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장

거란의 국호 중 한자로 ‘요’라고 표기한 것은 한족들이 위화감을 같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거란의 국호는 계속 ‘거란’이었다. - P24

석경당이 유주를 거란에 바친 사건은 중국 역사에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베이징이 북방 민족의 손에 들어가게 됨에 따라 만리장성은 더 이상 병풍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후 중국 역사는 북방 민족과 중원의 대립에서 북방 민족의 우세로 기울기 시작했다. - P59

거란 통치자들은 북위 정권처럼 한화되어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 자신의 근본을 초원에 두고 전통과 정통성을 지키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백성의 2/3을 차지하는 한족문화도 부정하지 않았다. 거란 사회는 유목과 농경 그 사이 어디쯤에서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 P90

성종이 즉위한 10세기 말 거란은 송과 여전히 충돌하고 있었고, 고려와는 교류가 거의 끊어졌으며, 만주와 초원의 여진과 여러 부족들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했고, 대하와도 원만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후 40여 년간 다원적 국제질서의 맹약체제를 구축하면서 1020년대 이후부터 12세기 초까지 1세기 동안 전쟁을 피하고 평화를 누렸다. 거란은 한족 중심의 조공체제와 천하관의 명분에 얽매이지 않고 송, 대하, 고려 등 이웃 국가들과 공존을 추구하였다. - P129

거란 제국과 주변 국가들 사이에 발생한 전쟁, 타협, 그리고 평화 관계는 조공체제의 형식이 아니라 당시 다원적 국제질서와 세력 균형의 틀에서 이해해야 하며, 거란의 역사적 정체성에 대한 연구는 ’중국사에서의 요대‘가 아니라 아닌 거란 중심적 시각에서의 접근을 요한다. - 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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