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5
이 열여덟 편의 에세이는 4년에 걸쳐 쓴 것이다.

2. 23
우리 침대 옆에 있는 서가에는 새로운 범주를 만들었다. "친구나 친척이 준 책". 먼저 그런 범주를 만들어 본 글쟁이 친구에게서 아이디어를 얻었는데,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그렇게 한 군데 모아두니 따뜻한 느낌이 들더라고 했다.

3. 44
그 구절을 읽는 순간 공감으로 인한 저체온증과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뜨거움이 결합되면서 몸이 부르르 떨렸다.

4. 59
아버지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일 주일 만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읽던 시력에서 시력검사표 맨 윗줄의 큰 글자도 읽지 못하는 시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플로리다 서해안에 살았는데, 나는 아버지를 모시고 마이애미의 배스콤 파머 안과 연구소로 갔다. 그곳에서 아버지는 망막 괴사 진단을 받았다. 기가 막히게도 그 원인이 80년 이상 잠복해 있던 수두라고 했다. 시력을 회복할 가능성은 적다는 얘기였다.

5. 63,65,66

내가 열한 살, 오빠가 열세 살 때 부모님은 우리를 데리고 유럽에 가셨다. 오빠 킴은 글을 읽게 된 후로 거의 매일 밤 그랬듯이, 코펜하겐의 앙글레테르 호텔에서도 침대맡 탁자에 책을 펼친 채 엎어 놓았다. 다음날 오후 방에 돌아와 보니 책이 닫혀 있고, 책갈피로 종이가 끼워져 있었다. 그리고 청소부가 서명한 메모가 표지 위에 놓여 있었다.
 손님, 책을 절대 그렇게 다루지 마세요.
오빠는 어리벙벙했다. 학교 기숙사에서도 나무 노에 맞을 각오를 하고 매일 밤 소등 뒤에 이불 속에 들어가 손전등 빛으로 책을 읽을 정도로 헌신적인 독자인 오빠가 책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으로 낙인찍히는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나도 오빠의 굴욕감을 이해했다. 나는 패디먼 가족보다 책을 더 숭배하는 가족을 상상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비행기에서 읽는 페이퍼백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다 읽은 장들은 찢어서 쓰레기통에 버리는 사람인데. 내 남편은 어떻게 생각할까? 그는 습기와 뜨거운 열기로 완전 분해된 책장들이 폭풍 속의 꽃잎처럼 떨어져 내리는 사우나에서 책을 읽는 사람인데.

바이런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 책들의 상태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어요.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밑줄도 긋고, 여백에 메모를 하기도 하고, 뜯어내기도 하고, 떨어뜨리기도 하고, 갈가리 찢기도 하고, 또 공개적으로 말하기 뭣한 짓을 하기도 했지요.

코펜하겐에서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침대맡에 펼친 책을 세 권쯤은 엎어 놓고 사는 킴도 책을 사랑한다. "그렇게 하면 언제든지 즉시 원하는 데부터 읽을 수가 있잖아. 전자 제품에 비유하자면, 책갈피를 끼우고 책을 덮는 것은 '멈춤' 단추를 누르는 것이고, 책을 펼친 채로 엎어 놓는 것은 '일시 중지' 단추를 누르는 것이지."

6. 75
나는 그 무렵 처음 어머니가 된 여자들이 수면 부족과 갑작스러운 정체성 재배치로 인해 빠져들게 되는, 환희와 공황이 뒤섞인 혼란 상태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7. 93
나 자신이 받아본 최고의 헌사. 남편의 책 속표지에 적힌 것.
 "내 사랑하는 아내에게... 이것은 당신의 책이기도 해. 내 삶 역시 당신 것이듯이."

8. 95
 매콜리 역시 아주 중요한 면에서 우리가 닮았다고 말할 것이다. 우리 둘 다 내가 "현장 독서" - 책이 묘사하는 바로 그 장소에서 그 책을 읽는 것-라고 부르는 것의 열렬한 신봉자이기 때문이다.
 우리 둘이 똑같은 취향을 지녔다는 사실이 더욱 반가웠던 것은 매콜리가 시대를 통털어 가장 위대한 독서가라고 할 만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세 살 때 독서를 시작해서 쉰아홉에 앞에 책을 펼쳐 놓은 채 죽었다.

9. 122
교열자 기질은 몇 가지 상호관련된 증상들을 거느린 더 큰 증후군의 일부인데, 그 증상들 가운데 하나가 발견 편집증이다.

10. 157
나는 그런 번득이는 눈길을 잘 안다. 내가 독서에 대해 느끼는 것이 바로 그런 마음이기 때문이다. 나는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하지만, 궁지에 몰리면 워터 피크 안내문이라도 읽을 것이다. 소도시의 모텔방에서 홀로 지낸 수많은 밤에는 전화번호부에서 위로를 받기도 했다. 오래 전 일이지만, 당시 내 아파트에서 적어도 두 번 이상 읽지 않은 유일한 문서 자료를 찾아내어 숙독하는 것으로 절망적인 불면증과 맞선 적도 있다. 그 자료는 내 룸메이트의 1974년형 도요타 코롤라 안내서였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중독, 금단 증상, 갈망, 공황), 수동 기어 조작 설명이 내게는 단테가 '천국편' 31곡에서 보여준 영원한 장미의 비전만큼 아름답게 느껴졌다.

11. 169
아이가 책을 가까이 하게 하는 방법 가운데 책을 쌓고, 세우고, 다시 배열하는 등 책에 온통 지문을 묻히게 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생각할 수 없다. 유리문이 달린 부모의 책장에서 마크 트웨인이나 발자크를 꺼내려면 먼저 손부터 씻어야 했던 다이애너 트릴링이 커서 애서가가 되었다는 것이 나에게는 놀라운 일이다.

12. 171
두 분의 책을 합치면 7천 권쯤 되었다. 새 집으로 이사를 할 때마다 목수가 와서 4백 미터 길이의 책꽂이를 짰다. 그리고 그 집에서 이사를 나오면 새 주인은 책꽂이를 뜯어 버렸다. 내 눈에는 다른 사람들의 벽이 벌거벗은 것처럼 보였다. 우리 집에는 사진의 평평하고 하얀 배경이 될 만한 벽이 존재할 수 없었다. 벽 자체가 예술이었다. 바닥에서 천장까지 박혀 있는 모자이크의 갖가지 색 타일들은 모두 세로로 길쭉하고 바짝 여윈 직사각형들이었다. 이것은 손을 대도 기분이 좋았지만, 오래된 종이의 먼지 냄새를 좋아한다면 코를 킁킁거려 볼 만도 했다.

13. 184
물론 가장 사적인 낭독은 연인들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대학시절 남자 친구의 좁은 침대에 함께 누워 있던 어느 날 오후가 기억난다. 우리는 공부가 끝날 때까지 유혹을 미루기 위해 발은 상대의 머리쪽으로 가게 반대로 누운 채 '낭만주의 시인들'이라는 두꺼운 밤색 책을 주고받으며 번갈아 블레이크의 '순수의 노래와 경험의 노래'를 낭독했다. 물론 오래 가지는 못했다.

14. 191
나는 책에 대한 책은 안사고는 못 배기는 성미다.

15. 207
그러나 슬프게도 잔인한 현실 때문에 환상에서 깨어날 수밖에 없다. 조지 오웰은 1936년에 쓴 "서점 추억"이라는 에세이에서 헌책방에서 점원으로 일하던 시절을 회상한다. 근무 시간은 길고, 가게는 매우 추웠으며, 책꽂이에는 죽은 청파리가 여기저기  널려 있고, 손님 대부분은 미치광이였다. 그 가운데도 최악은 책에서 점차 매력을 잃게 된다는 점이었다. "정말로 책을 사랑하던 때가 있다. 책이 쉰 살을 넘기만 하면 그 모습과 냄새와 촉감이 무척 좋았다. 시골 경매장에서 1실링을 주고 책을 떨이로 사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은 없었다. 그러나 책방에서 일을 하게 되면서부터 책을 사지 않게 되었다. 책을 한 번에 5천 권이나 만 권씩 덩어리로 보게 되자, 책이 지겨워지고 심지어 약간 역겨워지기도 했다."

16. 208
우리는 그 책들을 가게로 가져가 주제에 따라 분류했어. 역사는 왼쪽 벽에, 문학은 오른쪽 벽에, 철학은 위쪽 골방에. 그랬는데 갑자기 그 책들이 이제는 존 클라이브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더라고. 장서를 흩어놓는 것이 꼭 시신을 화장해 바람에 뿌리는 것과 같았다고나 할까. 무척 서글펐지. 그래서 나는 책이라는 것은 어떤 사람이 소유한 다른 책들과 공존할 때에만 가치를 얻게 된다는 것, 그 맥락을 잃어버리면 의미도 잃어버린다는 것을 깨달았지.

17. 218
나의 남편 조지 하우 콜트와 나는 책으로 서로의 환심을 샀으며, 서로의 자아만이 아니라 서재와도 결혼을 했다. 내가 양쪽에서 얼마나 운이 좋았는지! 조지는 편집자다운 꼼꼼하고 지혜로운 눈으로 이 책의 모든 말을 살펴보았으며, 여기 적힌 말의 많은 부분에 영감을 주었고, 그랜드캐니언에서건 책으로 가득찬 뉴욕시티의 우리집에서건 나와 함께 그 말을 겪어 왔다. 그가 나에게 보냈던 헌사를 점점 깊어지는 사랑으로 그에게 돌려주고 싶다. "이것은 당신의 책이기도 해. 내 삶 역시 당신 것이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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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심리/미국수필)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그렉 버렌트, 리즈 투칠로 ★★☆☆☆
⊙ 한국 실정에 다소 맞지 않은 연애론.
⊙ 섬세한 지적이 아니라 단순한 지적들.
    이래도 헤어져라. 저래도 헤어져라. 이런 식이라면 누구보고 연애를 하라는?

42. (건강/한국수필) ♣생로병사의 비밀♣ KBS 제작팀엮음, 홍혜걸 옮김 ★★★★★
⊙ 리뷰 쓰다.

43,44. (문학/스페인소설) ♣바람의 그림자 1,2♣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 (별 여섯개라...)
⊙ 다니엘 셈페레 마르틴, 훌리안 카락스, 페넬로페 알다야...
⊙ 눈을 휘어잡는 표지사진, 제목.
⊙ 몽환적 분위기
⊙ 할말을 잃다. 최고다.

45. (결핍/한국수필) ♣사는 게 거짓말 같을 때♣ 공선옥 ★★★★☆
⊙ 가난, 결핍이 묻어나는 글들. 허나 진솔한.

 

 

 

 

46. (영화/한국수필) ♣한국형 시나리오 쓰기♣ 심산 ★★★★☆
⊙ 알아야 할 사실들을 재미있게 알려 줌. 빠르게 읽힘.

47. (젊음/한국수필) ♣젊은 날의 깨달음♣ 고종석, 정혜신, 조정래, 홍세화... ★★★★☆
⊙ 조정래 : 치열하고 절절하여 가슴에 꽂히는 문장들.

48. (감동/한국수필)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 박경철 ★★★★★
⊙ 이 안에 우리가 겪지 못한 인생들이 있다.
⊙ 맑은 정신으로, 눈물 한번 훔치지 않으며 이 책을 읽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 심하게 감동적이다. 틀에 박힌 감동 아님. 상상을 뛰어넘는.
⊙ 정말 살 것 같았는데 죽어버리는 사람들, 죽을 것 같았는데 사는 사람들.
⊙ 이 많은 불쌍한 사람들. 그렇다면 나는...

49. (추리/영국소설) ♣가짜 경감 듀♣ 피터 러브제이 ★★★★☆

50. (문학/한국수필) ♣문학의 숲을 거닐다♣ 장영희 ★★★☆☆
⊙ 고전문학 소개
⊙ 빼어난 마력은 없는 글솜씨. 밋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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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春) 2005-04-30 0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는 정리법이군요. 깔끔하고 보기 좋군요. 그런데, 저 바람의 그림자가 그리 재밌나요? 스페인 소설... 로맹 가리가 스페인 사람인가요? ^^;;

진진 2005-04-30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굉장히도 잼나게 봤죠. 개인적인. ㅋㅋ. 로맹가리는... 러시아에서 태어난 프랑스 소설가라고 하네요. 알라딘에서 ^^
 
생로병사의 비밀 - 책으로 보는 KBS 생로병사의 비밀 시리즈 3
KBS 제작팀 엮음, 홍혜걸 감수 / 가치창조 / 2004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죽음의 내음으로 가득차다

어느날 보니 내 근처에서 ‘죽음’의 내음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가까운 사람이 갑상선 수술을 했고, 또 가까운 사람이 암으로 세상에서 사라졌다. 그렇게 나는 이 늦은 나이에서야 죽음에 대한 자각으로 한참을 헤메었다. 아니 그렇게 떠도는 내 정신은 여전히 행방불명중이다. 처음에는 믿을수 없었고 그 후에는 공포스러웠다. 60을 반으로 꺾으면 그 후미진 ‘각’ 근처를 맴돌만한 내 나이. 이제 ‘생성’보다는 ‘소멸’에 가까운 때는 아닌가 하여 사는게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아래로 아래로 향하다 결국엔 땅 속에 묻히는거야”

하루 열두번 얼굴을 씻으며 살을 아래로 쓸어내리고, 하루 열두번 붓질로 눈자위에 파란 아이섀도를 묻히다보니 하루하루 눈가의 살들이 처지는 느낌. 어느날 친척분께서 그러셨다. 사람은 처음엔 몸의 한부위가 처지고 그러다 전부위가 아래로 아래로 향하다 마지막에 땅속으로 들어가는거라고. 왠지 그럴듯했다. 나이가 들면 모든 것이 아래로 향하지 않는가. 섬뜩하리만큼 톡 쏘는 그 분의 말씀에 잠시 머리가 쭈뼛 섰던 것 같다. 그리고 두 눈으로 또렷하게 보며 '병'과 '죽음'에 강렬하게 묶여있던 나는 이 책을 흔쾌히 손에 잡았다.


아파요. 약 주세여. 플리즈. 

중고등학교때부터 한달에 한번 머리가 아팠다. 처음엔 죽을 병이 아닌가 했다. 오랜 후가 되어서야 그 통증에 일련의 규칙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 하루 이틀을 극심한 고통 속에 있으면서도 나는 알약 하나 손에 대지 못했다. 어릴적부터 감기에 아파 쓰러져도 약은 못먹게 하시던 어머니. 파인애플 통조림과 과일을 안겨주며 이불 덮고 푹 쉬라고만 하셨다. “엄마 약 좀 약 으으으” 끙끙대도 “약은 몸에 안좋다.” 한마디로 무시하셨다. --;


이빨에 아작아작 닿는 생라면의 감촉 

초등학생. 피아노 의자안에 숨겨둔 생라면을 꺼내서 동생과 스프를 뿌려 야금야금 몰래몰래 먹었다. “참 맛있는데 왜 못먹게 하는거지?” 투덜대는 순간 초인종이 울린다. 입에 붙은 가루 급히 떼어내고 의자속에 라면을 던져넣고 후다다닥 문을 열러 뛰어나간다. 인스턴트 반대론자, 어머님이시다.


세련되고 현대적인 도시락을 원한다고요. 아우. 

고등학생. 도시락에 찬란하게 박힌 비엔나 소세지와 각족 햄들. 그리고 붉게 한 점 찍힌 토마토 케첩. 친구들에게 애정 받을수 있는 메뉴가 이 말고 또 어디 있겠는가. 허나 가끔 각종 쌈과 맛깔난 양념장, 신기한 튀김멸치(볶음 멸치 아님) 등 독특하고 정성스런 반찬으로 눈길을 잡아볼 수는 있었지만 보편적인 애들의 먹거리가 내 도시락에 담길리는 없었다. 짜...짜...증스러웠다. 어머니 나름의 정성으로 유난을 떠는 것보다 그저 평범하게 그들의 도시락에 묻히고 싶었단 말이다. 햄, 참치... 먹고 싶다기보다 그들의 시선을 조용히 사로잡고 싶었다. --;


그래 바로 이 맛이야. 킁킁. 어디서 삼겹살의 내음이.

대학생. 그 집의 음식은 엄마의 식습관에 의해 결정된다. 대학교에 입학해 얼큰한 쏘주와 고소한 삽겹살을 처음 맛보던 그때를 잊을수가 없다. --; 나의 어머니는 육류를 그다지 즐겨하지 않으셨던 탓에 그제껏 집에서 연례행사로 불고기 따위를 먹을수 있었고, 무슨 날이면 갈비집 외식. 뭐 그런게 다였던 것이다. 촌...촌시럽기도 하지. 또... 꼬마부터 여고생에 이르기까지 집에서 심심하면 노란 국물을 입에 묻히며 밥에 쓱싹 비벼먹곤 하던 카레. 우리 집에서 단한번도 구경한적이 없었다. 저 노리끼리한 것은 외계의 음식? 고로 맛도 잘 몰랐다. 카레는 인스턴트였...던 것이다. 나는 그렇게 살았다. 집에서 라면을 끓여먹게 되는 날이면 정말 신이 났고, 갈비집에서 시키는 한잔의 사이다(콜라 아니다. 사이다가 그나마 몸에 좋다고. 꺅.)에 부들부들 좋아했고, 쏘주와 넘어가는 삼겹살의 감칠맛을 스무살이 되어서야 진득하게 깨달았던 것이다.


오래 살아 뭐하니?

그러던 어느날. 가정으로부터 정신적 독립을 시작한 ‘꺾어진 오십’ 즈음부터 내 삶은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정신적으로 독립했잖은가. 진짜 어른이 된 것이다. 먹는것도 내가 맘대로 골라 먹을거란 말이다. 건드리지 마셔. 콱! 인생의 맛도 어느정도 알겠고. 뭐 딱히 완전 늙어서까지 살고 싶지도 않고. 좋은것만 먹고 살아서 뭐하나 싶고. 괜히 센티멘탈해져서 몸에 쓴 것도 먹어보고 싶고. 짧고 굵게만 살다 가는거야. 크흥흥. 게다가 이 놈의 직장 스트레스가 오죽한가 말이다.


스트레스를 날릴 방법이란..

그때부터 달렸다. 건강을 위해 달린 것이 아니고 스트레스를 최소화하기 위해 달렸다. 스트레스로 그렇게 숨막히다가는 가슴에 한이 멍울 되어 죽을것만 같았으니까. 내 생사를 쥐고있는 사람이 내 머리의 뚜껑을 열게 할라 치면 카페인과 설탕범벅인 인스턴트 커피를 쭉쭉 들이키는 방법밖에 없었고(그를 흠씬 두들겨 팰수는 없지 않은가), 확 회사를 폭파시키고 싶을때면 초콜렛과 과자의 달콤함에서 허우적댔다.(회사가 자폭하는 일은 없지 않겠는가) 바빠 죽겠으니 5분간편 라면을 달고 살았고, 아파 죽겠으니 게보린으로 행복을 찾아보았다. 아휴. 삶이 얼마나 편해졌는지 그거 말도 못한다. 내 어찌 손톱만한 저 좋은 약을 두고 그 오래 끔찍한 두통속을 날았던가. 내 어찌 그 좋은 카페인을 멀리 하고 제정신으로 살 수 있었던가. 악마의 유혹은 그렇게 시작되었던 것이다...


뭐가 좋은지는 알겠다구요. 허나 악마의 유혹이..

지금에 와서 “그래서? 니 건강 나빠졌니?”라고 물으면 딱히 할 말 없지만 이렇게나 건강 무시한채 살다가는 십년후 이십년후를 장담하지 못하지 않겠는가. 이왕 살거 개운하게, 건강하게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더란 말이다. 내가 이제 더 이상 0살이던 탄생에 가까운 나이가 아니라 노년에 오히려 가까운 나이가 되어가는 것 같으니... 허나... 읽는내내 밑줄을 치고 그것도 모자라 이 책의 내용이 죄다 머릿속으로 꼼실꼼실 기어들어가는 상상을 했으면서도 식탁위에 얌전히 놓인 초콜렛과 빵을 입에 대고 말았다. 어느새보니 초콜렛 통은 사라지고 없었다. 나의 어머니께서 분명 숨겨두셨을 것이다. 유난스럽다고 해야하나. 먹고 싶어 슬퍼 미치겠다고 해야하나. 어딨냐 찾으면 그러실거다. “하루에 하나씩만 먹어.” 으어어어. 초등생이 된 이 새콤쌉싸름한 기분이여.


으어어어. 책 속에 어머니가 계셨어요. 무서워 죽겠네.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책 속에서 눈을 껌뻑껌뻑하고 계신 어머니가 보이는 것 같아 깜짝깜짝 놀랐다. 그녀의 장바구니엔 항상 과일이 많고, 특히나 요즘엔 한무더기의 토마토와 생선, 요구르트가 담겨오곤 한다.(‘이오’와 ‘에이스’ 사이에서 방황하시길래 ‘이오’가 끝맛이 좋다고 했다. 이게 무슨 소준가...쩝. 어쨌든 '이오'가 깔끔하다.) 식탁에 올라오는 대부분의 반찬은 콩에서 비롯된 두부, 콩나물이며 현미잡곡밥을 우적우적 씹어야 한다. 우리 가족은 고작 2~3가지의 반찬이라고 투덜대지만 개선되지 않는다. 정작 그녀는 우리가 주말오전 그르렁 잠에 골아 떨어진 사이 찐 감자, 요구르트와 인삼 간 것, 생선, 나물, 토마토, 두부 찌개에 마늘을 팍팍 넣어서 냠냠 좋은 것 조금씩 다 챙겨드시니 부족할게 없겠지. 룰루랄라 친구분들과 부지런히 공원을 걷거나 또 가끔 산에 가시니 스트레스 딱히 없으시겠지.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아니 이거 뭐야? 혹시 이 책 어머니 벌써 읽으신거 아니야?” 할 정도로 나의 어머니는 이상적인 생활습관을 가지고 계셨던 것이다. 엇... 바른생활 어머니?


토마토, 마늘, 녹차, 적포도주, 콩, 생선, 토마토, 마늘, 녹차, 적포도주, 콩, 생선

내가 잘한건 하나정도였던 것 같다. 녹차를 우려낸 물을 마시곤 하는데 이 책에 따르면 인체의 파수꾼이 녹차라 한다. 머릿속에 꼭꼭 눌러담고 싶은 책이었는데 지금 와 생각해보니 토마토, 마늘, 녹차, 적포도주, 콩, 생선, 걷기 정도만 기억이 나고 아 뭐가 이렇게 가물가물... 마늘을 어떻게 먹는게 가장 좋다고 했더라? 아... 마늘장아찌... 토마토는? 가열한게 제일 좋다고 했나? 아 가물가물... ‘항산화물질’을 많이 섭취하여 나의 이 기억력감퇴라는 치명적인 노화현상을 더디게  좀 해볼까? 나의 뇌 속에 건강을 세심하게 챙겨담아준 이 책은 시간이 나면 다시 한번 읽고 암기 정도는 기본으로 해야할 것 같다. 아... 상쾌하게 건강해진것만 같은 이 기분이여. 아... 그... 그런데... 벌써부터 커피의 유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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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5-04-29 0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요즘 읽는 책에 의하면 인스턴트 식품은 패스트푸드와 다르답니다. 영양분이 잘 갖추어 졌다는 얘기죠. 인스턴트가 무조건 안좋다는 건 편견이랍니다. 글구...삼겹살에 소주는 정말 환상적인 궁합이죠. 글구...카레 드실 때는 노란 국물 입에 묻히면 안됩니다.

로드무비 2005-04-29 0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참신하고 재밌는 리뷰예요.^^

날개 2005-04-29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단한 어머님이시군요.. 알아도 못챙겨 주는 경우가 많은데 저렇게나....^^

진진 2005-04-29 2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편견...옷. 그렇군요. 인스턴트 맛만 좋은데. 크흥. 삼겹살의 내음이.......습..

로드무비님: 에헹에헹.. 참신하다니 이것 참.. 조아라.

날개님: 당하는 사람은 괴롭다는... 훔... 지나친 것도 모자란 것도 싫고.. 그저 평범한 것이.. ㅋㅋㅋ

cienna 2005-06-20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집이랑 비슷한 집 또있네 -_-; 사탕이 사탄인줄 알았던 어린시절 -_-;(이름도 비슷하잖아요?) 그래도 우린 반찬이 풀만있진 않고 된장에 등푸른 생선이었는디 ㅋㅋ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렇게 그게 싫었었는데 저도 아이 낳으면 그렇게, 똑같이 키울 거 같아요.

진진 2005-06-22 1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아이 낳으면 저것보다는 조금 약하게 해서 키울지도.. 뭐든 과하면 안좋으니까여. ^^

서연사랑 2005-07-04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게 잘 읽고 갑니다~^^. 추천도 잊지 않았어요...(착하게,,,)

진진 2005-07-05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감사합니다. 즐찾 추가 잊지 않았어요. 착하게.. ^^
 

 

 

 

 

31. (드라마/한국수필) ♣방송드라마 창작 실기론♣ 김성의 ★★★☆☆
⊙ 드라마 공부를 가볍게 시작할 수 있는.

32. (대본/한국드라마) ♣한국방송작가상 수상작품집 1♣ 한국방송작가협회 ★★★☆☆
⊙ 김인영의 '결혼하고 싶은 여자' 대본을 소장할 목적이었으나 3회분 대본밖에 없었음.. --;

33. (드라마/한국수필) ♣TV 드라마 작법♣ 이환경 ★★★★☆
⊙ 31번 책보다 조금 더 깊이 있는.

34. (미술/네덜란드) ♣반 고흐, 영혼의 편지♣ 빈센트 반 고흐 ★★★★☆
⊙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 모음
⊙ 평생 가난에 시달린 반 고흐. 그의 미술을 향한 짙은 애정을 엿볼수 있는..

35. (기생충/한국수필) ♣기생충의 변명♣ 서민 ★★★☆☆
⊙ 적나라한 사진에 기절하고, 서민님의 유머에 웃고
⊙ 기생충의 정보를 몸에 새기고 며칠 식욕을 잃을것 같았으나 하루를 넘기지 않음. 

 

 

 

 

36. (분석/한국수필) ♣사람 VS 사람♣ 정혜신 ★★★★☆
⊙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글 잘 쓰네..

37. (조선/한국수필) ♣미쳐야 미친다♣ 정민 ★★★★☆
⊙ 조선시대 여럿 글에, 시골집 앞에 주렁주렁 열린 홍시가,
    우물가에 맑은 물 한 모금이, 가을 금빛 논에서 노니는 바람이 들어있네.
⊙ 비단결처럼 곱게 느껴지는 조선의 글 & 그림

38. (독일/한국단편) ♣별들의 들판♣ 공지영 ★★★★☆
⊙ 저자의 독일체류 경험을 바탕으로 쓴 6개의 단편소설 모음
⊙ 점점 상승곡선을 그리다 마지막 단편 '별들의 들판'으로 멋지게 마무리.

39. (사랑/한국소설) ♣열여덟 스물아홉♣ 지수현 ★★★★☆
⊙ 흡입력은 있음

40. (문학/독일소설) ♣데미안♣ 헤르만 헤세 ★★★★☆
⊙ 막스 데미안, 싱클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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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04-24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생충 너무 별점 짠 거 아니에요?ㅎㅎ

진진 2005-04-24 1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민 님이라 마음 같아서는 5개였지만.. 제가 워낙 적나라한 사진을 보기에는 마음 여린 여인이라... ㅋㅋㅋㅋ
 

4.20.


가시밭길임은 당연히 알겠고
궁핍할 가능성 99%.
그럼에도
'가고싶다'보다 더 '가야만 할 것 같다'라는 생각은...
'가고싶다'보다 더 '가는게 분명히 맞다'라는 생각은...
신의 계시를 받은게지?
ㅋㅋㅋ
자꾸 정신이 오락가락하는게...

건 그렇고 옆에서 쫑알대는 얄미운 참새에게 어떻게 꿀밤을 콩 때린담?
"로또 당첨돼서 미국으로 간다. 안녕~" 이라는 뻔한 뻥을 쳤더니
아주 웃으면서 "알았어. 잘 갔다와.크크크크. 우겔겔겔"

으...부들부들...


1. '글자가 미치게 좋다' - 무절제한 감정 표현
2. '글자는 마치 부드러운 꽃풍선 같아' - 어느 정도 우아한(?) 표현
3. '글자가 좋아' - 단정, 깔끔한 표현

사실은 1이 내 맘에 딱 맞는 표현이겠으나
나이가 들수록 단정한 3에 끌리는 것은...
여러 면에서 주목받고 싶고, 주목받아야 하는 '청춘'의 시기를 지나
여러 면에서 평범하게 묻히고 싶어하는 '**'의 시기가 도래했음을... 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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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ano避我路 2005-04-21 0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러 면에서 주목받고 싶고, 주목받아야 하는 '청춘'의 시기를 지나
여러 면에서 평범하게 묻히고 싶어하는 '**'의 시기가 도래했음을...
'**'의 시기라면? 노년의 시기? 허걱...
아침부터 풍선에 바람빠지는 농담했습니다.
극심한 황사로 인해 뇌마저 뻐걱거리고 있는 piano였습니다. 아 졸려...

진진 2005-04-21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노...노년의 시기....프흐흐흐... 흰머리만 없다 뿐이지... 그렇져... 마음은 어느새 노년? ^^ 오랜만이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