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청 제국이 선포한 국적법에 등장한 용어가바로 ‘화‘다. ‘화‘는 중화를 의미하고, ‘교‘는 위진남북조 시기부터 쓰인 용어로서 ‘잠시 머무르는 이‘를 의미한다.‘‘ 즉 ‘화교‘는 중화인으로 다양한 목적에서) 해외에 잠시 머무르는 이를 의미하게 된 것 - P43
이다. 그러므로 화교라고 지칭되는 이들은 귀향 혹은 귀국을 담보로, 잠시 머무르기 위해 동남아시아 및 홍콩으로 진출하여 무역과노동에 종사하는 중국계 이주자를 의미하게 된 것이다. 그 전까지청 제국 출신의 해외 거주 중국인은 민난인, 광둥인, 차오저우潮인, 하이난인 커지아인으로 그 출신 지역에 따라 각기달리 불리거나, 혹은 화상, 화공, 쿨리 등으로 그 직업에 따라 불려왔는데, 이들을 모두 화교라는 용어로 공식화한 것이다. 이후 화교 가운데에도 다양한 부류가 있다는 것이 발견되면서, 학계에서는 해외에 영구 정착한 중국계 이주민의 경우 ‘화인으로, 그들의 2세대, 3세대 후손을 ‘화‘라고 지칭하고 있다. - P44
화교의 송금은 기본적으로 외국의 화폐를 국내로 보내는 것이어서 그 중간에서 태환, 즉 환전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다만 20세기 이전수객과 교비국의 주요 태환 방식이 화폐-상품-화폐였다면, 20세기들어 그 방식이 ‘환어음‘ 방식으로 변화하게 된다. 이 환어음 방식은 주로 송금 방법 중 표회에 해당하는 것으로 교비 의뢰를 받은 교비국은 환어음을 구입하여 수신자 개인에게, 혹은 분국이나 연호에 - P88
보내는데, 그 환어음의 출처가 바로 은행이었다. 화교 송금 네트워크에서 은행의 역할은 외국 화폐인 화교의 송금을 국내 화폐로 태환해 주는 것이었다. - P89
피식민인으로서 인도 상인은 ‘대영제국‘의 제국민이라는 정치 - P113
적·사회적 지위를 활용하여 아시아에서 그 상업적 영역을 확장했고, 일본 상인의 경우 본국의 제국적 인프라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아시아 시장에 진출했다. 두 상인 집단 모두 근대 시기 ‘제국‘이라는 초국적, 초지역적 정치체제의 보호 아래 비교적 쉽게 아시아 시장에서 나름의 영역을 갖출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 동남아시아시장에서 두 그룹은 때로는 화상과 협력하고, 때로는 경쟁하면서 존재감을 과시했지만, 21세기 현재까지 동남아시아를 비롯한 아시아전역에 깊게 뿌리내려 ‘아시아의 유대인‘이라 불리며 초국적 네트워크를 유지한 이들은 화상이 유일하다. - P114
인종, 문화, 종교, 공동체에의 소속감 등은 흔히 인류문명의 형성에 중요한 요소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화상에게 이러한 가치들은언제든지 변화할 수 있는,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요소에 지나지 않았다. 이는 한 지역에서 수 세대에 걸쳐 공동체를 형성한 화상의 경우에는 본국의 지원 없이, 심지어 돌아갈 수도 없는상황에서 낯선 타국에 뿌리내려야 한다는 절박함의 발로였다. 또 여러 지역에 초국적으로 네트워크를 형성한 근대 화상의 경우 여러 정치체에 동시에 ‘협력‘해야 한다는 생존 조건으로 인해 형성된 화상만의 특징이다. - P120
싱가포르를 비롯한 동남아의 화교에게 애국심을 가지고 충성해야 할 대상이 누구인가라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매우 복잡 다양할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이미 20세기 초중반이 되면 동남아시아의 화교 사회와 중국 대륙 사이에는 서서히 메울 수 없는 균열이 벌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1955년 반둥회의에서 저우언라이周恩來가 해외 거주 중국인의이중국적 금지를 선언한 것이 동남아 화교를 중국 본토로부터 급속히 단절시키는 중요한 ‘공식적‘ 계기였다고 한다면, 어쩌면 림분컹을 비롯한 화교의 일본 식민 경험과 그 이후 애국심을 배제한 독립된 이주민 공동체로서의 자각이야말로 그들을 중국으로부터 단절시키는 좀 더 이른 시기의 ‘관념적‘ 계기가 아니었을까. - P140
탄카키가 1946년에 보낸 전보의 수신인은 각각 대통령 트루먼, 마셜 장군, 주중대사 레이턴이었다. 그는 스스로 화교지원기금조직Overseas Chinese Relief Fund Organization의 회장이라고 칭하면서 동남아시아전체 화교overseas Chinese in Southeast Asia의 이름으로 메시지를 전한다고 하였다. 그 핵심 내용은 미국이 중국의 국공내전에 개입하는 것은권의 침입이니 국민당 정부의 장제스에 대한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그만두라는 것이었다. 동남아시아, 특히 영국령 말라야, 해협식민지,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 화교공동체에서 지도자 격의 존경을 받고 있던 탄카키의 전보는 그가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지역의 화교를순식간에 ‘친공산당파‘와 ‘친국민당파‘로 갈라서게 만듦으로써 항일전쟁을 거치면서 동남아 화교 사회에 잠재되어 있던 갈등의 불씨를당긴 사건이었다. - P154
냉전 초 탄카키의 행적은 당시의 화교가 더 이상 호키엔이 아닌중국인 혹은 중국계 말레이인, 중국계 싱가포르인, 중국계 인도네시아인으로 살아가야만 하는 도전에 내던져졌음을 잘 보여 주고 있다. 그럼에도 제국과 국민 사이 ‘호키엔‘의 정체성은 21세기인 현재까지도 잔존하고 있는데, 한국의 한자어 발음상 진가경이라 불리는그는 현재 싱가포르를 비롯한 동남아시아 화교 사회에서는 탄카키라 불리고, 중국 대륙에서는 천지아겅으로 불리고 있다. 이는 저명한 호키엔 계열 화상으로서의 그의 정체성과 중국 국민으로서의 그의 정체성 사이에서 냉전 초 그가 중국 대륙에 (자의든 타의든) 남음으로써 후자로 결정된 것처럼 보였지만, 여전히 결정되지 않은, 현재진행형의 문제임을 잘 보여 준다. 그리고 그 범위는 단순히 이주민으로 존재하던 동남아시아뿐만 아니라 그들의 조상과 가족, 친족이머무는 중국 동남부 지역, 푸젠과 광둥까지도 포함한 범위라는 것역시 짐작할 수 있다. - P161
스페인령 필리핀 사회의 중국계 메스티조 그룹과 말레이-인도네시아 지역 중국계 페라나칸 그룹의 탄생과 활동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들이 중국 상인의 동남아 진출과 적응, 현지화의 과정에서 탄생했다는 점이다. 또한 동남아시아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화교의 상업 네트워크와 동남아 현지 사회를 링크시켜 주는 역할과 서구 식민 세력의 현지 통치를 용이하게 해 주는 역할 모두 ‘훌륭하게‘ 소화했다는 사실이다. 그로 인해 17세기에서 19세기까지 동남아시아 지역사회가 ‘중국인-동남아 현지 사회-서구 제국‘이라는 삼각 구도로 작동하는 과정에서 윤활유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다만 이러한 중국계 혼혈의 적극적 활동은 근본적으로 동남아시아 현지 주민에 대한 서구 세력의 가혹한 착취를 대리함과 동시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이루어졌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 P196
숍하우스의 기원에 관한 다양한 논의에는 나름대로의 근거가 뚜렷하여 그 진위를 밝혀내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다만근거가 확실한 부분들을 종합하여 재구성해 볼 수는 있다. 송대 이후명·청 시기까지 중국 동남 연해 지역의 주요 항구도시에는 ‘점옥‘ 형태의 주상복합의 건축양식이 존재하였고, 이러한 건축양식은 푸젠과 광둥 출신 중국 상인 및 노동자가 동남아시아로 진출하면서 외부로 전파되었다. 특히 말레이시아와 자바섬의 주요 항구도시에 형성된 중국인 거주지와 시장에는 비슷한 형태의 건축양식이형성되어 있었다. 이후 영국 식민제국이 말레이반도에 진출하면서19세기 초기 싱가포르를 중심으로 도시 개발을 진행한다. 그 과정에서 인도의 벵갈 지방에서 가져온 벙갈로우 건축양식을 도입하였고, - P212
동시에 중국의 주상복합 건축양식을 혼합하여 동남아시아 특유의식민지 도시건축문화, 즉 숍하우스 건축문화를 형성했다는 설명이가능하다. - P213
대부분의 식민지 경제는 주로 하나 혹은 두 종류의 상품작물의 수출기지로만 작동하였는데, 자바섬 외에 말라야의 고무와 주석, 미얀마의 쌀, 베트남의 고무와 쌀 등의 생산에만 집중하였다." 서구의 근대적 기술 문명을 통해 다수 동남아시아인의 생활 수준이 높아지는 등의 효과는 거의 없었다. 일부 엘리트 및 도시 중산계층을 중심으로 서구식 교육, 교통, 통신, 위생 등의 혜택을 입은 것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바타비아, 싱가포르, 사이공Saigon (현재 호치민시)등 거대 도시의 존재는 배후지 생산물의 수출입 혹은 유럽인, 중국인을 위한 거주 공간으로 기능했을 뿐이다. 동남아시아의 근대화는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각 지역이 독립을 하고 난 이후, 그것도 20세기 후반, 21세기에 와서야 제한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 P248
1965년 싱가포르가 말레이 연방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싱가18)포르 공화국이 탄생하였다. 사실 형식은 상호 협정에 의해 싱가포르가 독립된 주권을 선포하고 건국한 것으로 되었지만, 그 이면에는 축출이나 다름없는 형태의 독립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실제 리콴유가 이끄는 인민행동당은 싱가포르에서의 지지를 바탕으로 말레이 연방 중앙정계에까지 영향을 행사할 의도가 있었는데, 이에 대해말레이 중앙정부가 경계했다는 것이다. 실제 기록에 따르면, 말레이주요 정당들은 1964년 싱가포르의 인민행동당이 말레이 연방의 보통선거에 뛰어들 것을 결정한 것에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무엇보다 싱가포르의 인민행동당이 추구하는 사회의 구조가 다인종들 사이의 공존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면서 말레이 무슬림 위주의중앙집권적 국가의 수립을 계획하고 있던 말레이시아 중앙정계의반감을 사게 되었던 것이다." - P288
싱가포르는 현재 학계와 정부가 합심하여 기존 200년 식민사 중심의 역사관을 극복하려 하고 있다. 영국 동인도회사에 의해 식민화하기 이전 중국인, 말레이인 등 다양한 인종들이 혼거하던 시기의 항구도시 ‘테마섹 Temasek‘을 기억하고 연구함으로써 그 역사를 기존 200년에서 700년으로 늘리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성과를 젊은 세대들에게 확산함으로써 싱가포르 역사의 다양함과 다이내믹함을 각인시켜주려 한다. 그리고 이는 1965년 다인종·다문화 국민국가를 성립한 싱가포르가 국가 구성원들에게 ‘싱가 - P305
포리안‘이라는 내셔널리즘을 심어 주기 위해 인문학을 활용하는 주요한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P306
도남학교가 가지는 교육사적인 혹은 화교사 측면에서의 의의는신해혁명 이전 1909년, 최초로 비호키엔 중국인 그룹의 학생들을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는 점, 그리고 신해혁명 이후 1916년에는 역시나 최초로 만다린, 즉 중국 베이징어를 교내 공식 언어로 채택하여 학생을 교육시키기로 결정했다는 점에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각지역 간 상이한 지역문화를 초월하여 통합된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후손들에게 교육을 통해 이식시켜 주어야 된다는 탄카키 특유의 교육철학이 작용한 것이었다. 이러한 변화에는 직접적이든 혹은 간접적이든 간에 쑨원의 영향력이 적지 않게 작용했음은 분명하다. 일단 1900년에서 1911년 사이에 쑨원이 싱가포르에만 아홉 차례 방문하였다는 점과 탄카키 자신이 쑨원의 주요 후원자이면서 그가 조직한 동맹회의 일원으로서1911년 신해혁명의 주요 지지자 중의 하나였다는 점을 봐도 그렇다. 게다가 외부인에 폐쇄적인 화교 커뮤니티의 한 축인 초등교육기관의 교사로 연고도 없고, 스펙이 어떤지도 모르는 한반도 출신의 외국인을 소개시켜 준다는 것 자체가 쑨원이 도남학교 및 싱가포르 화교커뮤니티에 미치는 실질적인 영향력을 가늠할 수 있게 해 준다. 1926년 싱가포르라는 낯선 열대의 이국에 발을 디딘 최초의 한국인 이민자 정대호가 도남학교에서 무엇을 가르쳤는지, 폐쇄적인 - P316
화교 사회에는 잘 적응했는지, 어떠한 활동을 통해 독립운동 자금을 모았는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그가 1940년 8월 6일 싱가포르에서 사망하였고, 1990년 7월 2일 그 유해가 국내로 봉환되었다는 정도만 알 뿐이다. - P3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