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국의 동인도회사(VOC) 때문에 안달하고 이 회사의 특권들을 질시하던 네덜란드 상인들이 경쟁국인 영국, 덴마크, 스웨덴, 프랑스 등지의 동인도회사에 자본을 제공하거나 더 나아가서 오스텐더 회사 같은 것을 설립 - P281

한 것을 보면 사실 놀랍지 않은가? 네덜란드 상인들이 자기 나라 배들을 공격하기도 하는 됭케르크 출신의 프랑스 해적들에게 돈을 투자하고, 북해에서 활동하는 바르바리 해적들(사실 이들은 흔히 조국을 등진 네덜란드인인경우가 많았다)과 내통하고 있다는 것은 어떠한가? 1629년에 아바나 근처에서 스페인의 갤리온선 한 척을 나포한 후 네덜란드 서인도회사의 주주들이 약탈물의 즉시 분배를 주장함으로써 이 회사의 최초의 약점을 만든 것은또 어떠한가? 1654년에 포르투갈인들은 네덜란드에서 산 무기를 가지고헤시피에서 네덜란드인들을 축출했고 루이 14세 역시 네덜란드 무기를 사서 1672년에 네덜란드를 공격했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동안 이탈리아에서 전쟁을 수행하던 프랑스군의 군자금 지불은 암스테르담의 중계를 통해서 이루어졌는데, 이것은 네덜란드의 동맹국이면서 프랑스와 적대관계에 있던 영국의 분노를 자아냈다. 네덜란드가 그렇게 행동한 이유는 이 나라에서는 상인이야말로 왕이며, 상업이해가 국가이성이기 때문이다. - P282

네덜란드의 최초의 거창한 약진은 발트 해 및 플랑드르, 독일, 프랑스의 상업이라는 북쪽의 극점과 아메리카 대륙으로의 개방성을 갖춘 세비야라는 남쪽의 극점 양쪽을 선박과 상인들로 확고히 연결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스페인은 원재료와 공산품을 받았다. 네덜란드는 공식적으로든 아니든 그에 대한 대가로 현찰을 입수했다. 그리고 이렇게 획득한 은은 상업을 원활하게 유지해가는 보장이 되었다. 발트 지역과의 교역에서 수입 초과를 기록하던 이 나라로서는 은이 시장을 강제로 개방시키고 경쟁자를 눌러이기는 수단이 되었다. - P288

동인도회사의 역사는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영욕이 겹치는 역사였다. 대개 17세기에는 사정이 좋았다. 그러다가 1696년을 전후한30-40년 동안에 사정이 지속적으로 악화되었다.
유럽에서 후추의 우월성이 사라진 것이 결정적이었다. 이것은 1670년부터잠재적으로 보이던 현상이다. 이외의 보상으로서 고급 향신료들이 중요한지위를 계속 유지하거나 혹은 상대적으로 나아졌으며, 비단류나 면직류염색을 한 것이든 아니든와 같은 인도의 직물이 갈수록 중요한 자리를차지했고 또 차, 커피, 라카, 중국 도자기 등의 새로운 상품들이 등장했다. - P306

앞에서 말한 것들 이외에도 과거의 유통로와 시장에서 고장이 일어났고, 이 회사가 많이 이용하던 순환로에 틈새가 벌어졌다. 이런 경우에 흔히 있는 일이지만 때로는 옛 체제가 계속 살아남는 것이 새로운 적응을 방해하고는 한다. 가장 중요한 혁신은 차 무역의 확대 그리고 각국 상인들에게 중국이 개방된 일일 것이다. 1698년부터 영국 동인도회사가 재빨리 직교역(즉, 현찰교역)에 뛰어든 반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기존의 방식을고집했다. 즉, 후추와 약간의 계피 그리고 산탈 목재, 산호 등을 사러 바타비아에 오는 정크선들에서 중국 상품을 구매하는 데에 익숙했기 때문에 현찰에 의존하는 일 없이 상품을 통해서 거래하는 간접교역을 계속했다. 마지막으로 면화, 은 그리고 종국적으로는 아편을 주고 차를 구하는 벵골-중국사이의 연결이 영국에 이익을 주었다. 게다가 그동안 이 회사의 성공에 큰도움을 주던 코로만델 해안이 인도 내의 전쟁으로 인해서 황폐해진 것이 큰타격을 가했다. - P307

전국시장은 정치적 의지이 역시 언제나 효율적이지는 않다와 동시에 상업, 특히 원거리 국제무역이라는 자본주의적인 압력에 의해서 강요된 응집성이다. 대개는 외부교역이어느 정도 꽃피는 것이 전국시장의 힘겨운 통합에 선행하여 일어난다.
이런 점들 때문에 우리는 전국시장이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 세계경제의중심지 또는 중심지와 가까운 곳에서 그리고 자본주의의 그물망 속에서 발전하기 쉽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전국시장의 발달과 지리적인 차별화점진적인 국제분업에 따른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다고 생각하게된다. 반대로 전국시장의 무게는 세계 지배의 후보자로 나선 여러 세력들 사이의 끊임없는 투쟁에서 그 자신의 역할을 수행한다. 18세기에는 이 투쟁이 암스테르담이라는 한 도시와 영국이라는 "영토국가" 사이의 결투로 나타났다. 내부요소와 외부요소들의 압력 아래에서 산업혁명의 출발로 이행하는 핵심적인 전환이 이루어진 것도 바로 이런 전국시장이라는 틀 속에서였다. - P386

로 체제가 실패함으로써 결국 파리만이 아니라 프랑스 전역에서 1716년에 로가 설립한 국왕은행이 자취를 감추었지만, 대신 프랑스 정부는 조만간(1724) 파리에 새로운 거래소를 세워서 수도 파리가 이제부터 수행하게 될 금융 역할을 맡겼다.
그후 파리의 성공은 갈수록 분명해졌다. 그러나 계속된 이 진보 가운데 의심할 바 없이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는 때는 상당히 이후 시기로서 동맹관계의 역전과 7년전쟁 종전의 중간인 1760년경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는 정도가 아니라 서유럽을 포괄하는 대륙의 중심지에 위 - P466

치한 파리는 경제망의 중심점이 되었다. 이 경제망의 팽창은 이전과는 달리더는 적대적인 장벽에 부딪치지 않았다. 2세기 전부터 프랑스를 포위하던합스부르크 가문 소유지의 장벽은 이미 깨졌다.......부르봉 왕족이 스페인과 이탈리아에 들어서서 동맹을 붕괴시킨 것으로부터 우리는 스페인, 이탈리아, 남부 및 서부 독일, 네덜란드 등 프랑스를 둘러싼 지역의 분위기가 개방적으로 발전해간 것을 볼 수 있다. 이제 파리로부터 카디스로, 파리로부터제노바로(그리고 이곳을 경유해 나폴리까지), 파리로부터 오스텐더와 브뤼셀(빈으로 가는 중개지점)로, 파리로부터 암스테르담으로 가는 도로들이 자유로워졌고 이 도로들은 30년 동안(1763-1792) 전쟁 때문에 끊어지는 일이 없었다. - P467

영국의 전체 경제공간은 런던이라는 최정점에 복종한다. 정치적인 중앙집권, 영국 국왕의 권력, 상업활동의 집중 같은 요인들이 어우러져서 수도 런던의 위대함을 만들었다. 반대로 이 위대함이 이번에는 자기가 지배하는 공간을 조직하는 힘이 되며 이곳에 행정망과 시장망의 다양한 연결을 창출한다. 그라스는 보급영역의 조직화라는 점에서 런던이 파리보다 한 세기 이상앞서 있다고 주장했다. 런던에 우위를 가져온 요인 중에는 런던의 항구활동이 대단히 활발하다는 점(런던의 항구는 적게 잡아도 영국 전체 교역의 5분의 4 이상을 차지했다)도 작용했고 여기에 덧붙인다면 사치와 낭비곧문화적 창조와도 연결된다의 거대한 기생적 기구로서 파리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는 점도 작용했다. 마지막으로 특히 중요한 것은 런던이 아주찍부터 수출입을 거의 독점한 결과 영국 전체의 생산 및 재분배망을 통제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영국의 다양한 지역들에 대해서 런던이라는 수도는 일종의 조차장(場)이었다. 모든 것이 이곳으로 모여들었다가-국내로든지 국외로든지 다시 배분되어 나갔다. - P511

영국이 산업혁명을 성취하게 된 힘은 단지 팽창하는 영국 시장의 상승 또는 조직화에만 있었던 것도 아니고 또 물질적 풍성함에 있었던 것도 아니다(사실 활기 넘치던 18세기에는 영국만이 아니라 유럽 전역이 풍성함을 누렸다). 그것은 영국이 스스로 인식하지도 못한 채 근대적인 해결책들을 취하도록 만든 일련의 기회들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파운드 스털링 화라는 근대적인 화폐, 근대적인 방향으로 형성되고 변형되던 은행제도, 그리고 장기채 또는 영구채라는 안정성 속에 닻을 내린 공채 경험적으로 만들어진 가장 효율적인 걸작품 등이 그런 예들이다. 이 마지막 것은 되돌아보건대 영국의 경제가 건강하다는 최고의 표시였다. 이른바 영국의 재정혁명으로부터 탄생한 이 솜씨 좋은 체제는 영구히 지불되는 공채이자를 규칙적으로 지불했다. 이자지불을 한 번도 거르지 않았다는 것은 파운드 스털링 화의 가치를 계속 유지한 것만큼이나 특출한 묘기에 속한다. - P526

유럽은 자신에게 필요한 자양분과 힘의 많은 부분을 전 세계로부터 끌어왔다. 유럽이 진보해가는 도상에서 부딪친 여러 과제들 앞에서 자신의 원래능력보다 더 상승할 수 있던 것도 이와 같은 가외의 소득 때문이었다. 이항구적인 도움이 없었더라면 18세기 말 이후 유럽의 운명의 열쇠가 되었던 산업혁명이 가능했겠는가? 이것이 우리가 당면한 문제 중의 하나이다. - P544

아메리카 전체는 다양한 사회와 경제의 병존 또는 누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층에는 어떻게 부르든 간에 상관은 없지만 반쯤 폐쇄적인 경제가 있고 그 위에 반쯤 열려 있는 경제가 존재하며 마지막으로 상층에는 광산, 플랜테이션그리고 아마도 목축업을 하는 일부 조직(이것 모두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과 상업조직이 존재한다. 자본주의는 기껏해야 가장 상위의 상업층에만 해당한다. - P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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