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를 향한 역사 - 시대의 건널목, 19세기 한국사의 재발견 민주주의 한국사 3부작
김정인 지음 / 책과함께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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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구입해온 책을 기반으로 알라딘이 추천하는 책들을 간혹 볼 때가 있다. 그렇게 얻게 된 책이다. 이 책은 민주주의의 한국사 3부작 중 첫 권인데 시리즈가 올해 초 완간되었다고 하여 3권 다 구비했었다. 최근에 구입한 책들은 거의 다 완독했고 파시즘을 읽게 된 김에 이 시리즈를 읽어보면 좋겠다 생각하여 읽게 되었다.

민주주의가 최선이고 정답이냐라는 물음에 대해서는 솔직히 회의적 시각으로 변해가는 중이다. 특히나 한국의 정당 민주주의는 양분화되어 소수당의 목소리는 묻히고 있는데다 그마저 다수당도 국민의 의견을 대변하고 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현실상 내가 가진 의견이 국회에 반영되기 어렵다는 이야기다. 정작 중요하게 해결되어야 할 과제는 산적해 있지만 그걸 외면하는 국회나 정부에 답답할 때가 많다. 그러나 어쨌든 지금으로선 민주주의가 차선책으로라도 가장 나은 대안일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책은 19세기부터 20세기 초 대중 운동의 한 정점이었던 3.1 운동 이전까지 정치체제의 변혁 과정에 대한 역사를 다룬다. 조선에서 대한제국을 거치기를 지나 일제강점기가 될 때까지 짧은 시간에 조선은 압축적인 정치 변혁 과정이 이루어졌다. 신분제의 해체와 더불어 서양 근대 개념이 수용되면서 민중은 억압되어 있던 불만의 목소리를 분출하기 시작했다.

민주주의의 역사를 시간순으로 나열하지 않고 키워드를 중심으로 목차를 구성하여 내용을 정리한 점이 눈에 띈다.
인민, 자치, 정의, 문명, 도시, 권리, 독립 말이다. 인민, 자치, 정의, 권리는 민주주의에 반드시 필요한 키워드라면 문명은 조선이 왕조 국가에서 벗어나 근대 국가로 발돋움하기 위해 (지식인이) 먼저 수용해야 할 키워드였다. 도시는 근대화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따르는 결과이고 독립은 나라를 빼앗긴 지식인과 민중이 함께 외친 함성이었다.

‘인민‘은 19세기 이전 동아시아에서 피지배층을 뜻하는 개념이었다. 그러다 19세기 들어 정치적 주체라는 의미로 변화되었으며 소외 계층이 인민화되는 과정을 수반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소외 계층이라면 노비, 여성, 백정이라고 할 수 있다.
1801년 공노비가 해방되고 1894년 사노비까지 노비 해방이 되었으나 신분적 차별의 뿌리는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독립협회는 노비제 잔재 청산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동학은 여성과 남성은 다 같은 종교인이며 과부의 재혼을 허가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기독교와 독립협회는 여성을 위한 교육과 계몽 운동을 벌였다. 찬양회는 여학교를 설립해야 한다 기치를 내걸었으며 여기에 독립협회도 함께 가담하여 활동을 해 나갔다.
백정은 조합을 만들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었고 동학농민전쟁 시기 농민군에 가담하기도 했다. 백정을 위한 목소리는 형평사 조직 후 모욕 호칭이나 교육 차별을 금지하는 등 본격적인 활동을 해 나갔다.

‘자치‘는 대안 공동체적 개념이다. 천주교는 학문(서학)으로 수용되었다가 이후 종교로 수용, 확대되었다. 천주교는 자치공동체로서 교우촌(하느님을 따르는 친구들의 모임)을 만들고 화전을 일구거나 옹기를 만들어 팔며 공동노동/분배하는 조직을 시도했다.
동학은 천주교의 인간존엄적 평등 논리를 수용하면서도 조선 고유의 습속은 거스르면 안된다는 교리로 시작하였다. 최제우는 ‘내 안에 하느님이 있다‘라고 했으며 최시형은 ‘모든 사람, 사물, 사건에 하느님이 있다.‘라고 말했다. 사람의 빈부귀천 뿐 아니라 사물, 사건에도 존엄성을 부여한 것이 놀랍다. 이들은 개인 수양이자 마음 공부를 가장 중요시했다. 자치공동체는 접주제(종교 공동체)에서 시작하여 포주제(정치, 군사 공동체)로 옮겨가는 모습을 보였다.
천도교는 인내천 사상으로 대중들을 종교 운동 안에 끌어들였다. 가족을 중심으로 한 종교 생활을 강조하였으며 시기에 맞게 독립과 민주주의를 추구했다. 의정회, 전도사회, 소년회 등의 조직을 꾸려 활동했다. 특히 천도교소년회는 경어를 사용하고 스스로 벌어서 먹고 살아야 한다는 원칙을 강조했다고 한다.

‘정의‘는 공평한 기회와 공정한 분배가 실현되는 투명 사회를 실현하기 위한 인민의 노력이었다. 삼정의 문란, 세도정치의 폐단으로 농민들은 생존권이 흔들렸고 이에 억눌렸던 설움이 봉기로 나타났다. 홍경래의 난을 비롯하여 수많은 농민 항쟁이 일어났다. 민란 중심 세력은 빈농이었으나 유지층과 지식인, 수공업자, 노비, 유랑민, 날품팔이 등도 동조했다고 하면 나라가 얼마나 썩어 있었는지 이해가 갈 만하다. 정부에서 삼정에 대한 해결책을 내놓았으나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도리어 폐해가 심해지자 동학농민전쟁이 벌어졌다. 동학농민군은 토지평균분작, 노비제와 천민 차별의 철폐, 청춘 과부의 재혼 허용, 지역과 문벌을 타파한 인재 등용을 강조하며 대의를 제시했다. 반봉건에서 시작한 전쟁은 청일전쟁을 전후로 반외세까지 더해진다.

‘문명‘은 근대적 시민이 되기 위해 받아들여야 할 개념이었다. 서양 문명관을 수용해야 나라가 부강해진다는 생각에 지식인들은 서양 학문에 주목하였다. 독립협회는 독립신문을 통해 서양 문명 담론을 전파하는 데 앞장섰다. 1894년 정부에 의해 보통 교육이 시작되었고 대중들의 호응도 이어지면서 사립학교 설립 붐이 인다. 음력 시간에 길들여져 있다가 이때 서양식 시간 관념이 받아들여지면서 양력이 일상에 자리하기 시작했다.

‘도시‘는 근대에 들어와 형성된 공간이자 자발적 결사체들이 시위나 집회로 목소리를 내는 공간이었다.
독립협회는 오늘날로 말하면 민회(국회)적 기능을 정부에 요구하였는데 고종을 비롯한 권력자들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이었고 이에 갑론을박이 벌어진다. 독립 협회는 매주 토론회를 열었는데 누구나 회원으로 가입할 수 있었지만 굳이 가입하지 않아도 토론회를 방청할 수 있었다고 한다. 토론으로 결성된 의견은 독립신문 등의 매체에 실어 독자에게 전달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맺어지자 국권 수호를 위해 전국에 284개의 결사체가 만들어지고 전국적으로 대중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이 시기 시위의 꽃은 독립협회가 주도한 만민공동회와 관민공동회가 아닐까 한다. 정부의 폭압적 진압이 아니었다면 좀 더 오래 유지될 수 있었을텐데 참으로 아쉽다.

‘권리‘는 ‘인권‘과 ‘민권‘을 자각한다는 의미였다.
조선에서는 신분제가 폐지되면서 인민화와 개인화가 동시에 진행되었는데 동학농민전쟁과 갑오개혁을 통해 제도화되는 과정을 거쳤음에도 본격적으로 개인이라는 개념은 20세기 들어와서야 비로소 자리잡았다. 특권이 해체되면서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벌어 먹고 살아야 한다는 자주노동이라는 개념도 퍼졌다(권세 있다고 남에게 빌붙어 얻어먹으려하는 자들은 더이상 좋은 시선을 받기 어려웠다는 뜻). 한편 교과서를 통한 윤리 교육으로 자립, 근면, 공공성에 대한 가치가 교훈적으로 전파되었다. 재판소 제도 설립 등 사법권이 제도화되고 신체형, 연좌제가 폐지되는 등 인권을 보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기도 한다. 개인의 권리가 중요해진 시대가 되었지만 국권이 피탈되면서 국권과 민권 사이에서 갈등이 벌어지기도 했다. 나라를 위해 개인의 권리를 내려놓을 수 있으냐는 지금도 생각해볼 문제이나 예전만큼 집단의 목소리를 내기란 어려워진 게 아닐까 싶다. 오늘날의 지방자치 제도를 내놓은 사람들이 있었다. 박영효의 현회 제도(인민이 법을 제정하면 이것을 의회에서 논의하자)나 손병희의 향자치 제도가 그렇다. 유길준의 부민회는 비록 한성에서 시작했으나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고 한다.

근대 말 식민지 초 조선에서 민중이 권리를 자각하고 목소리를 외치는 시기가 도래했다. 이 책은 그 과정을 상세하게 보여준다. 특히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한 여러 활동은 오늘날의 민주주의 형태와 비슷한 단면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게 한다. 정치 체제는 왕조 국가에서 전제군주정으로, 입헌군주제에서 공화정으로 흐름이 바뀌었다. 3.1운동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입헌군주제가 좀 더 대중적인 호응이 있었으나 민주공화정이 대세가 된다. 다음 권은 1920년대 이후부터 식민지 말까지를 배경으로 한 민주주의의 역사를 다루는 것 같다. 기대를 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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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9월 통합 임시정부의 헌법으로 1차 개헌을 통해 공포한 ‘대한민국 임시헌법‘의 제2조에 처음으로 주권 규정이 등장한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대한 인민 전체에 있다‘는 조항이 그것이다. 그런데 1925년에 2차 개헌을 통해 공포한 ‘대한민국 임시헌장‘의 제3조는 ‘대한민국은 광복운동 중에는 광복운동자가 전 인민을 대(代)함‘이라고 명시하고있다. 1927년에 3차 개헌을 통해 공포한 ‘대한민국 임시약헌‘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 국권은 인민에게 있음. 광복 완성 전에는국권이 광복운동자 전체에 있음‘이라 하여 임시정부의 주권이 원칙적으로는 인민에게 있으나, 독립하기 전에는 독립운동가가 이를 대리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1940년 4차 개헌에 따라 공포한 ‘대한민국 임시약헌‘ 제1조 역시 ‘대한민국 국권은 인민에게 있되, 광복 완성 전에는 광복운동자 전체에 있다‘라고 하여 1927년의 헌법과 대동소이하다. 5차개헌에 따라 1944년에 공포한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4조 또한 ‘대한민 - P29

국의 주권은 인민 전체에 있음. 국가가 광복되기 전에는 주권이 광복운동자 전체에 있음‘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제8조에서는 광복 이전에 주권을 갖는 광복운동자가 누구인지도 명확히 밝혔다. ‘조국 광복을 유일한 직업으로 인정하고 간단없이 노력하거나 또는 간접이라도 광복사업에 정력 혹은 물력의 실천 공헌이 있는 자‘가 바로 광복운동자였다.33이처럼 ‘광복운동 기간에는 광복운동에 공헌한 광복운동자만이 대한민국 전체 인민을 대신하여 주권을 행사한다‘는 조항에는 모든 인민에게주권이 있음을 전제하면서도 영토와 인민이 부재한 망명정부로서의 정체성을 반영한 ‘임시‘ 헌법으로서의 특성이 잘 드러나 있다. - P30

임시정부의 승인외교는 전후 처리 과정에서 임시정부가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고 신탁통치가 아닌 스스로 독립국가를건설하기 위한 모색의 일환이었다. 해방 직후 임시정부는 ‘당면정책‘을발표하여 국내로 들어가서 과도정권을 수립할 때까지 정부 역할을 할 것임을 천명했다. 하지만 미군정은 이를 거부했고, 임시정부 지도자들은개인 자격으로 귀국해야 했다. 승인 문제가 헌법 체계를 갖추고 27년간명맥을 유지했던 임시정부의 운명을 갈랐던 것이다. - P36

민주공화국의 의회는 본질적으로 국민 의사의 대의기관임을 헌법에 명기하되, 여건상 국내 선거가 불가능하므로 국내 원적을 기준으로 독립운동가가 해당 지역 선거권을 대행하도록 하여 의정원이 ‘임시‘임을 분명히 하면서도 의회가 국민의 대의기구임을 입증하여 정통성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 P43

4년 넘게 존속한 신간회는 전국적으로 140여 개가 넘는 지회를 바탕으로 두고 각종 정치운동과 사회운동을 주도하거나 적극 개입하면서 민족협동전선체로서 입지를 다져갔다. 하지만 조선총독부의 집요한 감시와 탄압, 그리고 민족주의 좌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진영이관철시킨 해소론의 벽을 넘지 못하고 사실상 해체의 길을 걸었다. -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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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밤 : 이태준 중단편전집 1 - 기생 산월이, 방물장사 늙은이, 달밤, 오몽녀, 봄 외 30편 한국문학을 권하다 7
이태준 지음, 고명철 추천 / 애플북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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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30년대 무렵 조선을 배경으로 쓴 이태준의 중단편소설을 모았다.


어느 날 어느 곳에서 그가 나의 옷깃을 스치며 지나간들 

내가 무엇으로 그의 걸음을 막을 수 있으랴.

모두가 한낱 그림자로다.


우리는 매일 어떤 사람을 만나고 마주하게 될까. 만남과 헤어짐도 다 어쩌면 인연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사람은 평생 마주하지 못하기도 하기에 하다 못해 전철에서 잠깐 스친 사람이라도 때론 그 일을 계기로 특별한 인연이 되지 않던가.

<그림자> 속 주인공은 안타깝지만 그 기회를 흘려보낸 경우 중 하나였다. 어쩌면 그렇게 스친 인연이라 강렬한 기억으로 남을 수도 있겠지만.


<결혼의 악마성>을 보면서는 결혼은 결코 낭만이 아니라 현실임을 자각할 수 있다. 아버지가 폭군이었던 주인공은 말랑한 사람에게 끌렸다(너무 젠틀한 사람도 바람둥이라고 거부했음). 결국 그는 정직하고 따뜻한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런 것만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던가. 현실주의자인 나는 돈 없는 결혼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반듯함만으로 세상을 살아가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다. 세상을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영민(또는 영악)해야 하기 때문이다. 주인공의 결혼은 결국? 자신의 이상과는 다르게 흘러갈 수밖에 없었다.


한편 6년 만에 동경에서 조선으로 돌아가는 <고향>의 주인공은 정작 고향이 낯설기만 하다. 비록 조선에서 태어나 자라기는 했지만 아버지의 일에 따라 계속 장소를 옮겨 다닌 그는 한곳에 정착하며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6년 간의 외국 생활도 그는 이방인 같은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는 고베 역 플랫폼에서 한 조선인 유학생을 만나 밥과 술을 얻어먹는다. 왠 오지라퍼인가 싶은데 그는 조만간 좋은 은행에 취직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시모노세키에서 만난 조선인들은 하나 같이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는다. 주인공은 과연 내가 조선에 가서 변변한 일자리를 얻을 수 있을지 걱정한다. 과연 실제로 어떻게 되었을까?


<아무 일도 없소>는 돈이 되야 하는 기사를 써야 한다는 편집장의 요구에 신문사 기자가 찾아간 곳에서 만난 기가 막힌 사연의 주인공의 이야기다. 기자는 생각한다. 이렇게나 말도 안되는 사람들이 많은데 어쩌면 이렇게 세상은 평화롭고 여유로울 수 있는가를 말이다. 이 이야기를 보면서 이것이 비단 과거의 일일까 생각했다. 오늘날도 더했으면 더했지 덜할 것 같지 않은 씁쓸한 생각.


동경에서 교육으로 세상을 바꾸겠다 생각한 <실낙원 이야기> 속 주인공이 있다. 그러나 이상과는 달리 개인이 읽는 책을 검열받고 조선어를 가르친다는 이유로 문제가 되는 등 교사 생활이 순탄하지 않게 흘러간다. 식민지 시기 교사들이 처한 상황을 간접적으로 느끼게 된다. 과연 이런 일이 얼마나 많았을지. 


<코스모스 이야기> 속 주인공은 부모님의 요구에 따라 부잣집으로 시집갔으나(주인공은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다)  상대는 배려나 의식이라곤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 과연 이후 그녀의 삶은 어떻게 되었을까? 


<꽃나무는 심어놓고>에서는 소작농의 이야기도 접할 수 있다. 조선 시대 양반에게 부림 받던 소작농도 어려운 건 마찬가지였겠지만 일제강점기 들어와서는 더 힘든 현실을 마주하게 되었다. 지주가 일본 사람으로 바뀌면서 자기 땅을 가진 사람이 아니고서야 버티기 어려워진 것이다. 살아왔던 터전을 반강제로 떠나게 된 이들은 부푼 꿈을 가지고 서울로 오지만 그 돈으로는 변변한 집은 커녕 여관도 구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주인공은 처자식을 데리고 떠돌고... 도청에서는 사쿠라를 심는다고 인부들을 동원한다. 이들에게 현실은 너무나 잔인하다.


표제작 <달밤>의 주인공은 매일 늦는 신문 배달 때문에 분통을 터뜨린다. 알고 보니 그는 부업으로 신문 배달을 하는 것이었다. 이를 안 주인공이 그를 짠하게 여기면서 이야기가 흘러간다. 

그러고 보면 어릴 적 신문을 보는 집을 그렇게나 부러워했던 기억이 있다. 당시만 해도 신문을 따로 보는 것조차 사치라 여기던 시절이었다. 이제는 신문이 귀하기는 커녕 소셜 미디어로도 뉴스를 보지 않는 시절이 되었다. 매년 신문 구독을 해주십사 하는 전화를 받기도 하니 참 세상이 많이 변한 것만은 분명하다.


위의 이야기를 비롯하여 여기에 실린 단편 소설은 대체로 엘리트나 룸펜도 있지만 대체로 가진 것이 없거나 어쩔 수 없이 내몰린 소시민들의 이야기들이 많다. 소설이지만 현실 풍자는 기본이고 약간의 블랙 코미디 같은 웃픔도 느낄 수가 있다. 

또 맛깔나는 이북 사투리를 간접 경험할 수 있는 것도 묘미다. 이태준의 소설을 가볍게 경험해보기에 적합한 책이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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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적으로 파시즘은 1919년 3월 23일 일요일 밀라노에서 탄생했다. 그날 아침 참전 퇴역군인과 전쟁을 찬양하는 생디칼리스트,
미래파 지식인‘, 언론인, 단순 가담자 등 약 1백여 명 이상의 군중이 산세폴크로(San Sepolcro)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밀라노 상공업연맹 회의실에 모여 "민족주의에 반하는 사회주의와의 전쟁을선포하였다. 그때 무솔리니는 자신의 운동을 ‘전우단‘이라는 뜻의 ‘파시 디 콤바티멘토(Fasci di Combatimento)‘라 불렀다.
그로부터 두 달 후 퇴역군인들의 애국주의와 급진적인 사회적실험인 일종의 ‘국가사회주의(national socialism)‘가 교묘하게 결합된 파시즘 강령이 발표되었다. - P29

보수주의·자유주의 · 사회주의와 같은 ‘이름‘들은 정치가 교인의 일이었던 시대에 처음 만들어져, 상대방의 감성과 이성에 호소하는 교육받은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끈질기고 학구적인 의회 토론을 거치면서 구체적인 형태를 갖추었다. 고전적인 ‘이름‘은 그사상을 뒷받침하는 철학과 그 이름들의 강령을 검토함으로써 설명하는 것이 아주 자연스럽다.
하지만 이와 대조적으로 파시즘은 대중 정치 시대에 급조된 새로운 고안물이었다. 파시즘은 세밀하게 연출된 의식과 감정이 가득실린 수사(修)를 적절히 사용하여 사람들의 정서에 주로 호소했다. - P53

이 책은 목각인형이나 본질 같은 것은 잠시 옆으로 밀어두라고제안한다. 그러지 않으면 파시즘을 고립시켜서 보게 되는 고정된시각과 관점에 휘둘릴 수 있다. 우리는 살아 움직이는 파시즘을 보아야 한다. 탄생 순간부터 격변을 맞으며 생을 마치는 마지막 단계까지 파시즘과 사회가 형성한 복잡하게 얽힌 상호관계 속에서 파시즘을 보아야 한다. -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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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면의 조개껍데기
김초엽 지음 / 래빗홀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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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에게 이야기를 건네기, 살아 있다는 감각을 놓치지 않기, 나 중심 사고 돌아보기 등등 소설을 읽으면서 생각했던 것들이다. 김초엽 소설을 읽을 때마다 그럴싸한 현실적인 이야기를 상상으로 빚어낸 이야기로 놀라움을 주는데 이번에도 역시 그래서 좋았다. 그는 현실적인 문제를 SF적 상상으로 풀어내 독자에게 질문함으로써 각자의 생활 속에서 고민 속에 얻은 해답을 현명하게 풀어낼 수 있는 하나의 대안을 제시하는 것 같다.


단편 소설이라 시간이 날 때마다 한 편씩 읽었다. 대부분이 좋았는데 아래는 특히 내게 와닿았던 소설이었다. 


<수브다니의 여름 휴가>는 흥미로운 소재에 박진감 있는 전개로 순식간에 몰입하며 읽을 수 있는 소설이었다. 책의 포문을 열기에 적절했다 생각한다. 

'인간의 살갗인 이 부드럽고 연약한 피부가 다른 물성으로 된 것이었다면?' 이 소설은 그 물음을 조심스럽게 던진다.

금속 피부를 이식한 수브다니를 보면서 나는 단순하지만 어릴 적 만화에서 본 기계 인간을 떠올렸다. 영원한 생명을 꿈꾸던 인간이 기계의 몸을 주는 행성에 가 기계 인간이 되는 그런 이야기였다. 그렇지만 영원의 삶을 살 수 있던들 무슨 소용일까, 유한한 생명이어서 값진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어린 나이에도 했었더랬다.  

어쨌든 나는 수브다니가 금속 피부를 이식한 이유가 너무 의외라서 놀랐다. 금속 피부를 애써 고집하는 그를 보면서 주문을 받은 이는 그의 내막을 궁금해하고 이후 수브다니의 개인적 사정이 밝혀지면서 이야기는 의외의 전개로 흘러간다.

과연 자신이 원하는 대로 외형을 바꿀 수 있다면 삶의 어떤 것에도 만족할 만한 결과가 따라올까? 인공 장기, 인공 피부... 여전히 윤리적 문제는 남아 있기에 조심스러운 부분이다. 수브다니는 결국 자신이 원하던 여름 휴가를 떠났고 자신이 원하던 결과를 얻었다. 내가 생각하고 지향하는 바가 상대에겐 낯선 것일 수 있다.   


<양면의 조개껍데기>는 과연 표제작다운 소설이었다. '여러 명의 자아를 가질 수 있다면?' 실제로 그런 이들이 있었다. 

여러 명의 자아가 갈등하고 충돌하여 분열을 일으킨다면 어떻게 될까? 그래서 결국 다 쪼개져 분리되어 버린다면?

나는 평소 내 안의 자아도 여러 명이 살고 있나 생각할 때가 있다. 자아를 과연 단일한 모습으로 규정할 수 있을까 해서다.

종종 "너 답지 않게 왜 이래?" 혹은 "평소답지 않게 왜 그래?"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반감이 든다. '내가 가진 본 모습이라는 게 어떤 거지?' '나다운 게 뭘까?' 사람은 어떤 모습으로 규정하고 싶어하고 그래야 복잡하지 않고 정리하기 편하니까 그렇게 묻는 걸까 할 때가 있다.

어쨌든 내 안에 여러 자아가 있다는 가정은 실제 분리된 자아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가정이라 흥미로웠던 것 같다. 과연 주인공은 여러 명의 자아와 화해하여 좋은 결말을 맺었을까?

더불어 나, 인간, 지구 중심의 사고에 우리가 얼마나 길들여져 있는지 곱씹게 하는 부분도 있어서 좋았다.


<진동새와 손편지>는 앞선 두 작품에 비해서는 재미 면에서는 덜하다. 그렇지만 지구인의 문자 기록 역사와 언어 소통 문화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만들었다. 지구인은 당연하게 생각하는 문자 기록과 언어 소통이 비지구인에게는 낯설 테니까 말이다. 

과거부터 인간은 왜 자신만의 언어를 가지는 것에 집착하며 기록에 집착했을까. 진동새는 촉각으로 질감과 진동으로 정보를 얻는다고 한 것처럼 감각으로도 의사 소통을 충분히 할 수 있는데 말이다. 사실 다양한 언어가 있다는 것이 다양성 면에서는 좋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번거롭고 복잡하다고 여길 수도 있다. 물론 다양한 언어를 배우는 재미가 있고 외국어 소통을 위해 통역사라는 직업도 존재할 수 있었지만. 기록 문화는 확실히 매력이자 강점이라고 생각한다. 흘러가버리면 그만인 것이 기록화되어 오늘날 사람들이 직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에 특별한 가치를 부여하고 미래에도 전수하기를 원한다고 생각한다.


<달고 미지근한 슬픔>은 살아 있는 감각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시대 속에서 그 감각을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들이 나온다. 데이터 조각이 되버린 인간에게는 의미를 찾는 일에 몰두하는 일 밖에 남아 있지 않다. 감각한다는 것이 소용 없는 일처럼 되었기 때문이다. 그 어느 때보다 이어져 있는 세계 속에서 인간은 연결되어 있는가 하는 질문이 남았다. 예전보다 그 고립감과 공허함은 더욱 커지지 않았나 해서다. 이제는 예전보다 더 쉽게 연락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전화번호를 누르는 일이 더 어렵게 되어버린 것 같다. 


<비구름을 따라서>는 어떤 한 사건을 계기로 주인공과 조금씩 얽혀 있는 사람들이 서로 만나게 된 것을 계기로 시작하는 이야기다.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로 옮겨갈 수 있다면?' 사실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를 생각해본 적이 없다. 생각해보려면 상상했을 때 무언가 떠올라야 하는데 전혀 그런 게 없다. 이 세계가 좋아서일 수도 있지만 적응하며 사는 것이 자연스러워서이겠지.

아무튼 여기에는 다른 세계로 가고 싶어하는 사람, 다른 세계에만 관심 있는 사람(이 세계를 떠나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 세계에 어떻게든 발붙어 사려고 노력할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몸과 마음이 다쳐 고통스러울 때도 있지만 별 수 있나, 살아야지. 그치만 그게 안될 만큼 힘겨운 사람도 분명 있다. 주인공은 하나의 일에 정착하지 못하고 계속 옮겨다닌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그래도 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를 고민하는 모습이 짠하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하다. 작가가 쓸모가 있어야만 하는 이 세계를 비판하려 했는지 모르겠다. 비구름을 따라가자는 마지막 말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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