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울 때는 채우시고 비울 때는 비우시고, 천지만물이 다 그러하외다. 만물뿐이겠소? 만 가지 현상이 다 그러하외다. 비어 있어도 운행이 안 되는 법, 쌓여 있어도 운행이 안 되는 법, 많이 먹으면 배가 터져서 죽고안 먹으면 배 곯아서 죽고,"
"임병에 죽은 귀신아 칼 맞아 죽은 귀신아 배 곯아 죽은 귀신아 목매어 죽은 귀신아, 작두 가져올까요."
"여보시오 소지감선생, 무배들을 그리 괄시하지 마소. 나는무배는 아니오만 신령이 있고 없고 물증이 없기론 매일반 아니겠소. 서울 식자 귀에는 내 말이 우매하게 들릴지 모르나 이치란 어디 갖다가 붙여도하나요, 명료하고 어긋남이 없는 것인데 쓸데없이 헤매면서 근간(根幹)은 놔두고 수많은 잔가지들 각기 마음대로 휘어잡고 이것이다 저것이다. 때론 잔가지로 그물코를 만들어서 죄 없는 사람 올가미 씌우기 일쑤, 의론에 영일 - P184

이 없는 잘난 식자들 아무리 그 머리통 거미줄같이 생각이 얽힌들 그것 다 헛배 앓음에 불과한 것," - P185

혼란이며 목마름이었다. 순명할 수밖에 없는 절대적인 힘 앞에서 꿈틀거리는 한 마리의 벌레, 단말마의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한 마리의 벌레, 자신의 마지막 삶의 모습을 조용하는 어느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동정이라는 구둣발로 짓이겨지는 것은 상상만 해도 모골이 서늘해진다. 함에도 불구하고 누구 한 사람 얼씬거리지 않는 산장은 공포, 그것은 공포의 밤이요 공포의 낮이었다. 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지켜보는 시간은 가장 잔인한 고문이었다. - P200

"본성은 냉혹한데 자기 자신에게는 어찌 늘 그렇게 달콤하냐. 쇠약해지고 희미해진 자네 눈에 비치는 제문식, 그리고 자신에게 소속된 사람들, 여전히 개새끼처럼 고깃덩이를 보고 침을 흘린다, 물론 그렇지, 그렇고말고, 본능이니까. 그러나 억누르는 자의 힘이 쇠약해지면 자네가 생각하는 대로 한몫을 얻어내기 위하여 고깃덩이를 보고 침을 흘리며 꼬리가 부러져라 흔들어대는 개새끼들이 있고 다른 하나는쌓였던 분노와 증오 때문에 작은 몫이고 큰 몫이고 그건 안중에 없이 덤벼들어 목덜미를 물어뜯는 부류도 있는데 그것 또한본능 아니겠나." - P213

"복종의 존재인 저 거대한 무리는 그러나 결코 복종 아니하면서 목적에 이르지도 못한 채 사라져가며 또 사라져가고, 결코 그들은 그 아무에게도 지배된 적이 없고, 어떤 힘도 그들을 완벽하게 지배한 적은 없었다. 물질의 결핍이란 순간 순간 혹은 어느 기간에 있어서의 고통이며 굶주림과 헐벗음이 생명을 파괴하는 만큼 의식주야말로 가장 초미한 문제임엔 틀림이 없겠으나 그러나 존재만으로 인간은 설명이 되지 않아. 도시 인간을 모르겠다 한 것은 그 때문일까? 노예나 노비들의 끊임없는 탈출에의정열, 그 치열함이 헐벗음과 굶주림과 더불어 역사의 본질일까. 그리고 그네들은 본능적으로 진리를 진실을 희구하며 종교나 예술, 사랑을 혹은 일을 통하여 끊임없이 소망하고 갈망하며 이것들이 상극하고 상승하고 상쇄하며 엄청나게 준동하는데 상층과 중간층이 역사를 지배해왔다는 것은 과연 옳은 말일까? 상층과 중간층은 중심에서 퉁겨나간 한낱 비말(飛沫)에 불과한 거 아닐까. 대다수 민중이야말로 거대한 여울이다, 여울.
내가 또 그들을 모르겠다 한다면 중언부언이겠으나 거대한 그집단, 꿈틀거리는 그 집단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내게 있어서 그 행방은 늘 불가사의하면서도 불길해." - P219

커튼을 걷는다. 산장의 뜰에는 눈부신 햇살이 가득 차 있었고 새들이 지저귀고 있었다.
신록은 미친 것처럼 연둣빛 진초록이 서로 얽히고 설켜 일렁이고 있었다. 타고 있었다. 녹색도 탄다. 진홍의 단풍만 타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생명이 타고 있는 것이다. 생명의 환희, 인고의 겨울은 이 환희를 예비하고 있었기에 설원은 그렇게 청정(淸淨)하였는가. 햇빛은 황금가루같이 부서지고 흩어지고, 산장에서 바라다뵈는 앞산에는 철쭉이 한창이다. 짙고 옅은 빛깔,
분홍 같은 연보라 같은 빛깔들이 얼룩처럼 구름처럼 흐드러지게도 피어 있다.
‘여자도 아니요 가족도 아니요, 아무것도 없는데 지금 내 곁에는 햇빛과 신록과 꽃빛만이 있구나.‘ - P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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