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백인은 무르델레(murdele), 즉 바다에서 나온사람들이다. 흑인들의 전승은 오늘날까지도 백인들을 처음 보았을 때의 - P609

그 놀라운 상황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우리의 조상들은 대양 위로거대한 배 한 척이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이 배는 새하얀 날개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칼처럼 빛나고 있었다. 백인들이 물에서 나와서 말을 걸었는데 그 말을 누구도 알아듣지 못했다. 우리의 조상들은 겁을 먹었다. 그리고이 백인들이 죽은 사람들의 영혼인 붐비(Vumbi)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활을쏘며 이들을 바다로 다시 내몰려고 했다. 그러자 붐비들은 천둥소리를 내면서 불을 내뿜었다........." 흑인들은 이렇게 백인들을 처음 접했을 때 그들이 배 밖에서 산다는 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 P610

유럽의 탐욕스러운 수요에 직면해서 아프리카는 결국 고전적인 경제규칙에 맞추어 행동했다. 가격을 올린 것이다.
필립 커틴은 가격과 교역조건(terms of trade)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그의 명제를 증명했다. "화폐"의 성격이 원시적이라고는 해도 그것으로도 가격이나 교역조건 등의 문제를 훌륭히 소화해냈다. 사실 세네감비아의 명목화폐인 철괴에 대해서 영국 상인이 30파운드 스털링으로 산정한 것은 가격이아니라 하나의 가공화폐인 파운드 스털링 화와 또다른 가공화폐인 철괴 사 - P617

이의 환율을 나타낸다. 철괴로 나타낸 (그리고 결과적으로 파운드 스털링 화로 나타낸) 상품 가격은 본문의 표가 보여주듯이 계속 변동했다. 우리는 세네감비아에 대해서 가능성 있는 수입 총액 및 수출 총액을 계산해볼 수 있으며 "한 경제가 외부와의 교역에서 어느 정도의 이익을 이끌어낼 수 있는지추산할 수 있게 해주는 지표"인204) 교역조건을 개략적으로 계산할 수 있다.
커틴은 수출과 수입, 이 나라에 들어갈 때의 가격과 나갈 때의 가격을 비교함으로써 세네감비아는 외부와의 교역에서 갈수록 유리해졌다고 결론을 내렸다. 더 많은 금과 노예, 상아를 얻기 위해서 유럽인들은 그들의 상품 공급을 늘리고 가격을 낮추어야만 했다. 세네감비아에 대해서 확인한 이 사실은아마도 블랙 아프리카 전체에 대해서도 타당할 것이다. 블랙 아프리카는 신대륙의 플랜테이션, 사금채취장, 도시들의 요구에 응해서 점차 더 많은 노예들을 공급했다. - P618

러시아라는 거인은 변경지역까지 확고하게 지배하지는못했다. 베이징, 이스탄불, 에스파한, 라이프치히, 르비우, 뤼베크, 암스테르담, 런던 등지에서 러시아의 교역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조정되었다. 러시아 상인들이 기를 펴고 활동한 것은 러시아 내부의 시장들, 러시아 영토 내의 여러 곳에 퍼져 있는 정기시들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이들은 상트 페테르부르크나 아르한겔스크에서 외국 상품을 수입한 다음 이것을 가지고 멀리 이르쿠츠크 너머에서까지 교환화폐처럼 사용함으로써 [이전에 당한 패배에 대해서/역주] 복수를 한 것이다. - P650

튀르키예 제국의 대지는 ‘근동(東)‘이라는 요지를 창출했는데 이것은 이 제국의 권력의 생생한 원천이 되었다. 특히 1516년에 시리아, 1517년에 이집트를 정복함으로써 위대한 제국의 건설이 완수된 이후 이 점이 더욱 분명해졌다. 그러나 이 시기에 이르면 근동은 이전의 비잔티움 시대나 이슬람이 승리를 거두던 초기 시대와 같은 세계 유수의 요지는 더는 아니었다. - P657

아메리카의 발견(1492)과 희망봉 항로의 발견(1498) 이후 유럽이 유리한 위치에 섰다.

그리하여 근동의 요지는 가치를 상실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제로가 되지는 않았다. 오랫동안 최고의 지위를 누렸던 레반트 무역은 튀르키예가 시리아를 정복하고(1516) 이집트를 정복한 때(1517)에도 완전히 멈추지는 않았으며 지중해의 인근 통로들이 완전히 버려진 것도 아니었다. 홍해와 흑해는계속 이용했다. - P658

"유럽의 지중해, 북해, 대서양에서 볼 수 있는 다양성과 큰 규모의 해상교역의 망"이 등장했고 갈수록 더 명확해졌다. 비단, 향신료, 후추, 금, 은, 보석, 진주, 아편, 커피, 쌀, 인디고, 면, 초석, 티크 목재(조선용으로 쓰인다), 페르시아의 말, 실론의 코끼리, 철, 강철, 구리, 주석, 높은 분들을 위한 호화로운 직물들, 향신료를 생산하는 섬의 농민이나 모노모타파 왕국의 흑인을 위한 거친 직물 등 사치품이든 통상적인 상품들이든 모든 것이이곳에 섞여 들어가고 또 혼합되었다. "인도 내 무역"은 유럽인들이 도착하기 오래 전에 이미 자리 잡고 있었다. 왜냐하면 상호 보충적인 상품들이서로 유인하고 균형을 이루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아시아의 바다에서도 유럽의 바다와 유사한 상품순환의 끝없는 움직임을 활성화시켰다. - P682

상업수지가맞기 위해서는 한쪽의 열정이 다른 쪽의 열정과 맞아떨어져야 하는 법이다.
그런데 아시아는 로마 시대 이래로 귀금속만 받아들이면서 이 교역을 수행했다. 즉, 금(코로만델 해안에서 선호했다)과 더 흔히는 은을 받고서야 교역에응한 것이다. 이미 자주 이야기했지만 중국과 인도는 세계에서 유통되던 귀금속의 묘지가 되어버렸다. 귀금속은 이곳에 들어갔다가는 다시 나오지 못했다. 이 이상한 상수 요인은 서유럽에서부터 동양으로의 출혈을 유발 - P687

했다. 이에 대해서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아시아에 대한 유럽의 약점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이것은 유럽이 아시아에서, 혹은 유럽 내에서도 대단히 수익성이 좋은 시장을 개방시키는 수단이었다. 16세기에 아메리카의 발견과 신대륙 광산의 개발 덕분에 이 수단은 이전에 볼 수 없었던정도로 크게 강화되었다. - P688

분명 18세기의 인도에서는 혁명적인 산업자본주의가 탄생하지 못했다. 인도는 자기 자신의 경계 안에서는 안도하며 잘 살았고 자연스럽고 힘 있고성공적으로 움직였다. 인도의 농업은 전통적이기는 하지만 조밀하고 생산성이 높았으며, 산업은 옛날 유형이기는 하지만 극도로 활력 있고 효율적이었다(1810년까지 인도의 강철은 스웨덴제보다는 못하지만 영국제보다는 높은품질을 자랑했다). 이 나라에는 아주 오래 전부터 화폐경제가 작동하고있었다. 그리고 많은 효율적인 상인집단이 존재했다. 마지막으로 이 나라의상공업의 힘은 활기찬 원거리 교역에 근거하고 있었다. 그것은 자기 자신보다 훨씬 넓은 경제 공간을 무대로 했다. - P727

사회 전체가 산업생활 방식을 향해서 움직여간다는 의미의 산업주의(industrialisme)라는 말이 산업혁명이라는말보다 더 넓은 의미를 가진다는 것은 분명하다. 농업 우위의 사회로부터산업생산 우위의 사회로의 이행을 뜻하는 그 자체가 이미 심대한 움직임이다-산업화는 앞에서 이야기한 것보다 더 넓은 의미를 가진다는 것도 분명하다. 산업혁명은 말하자면 산업화의 가속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근대화라는 말은 산업화보다도 더 넓은 뜻을 가진다. "산업발전만이 근대경제의 전부가 아니다. " 성장은 더더욱 넓은 뜻을 가진다. 이 말은 역사의 총체성을 포함한다. - P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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