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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더서로 고찰하는 하나님과 정치
요람 하조니 지음, 김구원 옮김 / 홍성사 / 2017년 4월
평점 :
절판
작년 이맘 때부터, 직장에서의 인간관계로 힘들어 하는 어떤 후배의 얘기를 여러차례 들어왔다. 1년을 넘게 지속되다 보니 이제는 많이 지쳐 보였다. 후배의 얘기를 듣다보니 예전에 내가 겪었던 일이 문득 떠올랐다. 이제 다시 곰곰히 생각해 보니 ‘인간관계’ 문제라기 보다는 결국 ‘정치’의 문제였다.
<에스더서로 고찰하는 하나님과 정치>를 충격적인 느낌으로 읽고 나니 ‘정치’라는 단어가 일상적으로 알고 있는 것 보다 더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구나 싶다. 그 후배는 자신의 상황에 대해 정치적인 관점을 가지고 행동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으로 보인다. 특별히 무엇을 얻고자 함이 아니다. 상대방을 똑같이 공격하고자 함도 아니다. 자신의 아집을 벗어나지 못하고 타인을 힘들게 하는 사람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자신 주변의 관계들을 지키기 위해서 정말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떤 관점으로 상황을 바라보고, 어떤 실천 사항을 도출해야 하는지에 대해 적극적인 고민이 필요해 보인다. 그 후배에게 이 책의 전자책을 선물했다. <에스더서로 고찰하는 하나님과 정치> 는 그 이전에 명확하게 알지 못했던, 우리 주변의 ‘정치’에 대한 성경적 사고의 출발점을 마련해 준다.
요람 하조니는 미국에서 정치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1994년부터 이스라엘에서 유대 사상, 철학, 탈무드, 유대 역사 등 연구를 오랫동안 해왔다고 한다. 이 책은 유대교적 관점으로 에스더서를 해석한 책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이 책으로부터 새롭게 알고 깨닫게 되는 하나님의 모습이 성경의 다른 곳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의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아 보인다. 새로운 것은 그 하나님의 모습이 아니라, 적용되는 분야다. ‘정치’라는 분야. ‘정치’를 터부시하는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그 누구보다도 더 ‘정치적’이라는 아이러니를 여전히 보게 되는 한국 사회, 특히 한국 개신교인들에게 이 책은 인식의 전환을 요구한다.
저자는 에스더서를 1장부터 10장까지 차근차근 풀어나가며, 한구절 한구절이 어떤 의미인지 풀어나간다. 모르드개와 에스더의 말 한마디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를 구약 성서의 전통에 비추어 분석한다. 그 분석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역사다. 하나님이란 단어가 한 번도 나오지 않는 이 에스더서는 결국 구약 성서 전반에 나타난 유대 전통을 페르시아에서의 디아스포라의 삶이라는 맥락에서 새롭게 풀어 쓴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모르드개는 왜 하만에게 반항했을까?
에스더서를 읽다 보면 의문에 부딪히게 된다. 왜 모르드개는 하만에게 그렇게 반항한 것일까? 왜 유대인의 진멸이라는 위험한 상황을 스스로 초래했는가? 왜 그것을 잘못이라 생각하지 않았을까? 반항하지 않았다면 그런 위기도 없었을 것 아닌가? 그는 왜 유대인임을 밝혔을까?
요람 하조니는 이 대목에서 모르드개가 유대 전통이 지난 1000년 동안 싸워왔던 전쟁을 시작한 것이라고 한다. 그것은 우상숭배와의 전쟁이며 아말렉과의 전쟁이다.
저자가 바라보는 성서 전통에서, 국가 권력은 언제나 의심의 대상이지만, 경쟁하는 다양한 견해들에 개방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한 어느 정도 인정은 할 수 있다고 본다. 반면에 다양한 목소리를 듣지 않는 정부는 자신의 권력 추구만을 우선시하는 오만한 정치가들의 놀이터로 전락하며 수많은 백성들은 그들의 잘못된 결정으로 인해 고통 당하게 된다. 하나님은 결국 모든 나라 백성의 안녕을 바라시기에 권력자들이 진심으로 백성들의 선을 추구하면 하나님과 그의 종(선지자)들은 그들에게 힘을 줄 것이다. 그렇지 않은 통치자는 하나님께 반역하는 자이고, 자신의 자의적인 뜻을 하나님의 뜻보다 높이는 자이다. 저자는 이 점에서 자의적인 통치는 우상숭배로 연결된다고 본다. 우상숭배는 자신의 절실한 필요(이를테면 비가 내리는 것)를 충족하기 위해서라면 살인(희생제의)도 정당화될 수 있다고 믿는다. 우상숭배자들의 철학은 오늘날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도덕적 상대주의에 가깝다. 하지만 구약의 이스라엘은 피조 세계를 구성하는 보편적 원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우상숭배의 도덕적 상대주의와 양립할 수 없었던 유대의 전통은, 아브라함때 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만은 그러한 우상숭배의 철학을 구현한 인물이었다. 진리가 아니라 하만의 욕망이 백성의 생사를 결정하는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이것만이 이유는 아니었다. 그것은 하만이 아각의 후손이었다는 점이다. 아각은 500년 전 이스라엘 왕국 초창기에 유대인들과 전쟁한 아말렉의 왕이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인들이 광야에 도착했을 때 아말렉 전사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학살한다. 그들의 공격은 전략적 선택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세상에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즐기는 것 외에 굳이 특별한 목적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러한 공격으로 그들의 명성이 높아지지도 않았고, 이스라엘의 의지를 약하게 할 수는 있었겠지만 이스라엘 주력과의 전투를 피할 가능성도 없었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즐기기 위해 다른 어떤 목적도 필요하지 않은 사람들이 분명 존재한다. 아말렉 사람들은 욕망에 한계를 두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유대인의 입장은 도덕적 한계선을 인정하며 두려워하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결국 이 세상에서 개인적 이익과 정치적 이득을 가져다준다는 것이었다. 권력 추구에서 도덕적 한계를 두지 않으며, ‘젊은이, 노인, 어린이, 여자들’할 것 없이 모든 유대인을 거리낌 없이 학살함으로써 모르드개를 굴복시키려 했던 하만은 “뒤에 처진 모든 사람”을 공격함으로써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려 했던 아말렉의 범죄를 정확하게 재연한다. 이런 아말렉족에 대한 성서의 심판은 엄중하다. 모세 오경은 아말렉 백성의 이름이 하늘 아래서 도말될 때까지 아말렉과 싸울 것을 천명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두려움을 느끼는지 여부가 핵심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이웃에게 다르게 행동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넘어서는 안되는 선을 인식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은 그런 선을 알지 못한다. 모르드개는 페르시아의 체제에 순종하고 있었지만 그 순종에는 분명한 선이 있었다. 모르드개의 입장에서는 하만 총리가 절대 권력자로 등극한 것은 ‘선을 넘은 것’이었다. 모르드개에게 그 선은 어떤 사람도 넘어가면 안되는 선이었다. 그래서 모르드개는 유대인의 정체성을 걸고 자신만의 싸움을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불복종과 공개적 항의로 나타난다.
국가 법에 대한 불복종의 주제는 에스더서처럼 하나님이 없는 것 같은 시대를 배경으로 할 때 그 의미가 더욱 두드러진다.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도와주실 것이라 (즉 기적을) 기대하면서 국가권력과 맞서는 것도 일종의 믿음의 행위이지만 하나님의 도움이 끝까지 올 것 같지 않을 때 (즉 기적을 기대할 수 없는 시대에) 국가권력과 끈질기게 맞서는 것은 다른 차원의 믿음이다.
모르드개의 불복종이 보여준 가장 큰 교훈 중 하나는 우리가 압제자들과 홀로 맞서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시대에도 (즉 하나님의 기적이 없는 시대에도) 체념하지 않고 유대적 행동주의를 지속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즉 세상 권세와 권력은 아무리 강력해도 (진리에 인도되지 않을 때는) 인간을 향한 주권, 즉 ‘명령할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주권은 궁극적으로 진리에 인도받는 개인이나 국가에만 있다. 유대주의는 자신의 사익에 끌려 혹은 자신의 타락한 본능에 따라 ‘올바른 것’을 정의하려는 통치자의 권위에 대한 반란이다.
모르드개의 전쟁은 불복종하는 사람들과 불복종을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의 전투다. 지배 욕망에 도덕적 한계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과 그런 한계를 수용하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의 전투다. 우상을 거부하는 사람들과 그런 우상 거부를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의 전투다.
모르드개는 어떻게 주저하던 에스더를 행동으로 이끄는가?
왕 앞에 나갈 수 없다고 하는 에스더에 대한 모르드개의 답변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의 답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모르드개는 ‘꼭 그 사람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누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바로 그 사람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고(“당신이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인지 누가 알겠습니까?”) 얘기한다. 또한 그 사람이 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이 할 것이라고 (“당신이 잠잠히 계시면 유다 사람은 다른 곳으로부터 놓임과 구원을 얻을 것이다) 말한다.
모르드개는 꼭 ‘에스더 당신이 아니어도 된다’고 하면서 바로 그 다음에 ‘당신이 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얘기하여 주저하던 에스더를 움직이게끔 한다. ‘내가 아니어도 된다’면 그냥 기다려도 될 것이다. 위험을 무릅쓸 이유가 있는가. 저자는 이러한 태도를 ‘종교적 수용주의’ (Religious Quietism)라고 부른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인간의 능력은 너무 작아서 정해진 이치를 거스를 수 없다는 생각, 인간의 노력과 관계없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상황을 바꾸려 하지 말고 묵묵히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태도이다. 이러한 태도 많이 낯익다. 한국의 개신교의 ‘거룩함’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 전까지는 움직이지 않겠다는 태도이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나의 뜻을 따라 움직이지 않겠다’는 태도가 ‘(하나님이 뭐라 하든) 나의 뜻대로 가만히 있겠다’는 태도와 구별될 수 없게 된다.
모르드개는 “당신이 침묵하면 당신과 당신의 가족들은 반드시 멸망하게 될 것이다”라고 한다. 상황이 아무리 엄중하지만 딸 같은 에스더에게 이런 저주와 같은 말을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모르드개 입장에서 이 말은 저주가 아니라 에스더를 구원으로 이끄는 말이었다. 페르시아의 체제에 순응해 살던 에스더나 모르드개와 같은 유대인이 유대인으로서 ‘살아 있다’는 증거는 바로 이러한 시점에서 밝혀진다. 여태까지 순응해 왔던 모든 요구들이 성경의 보편적인 진리와 반대될 때, 그로 인해 모든 것을 잃을 위기에 있을 때, 그때 그가 유대 전통을 이어받은 싸움을 싸우고 있는지, 아니면 이미 우상에게 잠식되어 버렸는지 밝혀진다. 에스더가 침묵하면, 그는 더이상 유대인이 아니며, 영혼없는 노예임을 드러내는 것이며 유대인으로서는 멸망한 셈이 될 것이었다. 박해받는 사람들의 외침 앞에서 돌과 나무 같이 굳은 마음과 굳은 얼굴을 하고 행동하지 않을때, 그녀는 자신이 만들어 섬긴 바로 그 거짓 신이 되는 것이다.
왕후 에스더의 위대함은 그녀 앞에 놓인 선택지가 무엇인지 이해할 때 드러났다. 2장에서의 에스더는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려 하면서, 자신을 위해서는 무엇을 해달라고 부탁하지 않는 유형이었다.
“그녀는 그녀 앞에 우뚝 솟은 공포의 대상, 그에 대한 두려움, 그 앞에 무기력한 마비 상태, 그것에 대한 망각 상태를 강화할 것인지 아니면 그녀 안에 있는 온 힘을 동원해 막대기를 집어들어 그것을 부수어 버릴지 선택해야 한다.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 깨달은 그녀는 이제 과거와 결별하고, 인생에서 처음으로 모르드개에게 명령을 내린다.
가서 수산에 있는 모든 사람을 모으고 저를 위해 금식하되, 사흘 밤낮 동안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십시오. 저와 제 시녀들도 그렇게 금식하겠습니다. 그런 다음 규례를 어기고서라도 왕에게 가겠으니, 죽어야 한다면 죽겠습니다. (4:16~17)”
에스더서에서 하나님은 어떻게 응답하시는가
에스더 서에는 하나님에 대한 언급이 나오지 않는다. 에스더 서의 가장 놀라운 측면은 하나님의 부재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부재가 반드시 패배와 절망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보편적 진리가 우리 모두의 의지에 공명하기 때문이다.이는 “유다 사람은 다른 곳으로부터 놓임과 구출을 얻을 것입니다”라는 모르드개의 말에 표현되어 있다.
“모르드개는 인간이 ‘주관적’ 세계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며 살아간다고 믿는다. 주체적으로 사람을 세상에 태어나게 하려는 의지들(부모들)로부터 그의 죽음 후에도 주체적으로 그의 싸움과 생각을 지속하려는 의지들(후손들)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주관적 실재와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에 있는 의지들이지, 단순히 조정되는 사물이 아니다. 이 다른 지성들은 각자 관심사들이 있지만 그 중 많은 관심사가 영원한 진리들에 영향받는다. 따라서 사람이 이 영원한 진리들에 투신하면 할수록, 그의 노력을 지지해줄 사람들의 무리(과거와 미래를 포함함)가 점점 더 커진다.”
주저하던 에스더를 움직이게 한 모르드개의 한 마디에 에스더의 의지가 공명하여 모르드개와 연대하여 에스더 자신의 싸움을 시작하게 된 것처럼, 모르드개가 하나님의 보편적 진리에 서 있을 때, 그를 지지하고 그와 함께 싸울 준비가 된 ‘다른 의지’들은 항상 존재한다고 저자는 본다. 이것이 모르드개가 그렇게 확실하게 말한 ‘다른 곳’의 의미라고 본다. 하나님의 보편적 진리에 공감했던 에스더의 결단은 결국 모르드개의 외침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된다.
“우리가 참된 것과 영원한 것, 사명을 향해 나아가려 한다면 ‘생명의 실재’는 우리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며 열 배, 만 배로 갚아준다. 우리가 우리 역할을 하면, 즉 우리가 이 땅에서 동원할 수 있는 힘으로 최선을 다하면 “다른 의지”가 응답할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외침에 응답해 그들의 역할을 하기 위해 행동하는 “다른 곳”들이 생겨날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어떻게 인간의 노력과 연결되는가?
하나님의 역사를 얘기하자면, 우리는 무의식 중에 뭔가 기적적인 것을 기대한다. 있을 법하지 않은 놀라운 일들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놀라운 간증을 늘 기대하지 않는가. 주인공은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지만, 이미 일들은 알아서 준비되어 있었다는 감동적인 스토리를 기다리지 않는가. 하지만 에스더서에 기적이란 없다.
저자는 사건을 바라보는 서로 구별되어야할 두 종류의 관점에 대해서 얘기한다. 첫째는 자연적 인과관계를 넘어서 자연에 개입하는 하나님의 행동으로 보는 관점이다. 이 관점에서는 자연 안에 원인이 있을 수 없는 기적을 하나님의 역사로 보며 자연적 인과관계를 하나님의 역사와 배치되는 것으로 본다.
둘째는 하나님의 역사를 인간의 정상적인 행동을 포함한 자연적 원인들에 의한 것으로 보는 관점이다. 이 관점에서는 하나님의 역사와 인간의 정상적인 행동, 하나님의 일하심과 자연적 인과관계가 서로 배척하지 않는다. 자연적 사건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질서에 의한 것으로 이해되며,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의 행위나 물리적 요인들을 통해서도 창발하게 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특정 인간 행동이나 물리적 요인들로 100퍼센트 환원될 수는 없고 완벽하게 설명될 수도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정 시대와 장소에 발생한 하나님의 역사의 ‘중요한 부분들’은 관련된 인간의 행동으로 인한 요소들이 있다. 요셉은 어떻게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갔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으며 총리에까지 오르게 되었는가? 모세는 어떻게 이집트의 궁성에서 자라게 되었고, 왜 광야로 도망가는가? 두번째 관점은 이렇게 구약 성서에 자주 등장하는 관점이다. 세상과 인간의 자연스런 작용들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수 있다는 구약의 전통은 에스더서에까지 흘러내려온다. 이 맥락에서 에스더 이야기에 하나님의 역사는 이미 전제되어 있는 것으로 간주할 수 밖에 없다.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당신이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인지 누가 알겠습니까?” 라고 말했을 때 모르드개는 하나님의 구원이 결국 에스더의 행위로부터 나타날 가능성을 보고 있었다. 에스더가 하나님의 보편적 진리에 공감하여 마음을 정한 후, 그녀가 하나님의 왕권을 세우기 위해 행동한 순간은 정확하게 그녀 자신이 직접 계획한 정치적 전략을 실행에 옮긴 그 순간이었다. 그 순간은 하나님이 에스더를 통해 당신의 역사를 이루시는 순간이었다.
구약의 시대를 통해 함께 하셨던 하나님은 에스더의 시대에도 그 사건들을 주관하고 계신다는 것을 에스더서는 천명한다. 에스더서는 하나님의 역사가 어떻게 인간적 혹은 물리적 요인들로부터 창발하는지 보여줌으로써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알아볼 수 있도록 가르친다.
마무리
2019년의 대한민국 땅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역사는 어떻게 알 아볼 수 있을까?
모르드개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보편적 진리에 대적하는 존재들에 대해서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까? 에스더처럼 하나님의 진리에 순종하는 자신의 삶의 결단으로 하나님의 응답을 실현해내고 있는가? 우리의 일상에서 우리의 삶의 한 부분을 위협하는 공격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직장에서의 ‘정치’로 인해 고민하는 후배는 이 관점에서 어떤 행동을 해야만 할까?
이 후기는 이 책에서 포괄하는 많은 주제들 가운데 일부분인 초반부 주제만 담았다. 중후반부에서 저자가 분석해 내는 에스더와 모르드개의 정치적 전략의 탁월함은 담지 못했다. 모르드개와 에스더는 어떻게 그런 탁월한 전략을 세우고 행동에 옮길 수 있었을까?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없으리라. 그만큼 평소에 준비해 놓은 부분이 없었다면 위기의 순간에 저절로 갖춰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페르시아라는 이방 땅에서 디아스포라로 살아남기 위해 그런 탁월한 정치적 감각은 어쩌면 필수였을 것도 같다. 현대 사회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도 그런 감각이 마찬가지로 필요할 것이라 생각 되는데, 한국의 기독교는 전혀 그런 준비의 필요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세상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면서 말씀에 순종함으로 세상을 변혁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정작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구체적 내용은 공허했었다. 그래서 이 책은 개인적으로 무척이나 중요하게 다가온다. 말씀에 깊게 근거하면서도 세상의 정치를 직시하는 관점에서도 공허하지 않고 풍성한 책이다. 그래서 이 책은 우리의 삶이 던지는 많은 질문들에 대해 이전과는 다른 관점에서 대답하게끔 하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