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륵 카간이 회복하려고 했던 퇴뤼는 나라를 건국하고 통치할수 있는 근거였다. 좁은 의미로는 ‘조법祖法(전통적이고 관습적인 불문법)‘‘이고, 넓은 의미로는 ‘텡그리tenri (하늘[天] 또는 신神)와 아타ata(조상祖上) 등으로부터 물려받은 유무형의 전통傳統‘이다. 중국 황제가 천하를 다스릴 때 반드시 존중하고 준수해야 할 ‘상제‘, ‘종묘사직社稷‘과 비슷한 개념이다. 카를륵 카간은 유목 세계에서 자신의 권위를확보하고 신생 국가의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해 이를 통치의 근거로삼았다. - P46

카를륵 카간은 위구르가돌궐을 딛고 일어나 부흥해야만 하는 역사적 당위, 국가 재건에 필요한정통성을 확보했다. 텡그리가 명령해 회복한 퇴뤼의 핵심 내용은 돌궐에게 빼앗겼던 조상들의 땅, 즉 외튀켄 산지의 회복을 통해 현실이 되었다. 위구르의 국가 재건이 돌궐에 의해 단절된 역사를 끝내고 퇴뤼를회복한 것이라는 인식은 820년대에 제작된 비문 기록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 P64

비록 절반의 성공이었으나, 위구르는 경쟁 세력들이 초원으로 진출하려던 시도를 좌절시켰고 막북 초원의 여러 세력을 통합하여 이들을 보둔으로 확보했다. 어느 정도 건국의 윤곽이 보이자, 카를륵 카간 - P84

은 753년 위구르 퇴뤼의 회복과 돌궐을 대체하는 새로운 유목국가의성립을 대내외에 선언했다. 그러나 아직 미흡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이후에도 보둔을 확보해 위구르 국가인 ‘구성회홀‘에 포함시키기 위한 원정을 계속했다. 이렇게 확보한 보둔을 자신의 의도에 따라 조직하여 안정적으로 국가를 운영할 수 있는 체제를 마련하는 것이 카를륵 카간의과제였다. - P85

위구르의 성수인 토쿠즈는 실제 수량 아홉을 나타내는숫자와 연결되면서 토쿠즈 또는 구성이 하나의 개념어가 되었다. 그 결과로 투르크 유목민의 연합체였던 구성은 위구르의 발전과 함께 국호인 구성회홀이 되었다. 토쿠즈는 실제 숫자 9를 나타내면서 동시에 투르크 유목민을 포괄하는 개념이자 위구르의 국호로서 ‘전체‘를 뜻하는표현이 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한문 기록의 구성은 시대에 따라그 개념과 범위가 달라지는데, 구성회홀 혹은 구성회골이라는 국호로 - P100

사용되기 시작한 이후로는 부족이 아니라 초부족적인 ‘위구르 일(국가)‘
을 의미하는 표현이 되었다. - P101

카를륵 카간은 유목사회 내부에서 발생한 세력 갈등을 개인적 노력을 통해 해소하고 자신을 중심으로 분열을 통합하려 했는데, 이것이초기 위구르의 취약점이었다. 돌궐의 종주권을 인정했던 거란, 키르기 - P131

스, 튀르기쉬, 카를룩 등이 여전히 신흥 위구르에 도전했다. 또한 위구르는 막남으로 밀려난 돌궐 항호降236가 다시 막북 초원으로 돌아오는 것도 막아야 했다. 돌궐은 위구르를 다시 무너뜨릴 수 있는 잠재적위협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위구르는 687년 돌궐이 부흥해 막북으로복귀하자 터전을 잃고 쫓겨난 뼈아픈 경험이 있었다. 막남에 건재한 돌궐 항호의 복귀를 막기 위해서는 막북 초원 중심의 체제 안정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이를 위해 카를륵 카간은 조상이 물려준 외튀켄을 중심으로 한 셀렝게강 유역의 확보와 유지에 역점을 두었다. - P132

안녹산의 봉기 이후 10여 년에 걸친 당의 내전 과정에서 막남 초원에 대한 기미 지배는 완전히 무너졌다. 당뿐만 아니라 복고회은을 대표로 하는 막남 초원의 투르크 유목 세력 역시 약해졌다. 기미 지배를받던 투르크계 유목민(돌궐 잡호)이 7세기 중반부터 약화되었고, 740년대 중반에 이르러 돌궐 붕괴 이후 남하한 막남의 돌궐 항호 또한 부흥운동으로 당에 도전하다가 소멸했다. 당을 중심으로 한 기존의 질서가완전히 무너지면서 ‘유목 세계의 질서‘가 새롭게 재편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위구르는 막북 초원을 장악하고, 당과의 경제적 관계를 독점했다. - P172

760년대 위구르는 당으로부터 확보한 막대한 양의 비단을 바탕으로 교역 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마니교도 상인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뵈귀 카간은 이들이 머물 수 있는 도시를 건설하고 마니교를받아들였다. 이는 유목국가 운영에 필요한 기본 요소 중 하나였다.
막북 초원이라는 공간적 제약을 극복하고 유목제국을 발전시키려면 외부의 다양한 요소를 받아들여야 했다. - P212

알프 쿠틀룩 빌게 카간은 정변을 통해 소그드인을 대량 학살하여 뵈귀 카간의 동조 세력을 제거하고, 나아가 당을 곤란하게 했던 소그드 상인 문제도 해결했다. 진무군 사건 - P224

은 당쪽에서 저지른 일이었지만 그에 적극 대응하지 않는 방식으로 당내부에서 활동하던 문제의 소그드 상인들을 없앴다. 이후 알프 쿠틀룩빌게 카간은 자신에게 협조하던 소그드 상인 강적심을 당에 보내 경제적 관계를 회복하고자 했다.
알프 쿠틀룩 빌게 카간은 정변 이후에도 막북 초원에 고립된 유목국가 위구르의 한계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어떻게 해도 당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 P225

쿠틀룩이 북정을 점령해 톈산산맥 주변으로 진출한 것은 위구르가 유목제국으로 발전하는 핵심적인 계기가 되었다. 앞서 흉노, 유연,
돌궐 등도 그랬듯이 서방 지역은 공납이나 물자의 획득뿐만 아니라 교통로 확보를 위해서도 중요했다. 몽골 초원에서 성립한 유목국가가목제국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중국에서 얻어낸 물자를 유통할 수 있는 ‘교통로‘가 필수적이었다. 이는 오아시스 지역 주민의 입장에서도마찬가지였다. 소규모 도시국가라는 취약한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유목 세력과 연계해 교역하고, 좀처럼 문호를 열지 않는 중국과도교류할 여건을 만들어야 했다. 소그디아나 출신뿐만 아니라 톈산산맥주변의 오아시스 주민들은 유목국가와 공생 관계를 유지하며 발전을도모했다. 즉 유목국가와 오아시스는 한쪽을 잃으면 다른 한쪽도 존립에 문제가 생긴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긴밀한 관계였다. - P249

소례 카간은 서방 진출을 통해 더 넓은 영토와 새로운 보둔을 확보한 것, 그리고 마니교도를 지원하여 경제적 이익을 얻은 것을 비문에 남겨 마니교를 현창했다. 뿐만 아니라 마니교의 교리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자신의 권위를 강화했다. - P282

840년 위구르 유목제국의 갑작스러운 붕괴는 자연재해에 의해 유목 생산 구조가 파괴되고, 지배 집단의 내분이 발생한 상황에서 키르기스를 비롯한 종속 집단의 공격까지 받는 등 다양한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이후 위구르는 키르기스가 떠난 몽골 초원으로 돌아와 재기한 것이 아니라, 여러 세력으로 쪼개지고 흩어져 각자도생하게 되었다. 하나의 유목제국을 형성했던 초원과 오아시스 세계가 해 - P302

체되고 만 위구르의 ‘빅뱅 big bang‘은 그 주변의 여러 지역에 큰 영향을끼쳤다. 9세기 후반 국제 질서의 재편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10세기에 본격화되는 이른바 동아시아 ‘민족이동‘의 발단이 되었다. - P303

14세기 몽골제국의 지배를 받던 위구르의 후예 고창왕에게 과거몽골 초원을 지배했던 조상이 남긴 역사적 경험은 너무나 중요했다. 조상의 원주지를 새로운 세력인 몽골계 이주민에게 넘겨주고, 대제국을건설한 그들에게 지배당하며 하서에 머물던 그는 과거의 기억을 되새기며 다시 영광스러운 역사를 꽃피우고자 했다. 몽골 초원을 무대로 유 - P344

목제국을 건설했던 선주민으로서의 자의식을 드러내고, 당대의 지배세력인 몽골제국과는 다른 역사 인식을 보여주며 새로운 역사를 쓰고자했다. - P345

유목국가는 초원에서든 정주 지역에서든 군사적 장점을유지하면서 외래 요소와의 ‘선택적 공존‘을 통해 다양성을 확보하고,
이를 바탕으로 ‘교역 국가‘를 지향했다. 흉노 이래 모든 유목제국이 이런 방식으로 성장하고 발전했다. 따라서 위구르를 비롯한 유목국가를바라볼 때 ‘유목 아니면 정주‘라는 이분법이나 ‘유목과 정주만 있는‘
이원적 성격이라는 관점보다는 ‘다원성‘이라는 관점이 필요하다. - P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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