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이래 민족 형성을 촉진하기 위해 어떠한 상징적, 물리적 폭력이 필요했는지를 보여 주는 다수의 탁월한 역사 연구가 있다. 이 연구들에 따르면 민족 형성은 이미 존재하는 다양성을 거슬러 성취해야 했던 동질화였다. 이를 위해서는 다양한 영역, 다양한 수준의 방대한 개입이 필요했다. 물질적, 정서적, 문화적 동질화가 요구되었던 것이다.

비판적 역사학의 진영에서는 민족이 결코 완성된 적이 없다는 증거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민족은 충족된 적이 없다. 다시 말해 동질 사회가 완전히 동질적인 적은 없다. 그러나 비판적 역사 연구가 전하는 이 모든 통찰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비판적 역사학자들은 절대 과소평가해서는 안 되는 본질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민족이 잘 기능하는 허구라는 사실이다.
동질 사회라는 상상은 언제나 허구였다. 그러나 잘 기능하는 허구였다. 민족은 게다가 기능이 대단히 뛰어난 허구였다.

서구의 민주화된 민족 국가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는 이중화되어 있다. 우리는 부르주아(Bourgeois)이자 시투아앵(Citoyen)이다. 시민(Burger)이자 동시에 국민(Staatsburger)인 것이다. 시민으로서 우리는 모두 사인(私人)이다. 서로 구별되는 특징이 있는 개인이며, 이 특징이 우리를 분류한다. 우리는 남성이거나 여성이며, 가난하거나 부유하며, 공무원, 농부, 교사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구별된다. 그러나 시투아앵으로서, 다시 말해 국민으로서 우리는 공인(公人)인데, 우리는 모두 동등하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민주주의의 본질 요소가 들어 있다. 이것이 우리를 추상적 동등으로 이끈다.

이전의 개인주의는 개인의 다른 유형을 만드는 일이었다. 법권리 주체, 유권자, 국민은 추상화를 통해 생성되기 때문이다. 개별 사인으로서 개인은 언제나 구체적이고 구별된다. 그러나 공인으로서 개인은 구별되는 특성들을 추상화함으로써 동등해진다. 다시 말해 특수한 차이들을 무시할 때에만 각각의 개인은 전체의 동등한 부분이자 주권을 구성하는 동등한 일부가 된다. 이 점에서는 개인 사이를 결합하는 요인이 바로 개인의 특수한 직분에 대한 추상화다. 우리를 구별하는 것들을 무시할 때에만 우리는 전체의 동등한 부분이 된다.

한 사회의 동질화는 단순히 단일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차이가 부차화된다는 데 가깝다. 더는 차이가 없다고 해서 사회가 동질화되는 것이 아니다. 차이가 우선순위에서 밀려날 때, 공통된 것 앞에서 차이가 부차화될 때 사회는 동질화된다. 민족 유형이 제공하는 이 공통된 것은 유사성의 원칙에 기초한다. 공통된 형상 속에서 민족의 모든 구성원은 서로를 알아볼 수 있다. ‘상상된 공동체’는 이러한 유사성의 사회다.

민족 서사는 민주주의적 개인이 자기 자신을 공인으로 재인식할 외형을 제공한다. 이 외형의 윤곽은 가변적이다.
바로 이 형상이 우리가 같은 민족 구성원을 모두 안다고 믿게 한다. 우리는 같은 유형에 속하는 다른 모든 이들과 동일시한다. 이러한 형상이 존재하기에 민족이라는 환상이 작동했고, 바로 그래서 동질 사회라는 환상은 잘 작동했다.

프로이트 이래 우리는 당연하고 직접적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소속이 허구의 속임수임을 알고 있다. "자아는 자기 집의 주인이 아니다."라는 잘 알려진 명제로 프로이트는 자아와 집 양자에 대해 본질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자아의 자명함을 문제 삼고, 자기 소유로서의 집에 대해서 의문을 던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은 바로 이 두 가지 환상을 전 국민이라는 거대한 규모의 집단에게 오랫동안 정당화하는 데 성공했다.

자기 집을 다른 단어로 표현하면 환경이다. 환경이란 주위 환경이다. 하나의 전체를,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는 환경. 민족의 경우 이 하나의 환경이 전국을 에워싼다.

개인의 정체성에 관련해 지금의 변화는 다음을 의미한다. 동질 사회의 환경이 천천히 해체되면, 우리 모두는 더 이상 온전한 정체성을 갖지 못한다. 우리는 이제 온전하고 당연하며 분명한 정체성을 갖지 못한다. 온전하고 당연하며 분명한 소속도 없다. 더 이상의 허구는 없다.

민족의 귀환은 바로 다원화 사회에서 민족은 사라지는 대신 침식되고 있다는 증거다.
이러한 침식은 민족이라는 세계가 더 이상 유일한 환경도 아니고, 하나의 당연한 세계도 아님을 드러낸다. 민족은 더 이상 완전한 소속과 온전한 정체성에 대한 약속이 아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환경이 다른 환경에 의해 쉽게 해소되지 않았으며, 민족 유형도 다른 유형에 의해 해소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단순히 새로운 주도 권력이 발달했다는 말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단 하나의 유형으로, 단 하나의 환경으로 조직되지 않는다는 점이 변화의 가장 무거운 본질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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