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학자들은 도가철학을 새롭게 개념화하면서 궁극적으로는 그것을 통해 유가철학을 새롭게 정초하고자 했다. 반면 죽림칠현은 진정한 유가적 심성을 간직하면서도 도가적 철학과 실천으로 힘겨운 시대를 뚫고나가고자 했다. 여기에는 양자의 ‘입장‘ 차이, 새로운 천하통일을 눈앞에두고서 새로운 정초를 꿈꾼 현학자들과 이미 썩어버린 유교제국에 맞닥뜨려 그것으로부터 탈주하고자 한 죽림칠현 사이의 차이가 있다. 내용상으로다르지만, 이런 관계는 일면 키케로와 세네카의 차이를 연상케 한다.
현학자들은 여전히 ‘천하‘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론적 정초를 위해도가철학을 필요로 했지만, 그들의 주안점은 유가철학의 새로운 정초였고천하통일의 준비였다. 반면 죽림칠현은 ‘강호‘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여전히 본연의 의미에서의 유가적 심성을 간직했지만, 그들이 꿈꾼 것은 도가철학을 통한 강호에서의 탈주였다. 그러나 죽림칠현은 소요의 길을 꿈꿀 수 있었을 뿐 투쟁의 길은 걸어가지 못했다. - P485

서진(나아가 동진)의 역사는 또한 죽림칠현의 악영향, 정확히 말해 속화와 희화화의 과정이기도 했다. 속화(vulgarization)와 희화화(parody)는 그 어떤 사상에도 따라다니는 어두운 그림자이다.102) 당대의 많은 명사들이 죽림칠현과 같은 정치적 맥락과 내면적 고뇌도 없이 오석산(五)을 먹고, 술과 가무에 취해서 살면서, 온갖 사치를 부렸으며, 재치는 있으나 실질은 없는 청담을 일삼았다. 이는 미인 서시가 미간을 찌푸리고 다닌다고 뭇 여성들이 같이 찌푸리고 다니고, 선비 곽림종이 두건 한쪽을 폈다고 뭇 남성들이 같이 펴고 다니는 꼴이었다. 이 때문에 후대인들은 죽림칠현을 극히 부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본류와 말류를, 본래의 사상과 그 속화·희화화된 것들을 구분하지 못하는 일이라 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서진 왕조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팔왕의 난‘과 ‘영가의 난‘을 겪으면서 속절없이 무너져버린다. - P486

사실상 AD 3~6세기에 걸친 긴 다원화 시대가 전개된 것이다. 정치적 - 군사적으로 이 시대는 AD 5~8세기의 지중해세계에서와 같은 암흑시대였다. 그러나 문화적 측면에서 볼 때면 놀랍게도 동북아의 이 시대는 오히려각종 문화가 다채롭게 꽃핀 시대이기도 했다. 이 흥미로운 대조는 어디에서 유래하는 것일까? 이 시대는 지중해세계의 암흑시대에서처럼 동북아에서도 북방의 이민족들 중원의 문화에서 본다면 야만족들이 남방으로 밀려온 시대였다. 또 이 시대는 한편으로는 사분오열된 북방과 다른 한편으로는 기존 중원 문화를 이어간 남방으로 나뉜 시대이며, 이 점에서도사분오열된 서방과 기존 로마 문명을 이어간 동방으로 나뉘었던 지중해세계의 역사와 흡사하다. 다른 차이들을 접어둔다면, 유라시아 동과 서의 같・시대에 유사한 구도의 역사가 진행되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러나 문화적 특히 사상적 측면에서 본다면 동과 서는 판이하다. 왜였을까?
우선은 동북아 문명에서 ‘문‘의 우위와 이를 뒷받침하는 문사-관료들, 문사- 귀족들 즉 ‘사대부‘ 계층의 존재를 들 수 있다. - P489

지중해세계에서 이슬람이라는 새로운 종교가 도래했다면, 동북아세계에서는 불교라는 새로운 종교가 도래했다. 그러나 동북아에서는
‘기독교 vs. 이슬람교‘ 같은 격한 구도는 성립하지 않았다. 물론 도교와 불교는 서로 경쟁했고 때로는 대립하기도 했지만, 유교와 도교 그리고 불교는 종교전쟁을 일으키기는커녕 많은 수준 높은 사상적 - 문화적 결실들을가져왔다. ‘종교전쟁‘이 없었다는 것이야말로 동북아 문명의 위대한 측면이다. 지중해세계의 서방은 동방으로 십자군을 보냈지만, 동북아세계의 동방은 구도(求道僧)들을 서방=서역으로 보냈다. 이러한 차이를 통해 동북아세계의 ‘암흑시대‘는 오히려 문화가 찬란하게 꽃핀 시대, "빛나는 암흑시대"가 되었던 것이다. - P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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