위를 하고서도 이 생애에 처벌을 받지 않는다면, 종교는 그가 다가올 생애에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가르치며 사람들에게 정의에 대한 감각을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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