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자학이 새로운 왕조가 건설될 때 특히 큰 매력을 발휘한 것은 바로 우주와 인간을 잇는 웅혼한 규모의 사유, 지식인들의 영혼에 정체성을 불어넣는 인성론, 그리고 봉건사회를 정초해준 위계적 정치철학으로 구성된높은 경지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측면이 새로운 왕조의 구축자들에게는최상의 패러다임을 제공했던 것이다. 명을 세운 주원장의 경우 외관상 농민반란의 형태를 띠었지만, 그 주도 세력은 지주 계층이었고 주원장 자신이 건국 이후 철저히 유교적 이념에 따라 신왕조를 구축했다. 조선의 경우고려를 무너뜨리고 신왕조를 세운 주축 세력이 정도전을 비롯해 모두 신진 사대부 계층이었다. 에도 막부의 경우에도 역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주자학을 받아들이면서 새로운 정권을 정비했다. 이처럼 주자학은 사대부(사무라이) 계층의 정신세계와 정치철학을 확고하게 지배한 철학 체계로서 동북아 전체에 걸쳐 일반 문법을 형성했다.
주자학이 이런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주자학 자체의 철학적 매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거기에는 또한 사대부 지식인들의 권력의지 또한 작용했다고 보아야 한다. - P741

이황의 경우 리사단과 기/칠정이 ‘호발(互發)‘한다고 할 수 있고, 기대승의 경우 사단을포함하는 칠정이 모두 리와 기에서 ‘공발(發)‘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양자의 논쟁 결과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인간의 감정은 도덕적 감정인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과 비도덕적/인간적 감정인 기쁨, 성남, 슬픔, 즐거움, 사랑, 미움,
두려움으로 나뉜다. 그런데 이 양자의 관계는 무엇인가?
2. 도덕적 감정이든 비도덕적 감정이든 모두 세계의 근본 이치인 리와기에서 연유한다. 리와 기에서 발현한 감정은 아직 순선한 국면에서는 도덕적 감정으로서 나타나지만 기의 작용이 강해지는 현실적 삶에서는 점차 비도덕적 감정으로 화한다.
3. 현실적 삶을 살아가면서 도덕적 감정과 비도덕적 감정은 같은 선상에서의 정도차가 아니라 결국 두 갈래로 갈라져버린다. 이를 거꾸로투사해서 본다면, 두 종류의 감정이 공히 리와 기에서 나왔으되 본래부터 도덕적 감정은 리 쪽에 뿌리를 두었고 비도덕적 감정은 기쪽에 뿌리를 두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양자는 탄생해서 진행하는 과정을 보면 리 · 기로부터 공발한 감정이 사단 국면에서 칠정 국면으로 변해간다고 할 수 있지만, 현실 속에서 나타나는 대립적 성격에주목해 다시 돌아가 생각해보면 애초에 도덕적 감정은 리에서 나오되기를 동반하는 것이었고 비도덕적 감정은 기에서 나오되 리를 동반하는 것이었다고 해야 한다. - P762

이황은 인심과 도심에 관련해 "인심이란 바로 칠정이 그것이요, 도심이란 바로 사단이 그것"이라 보았다. 그러나 사단과 칠정을 택일이 아닌정도의 문제로 본 이이에게 사단은 어디까지나 인심의 범주에 들어가며,
도심은 미발의 성으로 파악된다. 이는 이황의 ‘理氣隨‘를 ‘氣發理‘의입장에서 비판한 그의 사유 구도로 보면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성혼은 이황의 입장을 이어받아 이이에게 이의를 제기하게 되고, 양자의 서신 교환은 이황과 기대승 사이의 서신 교환이 그랬듯이 조선 철학사에서의 또 하나의 중요한 사건으로 남게 된다.
사단칠정론이 ‘정‘에 대한 논변이라면, ‘인심도심론‘은 ‘심‘에 대한 논변이다. ‘心性情‘의 구도에 입각해본다면, 전자는 심이 이미 발현해 나타나는 정의 두 종류인 사단과 칠정의 관계에 관한 논변이다. - P768

인심도심론이 성과 정을 나누지 않고 마음을 전체로서 다루었다면, 사단칠정론과 인물성동이론은 각각 감정과 도덕적 본성이라는 마음의 두 측면을 따로 다루었다. 정이 마음의 ‘이발‘의 측면이라면, 성은 마음의 ‘미발‘의측면이다. 따라서 인물성동이론은 미발 상태에서의 성에 관한 문제이다.
이성에 관련해 ‘인‘ 즉 사람과 ‘물‘ 즉 사람 외의 존재들(주로 동물들)의 동일성과 차이에 관한 논쟁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의 차이는 물론 근본적 차이를 뜻한다. 세부적 차이들은 너무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논쟁의핵심은 미발 상태에서는 인물이 ‘동‘하고 양자가 ‘이‘한 것은 이후 이발상태에서의 기의 문제라는 입장(인물성 동론)과 미발 상태에서 이미 인.물은 ‘이‘하다는 입장(인물성 이론)의 대립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 논쟁은17~18세기에 걸쳐 길게 전개되었거니와, 이는 조선의 철학자들이 주자학을 얼마나 집요하게 심화해나갔는가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본다면, 즉 17~18세기가 이미 철학사적인 그리고 세계사적인 거대한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던 때임을 생각하면, 이는 이들이 얼마나 어떤 일정한 테두리 안에 갇혀 스콜라적인 논변들을 계속했는가를 말해주기도한다. - P773

송·원·명의 성리학자들과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다른 역사적 맥락을 띠고 있었다. 송·원·명의 성리학자들은 자신들의 사상을 실제 정치에 구현하지 못했으며, 그들의 복고주의는 대개는 이념이나 학문·문화로서만 전개되었다. 오히려 왕안석·장거정 등의 신법이 혁신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다름 아니라 조선이라는 왕조를 만들어낸 주역들이었으며, 이 왕조를 설계하고 운영한 주인공들이었다. 뛰어난 정치가였을 뿐만 아니라 수준급의 정치학자이자 철학자이기도 했던 정도전 같은인물이 그 전형적인 예이다. 그들은 주자학과 상고주의를 실제 이 세계에구현하고자 했다. - P785

왕수인이 생각하는 ‘앎‘이란 흔히 말하는 ‘지식‘이 아니라 무엇이 올바른 것인가, 어떤 행위가 올바른 행위인가를 아는 것이다. 왕수인은 누구나 이런 앎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다만 행위하지 못 - P796

하는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모르는 척할 뿐이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누구나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이 왕수인의 확신이다. 그리고 그러한 앎을 자각한 사람은 당연히 그에 따라 행위한다는 것 또한 왕수인의 굳은 확신이다. 그렇게 행위하지 못하는 사람은 앎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이 본연의 앎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사람일 뿐이다. 이와 같은 논지는 물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맹자의 성선설을 바탕에 깔고 있는 주장이다. 그리고 "물을 터주는 것이 치지"라는 말에서 주자학과 양명학의 근본적 차이를 느낄수 있다. 왕수인은 우리 모두가 갖추고 있는 이 앎 즉 윤리적/도덕적 직관을 ‘양지(良知)‘라 불렀다. 왕수인에게 천리는 곧 양지이며, 양지를 깨닫는것 자체가 이미 천리에 따라 행위한다는 것을 뜻했다. - P797

양명학의 문제점은 주관에 머문 데 있는 것이 아니라오히려 객관으로 너무 멀리 나아간 데에 있다. 더 정확히 말해, 객관으로훌쩍 뛰어 건너간 데에 있다. 우리의 철학사에서 여러 번 반복해서 언급했듯이, 내면으로부터 시작해 너무 먼 객체성 냉정한 시선으로 보면 다소상상적인 객체성으로 도약해 건너뛴 철학들이 철학사에 간간히 등장해왔다. 양명학의 문제도 이런 철학들과 동질의 것이다. 양명학의 문제는주관에 머문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관으로부터 ‘태허‘, ‘하느님‘으로 너무 쉽게 건너뛴 데에 즉 그 사이의 구체적 객체성으로서의 자연과 역사를건너 뛰어버린 데에 있다. 자연과 역사라는 구체적 객체성과의 고투가 결여된 철학은 흔히 이처럼 너무 가까운 내면과 너무 먼 초월을 즉각적으로이어버리곤 한다. - P820

자가준칙에 입각하는 양명학은 어떤 사상과 결합하느냐에 따라 매우 심각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만일 마음은 그 자체로 지선이고 악은 바깥에서 오는 것이라면, 이를 왜곡했을 때 나는 선하고 세상은 악하다는 것이 된다. 그리고 여기에서 다시 한 번 비약하면, 이 악한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선한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된다는 이상한 논리가 나오는 것이다.34) 물론 제국주의, 파시즘 등과 결합됨으로써 - P823

인류에 해를 끼친 사상이 양명학만은 아니며, 따라서 이와 같은 식의 비판이 양명학에만 가해져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청일전쟁 이후일본 양명학의 흐름에는 이런 어두운 면이 들러붙어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 P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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