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건이 북쪽 지대에서 축성 공사를 한창 벌일 때인 922년에거란의 야율아보기가 낙타와 말과 털방석을 예물로 보내며 우호를 보였다. 이것이 거란과 고려의 첫 외교관계였다. 야율아보기는 한편으로는 중원을 도모하기 위해 후방에 있는 고려에우호를 보인 것이다. 고려는 후백제와 싸움을 하던 중이라 거란과 굳이 분란을일으킬 필요가 없었다. 고려는 중국 땅에서 일어나는 일에 민감한 반응을 보일 처지가 아니었다. - P54
거란은 926년 끝내 발해를 멸망시키고 괴뢰국인 동단국을세웠다. 거란은 발해를 병탄하면서 국력을 키워 중원을 도모 - P55
할 역량을 지니게 되었다. 이제 명실상부한 제국이 된 것이다. - P56
942년 6월, 후진의 고조가 죽고 조카 석중귀(貴)가 즉위하니 이 사람이 출제(帝)이다. 출제는 요에 대해 강경한정책으로 맞섰다. 출제는 요를 공격하는 전쟁을 서둘렀다. 멸라는 예전 고려의 제안을 출제에게 전달하였다. 출제는 동의하여 고려의 군사가 요의 동쪽 변방을 공격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요의 군사를 분산시키려는 작전이었다. 이해 10월, 요는 사신 30여 명과 함께 낙타 50필을 고려에보내 호의를 보였다. 왕건은 강경하게 거부하고 이렇게 말하였다. 거란은 일찍이 발해와 서로 우호관계를 맺었는데 갑자기두 마음을 먹어 동맹을 깨고 멸망시켰다. 무도함이 지나쳐이웃으로 우호를 맺을 수 없다. 요나라를 거란이라고 호칭하여 나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뜻을 보였다. 왕건은 사신 일행을 섬으로 귀양보내고 낙타는 - P58
개경 만부교 아래에 매어놓아 굶어 죽게 하였다. - P59
광종의 의지는 확고했다. 광종의조치를 두고 정인지는 이렇게 적었다.
우리나라에 노비가 있어 풍교(風敎)의 진작에 큰 도움이되었다. 내외를 엄히 하고 귀천을 매겨 예의가 행해지는 것이 여기에 말미암지 않은 것이 없다
노비가 없으면 양반이나 사대부가 체면을 차리지 못한다는말이었다. 유학자 출신인 최승로는 광종의 노비정책을 비난하면서 광종의 다음 임금인 성종에게 이렇게 건의하였다.
성상께서는 깊이 지난 일을 거울삼아 천한 자가 귀한 자를 능멸하지 못하게 하고, 노비와 주인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말고 중도를 잡아 처리하게 하소서. 대체로 벼슬이높은 자는 이치를 알아서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저지르는경우가 적으며, 벼슬이 낮은 자일지라도 진실로 자기의 비위를 꾸밀 만한 특별한 사람이 아니면 어찌 속임수로 양민을 천민으로 만들 수가 있겠습니까? 다만 궁원(院)과 공경들이 더러 위세를 빌려 비법을 저지르는 자가 있긴 하지만... 지난날 판결한 것을 다시 캐고 따져 세상을 어지럽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최승로는 노비 문제로 세상이 시끄러우니 지난 일은 접어두고 노비 관계의 송사를 분명히 하라고 요구하였다. - P103
세 번째로는 차현 남쪽과 공주강 바깥은 산의 모습과 땅의형세가 거슬리게 뻗어 있으니 이곳 출신 인물을 등용하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본심이 어디에 있든 왕건으로서는 역사적인과오를 범한 대목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공주 일대에 국한된지역 차별정책이라고 보기도 한다. - P138
거란의 동경에서 우리나라의 안북부까지는 생여진(生女眞: 여진의 한 갈래)이 점령했던 곳입니다. 광종이 이를 빼앗아 가주, 송성 등의 성을 쌓았습니다. 지금 거란이 침입한것은 두 성을 차지하기 위해서입니다. "고구려의 옛 땅을빼앗는다"고 떠드는 것은 실상 우리에게 공갈을 치는 것입 - P161
니다. 그 군사의 강성함을 보고 갑자기 서경 이북의 땅을떼어 그들에게 주는 것은 계책이 될 수 없습니다. 삼각산이북의 땅 또한 고구려의 옛 땅인데 저들이 끝없이 욕심을부려 요구한다면 그대로 내줄 것입니까? 더구나 땅을 떼어적군에게 주는 것은 진실로 만세의 수치가 됩니다. 어가를도성으로 돌리시고, 신들로 하여금 한번 싸움을 해보게 한뒤에 논의하여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서희는 쌀에 관한 문제에서는 인간철학의 심오함을 보여주었으며, 전쟁의 원인과 사정을 따질 때는 뛰어난 전략가의 태도를 보여주었다. 그는 영토 할양에 따른 역사의식이 철저하였으며, 전술 면에서도 탁월한 견해를 피력했다. 만일 이때 서희의 주장이 없었다면 어떤 결과를 빚었을까? 서희의 동조자로 이지백이라는 벼슬아치가 있었다. 이지백은서희의 주장을 따르면서 소손녕에게 뇌물을 후하게 주어 회유하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성종은 서희의 주장에 따라 강화사신을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화통사(和使)로 낮은 벼슬아치인 장영을 뽑아 보낸 것을 보면 조정에서 아직도 사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 같다. - P162
강한찬 한은 중국조(趙)나라 서울인 한단에서 처음생겨난 글자이다. 세상의 부귀영화가 부질없음을 나타내는 ‘한단지몽‘ (邯鄲之夢)이라는 고사성어도 있다. 이를 ‘감‘으로 발음할 근거가 전혀 없다. 따라서 강감찬은 강한찬으로 고쳐불러야 한다. 이 책에서는 강한찬으로 통일하였다. - P169
강조가 통주에서 삼수채를 설치하고 있을 때 요군의선발대와 다시 맞부딪쳤다. 고려군은 칼을 꽂은 수레를 배치하여 요군을 공격하였다. 요군은 패전을 거듭하였다. 그러나강조는 지장의 자질이 모자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적을 물리친 뒤 적을 깔보며 진중에서 유유히 바둑을 두고 있었다. 반격을 시도한 요군이 삼수채를 격파하고 밀려들어왔다. 이 보고를 받은 강조는 태연하게 큰소리쳤다. 입 안의 음식은 적으면 씹기가 불편하다. 많이 들어오게내버려두어라. 요군이 물밀듯이 진중으로 쳐들어왔다. 그때서야 강조는 황급하게 일어나 싸울 채비를 차렸으나 어느새 들이닥친 요군이강조를 꽁꽁 묶어버렸다. 강조의 몸은 북방에서 나는 털담요에 둘둘 말렸다. 함께 있던 고려의 장수들도 다 잡혔다. - P177
이 일련의 전쟁에서 가장 용감하게 싸운 전사들은 천인부대에 속한 군인들이었다. 조정에서는 죄인이나 투항한 오랑캐들을 집단마을에 살게 하였다. 이들은 양수척처럼 유랑민이 되기도 하였다. 이들은 공물 수송과 도로 청소, 건축 공사 등에수시로 동원되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집단으로 부대에 편성되 - P193
어 전쟁터로 끌려갔다. 이들이 동원될 때에는 백성들이 양식을 싸서 주었다. 나라에서는 별다른 경비를 들이지 않고 병사로 써먹었다. 이들이 어찌나 용감하게 싸웠던지 "거란이 고려와 싸워서 패전한 것은 이들 무리에 힘입었다"는 말이 나돌정도였다. 이들은 머리를 깎고 구걸승(求乞僧)처럼 떠돌이 생활을 하였으나 가사를 입지 않고 계율을 지키지 않았기에 사람들이 재가화상(在家和尙)이라고 불렀다. - P194
병이 깊어진 문종은 송에 약과 명의를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 신종은 의원 88명과 약재 100가지를 보내주었다. 문종은감격한 나머지 『화엄경』을 외우며 중국에 태어나기를 기원하였다고 한다. 문종은 어느 날 송의 수도 개봉을 돌아보는 꿈을 꾸고 시를지었다. 악업의 인연으로 거란과 가까워1년의 조공만도 몇 번인지 모른다네. 이 몸 홀연히 개봉에 이르니한밤에 흐르는 눈물 애석하도다. (명나라 사람이 지은 『요산당기』 (자기의 얼을 빼놓은 소중화 의식이다. 이와 같은 맹목적인사대의식이 뒷날 민족자주사상의 왜곡을 가져왔다. 이렇게 문종대에 수교를 재개한 두 나라는 우의를 돈독히하여 활발한 무역을 벌였고 요가 망하는 것을 함께 지켜보았다. 몽골이 원나라를 세울 때까지 두 나라 사람들은 활발한문화 교류와 상품 무역을 벌였다. - P211
민간인들은 역에서 숙박이나 음식 제공의 편의를 받을 수없었으므로 사찰에서 경영하는 원(院)을 많이 이용하였다. 사찰에서는 직접 장사를 하였는데, 장사를 할 때에는 많은 물건을 말에 싣고 먼 거리를 넘나들었다. 또 10만 명이 넘는 승려들이 필요에 따라 늘 이동했다. 승려들은 만행이라고 하여 세상 물정을 살피면서 고행을 하느라 이동이 잦았고, 여름과 겨울 두 차례 안거(安居)를 할 때에도 이동하는 숫자가 많았다. 따라서 이들을 위한 숙박시설로 원을 설치하게 되었다. 원은 사람의 통행이 많으나 마을과 멀리 떨어진 곳에 주로 설치하였다. 도둑이나 맹수가 출몰하는 곳을 골라 건물을 세우기도 했다. 처음에는 절일을 보는 사람들이 이 시설을 이용하여 숙박과음식 제공은 물론 말먹이나 여행에 필요한 물건을 조달하였으나 차츰 일반인도 이곳을 이용하게 되었다. 민간인들은 이곳에서 자기도 하고 밥을 사먹기도 하고 도둑이나 맹수를 피하기도 하였다. - P239
승려들은 상업 활동까지 벌여 재산을 불려나갔다. 이렇게 모은 재산으로 승려들의 수행을 돕고 사찰을 건립하였으며, 화려한 불상과 불탑을조성하고 뛰어난 불화를 만들어냈다. 승려들은 문벌귀족과 함께 대토지 소유자로 군림하면서 온갖 비리를 저지르고 사치스런 생활을 하였다. 절에서는 소유토지에 장생표(長椎標)를 세워 경계를 표시하였다. 통도사의경우, 나라의 허가를 받아 12개의 장생표를 세웠다. 지금 양 - P265
산군 하북면 백록리에 1085년(선종 2)에 세운 높이 166센티미터의 장생표가 보존되어 있다. 장생표 안에는 국가 소유나개인 토지는 없고, 절 소유의 토지와 산판만 있었다. 금강산 장안사의 경우 소유 토지가 전라도, 경기도, 황해도에 걸쳐 널려 있었다. 장안사의 승려들은 가을철이면 여러 곳을 헤집고 다니면서 도조를 거두기에 분주하였다. 승려들은여기저기에서 장사를 하느라 부산을 떨기도 하였다. 물론 모든 사찰이 이렇게 풍족했던 것은 아니다. 귀족과 연계되지 않거나 원당이 아니거나 낮은 신분의 승려가 꾸려가면서 불법에 정진하는 절은 거의 토지를 소유하지 못했다. 그래서베를 짜서 팔거나 스스로 농사일과 작은 장사를 벌여 생계를 꾸렸으며, 때로는 탁발(托鋒)로 연명하였다. 많은 승려와 신도로 이루어진 절의 자위 조직은 외침이나변란이 있을 때 군사 인력으로 동원되기도 했다. - P267
벼슬아치에게 적용한 규정은 일반 서민에게 영향을 끼쳤다. 신라에서는 불교식 화장인 다비(茶毘)가 유행하였다. 매장은주로 왕이나 귀족들의 장례였다. 그러나 신라의 문무왕이 자신을 화장하라고 명한 뒤 이를 따르는 왕들도 있었다. 고려 초기의 벼슬아치와 서민들은 죽은지 3일 만에 시체를절 근처에서 화장했다. 유골은 골호(骨壺)나 석관(石棺)에 담아 묻었다. 초기에는 주로 석관을 썼는데 판석 여섯 개를 조립하여 만들었다. 이는 불교의 장례의식이 변형된 모습이다. 불교에서는 시체를 화장한 뒤 재를 강이나 바다에 뿌리고 바 - P292
람에 날려 물고기나 새에 보시한다. - P293
제례(祭禮)도 장례와 더불어 일정한 격식을 갖추었으나 불교와 민속의 영향을 받아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고려 초기에는 기제사를 부모 중심으로 지냈는데 1390년(공양왕 2) 고관은 3대, 6품 이상은 2대, 7품 이하와 서민은 부모의 기제사만 지내게 하고, 가묘를 두어 받들게 하였다. 이때에는 유교 의식이 널리 퍼졌는데도『주자가례』의 규정을 따르지 않았다. 고려 후기에 와서 유학자들이 강력하게 유교식으로 의식을시행하자고 주장한데다 『주자가례가 널리 보급되어 예식이복잡해졌다. 양반들은 삼년상을 치렀고 차츰 기제사가 3대 이상으로 확대되었으며, 가묘를 두고 조상을 받드는 풍조가 만연하였다. 친족과 가족 묘지를 화려하게 꾸미고 묘 주위를 돌로 장식하는 따위 형식 중심의 조상숭배 풍조도 유행했다. - P297
박유(朴楡)는 몽골 침략기에 높은 관직에 있던 벼슬아치였다. 그는 고려에 남자보다 여자의 수가 많은 것을 한탄하였다. 그는 생각을 거듭한 나머지 이렇게 건의하였다. 우리나라에는 본래 남자가 적고 여자가 많습니다. 그런데도 신분의 높낮이를 가릴 것 없이 아내를 한 명만 두고 있습니다. 아들이 없어도 첩을 둘 수가 없습니다. 외국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왕래하면서 수의 제한없이 처첩을 두고 있어 사람들이 모두 북쪽으로 흘러갈까 두렵습니다. 청하옵건대 여러 벼슬아치들이 첩을 두되 품계에 따라 수를 줄이고, 서인은 아내 하나와 칩 하나를 두게 하시고 첩에게서 난 아이도 적자와 같이 벼슬길에 나오게 해주소서. 이렇게 하면원망이 사라지고 인구가 늘어날 것입니다. (『고려사 열전) - P302
이 말을 들은 여자들이 거리와 마을에서 박유를 보면 쫓아가 손가락질하였는데 "여자들의 붉은 손가락이 묶어놓은 것같았다"고 하였다. 박유는 철저하게 여성들의 지탄을 받았다. 여론에 따라 축첩 건의는 묵살되고 실현을 보지 못하였다. - P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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