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전교조는 아니더라고?"
그 말을 듣고 곽은 조합에 가입해둘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민원으로부터 보호받으려면 조직이 있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전교조와 교총 등 모든 교원 조직 가입을 거절했던 이유를 돌아보고 있을 때 교장이 말을 이었다.
"다행이네. 전교조 교사, 수업중 마르크스 읽혀. 이런 기사라도 나봐. 작살난다."
기사에 달릴 댓글이 눈에 선했다. 전교조가 사상 교육으로 학생들을 세뇌하며 공교육의 저반을 흔들고 있다…… 노동조합에 대한 몰이해는 차치하고, 곽이 가늠할 때 조합에는 그런 영향력이 남아 있지도 않았다. 학생들이 들어줘야 세뇌를 하고, 조합원이 존재해야 저반을 흔들 것 아닌가. 전교조를 한국 교육에 암약하는 간첩 집단 취급하는 세계관은 황당하다못해 순진해 보였다. 하지만 광범위하게 실재하는 편견이기도 했다.

모두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수업을 듣지 않는 게, 혹은 어떠한 학교교육에도 참여하지 않는 게 부와 권력만을 추종하고 소수자를 배척하며 환경을 파괴하는 불량배로 성장할 거라는 뜻은 아니었다. 노동 착취에 시달리며 형벌 같은 생존을 이어가지만 어떤 비판 의식도 벼릴 수 없는 죄수가 된다는 뜻도 아니었다. 아무도 예단할 권리는 없었다. 학교에서 잘 배워야 훌륭한 시민으로 성장한다는 믿음은, 제도교육에서 ‘모범적인’ 성취를 얻어서 삶의 기반을 마련한 자신 같은 교사들의 고정관념이었다. 공교육이란 중산층의 아비투스를 재생산하고 체제 유지에 기여하는, 필연적으로 보수적인 국가 장치 아닌가. 바른 자세로 수업을 경청하라는 지도는 규율화된 신체를 양산해 사회적 유용성을 극대화하려는 ‘학교-감옥’의 통치술 아니냔 말이다. 곽은 일리치, 부르디외, 푸코 등을 떠올리며…… 어떤 지도도 하지 않았다. 엎드린 학생들의 뒤통수를 애정어린 눈으로 보았다. 학생들이 버리고 간 학습지의 빈칸에 숨은, 자신이 모르는 언어로 된 가지각색의 목소리들을 상상했다.

비극적으로 여길 필요는 없었다. 전성기는 무한히 지속될 수 없으며, 때로 아티스트는 대중의 외면을 스스로 가속시키는 법이다.

이야기에는 효율성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메시지가 있다

세상은 정치적인 음악가에게는 약간의 존경을 적선하지만, 정치하는 음악가에게는 무자비하다는 걸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언론은 정치에 발을 들였던 예술가들의 궁색한 말로와 군소정당의 반복적 실패를 부각중이다. 호사가들은 로나의 선언을 유력 정당 공천을 유리한 조건에 받기 위한 포석으로 폄하하고 있다. 가장 가슴 아픈 사실은, 팬들조차 그녀가 ‘순수함’을 잃었다고 손가락질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대 또는 아스팔트에 있어야만, 허락된 자리에 머물러야만 보존되는 ‘순수함’에 우리는 동의하지 않는다.

우리는 외다리비둘기이며 아로미이다. 제플린88과 똑딱이단추, 배부른소크라테스와 목련러너, 까망쥐, 잉맨, 사축A, 빵또아, 붕어싸이코, 당근도기립하시오이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친구와 연인, 추종자이자 소비자, 감시자와 연구자 또는 변호사였으며, 이제 로나의 동지가 되려 하는 사람들이다. 로나는 모두의 스타가 아닐지언정 우리의 별이다. 우리는 ‘모두’가 아니므로 당신의 하루를 모른다. 하지만 알고 싶다. 로나가 질문했듯, 만약 당신이 단지 생존하기 위해 그렇게나 일하는 데에 지쳤다면, 더 많은 삶을 사랑하고 창조하는 데에 쓰고 싶다면, 자신이 자유로운 인간인지 의심해본 적이 있다면, 당신은 우리다. 머지않은 창당 대회, 서로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지라도 우리는 붉은 도브의 연주에 맞춰 같은 노래를 부를 것이다. 우리의 별, 로나가 예고한 대로 그 노래의 제목은 ‘우리는 가능하다’이다.

하늘이 맑았다. 눈밭은 하얬고 바다는 파랬다. 음식냄새를 피우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날이었다. 미안한 일에 사과하고 고마운 일에 인사하기. 마주앉아 밥을 먹고 나란히 서서 사진 찍기. 그러려면 때맞춰 울리는 알람이 필요하다는 느낌. 한시에는 한 번, 열두시에는 열두 번의 종소리가 울리도록. 돌아가면 오른쪽 태엽을 감아보고 싶었다. 열두 바퀴든 열두 바퀴 반이든. 그때 잘못 셌거나 지금 잘못 셌거나. 아니면 그때는 열두 바퀴였는데 이제는 열두 바퀴 반이거나. 시계판 뒤에 무슨 장난과 음모가 있든 살아야 할 시간이 많았다. 어쩌면 서핑을 배울 수 있을 만큼 긴 시간이 있을지도 몰랐다. 왜 시도도 안 해봤을까. 나도 파도를 탈 수 있지. 그래, 나는 파도를 탈 수도 있어.
그는 그런 생각을 하며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눈 쌓인 갓길에 서 있었다. 나직한 바람에 봉지의 표면이 파르르 떨렸다.

버리려면 들어야 했다. 버리는 것과 떨어뜨리는 것은 아주 달랐다.

아까 군청 사람을 만났는데 말이야.
아버지는 소주를 들이켜며 말을 이었다. 가족끼리도 카지노에 놀러간다는 먼 나라. 늘어나는 관광객들을 위해 지어질 도로와 호텔. 동네가 탄광문화관광촌으로 개발되면 치솟을 땅값. 국회의원으로부터 도의원, 군의원 들로 이어지는 낯선 이름들. 결국 군청의 아무개 계장이 아버지와 몇 촌이며 항렬이 어떻게 되는지. 그래서 송희 너는 앞으로 무엇을 배워두면 좋은지……
송희는 아버지의 야윈 팔뚝을 보았다. 검댕이 묻은 작업복을 입고 작업화를 신었던 옛날. 저 팔뚝으로 정말 깜깜한 땅속에서 돌덩이를 내리쳤을까. 탄차를 밀고 포대를 짊어지고 어머니를 안았을까. 그리고 나를 들어올렸을까. 송희는 눈앞의 사람이 버린 것과 버리지 못한 것을 가늠해보았다.
송희는 물었다.
근데 아빠는 몸무게가 몇이야?

정확한 궤적으로 떠오르는 바벨. 무수히 상상했던 깨끗한 움직임. 꽂힌 원판을 세어보니 이미 100킬로그램이었다.
3차 시기를 위해 복도를 걸으며 송희는 ‘마지막’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오늘 역도대에 오른 건 이십여 명. 그중 십수 명은 역도화를 벗게 될 것이다. 송희는 자기가 그 십수 명 중 하나라는 걸 받아들일 준비를 했다. 다만 바벨을 떨어뜨리고 끝내고 싶진 않았을 뿐.

방해하는 사람은 없어.
그래. 사실 언제나 없었지. 적어도 역도대 위에서는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도 말리지도 않았어. 송희는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들었거나, 내가 들지 못했을 뿐.
이상하게 말이야.
송희는 그렇게 말하며 바벨에 원판을 더 꽂았다. 그것은 100킬로그램이 되었다.
이제 아무도 밉지가 않아.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한다. 어떤 실수는 바로잡을 수 없을 뿐이다.

나는 살고 있을까.

잘 살려면 일단 살아야 한다. 살려면 생각을 멈추고 잠들어야 한다. ‘나는 살고 있다’는 쓸모없는 주문이다.

지금 내가 알아내야 할 것은 보편 법칙이나 핵폭탄 해제 비밀번호가 아니라 어머니에게 선물한 태블릿의 게임 계정이 왜 자꾸 로그아웃되는가이다. 〈사천성〉과 〈애니팡〉은 어머니의 취미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지만 요즘은 혼자 하는 캐주얼 게임조차 로그인을 요구한다. 영문자와 숫자와 특수문자가 조합된 열두 자리의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일은 68세의 인간을 화나게 한다. 대문자 자동 변경 기능을 끄고 특수문자 키보드로 전환하는 방법을 전화로 설명하는 일은 나를 화나게 한다.

오늘날 ‘문명국가’의 다수 시민은 화요일 밤에는 실시간 중계되는 가자 지구의 화염을 보고 목요일 정오에는 총기 난사범의 프로필을 듣더라도 일요일 오전에는 애인에게 단검이 아니라 커피와 토스트를 건넬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차세계대전을 끝낸 폭발 이후 현재까지의 시대를 핵에 의한 평화, 즉 ‘팍스 아토미카Pax Atomica’라 부르기도 한다.

누구도 누구를 치유하기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은 마음의 상호확증파괴다.

나는 가장 먼저 깊은 밤의 문 앞으로 간다. 나는 문을 닫지 않는다. 문을 열지도 않는다. 나는 문을 없앤다. 문도 문틀도, 그것들을 지지하는 벽과 기둥도 없애버린다. 모두 사라진 곳에 활주로가 나타난다.

‘규범’ ‘정상’ ‘평균’ 같은 억압적 개념들에서 평범함을 떨어뜨려놓을수록, 평범함이 얼마나 다양하고 비일관적이며 풍부한 것인지 볼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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