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 재정을 궁지로 몰아가고 가고 번주의 위신을 실추시켜 천황의 권위를 상승시킨 것이 보신전쟁이었다.

게이오 3년(1867년) 11월 2일, 사쓰마번사 데라시마 무네노리는 번주 시마즈 다다요시에게 의견서를 제출했다. 요시노부의 대정봉환이 이루어져 조정이 제번주에 상경을 명해 번주 다다요시가 가고시마를 떠나려던 시기였다.
의견서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정권이 조정에 반환된 현상황에서 모든 인민이 감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봉건 제후’ 다시 말해 제번주를 폐지하고 ‘진정한 왕도’를 세우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제번주는 ‘봉지’와 ‘국민’을 조정에 반환하여 스스로 ‘서민’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하여야 비로소 공명정대한 ‘근왕’이 실현되는 것이다. 구태의연한 ‘제후’인 채로는 정권을 조정이 쥐어도 ‘이름’만 달라질 뿐이며 ‘실질’은 전혀 변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명확한 판적봉환론이다.
다만 데라시마도 ‘사람들의 특성’이 자기가 하고자 하는 말만 하고 남의 말을 듣지 않는 상황으로, 즉시 이것이 실현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에 구체적으로는 사쓰마번이 앞서서 영지를 몇 분의 일을 반환하고 다른 번주도 이를 따라 반환하도록 제안했다

기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왕정복고 정신은 가마쿠라 이래 700년간 이어져온 봉건할거라는 ‘적폐’를 일소해야 비로소 실현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모든 번주가 토지와 인민을 조정에 ‘반납’해야 한다. 기도는 제번이 조정의 권력을 좌우하는, 즉 밑의 세력이 강하여 위에서 제어하기 힘든 상황을 우려했던 것이다. 이를 미연에 막아 ‘진정한 권력’을 조정에 확립시키기 위해서도 판적봉환은 필요했다(

애초에 왕정복고란 전국의 정치를 ‘일제히’ 조정에 돌려주는 것으로, 각 번이 대항하는 이 같은 상황의 폐해를 타파하고 정령은 모두 조정에서 나오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모든 번주가 ‘정치·병마의 권한’을 조정에 봉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봉환 후의 영지는 부현으로 만들 것, 번주에게는 작위와 봉록을 주어 귀족으로서 상원 의원이 되도록 할 것, 번사 일부는 조정의 병사나 관리를 앉히고 나머지는 ‘토착화’할 것 등을 제안했다.
이와 같이 이토의 건백은 정치권력을 조정으로 일원화하자는 판적봉환론이지만, 단순히 판적을 봉환하는 것이 아니다. 기도나 오쿠보가 명확히 하지 못했던 ‘속내’, 다시 말해 봉환 후의 조치를 확실히 드러내고 있다.

이토는 더 나아가 다음해 2년 1월 ‘국시강목’을 건의한다. 앞의 정치·군사권 봉환을 포함한 전 6항목에 이르는 의견서이다. 다른 5항목은 천황중심체제 수립, 대외적 독립 유지, 자유권 확충, 서양학술 도입, 대외화친정책 추진이다. 이 의견서는 제번에도 널리 회람되어 ‘효고론’이라 불리게 된다.

건백서는 당시의 유신정권 내에 존재하던 왕토왕민론과 재교부론 쌍방의 의견을 거둬들여 작성한 것이었다. 양자는 본래 모순되는 것이나 그 실현을 위해서는 양자 모두 판적봉환이 필요불가결한 수단이기에 타협의 여지는 있었다.

건백서의 내용을 검토하면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는 왕토왕민론에서 나온 영지·영민의 반환이고, 또하나는 천황에 의한 재교부 청원이다. 허나 이 두 가지는 원리적으로 모순된다. 왕토왕민론은 일군만민 아래 영유권을 모두 천황에게 귀속시켜 일체의 사유를 인정하지 않는 주의이다. 이에 비해 재교부론은 구막부시대 쇼군을 대신하는 것으로, 소령을 재확인했던 관행에 기초하여 번의 개별 영유권을 전제로 하는 주의이다. 그럼 이러한 모순이 어째서 하나의 건백서에 동시에 나타나게 된 것인가?

천황친정이라는 기본적 성격은 지니고 가면서도 유신정권은 제번에 기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공론’이란 구체적으로는 제번의 의사를 의미했으며, 그 제도화가 공의소였던 것이다.

판적봉환을 둘러싼 제번은 이후의 번체제를 어떻게 할지 의론을 전개했다. 이를 보면 번체제를 해체하는 군현론은 소수였으며, 다수는 현실의 부번현 세 통치 체제를 전제로 종래의 번체제를 온존하려는 군현·봉건병용론이었던 것이 확인된다. 그리고 이것은 유신정권이 진행하려 하는 방향과 기본적으로는 같은 것이었다.

판적봉환의 가장 큰 의의는 번주의 개별영유권이 부정된 것이다. 왕토왕민론은 여기에서 제도적으로는 실현되었다. 제후의 종래의 영지는 ‘관할지’로 불리게 되었고, 지번사는 천황의 토지를 관리하는 지방장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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