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철학사 3 - 근대성의 카르토그라피 세계철학사 3
이정우 지음 / 길(도서출판)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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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성’을 견인한 강력한 추동력들 중 하나는 바로 자연에 대한 새로운 이해였다. 그리고 근대성은 자연에 대한 또 하나의 이해를 덧붙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자연을 탐구하는 매우 새로운 방식,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하나의 독특한 ‘방법’을 개발했다는 데에 그 의미가 있다. - P22


서구 근대 철학의 시작은 데카르트부터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데카르트는 ‘사유하는 내가 있다(는 것은 참이다)’라는 명제를 내걸며 합리주의 인식론(환원주의)을 펼쳤다. 그리고 사람의 노동력이 아닌 기계로 움직이는 힘(동력)이 있음을 주장하여 기계론의 기초를 닦았다. 사실상 서구 문명의 기초가 되는 이성과 과학의 논리가 그에게서 최초로 제기되었다. 


오늘날 ‘과학’이라는 학문은 근대에 들어와 성립한 것이다. 원래는 ‘철학’의 한 부분이었던 ‘과학’은 자연/우주의 진리를 관조하는 행위였고 ‘기술(공예)’은 ‘기술’과 ‘예술’로 추후 분화되는 과정을 거친다. 과학기술의 발달은 물질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사물을 어떻게 조작하는지 인간의 능력을 보여주는 시험의 장이 되었다. 

 

서구에서는 데카르트의 기계론을 통해 자연세계를 추상적인 개념으로 변화시켰다. 이후 데카르트의 기계론을 극복하고 힘(운동)의 과학을 구축한 인물은 뉴턴과 라이프니츠다. 뉴턴은 질량, 운동량, 힘을 정의하고 법칙들(관성의 법칙, 가속도의 법칙, 작용-반작용의 법칙)을 정의하며 물체 간 운동성을 이야기했다. 라이프니츠는 뉴턴과 달리 물체 자체에 힘이 있다는 개념(능동성)으로 ‘동역학’을 주장했다. 


관념의 기능은 사물들을 표현하는 데 있다. 여기서 말하는 ‘표현’이란 서로 다른 존재면들 사이에서의 번역이다. 데카르트는 정신과 물질 사이에 어떤 인과관계가 성립한다고 보았다.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는 데카르트의 목적론적 세계관을 극복하고 인과론적 세계관을 펼치려 노력했다. 스피노자는 정신을 신체의 관념이라고 보았다. 그에게 정신과 물질은 신과 자연의 동시적 표현(일원론)인 반면 라이프니츠에게서 정신과 물질은 서로 다른 계열체들의 표현(다원론)이다. 


18세기 계몽의 시대가 되면 관념적 면에서는 합리주의와 경험주의가 양분되는 양상을 보인다. 로크는 마음의 구성요소는 관념들(ideas)이라 보았고 경험을 구성하는 요소를 분석하는 5가지 개념으로 색(대상), 수(지각), 상(감응), 행(행동), 식(마음)을 제시했다. 흄은 모든 관계들이 외부적이고 마음을 구성하는 것은 지각의 덩어리들이며, 인간적 삶의 기초는 정념으로 이 때문에 주체들은 서로 다르다고 보았다. 

구체적 세계에서는 유물론을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 반면 루소처럼 자연을 풍요로운 존재이자 신비로운 존재로 보는 철학자들도 있었다. 


칸트는 인간 의식의 구조를 규명하여 실제 경험 이전에 확인하는 과정(선험적 작업)에 집중했다. 그는 이성을 중요시하면서도 그 한계를 인정하고 실재 세계의 현상 너머에 대한 형이상학적 사유의 가능성을 탐구하고자 했다. 

칸트 이후에는 자아의 자기 정립을 중요시 여긴 피히터, 셸링의 객체 자체로서의 탐구, 인간의 주체/이성을 극한으로 중요시 여긴 독일/관념론으로 분화하는 모습을 보인다. 헤겔은 범주들도 존재화하여 세계의 이념들로 파악하고자 했다(자연을 탐구하는 이성, 타인/사회/세상을 인식하는 이성, 자기를 구현하는 이성). 


동북아의 철학자들은 주자학이 12세기 이후 500년을 군림하는 동안 한편으로 주자학을 비판하며 ‘기’에 대한 탐구를 통해 사물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기(氣)’는 불교에서 말하는 ‘무(無)=공(空)[비어있음]’, 도가에서 말하는 ‘무(無)=허(虛)’, 성리학의 ‘리(理)’를 뛰어넘고자 한 개념이다.

기학적 표현주의의 대표적 인물은 왕부지와 정약용이다. 왕부지는 태극을 음양의 기로 해석하여 장재의 기 일원론을 내재화하고 장재와 주희의 사유를 가시화하고자 했다. 그는 인간에게 주어진 리(理)와 성(性)이 심(心)의 기반에서 발현되는 정(情)인 세(勢)가 서로 다투며 세계는 결국 나선형으로 발전해나간다고 보았으나 그가 말한 세계는 중화중심주의라는 한계에 갇혀 있었다. 정약용은 추상화된 개념이 경험의 세계에서 환원된다고 보았다. 인간은 초목금수와 같지만 인간만이 도의를 가진다고 보았고 비록 도의와 기질이 갈등을 일으키지만 인간은 노력을 통해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실학은 성리학을 넘어 현실에서 새롭게 유교적 가치를 사유하고자 했다. 경학과 경세학은 근대적 개념을 현실에서 규명하고자 했다면 기학은 객관적 사회 구조를 분석하고자 했다. 대진은 ‘태극=기’로 기질지성만 인정하는 모습을 보인 반면 최한기는 각종 기들이 서로 통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혼란스러운 배경 속에서 태평천국과 동학을 비롯한 민중사상이 등장하기도 했다. 


근대 말이 되면 주축 세력이 귀족에서 시민, 민중으로 변화한다. 

홉스는 개인주의(개인이 중요하다)를 펼쳤고, 스피노자는 대중의 역량과 개개인들의 내적인 힘, 개인 간의 관계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민주정(오늘날의 대중민주주의)을 제시했다. 로크는 여기서 더 나아가 정부가 시민사회/국가 위에서만 성립이 가능하며 시민사회의 저항성을 강조했다. 반면 루소는 최소한의 정부를 이야기했다. 

칸트는 조약을 맺음으로써(물론 국가의 형태는 공화국이어야 하고 각 국가의 시민은 계몽된 시민이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존재했음) 영구평화가 가능하다(영구평화론)고 주장했는데 이는 지나치게 낙관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헤겔은 시대정신을 담지하는 국가가 세계를 이끄는 주인공이 된다고 이야기했는데 이는 힘의 논리가 작용할 때 위험 요소를 떠안은 모습이 엿보인다(서양이 동양을 지배하는 논리가 되었을수도). 


현대 정치체의 두 축인 ‘자유’와 ‘평등’을 기반으로 한 ‘자유주의’와 ‘사회주의’가 이 무렵 등장했다. 

자유주의는 벤담의 공리주의 정치철학이 대표적이다. 공리주의는 자본주의의 힘을 바탕으로 세계를 과학기술의 힘을 통해서 사회의 기본 구조를 어떻게 하면 안정적이고 효율적으로 해결할까를 고민하면서 나온 철학이다. 벤담은 어떤 행동이 쾌락을 증가하고 고통을 감소시켰는가를 중요시하며 지배계층이 피지배계층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방법에 초점을 맞추었다. 밀은 사상의 자유와 토론의 장을 중요시하며 개인의 독립성과 사회의 통제가 적절히 조화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은 노동의 산물, 노동활동, 타인의 인정으로부터 소외당하는 삼중고를 당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생산관계를 둘러싼 계급 투쟁이 중요하며 역사란 그 투쟁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 표현하고 나아가 부르주아적 소유의 폐지를 주장했다. 


왕조였던 이슬람의 사파비 왕조, 오스만 왕조와 인도의 무굴 왕조는 국민 국가로 변화하는 과정을 거쳤다. 

이슬람 시아파의 철학적 기초를 다진 인물은 물라 사드라이다. 물라 사드라는 신비주의 전통과 지성을 통합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이슬람 철학을 본질주의에서 실존주의에서 전환시켰다. 

이란 이슬람에서 물라 사드라의 역할이 컸다면 오스만 이슬람에서는 와하비즘과 네오수피즘이 중요했다. 와하비즘은 알 와합과 추종자 와하비들은 쿠란과 하디스만을 따르라는 개념이었고 네오수피즘은 예언자 정신과의 합일을 강조하며 개개인의 영적 깨달음을 중요시한다. 마치 신라 시기 불교의 교종과 선종을 떠올리게 되기도 한다(무리수가 있지만). 이슬람 세계의 철학은 종교적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는데 오스만은 탄지마트를 통해 어느 정도 근대화가 추진되었다.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가 된 이후 근대화도 함께 진행되었다. 오로빈도 고슈는 영국 제국주의에 대항해 일어난 흐름 중 급진파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인도의 전통 철학(베단타철학, ‘’多中一一中多’, 화’의 논리)을 현대에도 계승해 이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마디로 정치와 종교를 결합시키고자 했다고 볼 수 있다. 


동북아 세계도 서양 제국주의에 맞서 다양한 흐름이 이어졌다. 중국은 동도서기론을 바탕으로 한 양무파와 변법파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양무파는 전통을 고수하되 서구에게서 배우자는 입장이었다. 변법파는 양무파처럼 봉건 전통을 포기하지 않으면 중국이 바뀔 수 없다 주장하며 틀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조선은 서양을 비롯한 외부 세계에서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는 개화파가 있었던 반면 전통을 고수해야 한다는 위정척사파가 존재했다. 종교를 바탕으로 민중을 계몽하고자 한 동학, 대종교의 흐름도 나타났다. 

일본은 요시다 쇼인에서 시작한 제국주의의 씨앗이 후쿠자와 유키치를 기점으로 사회진화론에 국가주의가 결합하여 많은 폐해를 낳게 된다. 반면 나카에 초민은 민권을 주장하고 평화외교론을 주장하는 모습을 보인다. 교토쿠 슈스이, 오스키 사카에처럼 아나키즘을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슬람과 인도 세계의 철학은 아직 이해가 부족하여 거리감이 느껴지기도 하는데 동북아세계의 근대 철학은 역사가 좀 더 친숙하니 이해가 쉬웠다. 


이 책을 통해 특히나 동양 철학가들 중 대진이나 최한기, 물라 사드라, 오로빈도 고슈 등을 알고 가는 것은 수확이다. 다만 이슬람과 인도 철학은 비중이 확연히 적어 언급 정도에 그친 것이 아쉽다(아무래도 근대 시기 철학은 서양 철학이 더 촘촘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다른 세계철학서에서 결코 얻을 수 없는 이름들일 것 같아 저자에게 감사한 마음이 있다. 


근대 서구 인식론은 동시대 동북아의 인식론보다 훨씬 역동적이고 치밀하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동북아의 경우 근대 학문은 인문과학에서 출발했다. 그것은 구체적인 경험을 기반으로 사물들과 문헌들을 탐구하는 경험주의적 학문이었다. 그리고 이 학문의 정초로서 새로운 근대적인 주체의 개념화가 있었고, 최한기에 이르러서는 이 주체를 신기를 내포한 형이상학적 주체로까지 고양했다. 이런 과정은 대체적으로 연속적인 과정이다. 그러나 서구의 경우 수학적 물리학이라는 합리주의적 과학과 근대의 새로운 흐름으로 나타난 경험주의 사이에 인식론적 분열증이 있었다. 우리는 로크에게서 이런 분열증을 확인할 수 있었고 다양한 갈래의 모색들을 거쳐 칸트에 의해 이 분열증이 치유되는 과정을 보았다. 그리고 칸트 사유에 존재하는 다원성을 극복하려 한 일원성의 사유들이 이어졌다. 서구 철학은 이렇게 인식론적 분열증을 앓고 그것을 치유하는 과정에서 뛰어난 성과들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 P583


이번 3권은 특히나 이론적이고 관념적인 개념들이 많아 과연 내가 읽고 이해한 것이 맞나 하는 의문을 여러 번 가지면서 읽었다. 그래도 밑줄 열심히 긋고 개념도 정리해가며 읽었기에 보람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제 마지막 4권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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