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카 지명 붙이기에서 깜짝 놀랄 만한 것은 ‘뉴‘와 ‘올드‘가 공시적으로, 비어 있는 동질적 시간 안에 공존하는 것으로 이해된다는 점이다. 비스카야는 누에바비스카야와 나란히 있고, 뉴런던은 런던과 나란히 있다. 후계 구도가 아니라 형제 간의 경쟁을 연상케 하는 작명 스타일이다. 이 유례없는 공시적 참신성은 역사적으로 오로지 상당수의 인구 집단이 그들 자신이 다른 상당수의 인구 집단에 평행한 (parallel) 삶을 살고있으며, 결코 만나지는 않을지라도 틀림없이 같은 궤도를 따라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할 위치에 있을 때에만 일어난다. - P280
평행성과 동시성의 감각이 단순히 떠오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막대한 정치적 결과도 낳으려면, 반드시 평행 집단 사이의 거리가 멀고, 둘 중 새로운 쪽은 오래된 쪽에 확고히 종속되어 있는 대규모의 영구 정착지여야 했다. - P281
유럽에서 새로운 민족주의들은 거의 즉시 그들 자신이 ‘잠에서 깨어난다고 상상하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문구는 아메리카에는 전혀 낯선것이었다. 1805년에 이미 우리가 제5장에서 보았듯이) 젊은 그리스인 민족주의자 아다만티오스 코라이스는 자신에게 공감하는 파리 관중에게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민족은 자신의 무지라는 무시무시한광경을 살펴보고 민족을 선조의 영광으로부터 가르는 거리를 눈대중하며 부르르 떤다." 이것은 새로운 시간에서 옛 시간으로의 이행을 드러내는 완벽한 사례이다. - P289
르낭이 그의 민족이란 무엇인가?』(Qu‘est-ce qu‘une nation?)를 발표했을 때, 그를 사로잡은 것은 다름 아닌잊을 필요성이었다. 일찍이 제1장에서 인용했던 구절을 다시 살펴보자.
그래서 민족의 본질은 개개인 모두가 공동으로 많은 것을 가지면서, 많은것을 잊었다는 데에 있다. 프랑스 시민이라면 누구나 생바르텔레미와13세기 미디의 학살을 잊었어야 한다.
이 두 문장은 얼핏 보기에 직설적인 것 같다." 그렇지만 잠깐 곱씹어보면 이 문장들이 실제로는 얼마나 야릇한지가 드러난다. 예컨대 르낭이 그의 독자들에게 ‘생바르텔레미‘나 ‘13세기 미디의 학살‘이 무슨 뜻인지 설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는 점이 눈에 띈다. 그러나 ‘프랑스인‘이라 일컬어지는 이들이 아니면 그 누가 ‘생바르텔레미‘가 1572년 8월 24일 발루아가의 왕 샤를9세와 그의 피렌체인 어머니가 개시한 지독한 위그노 학살을 가리킨다는 것을, 또는 ‘미디의 학살‘이 길게 줄지어선죄 많은 교황들 중 그 죄가 더 깊은 축에 드는 인노켄티우스 3세의부추김 끝에 피레네 산맥과 남부 알프스 산맥 사이의 광활한 지대에 걸 - P295
쳐 저질러진 알비파 교도의 절멸을 가리킨다는 것을 곧바로 이해할까. 르낭은 이 사건들 자체가 300년 전과 600년 전에 일어났는데도 독자들의 머릿속에 ‘기억‘되고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 기이하다고 생각하지도않았다. 또한 (잊었다 (doit oublier)가 아니라 ‘이미 잊었어야 한다‘ (doitavoir oublié)라는 단정적인 구문도 놀라움으로 다가온다. 이는 국세법이나 징병법에 사용되는 불길한 어조로, 옛 비극들을 ‘이미 잊었어야 함‘이 현대 시민의 일차적 의무라는 점을 시사한다. - P296
시조(Originator)가 없기에 민족의 전기는 복음처럼 기나긴 씨뿌림과 생식의 사슬을 통해 시간을 타고 내려가며‘ (down time) 쓸 수 없다. 유일한 대안은 베이징 원인이든, 자바 원인이든, 아서 왕이든, 고고학의 등불이 알맞은 빛을 내려주는 곳이라면 어디든 그쪽을 향해 ‘시간을 타고 올라가는‘ (up time) 형식으로 전기를 빚어내는 것이다. - P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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