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통의 말은 곧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였다. 당시 초의 항우와 한의 유방은 혈투에 혈투 - P305
를 거듭하고 있었다. 양쪽 모두 타격을 입어 힘이 약해졌다. 이 두 거두(巨頭)의 힘이 약화되면 제삼 세력이 진출하여 그들과 대등한 입장이 될가능성이 있었다. 제삼의 세력이 될 수 있는 것은 제의 왕이 된 한신뿐이었다. 당시 한신의 힘은 물론 두 거두에게는 미치지 못했지만, 그가 초에붙으면 초는 천하를 취할 수 있으며, 한은 그 없이는 패업을 이룰 수가없었다. 이런 그에게 괴통은 초에도 한에도 붙지 말고, 음천하를 삼분하여 정(鼎足, 다리가 셋인 정(鼎)에 비유한 것만 같지 못합니다. 라고 권했다. 그러나 한신은 한왕 유방의 은덕을 배신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괴통은, 용략(勇略)으로 주인을 떨게 하는 자는 몸이 위태로우며, 공이 천하를 덮는 자는 상을 받지 못한다. 는 속담을 들려주었다. - P306
유방은 처음부터 함께한 부하들의 힘만으로는 천하를 잡을 수 없었을 것이다. 천하를 잡기 위해서는 한신, 팽월, 경포세맹장이 필요했다. 한왕 신과 같은 지방 세력의 도움도 얻어야만 했다. 그러나 일단 천하를잡은 뒤에는 야심만만한 이들 맹장들에게 상당한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고조는 결국 가장 간단한 방법, 즉 모반을 일으켰다는 누명을 씌워 주살하는 똑같은 패턴으로 그들을 정리했다. - P318
지금의 왕조가 멸망하면 자신들도 멸망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주어진 지방을 열심히 지키려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지방, 즉 ‘제후국‘은 너무넓어서도 안 된다. 요소요소에 적당한 크기의 나라를 만들어 거기에 황족을 왕으로 세우는 것이 한나라의 국책이었다. 물론 천하의 대부분은군현이었다. 군현제를 주로 하고 거기에 봉건제를 약간 가미한 절충적 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일반적으로 군국제(郡國制)라고 한다. 한신이 강등된 뒤, 초를 둘로 나누어 회동(東)의 3군 53현에 형왕(荊王) 유가(劉賈)를 세웠으며, 설(薛), 동해(東海), 팽성(彭城) 336현에 초왕유문(文)을 세웠다. 제후국을 가능한 한 작게 하려 했다. ※ 이들 나라에는 각각 상(相, 승상)을 비롯하여 중앙 정부 관료기구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존재했다. 독립성이 매우 강해서 한 제국은후에 이들 때문에 골머리를 썩게 된다. 제왕은 당연히 그 나라에 머물면서 가끔 입조(상경)하게 되어 있었다. 황실의 번병이기 때문에 왕의 나라도 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그 군대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왕이 아니라 황제뿐이었다. 또 나라의 상(相) 등도 중앙 정부가 임명하는 것이 원칙이었기 때문에 제도상으로는독립 왕국이 되어 중앙에서 이탈할 수 없는 구조였다. - P323
여태후는 차근차근 여 씨 일족의 천하를 구축해 나갔다. 무력 이외에정권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없다는 생각에서 조왕인 여록을 상장군으로삼아 북군을 지휘토록 했으며, 여왕(王)인 여산으로 하여금 남군을 통솔케 했다. 조왕과 여왕양(梁)을 개명하여 여라 칭했다)은 영국(國)이 있으면서도 그곳으로는 부임하지 않고 장안에서 군대를 장악했다. 그러나 여태후가 있었기에 여 씨 일족이 득세할 수 있었다. 혜제가 재위했던 8년 동안을 포함해서 여태후가 집권한 것은 거의 15년 동안이었다. 여후 일족의 천하는 여태후의 죽음과 함께 막을 내렸다. 혜제의 죽음이후 명목상의 황제는 있었지만, 여태후가 만들어 낸 가짜였기 때문에사가들은 이 15년 동안의 후반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고민한 끝에 고후(高后) 몇 년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 P358
살아남은 역전의 호걸들이 어째서 여 씨 일족의 전횡을 용납한 채 침묵을 지키고 있었는가 하는 문제로 되돌아가자. 가장 큰 이유는 여 씨일족 진영에는 그리 대단한 인재가 없었기에 그들의 전횡도 어차피 여태후가 죽고 나면 끝이라는 마음이 모두에게 있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나이 많은 여태후의 죽음을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으면 되는 일이었다. - P360
삼족죄와 요언령 등은 법률지상주의, 엄벌주의였던 진나라 제도의 잔재와도 같은 것이었다. 진나라의 색채가 점차 사라지면서 그것이 백성의휴식에도 도움이 되기도 했다. 이 두 개의 악법이 폐지되었을 때, 특히 그것이 혜제의 유지강조되었다. 혜제 유영은 나약하기는 했지만 인도주의자 휴머니스트였다. ‘혜‘라는시호에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가 유약했기 때문에 여후가위험한 공신들의 숙청에 목숨을 걸다시피 열을 올렸는지도 모른다. 이 시대에 대해서 사마천은 사기 여후본기」속에서, 여민(黎民, 서민)은 전국(戰國)의 고통에서 벗어났고, 군신(君臣) 모두 음가 무위하게 휴식하기를 바랐다. 따라서 혜제는 팔짱을 낀 채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며, 고후는 여주(女主)로서 제(制, 칙서)를 칭하고, 정(政)은 방호(房戶, 후궁의 문)를 나서지 않아 천하가 평온했다. 형벌을 드물게 썼고, 죄인 역시 드물었으며, 산업에 힘써 의식은 더욱 늘었다. 라고 높이 평가했다. - P36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