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체 1권을 읽고 삼체 중드 시리즈 앞부분을 보고 있다가 바빠져서 한동안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출퇴근으로 이동하는 길에 조금씩 드라마를 다시 보기 시작하면서 삼체 1권을 재완독했다. 여전히 난해하지만 다시 읽으면서 보이는 부분들이 많다. 


삼체 중드는 삼체 소설 1권의 내용을 담고 있는데 원작에 충실하다는 것을 단번에 느낄 수가 있다. 캐스팅도 어쩜 그리 찰떡으로 했는지 특히 왕먀오와 스창, 선위페이, 예원제 등... 모두들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들이라 흡입력을 더한다. 원작 내용상 전체적으로 드라마는 묵직한 분위기로 이어지기 때문에 재미를 생각한다면 다른 컨텐츠를 보는 것이 낫겠다. 넷플릭스 삼체도 진작 나왔지만 여력이 안 되어서 아직 시도해보지는 못했다. 원작과는 다른 느낌이 많다는 평인데 어쨌든 나는  궁금해서라도 향후 보기는 할 것 같다.

삼체 소설을 읽고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그대로의 영상을 원한다면 30부작인 중국 드라마를 추천한다. 


삼체 이야기는 수학, 물리, 천문학 등 관련 지식들이 많아 어려울 수 있지만 대중들도 흥미롭게 여길 수 있는 이야깃거리가 제법 많다. 나도 순수 과학을 전공하지는 않았어도 재미나게 볼 수 있었다. 


삼체 1권에서 중요한 에피소드를 몇 개만 꼽아보자.


먼저, 초반에 왕먀오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과학의 경계에 뛰어들어가기까지의 과정이 흥미로웠다. 누구라도 눈 앞에 시한폭탄 타이머가 움직인다면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 타이머의 끝은 어떤 것일지, 내 삶은 이대로 끝이 날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압박감이 타이머가 종료될 때까지 지속될테니 말이다. 안경을 쓰는 사람이라면 알텐데 눈 앞에 종종 희뿌연 안개 같은 현상이 일어날 때가 있다. 가끔씩 느끼는 어지러움증과는 다른 느낌인데 그럴 때마다 불편함을 느끼곤 한다. 잠깐동안 생기는 것에도 불편함을 느끼는데 매 순간 눈 앞에 숫자가 새겨지는 경험은 역시 유쾌할 것 같지가 않다.


숫자들이 그를 집요하게 따라왔다. 침대에서 내려와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열었다. 창밖 잠든 도시의 불빛은 여전히 찬란했고, 카운트다운 숫자는 광활한 도시를 배경으로 영화 속 자막처럼 떠 있었다. - '저격수와 농장주' 中


두 번째로, 홍안 기지의 진실이 파헤쳐지기까지의 과정이다. 중심 인물은 예원제로 부모가 모두 물리학도였으니 자연스레 그도 물리를 전공했다. 그의 부모는 서로 입장이 달랐는데 한쪽은 기본과 이론을 중요시했다면 다른 한쪽은 현실에서의 적용(응용)이 중요하다는 입장이었다. 당시는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냉전이 시작된 시점으로 양국 간 우주 경쟁이 본격화되면서 중국도 그 경쟁에 뛰어들게 된다. 마오쩌둥의 사상 검증에 의해 예원제의 부모는 걸려들어 갈라서게 되었고 그녀도 이로 인해 노동형을 받아 가게 된다. 그러다 어떤 계기로 예원제는 양웨이닝과 레이즈청을 따라 홍안 기지에 들어선다. 


사실 나는 홍안기지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찾아나가는 과정도 흥미로웠으나 그 전에 환경에 대한 비판이 인상 깊었다. 예원제가 노동형을 받으면서 읽게된 책이 공교롭게도 카슨의 <침묵의 봄>이었다는 것이 절묘하다는 생각을 했다. 베트남 전에서 DDT에 의한 피해가 극심했다는 것은 이제 잘 알려진 사실인데 카슨의 책을 통해서 이는 더 잘 알려진 면이 있다.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숲의 나무들은 끝도 없이 잘려나갔다. 붉은 등을 내뿜는 거대한 전파 망원경은 새 떼를 집어삼키고 근방의 사람들에게는 알 수 없는 피부의 가려움증이 생겨난다. 오늘 아침 신문 기사에서 이런 단어를 보았다. '기후 위기'나 '기후 재앙'을 넘어선, '기후 이상화'라는 단어다. 얼마 전 6월 중 역대 최고 기온을 찍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해외에는 성지 순례를 간 사람들이 50도가 넘는 폭염을 이기지 못하고 900명이 넘게 사망했다고 들었다. 갈수록 지구의 환경은 극한으로 치닫고 있는데 이를 타개하기 위한 노력은 너무나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푸다닥하는 소리가 나더니 산 아래 숲에서 어두운 그림자가 밤하늘로 속속 떠올라 빙빙 돌았다. 그녀는 엄동설한 숲속에 그렇게 많은 새들이 있다는 것에 놀랐다. 이어 공포스러운 광경이 펼쳐졌다. 새 떼가 안테나가 향한 곳으로 날아들더니 희미하게 빛나는 구름을 배경으로 후드득 추락하기 시작했다. 약 15분 뒤, 안테나의 붉은 등이 꺼졌고 피부의 가려움증도 사라졌다. - '홍안 1' 中 


세 번째로, '삼체'의 목적과 지구삼체조직에 대한 진실을 추적하기까지의 과정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구원파와 강림파 간의 구도를 설정한 작가의 생각이 좋았다. 지구는 누군가의 힘을 빌려 구원받을 수 있는가, 지구는 더 이상 가망이 없으니 없애버리고 다른 길을 찾을 것인가. 각 파의 대표 인물인 선위페이와 판한이 치열한 갈등을 벌일 때 특히나 흥미로웠다.


웨이청이 말했다. "삼체문제(질량이 같거나 비슷한 물체 세 개가 상호 인력의 작용 아래 어떤 운동을 하는가 하는 문제로 고전 물리학의 중요 문제이고, 천체 운동 연구에 중요한 의의가 있어 16세기 이후 계속 관심을 받았다)의 진정한 해결 방법은 어떠한 시간 단면의 초기 운동 벡터를 알고 있을 때 삼체 시스템 이후의 모든 운동 상태를 정확히 예측할 수 있는 수학 모델을 구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선위페이도 갈망하는 목표였습니다."

선위페이가 말했죠. '당신들은 주의 힘을 빌려 인간에 반대하지요.' 그러자 판한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완전히 틀린 건 아니지. 우리는 주가 세상에 강림해서 진작에 벌을 받았어야 할 인간들을 처벌해야 한다고 생각해. 하지만 당신이 강림을 막고 있지. 그러니 우리는 공존할 수 없어." - '삼체문제' 中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핵심 인물이 밝혀지기까지의 추적 과정은 그야말로 짜릿하다. 중심 인물이 밝혀지고 지구삼체조직이 설정되고 나서는 오히려 평범하게 느껴지는 면이 있기까지 했다. 물리 개념을 몰라도 과학과 문명이 지구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현재와 미래를 위해 지구인이 해야 할 생각과 행동은 무엇인지 절실히 느낄 수 있는 수작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학창 시절 '물리' 선생님만 좋아했지 정작 '물리'와는 담 쌓고 지냈던 때가 떠오르기도 했다. 컴퓨터를 전공했음에도 인문/사회 분야에 관한 책들을 주로 읽느라 과학 분야의 책을 등한시하고 있는데 간간이 읽어보자는 결심을 갖게 하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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