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하원 비미활동위원회(이하 HUAC로 표기함)의 활동은 1938년에 시작되어 1975년에야 중단되었다. 유명한 공개 재판들이 있지도 않은 실체를 쫓은 ‘마녀사냥‘만은 아니었다. 미국에는 실제로 공산주의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노동조합, 헐리우드, 정부 여기저기서 활동했고, 많은 아프리카계 및 유대계미국인이 미국공산당에 입당했다. 1930년대에도 공산주의자가아주 인기였던 적은 없었지만, 2차 세계대전 후 달라진 것이 있다면이제는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매카시즘은 특히 대통령과 미국 연방수사국(이하 FBI로 표기함) - P43
이 주도한 하향식 과정이었다. 반공주의 합의를 도출하고 전파하는 데 앞장섰던 FBI 국장 J. 에드거 후버는 HUAC에 출석해 매카시즘이 바탕을 두었던 몇몇 가정들을 널리 알렸다." 후버는 공산주의자들이 미국에서 무장 반란을 일으키려고 계획 중이며, 그러한 반란이 일어나면 경찰력이 마비되고 모든 통신수단이 장악될 것이라고 했다. - P44
위즈너는 1944년 9월, 루마니아로 가서전쟁 중 미국이 임시로 세운 첩보기구인 전략사무국(이하 OSS로 표기함) 지국장을 맡았다. 그곳에서 그는 소련이 루마니아를 차지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말을 듣고 그렇게 믿었으나, 본국의 상관들은 동맹이 그런 짓을 할 리 없다는 분위기였다. 1945년 1월, 스탈린은 루마니아에서 독일계 남녀 수천 명을 소련으로 데려가 "노동동원"하라고 명령했다. 대상자 중 몇은 위즈너와 아는 사이였다. 강제 이주가 시작되자 그는 미친 사람처럼 시내를 돌아다니며 그들을 구출하려 했다. 하지만 위즈너는 실패했고, 수천 명이 유개화차에 실려 강제노동수용소로 끌려갔다. 그의 가족들은 그 장면들이 뇌리에 박혀 파란만장한 삶 내내 그를 괴롭혔다고 말했다. - P52
같은 시기, 미국 외교 정책 기구의 정반대 부분에서 일하는워드 팔프리 존스라는 아주 다른 류의 인물이 위즈너의 OSS 전 상사였던 앨런 덜레스와 함께 베를린에 도착했다. 그는 외교관이자참전용사로 일찌기 독일 국가사회주의의 참상을 목격했다. 그는1934년 독일에 여행을 갔다가 나치 깃발에 제대로 경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나치 군인에서 두들겨 맞은 적도 있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이미 성인이었던 존스는 참전해서 독일에 있었다. 종전 직후 그는 국무부에 들어갔다. 존스는 단호한 전사인 위즈너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세계에 접근했다. 모든 상황을 전 지구적인 흑백 대결로 보지 않고 각 상황의 복잡성을 깊이 파고들어 해결책을 찾고자 했다. -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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