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생존 전쟁을 치르다 : 행랑어멈과 식모들*우리 시대의 커리어우먼 역사 속 여자, ㅇㅇ하다 4
이아리.권혁은 지음 / 푸른역사 / 202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 집은 엄마(또는 할머니)가 먹여 살렸는데˝라는 회고는 한국 사회에서 낯설지 않다. 압축적인 근대화와 산업화를 겪었던 한국 사회는 매우 오랜 기간 여성들의 노동에 의존해 생계를 도모하고 살길을 찾아온 역사였다.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하면서도 여성들은 스스로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혹은 삶의 의미를 찾고 자아실현을 이루기 위해 노동을 했다. - P11~12

의미 있는 내용의 신간이 나왔다. <역사 속 여자 OO하다> 시리즈다. 우선 4권의 책이 나왔는데 덜컥 한꺼번에 사기보다는 한 권을 먼저 읽어보기로 했다. 1권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4권이었다는. 다른 무엇보다 4권의 제목과 내용이 가장 먼저 끌렸다.
이 시리즈가 왜 기획되었는지 독자들 입장에서 대부분 어느 정도 짐작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역사학계에서 일하는 여성학자들은 역사 속 사료를 보고 읽으며 여러 번 한계를 마주한다. 남아 있는 사료와 기록은 대부분이 남성이 쓴 것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료 속에서 아무리 이를 잡고 헤집어봐도 여성들의 목소리를 접하기란 쉽지 않다. 근현대 이후 시기부터 여성들이 글을 쓰기 시작했지만 그 전에는 그런 경우도 드물었으니 말이다.
이 시리즈는 2024년 여성 사학자들 몇몇이 담소를 나누다 의기 투합하여 기획하게 되었다고 한다.

4권의 내용은 먹고 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다. <여자, 식모 살다>를 통해서 근대 시기 행랑어멈과 식모에 주목을 했다면 <여자, 회사 가다>는 여성이 회사에 취직하고 맞닥뜨린 현실을 다룬다. 여러 사료를 접목하여 사건을 재구성하여 독자가 당시의 현실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행랑은 본래 근대 이전 하인들이 주인이 사는 안채와 분리되어 사는 공간이었다. 그러다 1894년 갑오정권의 개혁 내용으로 신분제가 공식적으로 폐지되면서 노비들이 차차 주인을 떠나자 그들을 대신해서 지방에서 농사를 짓고 살다가 경제적으로 몰락해서 상경하게 된 농민들이 서울 양반집의 행랑채를 채우게 되었다.
식민 지배가 어느 정도 안정되자 단기간만 조선에 머물던 재조일본인들이 가족을 이끌고 상당수 들어오며 서울에 자리하기 시작했다. 확산 중이던 서울의 행랑살이는 주택난이 심화되면서 쇠퇴했다. 게다가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전시 호황을 누린 일본은 젊은 여성 공장노동자들을 고용하는 섬유공업이 크게 발달하였다. 이 때문에 일본 본토에서도 식모 일을 할 만한 젊은 여성이 크게 부족해졌다. 반면 조선의 재조일본인 가정들은 달랐다. 조선인 식모가 일본인 식모에게 주는 급료의 6활 정도만 주어도 기꺼이 일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이들은 조선인 식모를 고용하기 시작했다. 일본인들이 모여사는 진고개에는 치마저고리를 입은 채 발에는 일본식 게다를 신고 딸깍딸깍 소리를 내며 돌아다니는 조선인 여성들이 늘어가기 시작했다 한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는데 식모살이를 하려는 여성들이 어떻게 재조일본인 가정에서 일을 할 수 있었을까. 대부분이 어려운 형편에 돈을 벌기 위해 시골에서 상경한 여성들일테니 서울에 아는 이는 없었을 것이다. 이들은 다름 아닌 직업소개소를 통해서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1920년대부터 주요 도시에 국가적으로 인사상담소가 생기기 시작했는데 1920년대 중후반 무렵에는 인사상담소가 전문 ‘직업소개소‘로 분리되기 시작했다 한다. 직업소개소에서 부르던 공식 명칭은 ‘호내사용인‘으로 여러 직업 중 식모가 전체 중 절반 이상을 차지했을 정도라니 놀랍다.
그러나 당시 식모를 보는 사회적인 시선은 별로 곱지 않았다. 언론도 그렇고 남성들의 편견도 많았다.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먹고 살기 위해 직업을 선택한 경우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허영심 있거나 유혹하는 여성으로 보는 경우가 많았다. 여성들은 범죄에 연루되거나 성폭력 및 인신매매의 희생양이 될 위험성이 많았음에도 사회는 개인에게 책임을 지웠다. 이는 예나 지금이나 한결 같은 모습인 것 같다.

대학을 간다 했을 때 부모님을 설득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기억이 난다. 하필 나라 경제도 어려웠고 살림이 팍팍했을 때니 말이다. 그래도 여성이 대학을 간다고 해서 이상할 것이 없었던 때였다.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전두환 정부의 정책 때문이다. 전두환 정부는 과외 과열 해소를 명분으로 1981학년도부터 각 대학에 기존 졸업정원의 30퍼센트를 추가 선발하되, 그만큼을 중도에 탈락시키도록 했다.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정부에겐 당장 눈에 띄는 치적이 필요했다. 그 일환으로 입시 지옥을 해소하겠다며 과외 금지와 함께 졸업정원제를 내세운 것이었다. 졸업정원제는 대학생 수를 급격히 팽창시켰다. ... 여대생 수 역시 급격하게 늘어났다. 여학생이 점차 고등교육에 진입하기 시작했고, 고등학교만큼은 아니었지만 많은 부모가 딸에게도 대학 교육을 시키기 시작했다. - P102~103
전두환 정부가 과외 금지를 한 것은 알고 있었는데 졸업정원제를 시행했다는 이야기는 자세히 알지 못했다. 아무튼 늘어난 대학생 정원만큼 여학생의 수도 자연스레 늘어난 것이다.

1993년 8월 서울대에 심상치 않은 대자보가 붙었다. A교수의 성폭력을 고발하는 대자보였다. 대자보를 붙인 여성은 조교로 불쾌한 일을 겪었다. 무언가 잘못 되었다를 느꼈는데 전임 조교로부터 자신과 똑같은 일을 겪었다는 사실을 알고 ‘이 사람은 상습범이구나.‘느꼈다. 짐작하겠지만 대자보를 붙인 후 논란과 더불어 거센 후폭풍에 휩싸였다. 그럼에도 그녀가 대자보를 붙일 때 그것을 찢으려는 이들을 막아선 학생들, 대학본부와 학과의 외면 속에서도 먼저 진상조사단을 꾸렸던 학내 단체들, 끝없는 법정투쟁을 함께하며 곁을 지켰던 활동가들, 멀리서 연대의 목소리를 보내 온 시민들, 그들이 있었기에 단 한 장의 대자보가 시대를 움직일 수 있었다.
1999년 2월, ‘남녀고용평등법‘이 개정되며 ‘직장 내 성희롱‘ 개념이 명문화되었다. 또한 사업주가 직장 내 성희롱 예방교육을 의무적으로 실시해야 하고, 성희롱 가해자에 대한 부서 전환과 징계 조치를 취해야 하며, 피해 근로자에게 고용상의 불이익 조치를 취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이 들어갔다. 여성을 채용 공고에서부터 배제하는 일이 법적으로 금지되었고, 이제 직장 안에서의 성희롱이 법적으로 금지되었다.

작고 얇은 책인데 쉬우면서도 알차다. 앞으로도 이 시리즈에 관심을 가지며 읽게 되지 않을까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