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은 땅이 넓기 때문에 각지에 정권이 동시에 병립하여 각각의 건국신화를 갖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러한 지역 정권들은 끊임없이 흥망을거듭했기 때문에, 그럴 때마다 신화는 함몰되어 버린다. 어떤 이유에선지함몰을 면한 일부가 세상에 남겨지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도요 플신화는 역사를 반영한 부분도 가지고 있지만, 결코 전체를 반영하지는 않는다. 말하자면 단편적인 반영이다. 어떤 의도에 따라 허구로 조작될 수도 있기 때문에 신화에서 역사를 추구한다는 것은 어려운 작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에 비하면, 고고학상의 발견은 극히 구체적인역사 그 자체의 흔적이다. 그러나 흔적은 흔적이기 때문에 그것으로 역사 전체를 재구성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허구로 조작한다고 말했지만, 그 필요성이 제기됐다는 사실 그 자체가 역사를 푸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예를 들어서, 일본의 신화가 기록된것은 국가의 통일이 어느 정도 이뤄져서, 그것을 더욱 강화할 필요를 느낀 시대였음을 알 수 있다. 이미 8세기에 접어든 뒤였기 때문에 허구에의한 조작의 조직성이 높았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 P13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모든 것을 의심하고 그 실존을 부정했기 때문에
‘말살박사(抹殺博士)‘라고 불렸던 학자들이 일본에 있었다. 중국에도 그런부류의 학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의고파(疑派)라고 불린다. 학문을 하는 자세로서 이것은 평가를 받아도 좋을 것이다.
사마천은 자신의 시대에서조차도 실존인물이라 믿어지지 않았던 황제를 전부 허구라고는 말할 수 없다고 보고, 『사기』의 권두에 그 사실을 적었다. 맹종적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사마천의 자세는 일종의 의고파라 할수 있다. - P17

이미 친숙하게 알려진 신들로 가득 차 있는 시대에는 새로운 신을 끼워 넣을 틈이 없다. 억지로 끼워 넣는다 할지라도 이질 분자임을 알 수있기 때문에 그곳으로 녹아들지 못한다. 따라서 하는 수 없이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좀 더 오래된 시대에다 끼워 넣게 된다. 어차피 혼돈스러운시대이기 때문에 그 위로는 얼마든지 섞어 넣을 수 있다.
새로운 신일수록 더 오래된 시대에 들어가게 되는 것을 ‘가상설(加上說)‘이라고 하는데, 의고파인 고힐강(顧頡剛, 1893~1981, 중국 고대사를 전공한북경대학 교수-옮긴이)이 주창했다. 일본에서도 에도(江戸) 시대에 도미나가나카모토(富永仲基, 1715~1746, 고문학 학자-옮긴이)가 같은 설을 주장했다.
새로운 신들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 온 신들도 끼어들 자리를 찾고 있었다. 비주류파의 신들은 자칫 오래전 시대에 자리를 부여받았던것은 아니었을까. - P18

신화에 그 편린이 반영되어 있는 역사는 의외로 짧은 기간이었을지도모른다. 신화를 정리할 때 상당 부분을 크게 늘렸을 것이다.
예를 들어, 복희와 여왜가 부부신임에도 불구하고 복희 다음이 여왜였다는 계보를 만들면 그 만큼 기간이 길어진다. 비주류의 신이지만, 가상설에 의해서 태고로 끌어올려진 삼황은 그나마 행복한 편이라고 할 수있다. 공공처럼 신화의 바다를 오랫동안 표류해야 했던 신도 있었으니.
아마도 삼황은 조용했기 때문에 계보에 들어가는 일을 인정받았을 것이다. 난폭한 존재는 방황하는 신이 되어 버리는 것 같다. 사실은 그런신들이 더 윤곽이 뚜렷해서 우리에게는 재미있게 여겨지지만. - P30

세습제도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선양을 이상화할 필요가 생겼을 것이다.
세습은 사유재산이 늘어났기에 필요해진 것이다. 그 이전까지의 씨족공동체 안에서의 생활은 사유재산에 의지할 필요가 없었다. 반파유적에 - P60

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거주지 중앙에 집회소가 있어서 대부분의 일을거기서 해결할 수 있었다. 그다지 어려운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홍수나가뭄 등과 같은 자연재해와 다른 부족의 공격 외에는 문제다운 문제는없었을 것이다.
제사를 주재하고 파종이나 수확 시기를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제왕의 주요한 일이었다. 황제 신화에서 그 편린을 엿볼 수 있는데, 부족은지역적으로 연합을 하게 되었고, 부족연합의 대수장이 제왕이라 불렸다.
그리고 각지의 수장이 바로 제후였다.
부족의 연합은 다른 부족과 전쟁할 때 강력한 군대를 만들기 위해 필요했을 뿐만 아니라, 대규모의 치수공사를 할 때도 역시 수많은 인력을모을 필요가 있었기에 형성된 것이다.
대수장은 커다란 힘을 모을 수 있었으며 그것을 지휘할 수 있었다. 사유재산은 틀림없이 그런 힘을 가진 대수장 주변에서 생겨났을 것이다. - P61

요가 제위(位)에 있고, 순이 섭정을 할 때
공공을 유릉(幽陵)으로 유배 보내 북적으로 바꾸고,
환두를 숭산(崇山)으로 추방해 남만으로 바꾸고,
삼묘를 삼위(三危)로 옮겨 서융으로 바꾸고,
곤을 우산(羽山)에 극(極, 유패)하여 동이로 바꾸고,
라는 처분을 했다.
북적, 남만, 서융, 동이라는 중국의 ‘사이관(四夷觀)‘이 여기에 나타나있다.
만들어진 이야기라 할지라도 이것은 중요한 사실이다. 적, 만, 융, 이등 중원에서 보면 변경에 있는 각 부족은 처음부터 변경에 있었던 것이아니라 중원에서 추방되어 사방의 변경으로 가게 된 것이라 되어 있다.
이것은 요와 순의 실재, 비실재 문제와는 상관없이 유력한 각 부족이 중원 주변에서 멀리 떨어진 땅으로 옮겼다는 역사적 사실을 솔직하게 반영하고 있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가 언제 만들어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시대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상식이었다고 여겨진다. - P65

청나라 말기의 개량주의자인 강유위(康有爲, 1856~1927)는 『대동서(大同書)』를 저술했는데, 그것은 점진적으로 태곳적 대동의 세계로 돌아갈 것을 주장한 책이다. 대동이 어떤 시대였는지 『예기』의 「예운편(禮運篇)」에 나타나 있다.
대도가 행해지면 천하를 공(公)으로 삼고, 현(賢)을 뽑고, 능(能)을 존중하고, 신(信)을 익히고, 목(睦)을 닦는다. 오직 자신의 부모만을 부모라 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자식만을 자식이라 하지 않는다. 노(老)에게는 마칠 곳이 있고, 장(壯)에게는 쓰일 곳이 있고, 유(幼)에게는자랄 곳이 있고, 긍과고독폐질(吟寡孤獨廢疾)인 자를 모두가 돌보는 - P79

곳이 있다. 남자에게는 분(分)이 있고, 여자에게는 귀(歸)가 있다. 화공(貨)는 그것을 땅에 버리기를 싫어하지만, 반드시 자신이 저장하는 것은 아니다. 힘을 그 몸에서 내지 않는 것을 미워하지만 반드시 자신을위해서 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연고로 모(謀)는 갇혀서 일어나지 않고, 도절난적(盜竊亂賊)은 더욱 일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대문을 잠그지 않으니 이를 대동이라 한다.

세습이 시작된 하(夏) 이전이 대동의 세상이다. 이것을 설명해보면, 대도가 행해지면 ‘천하위공(天下爲公)‘이 된다는 것이다. 천하를 공의 것이라보고 사유화하지 않는다. 현자를 뽑고, 유능한 사람을 존중하여 쓰고,
신을 익히고, 서로 화목하게 지낸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신의 부모만을부모라 여기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노인을 대할 때는 자신의 부모처럼섬긴다. 그리고 자신의 자식만 귀여워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아이들을자신의 자식처럼 사랑한다. 노인에게 편히 눈 감을 수 있게 하고, 장년에게는 그 힘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하고, 긍(나이 들고 아내 없는 자), 과(나이 들고 남편 없는 자), 고(어리고 부모 없는 자), 독(나이 들고 자식 없는 자), 폐질(장애자) 등은 모두가 돌보게 된다. 남자에게는 직분이 있고, 여자에게는 시집갈 수 있게 한다. 재화를 버리는 것을 좋지 않게 여기지만 반드시 자신의 것으로 삼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사회의 공유 재산이다. 힘을충분히 발휘하지 못하는 것을 좋지 않게 여기지만 그것도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모략 같은 것은 당연히 일어날 리가 없고,
물건을 훔치는 자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문을 잠글 필요도 없는 것이다.
이것이 대동의 세상이다. - P80

하라는 국호는 우가 처음으로 봉해진 나라의 이름에서 땄다고 한다. 그 후 전국적(全國的)인 정권은 시조가 처음으로 봉해진 땅의 국명을 국호로 사용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상(商, 은), 주, 진(秦), 한, 위, 진(晋), 수, 당, 송 모두이 관례에 따른 것이다. 몽골 정권은 특별히 어디에도 봉해진 적이 없었기 때문에 지명이 아니라 추상적인 가명(名)을 골라서 원(元)‘이라고 명명했다. 원에 의해서 하 이후의 전통이 무너진 셈이다. - P102

전승에 의하면 하와 은은 조상이 같지만, 계열이 다른 부족이었을 것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서로의 생활양식에 커다란 차이가 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하가 멸망하고 은의 천하가 되었지만 사람들의 생활이 송두리째 뒤바뀌는 일은 없었다.
틀림없이 하는 권력의 자리에 안주하여 수장이나 그 주변의 간부들이 타락했을 것이다. 사람들도 퇴폐했었을지도 모른다. 같은 기반의 생활권 속에서 보다 청신한 기풍을 가진 은이 힘으로 권력을 대신했다. 단절이나 혁신보다 계속이라는 느낌이 더 강했을 것이다.
나중에 이야기하겠지만, 은에서 주로의 교체는 흔히 ‘은주혁명(殷周革命)‘이라 일컬어지듯 커다란 변혁이었다. 그것은 계속이라기보다는 단절이라는 느낌이 더욱 강했다. 그에 비해서 하와 은의 교체는 일종의 사회 발전 선상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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