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튼의 해체에서 톰 네언은 영국의 정치 체계와 근대 세계의 그밖의 정치 체계 사이의 관계에 대해 몇몇 귀중한 말들을 남긴다.‘ [영국 체계] 단 하나만이 "서서히 이루어지는 관례적인 성장의 표본으로서, 이론을 따른 결과로 일어난 의도적 발명의 산물인 다른 사례들과는 다르다." 더 늦게 도착한 이들 다른 나라들은 "수 세기에 걸쳐 헌정주의를 진화시킨 그 국가의 경험이 맺은 과실을 단숨에 요약하려고 시도했다." 첫번째였기 때문에 잉글랜드의 - 나중에는 브리튼의 경험은 독특한 것으로 남았다. 이미 영국 혁명이 성공을 거두고 확장된 세계에 두 번째로 들어 - P235
섰기 때문에, 후발 부르주아 사회들은 이러한 이른 발전을 반복할 수 없었다. 그들의 연구와 모방은 굉장히 다른 어떤 것을 발생시켰다. 추상적인 또는 ‘비인격적인‘ 국가라는 진정으로 근대적인 교의는 그 추상적인 성질 때문에이후 역사에서 모방될 수 있었다. 물론 이는 발전 과정의 예사 논리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나중에 ‘불균등결합 발전‘이라는 그럴싸한 이름을 갖게 된 것의 초기 견본이었다. 진짜 반복과 모방은 정치적으로든, 경제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테크놀로지에서든 전혀 불가능하다고 해도 무방하다. 우주는 이미 복제되고 있는 최초의원인에 의해 너무 많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 P236
알렉산더 우드사이드(Alexander Woodside)의 말을 빌자면, "베트남(Vietnam)이라는 이름은 전반적으로 베이징에서 유래한 것이라 하여, 한 세기 전의 베트남 지배자들에게는 지금처럼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당시로서는 작위적인 명칭이었던 베트남은 중국인들도, 베트남인들도 널리 사용하지 않았다. 중국인들은 모욕적인 당나라 말 ‘안남‘에 매달렸다. 한편 베트남 궁정은 1838~39년 왕국을 위한 다른 이름을 비공식적으로 창안했고, 이를 굳이 중국에 알리지 않았다. 그 새로운 이름인다이남(南)은 궁정 문서와 공식적으로 편찬된 역사 기록에 정례적으로 등장한다. 그렇지만 이는 오늘날까지 살아남지는 못했다." 이새이름은 두 가지 측면에서 흥미롭다. 첫째, 여기에는 월나라 이름의 (‘Viet‘-namese) 요소가 들어가 있지 않다. 둘째, 그 영토적 지시는 (중화의) ‘남쪽‘이라는, 순수하게 관계적인 것이다." - P238
성공한 혁명가들은 오래된 국가의 전기 배선도 상속받는다. 가끔은 관리들과 밀고자들도 물려받지만, 서류철과 사건 기록, 공문서 보관소, 법, 재정보고서, 센서스, 지도, 조약, 교신, 각서 등은 언제나 물려받는 품목이다. 집주인이 도망간 대저택의 복잡한 전기 체계처럼, 국가는 예전의 화려한자신으로 거듭나기 위해 새 주인의 손이 개폐기에 닿기만을 기다린다. 그러므로 혁명 지도부가 의식적으로든 아니든 장원의 영주 노릇을 하게 된다고 해서 놀랄 것은 없다. - P241
광범위한 중국 인민 대중이 캄보디아와 베트남 사이의 식민지 국경 지대에서 일어나는 일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쏟았으리라고 상상하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나는 추정한다. 크메르 농민과 베트남 농민들이 그들 인민들 간의 전쟁을 원했거나 - P242
그 일에 자문을 제공했을 리도 없다. 대단히 진정한 의미에서 이 전쟁들은, 거의 사후(事後)에 그리고 언제나 자위의 언어로 인민 민족주의를동원하는, ‘각하들의 전쟁‘이었다. (그리하여 이 언어가 가장 그럴듯하지못했던 중국에서는, 네온사인이 빛나는 ‘소비에트 패권주의‘의 간판 아래에서조차 열광이 특히 저조했다.) - P24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