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국강병 경쟁으로 각국은 앞다투어 유능한 인물을 등용했으며 정치개혁을 꾀했다. 그러나 가장 유효한 정치개혁을 단행한 것은 서쪽의 진(秦)나라였다.
진나라는 동주(東周)가 된 뒤에 비로소 제후에 봉해진 새로운 국가였다. 삼진(三晋)과 전제(齊)는 찬탈 정권이기는 했지만, 나라 자체는 오래되었으며 예전의 제도나 관습을 그대로 계승했다. 여러 가지 저항이 있었기 때문에 과감한 개혁도 마음대로 행할 수가 없었다. 그런 점에서 진나라는 고려해야 할 오래된 관습도 없었고, 개혁에 대한 반발도 다른 나라에 비해서 비교적 적었다. - P87

무령왕은 감정의 기복이 격한 사람이었던 듯하다. 미인 맹요를 얻자그녀와 함께 틀어박혀 몇 년 동안이나 조정에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만큼 정열적인 사람으로, 말을 타고 활을 쏘는 이른바 ‘호복기사‘를 도입해 조나라 군제의 체질 개선에 성공한 것은 그것의 좋은 면이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가정에서 애정의 균형을 유지하지 못했다는 데 정열적인 사람의 비극이 있었다. 그의 격렬한 감정의 기복은 왕족과 중신들의 두려움의 대상이었으며, 그것이 그의 목숨을 빼앗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그 후 조나라는 염파(廉), 인상여(如) 등과 같은 현명하고 재능있는 사(士)를 배출했기에 무령왕의 죽음이 더욱 안타깝게 여겨진다. - P106

전국사군에게서는 ‘협(俠)‘의 냄새가 진하게 풍긴다. 임협은 미묘한 차이로 난폭함이 되기도 하고 무뢰함이 되기도 한다. 맹상군이 ‘계명구도‘
무리들의 도움으로 진나라에서 탈출하여 돌아가던 도중, 조나라의 평원군에게 들렀을 때 길가에 있던 사람이 "뭐야, 소인배잖아"라고 말하자,
화를 내며 주위에 있던 수백 명을 죽이고 한 현(縣)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것은 폭력집단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왕의 밑에 있었던 사군은 행동대원이나 자객 같은 사람들을 데리고있으면서 왕의 이름으로는 할 수 없는 일들을 했다. 왕의 별동대 같기도하고, 때로는 그 세력에서는 왕을 능가한 것이 아닌가 여겨지는 경우도있었다. - P114

초나라의 회왕은 굴원의 반대파들의 말이 이치에 합당하다고 생각했다. 친진 정책을 취하기로 했다. 굴원은 왜 그것을 막지 못했을까? 그렇게도 표현력이 풍부했던 그가 왕을 설득하지 못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
상관대부인 근상이나 자란(蘭) 등과 같은 반대파 사람들이 굴원보다더 뛰어난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들 뒤에 무시무시할 정도의 책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 책사에게 놀아났던것이라고밖에는 생각되지 않는다.
장의(張儀)라는 괴물이 있었다.
전국 시대에 제후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유세하던 책사들을 ‘종횡가(縱橫家)‘라고 부른다. 춘추 시대 때부터 이런 부류의 유세외교가들이 있었는데, 고전을 인용하여 의(義)를 주장하고 예(禮)를 주장했다. 그러나 전국 시대에 접어들면서 그들은 오로지 이해(利害)에 관한 것만을 주장했다.
장의는 전국의 종횡가를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P132

변설가에 대한 사마천의 비평은 상당히 가혹한 편이다. 『사기』는 오기에 대해서,
각폭(刻暴, 각박하고 잔혹함) 소은(少恩, 인정이 없음)함으로 자신의몸을 망쳤다. 슬프다.
어라고 기록했고 상앙에 대해서는,
상군(商君)은 천자(天資, 타고난 자질)가 각박한 사람이다.
라고 평했으며 소진과 장의를 묶어,
요컨대, 이 두 사람은 참으로 경위(傾危, 위험한 사(士)이다.
라고 단정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에게 매우 감탄을 하지만 개인적으로 사귈 수는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 P150

천하가 통일되어 하나의 커다란 강국이 태어나는 것이 과연 백성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일일까? 모략가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아프리오리(설명이 필요 없는 선험적 원리)였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하고 의문을 제기한사람들이 있었다. 때때로 언급한 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노장사상(老莊思想)이었다. - P151

순자는 진나라가 왕자(王者)가 되기에는 아직 멀었다고 판단했다. 다른 6개국보다는 뛰어나지만 순자가 이상으로 삼고 있는 왕도는 훨씬 더 높은 곳에 있었다. 진나라가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이유를 순자는,
대부분에 유(儒) 없기 때문이 아닐까.
라고 추론했다.
보기에 모든 것은 훌륭하지만, 거기에 하나의 중심이 되는 것이 없었다. 유가에 속한 순자에게 있어서 그 중심이란 유(儒)의 정신이었다. 그것이 없다는 것이다. - P196

유자는 정치와 사회를 비판한다. 한비가 보기에 이는 말로써 법을 어지럽히는 것이다. 협자는 힘으로 억지를 부린다. 이는 무로 금을 범하는것으로 양쪽 모두 절대적이어야 할 ‘법‘에 위반되는 것이다. 무례한 무리들임에도 불구하고 위에 있는 사람들은 유자(儒者)와 협객(俠客)을 앞다투어 예우한다는 것이다. 식객이 3천 명이라 일컬어졌던 전국사군의 빈객들도 대부분 유자나 협자였을 것이라 여겨진다. 군주는 비생산적이고국가의 근본인 법에 반하는 무례한 자들을 우대해서는 안 된다고 한비는 주장했다.
시황제의 입맛에 꼭 맞는 학설이었다. 후에 나타나는 시황제의 반유가적 행동은 한비의 영향을 크게 받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 P208

지금은 위청과 곽거병의 인물됨을 비교하는 자리다. 위청은 부하에게자비롭고 그들을 사랑하고 존경했지만 전장에서 그들을 토개처럼 부리지 못하는 성격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곽거병은 부하를 생각하는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전장에서는 틀림없이 부하를 토개처럼 부렸을것이다.
무제가 보기에는 곽거병이 더 믿음직했을 것이다. - P259

진승이 왕위에 머문 것은 겨우 6개월에 불과했다. 그 전까지는 징용된일개 병사였는지 인부였는지도 잘 알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런 사람이새로운 시대의 막을 여는 중요한 역할을 해내었다. 진승이 먼저 일어난뒤 항우가 나타났으며, 다시 유방이 나타나 역사가 바뀌었다. TOUS한나라의 천하가 된 뒤, 진승 무덤 가까이에 그 무덤을 지키기 위해서른 집이 배치되었으며 제사가 계속 올려졌다.
당시의 상태로 봐서 진나라는 그렇게 오래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그때 진승이 군사를 일으키지 않았다면, 한나라가 진나라의 후계자가 되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보다 10년만 더 늦었더라도 유방은 나이 때문에천하를 다투지 못했을 것이다. 진승이 거병했을 때, 유방은 채 마흔이 되지 않은 가장 좋은 연령대였다. 그런 의미에서 진승은 한 왕조의 은인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 P270

소수정예의 부대만을 거느린 항우는 양면전쟁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항우의 약점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 소수정예이기 때문에 전쟁이 오래지속되면 어려움을 겪었다. 정병은 그렇게 간단히 보충할 수 있는 것이아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병력은 줄어든다. 게다가 본거지의 생산력이 약했기 때문에 보급에도 문제가 있었다.
유방 자신은 연전연패였지만, 우군(軍)인 한신이 제를 평정하고 남하를 시작하여 초를 위협하고 있었다. 팽월(彭越)은 활발하게 게릴라전을전개했다. 그리고 보급에 대해서는 소하라는 그 방면의 천재가 있었으므로 유방은 그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 P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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