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역사 - 상 - 제8판
니콜라스 V.랴자노프스키.마크 D. 스타인버그 지음, 조호연 옮김 / 까치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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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재료는 바로 지속성이다. 비록 모든 역사적 사건이 독특하고, 따라서 모든 일련의 사건들이 유동성과 변화와 다양성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현재에 의미를 부여하고 우리가 역사를 가지도록 해주는 것은 주어진 현재와 과거의 관련성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지속성을 구성하는 세부적인 사항은 주장일 따름이고, 종종 논란거리가 된다. 비록 겉보기에는 별문제 없이 보이는 이 책의 표제도 하나의 주장이다. 왜냐하면 많은 특정 민족들, 문화, 역사를 "러시아"라는 제목 아래에 담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중에는 러시아어가 아닌 언어를 구사하면서 스스로를 러시아와는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민족들도 포함되어 있다. 그중 일부는 나중에 차이점을 인식한 데에서 영감을 얻어 민족국가로서의 독립을 얻어내고, 자신들의 역사가 러시아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하게 된다. - P30~31


오늘날의 러시아가 오기까지 역사는 어떠했을까. 다민족으로 구성된 국가임을 알고는 있지만 지금의 모습이 되기까지 과정이 궁금했다.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이 도무지 끝날줄 모르는 상황을 보며 답답한 마음과 안타까움이 이는 까닭에 분석하고 싶은 이유가 있었다. 또 러시아 관련 문학 작품을 더 잘 읽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앞선 인용문을 통해서도 느끼지만 러시아의 역사는 복잡다단한만큼 사소한 것 하나라도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필요가 있다 느꼈다.

러시아의 기원은 키예프부터가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키예프국은 동슬라브족을 통일하고 비잔티움과의 전쟁 끝에 강화조약을 체결하면서 부상했다. 전성기(980~1054년)의 키예프는 영토를 확장하고 유럽의 많은 지배가문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으며 같은 시기 유럽의 국가들처럼 기독교를 수용했다(로마가 아닌 비잔티움으로부터). 키예프는 지배 하에 있던 영토에서 모피, 밀랍, 꿀, 노예 등을 공물로 거두고 비잔티움 등과 교역하며 상업을 발전시켰다. 사회는 최상위층이었던 공, 보야르(귀족), 드루지나(가신), 스메르디(농민), 자쿠피(반자유농민), 수공업자, 노동자, 노예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공은 군사 지휘권 뿐 아니라 재판권, 행정권을 지니고 있었다. 보야르, 드루지나가 이에 협력하였으나 전쟁 등을 논의하거나 긴급 법령 등을 결정해야 할 때는 민회가 소집되었다. 

이런 키예프가 몰락하게 된 것은 내부적으로는 교역로가 파괴되고(국제 교역에서 키예프의 가치가 떨어짐) 정치 체제가 실패(합의 없는 무력에 의한 지배, 친족 간의 공동 통치, 형제 간 순환 통치 간의 갈등)하면서 국가 붕괴를 이끈 탓이 크다. 거기에 남동쪽 스텝 지대에서 끊임없는 외부 세력의 공격으로 소모전을 치룬 이유도 더해졌다. 


공의 독립 보유지에 따른 분령지가 급속히 늘어나면서 분열이 시작되었다. 키예프는 대외적으로 끊임없이 공격을 받았는데 특히 1240~1380년까지의 몽골이 핵심 타격이었고 남서부는 리투아니에게, 북부는 노르웨이, 독일, 스웨덴에게 의해서였다. 키예프인들은 언어적, 민족적으로 갈라져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인 세 분류로 나뉘어지게 되었다. 몽골이 남부 러시아 스텝 지대를 차지하면서 러시아인들은 영토를 빼앗기고 권력의 중심이 북동쪽으로 이동하여 유럽과 단절되는 계기가 되었다. 


오늘날 많은 역사학자들은 분령 시기가 위기와 생존의 시기였을 뿐만 아니라, 공국들 사이에서 앞을 향한 경쟁의 시기이기도 했고, 변화의 시기이기도 했다고 본다. 각각의 공국들은 키예프의 과거에서 자신들의 유산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중 모스크바가 경쟁 공국들을 물리치고 승자로 입증되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역사적 시대 구분이라는 언제나 골치 아픈 문제에 대한 관점에서 보면, 역사학자들이 키예프와 분령 시기를 "중세 러시아"로 부르며, 중앙집권화된 모스크바국의 성립기를 "근대 초기의 출발이라고 규정하는 경향은 점차 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러시아 발전의 독자성보다는 폭넓은 유럽적 흐름과의 비교 가능성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 P103


15세기 초 킵차크 한국은 크림, 카잔, 아스트라한으로 분리되고 모스크바는 1480년 몽골로부터 완전히 독립한다. 

모스크바 러시아 시기 이반 3세(1462~1505년)는 흩어져 있던 주변 공국들을 모으며 통합하는 과정을 진행했다. 이반 3세는 비잔티움 공주인 소피아와 결혼하면서 통치자로서의 권위를 높였다. 리투아니아는 모스크바와 결혼 동맹을 맺었으나 이는 중앙 집권적 정치를 진행하던 모스크바가 지방 분권형 정치를 진행하던 리투아니아에 대해 우위에 서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혁명 이전의 대부분의 러시아 역사학자들은 모스크바의 성장이 모스크바 공들과 러시아 민족의 위대하고도 필연적인 업적이라고 찬양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외부의 침략을 받고도 살아남아서, 역사에서 자신들이 맡은 역할을 담당하기 위해서 통합해야 했기 때문이다. 소련시기의 역사학자들도 동일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고, 이 주장은 소련 이후의 공식적인 역사 교과과정에서, 그리고 러시아 지도자들이 민족의 과거에 대해서 언급할 때 소중하게 다루어진다. 반면에, 프레스냐코프 같은 혁명 전의 러시아 역사학자들, 오늘날의 많은 서구 역사학자들, 그리고 당연하게도 폴란드, 리투아니아, 우크라이나 역사학자들 등은 이런 해석-비판자들이 보기에 이것은 "민족주의적 신화이다에 종종 의문을 제기한다. 이런 저술가들은 칭찬의 대상이 되고 있는 "러시아 모으기가 무엇보다도 노브고로드와 프스코프 같은 러시아인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다양한 비러시아 민족들을 대상으로 한 모스크바국 공들의 교묘한 침략이라는 점을 특히 강조했다. 그리하여 모스크바국 공들은 그들에게서 자유를 빼앗았고, 모든 사람들을 모스크바국의 전제정치에 예속시켰다는 것이다. - P169


모스크바 러시아는 이반 뇌제와 표도르 시기 전성기를 맞이한다. 이반 4세(이반 뇌제)는 개혁을 하는 한편 공포정치를 병행하며 근대 국가 및 제국으로의 기틀을 마련했고 볼가 지역과 시베리아로 영토를 확장했다. 표도르는 스웨덴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그루지야국을 속국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 시기 농민 지위가 낮아지며 봉직 귀족과 충돌 및 갈등이 빚어지자 정부는 봉직 귀족의 편을 들면서 농민들이 여기저기에서 들고 일어났다. 또 표도르가 죽을 당시 후계자가 하나도 없는 상태였고 보리스 고두노프처럼 여기저기에서 권력자임을 참칭하며 사회적으로 혼란이 발생했다. 이는 1613년 미하일 로마노프의 즉위로 로마노프 왕조가 시작되면서 일단락되었다. 


미하일 정부는(1613-1645년) 국제 관계를 안정화시키고 재정 확충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뒤이은 알렉세이는(1645-1676년) 1649년 탈주한 농노를 붙잡아 주인에게 돌려보내는 기한이 무기한으로 변경된다는 법을  공포하면서 농노제를 더욱 강화했고 우크라이나까지 모스크바의 관할 영역을 확대했다. 

행정을 뒷받침한 것은 보야르 두마 혹은 협의회(오늘날로 보자면 의회)였고 차르는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중앙집권에 열을 올렸다. 관료의 수가 증가하며 관료제는 확대된 반면 지방행정은 취약해졌다. 이 시기 농업은 여전히 중심 산업으로 위치했으나 교역, 수공업, 제조업도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다. 

알렉세이 시기 종교 인쇄가 가능해지면서 기독교 저술이 활발해졌고 교회 개혁 운동 진행으로 국가와 교회가 통합되었다. 유럽을 통해서 서구의 세속 문학이 확산되자 개인주의 주제가 대두되었으며 궁정 극장이 설립되면서 러시아 희곡이 시작된다. 이전부터 유행하던 성상화는 서구의 영향을 받아 원근법, 해부학 지식이 더해져 달라진 모습을 보였고 초상화 같은 세속적 회화도 등장하였다.


18세기부터 19세기는 제정 러시아의 시기다. 이 시기는 제국 시대라고도 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대이자 이전 러시아 시대라고 불린다. 


18세기의 러시아는 압도적으로 농촌 사회였다. 인구의 대부분은 농민이었다. 그들은 농노와 국가농민이라는 두 부류로 나뉘었는데, 대략 수는 비슷했다. 농노의 처지는 표트르 대제로부터 파벨과 알렉산드르 1세의 통치기를 거치면서 더욱 악화되었고, 1800년 무렵에는 최악의 상황에 다다랐다. 세금 부담의 증가 이외에도 농민들은 점점 더 경제적 착취의 대상이 되었고, 농노들이 시정 요망 사항에 대한 청원권조차 가지지 못하고 주인의 의지에 사실상 완전히 예속됨에 따라서 형편은 더욱 악화되었다. - P407


표트르 대제는 서구화 개혁을 단행하여 군대, 행정, 교육 시스템을 근대화했으며, 대북방 전쟁 승리로 발트해 주도권을 확보하고 폴란드에도 우위를 확보했다. 예카테리나 대제는 영토 확장(폴란드 분할)과 학문과 예술 발전을 이끌며 근대화를 주도했으나 이 시기 농노제는 더욱 확대되었다. 알렉산드르 1세 시기 러시아는 프랑스, 프로이센을 포함한 유럽국가와 스웨덴, 영국, 러시아 연합 간 전쟁 끝에 빈 회의에서의 협약으로 유럽 내 위상이 높아졌으나 내부적으로는 농노제 폐지 실패와 데카브리스트 반란으로 갈등이 일었다. 니콜라이 1세는 관제 국민성을 강조하며 군국주의적 통치를 이어갔다. 페르시아, 투르크와 전쟁을 벌이고 폴란드, 벨라루스, 우크라이나를 러시아화했으나 크림 전쟁에서의 패배로 한계에 부딪힌다.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는 사실상 전례가 없는 놀라운 외교력 및 군사적 성공을 거두었다. 이 국가들은 거대한 유럽 국가를 해체하고 완전히 파멸시켰으며, 과거의 적이자 경쟁자이자 갈등의 근원인 국가를 제거함과 동시에 자신들의 영토, 자원, 인구를 크게 늘렸다. 동유럽은 완전히 이 나라들의 통제하에 들어갔으며, 프랑스는 자신들의 옛 동맹국을 잃어버렸다. 의미심장하게도, 폴란드 분할 이후 오랫동안 동유럽의 이들 세 군주국은 국제무대에서 서로 긴밀히 협력했다. 다른 한편으로 폴란드 분할은 지속적인 결과를 낳은 고통스러운 유산을 남겼다. 특히 러시아 제국 내에서의 "민족 문제"의 출발이 폴란드 분할로부터 유래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 P394


19세기 전반 고등 교육의 확산으로 과학 등 학문이 발전하면서 인텔리겐치아가 대두되는 등 지적인 해방이 이루어진다. 낭만주의, 관념론이 유행하는 한편 슬라브주의, 민족주의 같은 보수주의 기치가 일어서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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