Ⅲ. 승화

얼마 전 '국립 서울현충원'에 대한 책을 읽고 난 뒤라 그런지 특히 이 챕터의 내용이 눈에 확 들어왔다.(현충원에도 무명용사탑이 있다.) 전사자에 대한 숭배는 예전 같으면 일상적으로 국민 의례를 행하면서, 지금은 현충일 같은 특정 기념일에 국가에 대한 충성을 바쳐 순국한 순교자로 대상화된다. 나는 이 과정이 정치적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것이 민족주의(에 대한 숭배)를 끊임없이 끌어올리는 행위겠구나 하는 생각이 일었다. 의도치 않게 연결 읽기가 되고 있어서 더 의미가 있다.

[죽음의 민주화와 사자의 기억]
피해자=수동성, 희생자=능동성 or 주체성
비장한 선율에 숭고한 희생의 노랫말을 붙인 애국가요가 각종 국가 기념식에서 제창되는 것
<님을 위한 행진곡> 제창 여부를 놓고 벌어진 논쟁
국민국가의 의례 -> 고통의 기억을 동원하면서 공동체의 응집력을 극대화. 희생자의식 민족주의
"함께 나눈 고통이 기쁨보다 민족을 더 단결시키고, 민족적 기억을 위해서는 애도가 승리보다 나은 것이다."(by 에르네스트 르낭)
집단적 희생의 기억 - 정치 종교를 만들어내는 재료
전근대사회에서의 전사자 의례는 혼을 달래서 빨리 잠재워야 할 부정적인 존재 vs 근대 국가의 국민 의례는 전사를 위대한 행위로 간주하고 해석을 기록하여 후세가 추모하게 하는 숭배
근대 주체 -> 국민국가의 요청에 따라 다듬고 만들어진 주체. 명령에 복종하고 조국에 충성하고 군인의 미덕을 숭상하는 국민으로 프로그램화된 대중
17세기 영국의 휘그파는 고대 공화국의 시민과 자신을 동일시, 1750년대 프랑스 신고전주의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시민적 공화정을 이상적 공동체로 여겼음(공동 의지에 기초한 공동체,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지닌 시민, 공동체에 대한 시민의 헌신)
희생자의식 민족주의가 고전적 민족주의와 다른 점은 조국과 민족을 위해 싸우다 죽은 전사자 뿐 아니라 억울하게 죽은 모든 이의 희생까지 민족의 이름으로 승화시킨다는 데 있다 - 죽음의 민주화

[숭고한 희생자와 순교의 국민화]
피해자와 희생자는 언어나 문화권에 따라 서로 다른 의미이거나 같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고 같은 언어에서도 문맥에 따라 다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반면 순교자는 언어권의 경계를 넘어 그 의미가 거의 일치한다. 순교자는 종교적 믿음이나 정치적 신념을 위해 모든 고난을 무릅쓰고 죽음까지 마다하지 않는 정치적 행위를 뜻한다.
"독재자는 죽는 순간 지배가 끝나지만, 순교자는 죽는 순간 지배가 시작된다."(by 쇠렌 키르케고르)
'이타적 자살'(by 에밀 뒤르켐): 자기 사회의 지배적 신념과 헤게모니적 가치체계를 체화한 구성원이 사회여론의 압도적 지지를 받고 자살을 결단함으로써 집단의 이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현상 -> ex) 이슬림 지하드 전사의 '자살 테러' or 팔레스타인 전사의 '자살 공격'
순교의 대중화 or 순교의 국민화로 희생자의식 민족주의가 이데올로기를 넘어서 일상에 깊숙이 자리하게 돼 -> 무명용사의 숭배

[시민종교와 전사자 숭배]
진보주의 이데올로기는 삶의 우연성과 불멸성에 대한 숙명론적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민족주의는 민족의 영속적 삶이라는 관념을 통해 죽은 자와 태어나지 않은 자를 연결하고 죽은 자를 민족의 삶 속에서 부활시킨다고 주장
민족주의는 조국을 위해 죽어간 자들의 제사를 통해 영속된 운명공동체를 재확인
희생자에 대한 종교적 애도에서 중요한 것은 죽은 자의 관점이 아닌 살아서 애도하는 자의 관점. 애도의 주체가 산 자이기 때문.
1차 대전의 기억이 종교적 분위기를 부여하면서 순교와 부활이라는 믿음을 국가라는 시민종교에 투영
야스쿠니 신사의 전사자 숭배: '정치종교-시민종교-세속종교'
야스쿠니 신사가 정치종교의 성전이 된 기원
대한민국 전사자 의례는 제국 일본의 정치종교적 의례에서 기원한 것
강제 동원 희생자 집단의 복권 -> 기억의 지구화, 정치의 민주화로 가능해짐

[탈영병 기념비와 대항 기억]
전후 독일과 소련, 일본 사회는 탈영병의 존재를 사회적 기억에서 배제하면서 조국의 순교자 신화를 유지 가능했음. 따라서 탈영병의 존재는 오래도록 사회에서 잊힌 존재
정치종교는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 한계가 존재 - 조국을 위해 무모한 죽음보다는 전쟁에 반대하고 살아남는 게 애국이다라는 생각이 퍼지면서 정치종교의 세력이 약화된 것 -> 이는 현재 러시아 군인들의 강제징집 명령에 불복종, 포기하거나 탈출하는 현상과 오버랩됨.
탈영병을 위한 기념비(2014.10.24, in 오스트리아 빈): 나치 군사재판에 희생된 오스트리아 탈영병을 위한 기념비 - 정치종교의 전사자 숭배의례를 통해 고양된 희생자의식 민족주의의 문화적 기억에 맞선 반헤게모니적 기억문화의 예
하인리히 뵐 - 2차 대전 당시 탈영병이자 투항자로서 비판을 많이 받았음
2007년 1월 새로 제정된 대한민국 국기법에는 '국기에 대한 맹세' 조항이 없지만 국기에 대한 충성서약은 행정자치부 시행령으로 존속.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는 피해자가 희생자로 넘어가는 담론적 승화 과정에서 출현한다. 우리의 기억 속에서 억울하게 죽은 수동적 피해자가 국가와 민족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 숭고한 희생자로 탈바꿈하는 순간,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로 가는 문이 열리는 것이다. 강제 폭력의 피해자가 자발적인 결단의 희생자로 미화되고, 의미없는 죽음이 의로운 죽음으로 신성화되고, 우연한 사고가 운명적 비극으로 신비화되고, 현실 속의 피해자가 기억 속의 희생자로 자리매김될때,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는 운명론적 초월성을 띠게 된다. 희생의 승화를 통해 조국, 민족, 혁명, 해방, 근대화 등을 꿈꾸는 세속의 이데올로기가 존재론적 운명의 차원으로 격상되는 것이다. - P113

억울한 희생자의 고통과 고난을 민족적 기억의 주변에서 중심으로끌어올린 희생자의식 민족주의의 출현과 더불어, 희생자는 과거 민족영웅이 누렸던 권위를 공유했다. 지구적 기억 공간이 만들어지고 피억압자의 인권 감수성이 예민해지면서 폭력의 희생자가 바로 그 희생때문에 도덕적 영웅이 된 것이다. 희생자의식 민족주의에서 피해자가희생자로 승화되는 양상은 순교 개념을 축으로 한 영웅 민족주의와는크게 다르다. 전사자와 민간인 희생자 사이의 위계를 지우고 군인 전사자에게 국한된 죽음의 민주화를 민간인 희생자까지 밀고 나감으로써 희생자의식 민족주의가 공감을 얻는 세속종교의 영역은 더욱 넓어졌다. 죽음의 민주화가 정치종교의 민주화·대중화·국민화를 낳은 것이다. - P120

‘희생자‘라는 단어 뒤에 굳이 ‘의식‘을붙여 ‘희생자의식‘을 고집하는 이유는 첫째, 피해자를 희생자로 승화시키는 기억의 전이 과정을 담기 위해서다. 피해자에게 희생자의 숭고미학을 덧씌우는 수사법의 정치학을 설명할 때 희생자 ‘의식‘이 더 효과적이라는 생각이다. 둘째, 실제 희생자가 아닌 ‘포스트 메모리‘ 세대가 가진 역사의식인 ‘세습적 희생자의식‘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기도하다." - P124

순교자의 지배가 시작되면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도 기지개를 켠다.
그러나 순교자 숭배가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소수의 선택된 순교자에서 다수의 집단적 순교자가 필요하다. 순교의 대중화 또는 순교의 국민화가 요구되는 것이다. 몇몇 선택받은 사람만이아니라 국민 전체가 순교자가 될 때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는 추상의이데올로기를 넘어 일상에 깊이 뿌리박는다. ‘그들‘의 순교가 아니라
‘우리‘의 순교가 되는 것이다. 이름 없는 영웅이 귀족적 영웅을 대체하는 죽음의 민주화는 특히 무명용사 숭배에서 잘 드러난다. 보통 사람들의 일상에 깊이 뿌리박은 전통종교의 형식이 필요한 것도 이 대목에서다. - P126

전사자 숭배는 국가라는 종교에 순교자를 제공했고, 죽은 이들의 마지막 안식처는 국가적 경배의 신전이 되었다. 전사자를 어떻게 매장하고 추모할지, 전쟁기념물에 어떤 상징성을 투영할지 등 전사자 묘역의건설과 관리 문제는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더 체계적으로 논의되고 의례도 더 정교해졌다. 전사자 숭배를 중심으로 구축된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한 기억 문화의 회로판을 통과한 기독교의 순교 전통은 순국의 전통으로 탈바꿈했다. ‘신을 위해 죽는다(pro domino mori)‘는 가톨릭의 순교 정신이 ‘조국을 위해 죽는다(pro patria mori)‘는 순국의 정치적 도덕률로 바뀌면서 전사자 숭배는 근대 국민국가의 정치종교적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순교가 순국으로 탈바꿈하고, ‘의사(義士)‘ 또는 ‘열사(烈士)‘가 ‘순교 성인‘을 대체하며, 나라에 대한 충성으로 목숨 걸고 싸운 말단 병사들이 순교자와 같은 반열에 오를 때, 애국적 순교자의 지배가 시작되고 조국과 민족을 신성화하고 숭배하는 정치종교는한껏 고양된다. - P129

전사자들을 ‘영령(英靈)‘으로 호명해서 그들의 헌신과 희생을 ‘현창
‘하는 순간, 죽음은 민족의 영원한 삶 속에 스며들어 불멸의 지위를 얻는다. - P131

기독교의 종교적 기운과 결합할 때 전사자 숭배는 애도를 넘어 승화의 경지에 이르기 쉽다. 특히 세속적 진보의 비전을 잃어버린 채 종교적 주술의 과거로 되돌아가는 근대의 재주술화 과정에서 ‘도덕적 자본‘의 헤게모니가 강해지면, 국가가 추구하는 공식적 기억은 점점 더 종교적 상징에 의존한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먼저 발전한 전사자 숭배와 정치종교가 좋은 예다. 특히 ‘희생자의식‘은 개념적 신축성으로 신성한 것과 세속적인 것 사이의 상호침투와 모순적 결합을 더 손쉽게 만들어주는경향이 있었다." 궁극적으로 전쟁에 대한 집단 기억은 국가가 만들고퍼뜨리는 역사 정책의 도덕적 층위를 결정한다. 국가가 구성한 공식기억의 주인공은 전쟁의 공포가 아니라 영광이었고, 희생자가 아니라영웅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신성한 경험으로 구성된 전쟁의 기억은 국가에 전례 없이 종교적 분위기를 부여하고, 피에타(Pieta) 모티브를 통해 전사자를 기억하는 양상에서 보듯이 순교와 부활이라는 전통적인 믿음을 국가라는 전면적인 시민종교에 투영했다. - P133

희생자의식 민족주의가 태동하던 시절 해방공간의 한반도에서는
‘반공 영령‘이 아시아·태평양 전쟁의 전사자를 대신해 현창과 숭배의대상이 되었다. 신의주학생사건의 희생자들을 시작으로 좌우익 폭력충돌 과정에서 희생된 우익 측 경찰, 군인, 군속, 철도원, 의용소방대,
민간 반공단체 회원이 전사자 의례의 중심이 된 것이다. ‘반공 전사자‘
들의 현창은 1949년 개성전투에서 숨진 이른바 ‘육탄10용사‘ 장례식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명령에 따른 결사대‘였던 일본 제국의 육탄 3용사와 달리, 대한민국의 육탄10용사는 ‘자진하여 살신성인했다‘는신화를 전국에 퍼뜨렸다. ‘조국의 군신‘이자 ‘영원불멸의 정의의 봉화‘
인 반공 전사자 숭배 의례는 한국전쟁 당시 ‘국군 전몰장병 합동 추도식‘ 등을 거치며 발전을 거듭했다. 이들은 ‘애국지사‘, ‘순국열사‘ 등으로 호칭이 격상되어 독립투사와 같은 순교자의 위치로 올라갔다. 정작독립을 위해 무장 투쟁하다가 희생된 순국열사들은 국가와 사회의 무관심 속에 잊혀갔다. - P144

제국 일본의 전사자 숭배와 정치종교의 의례는 제국이 해체된 이후에도 동아시아 각국에서 살아남았다. 미군의 점령 아래 제국의 유산과총력전 체제를 부정해야만 했던 일본보다 국가 건설이 절실했던 신생독립국 대한민국에서 의례는 더 잘 보존되었다. - P141

매일매일의 투쟁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사는 게 죽는 것보다 어렵다. 비겁한 일상 대신 영웅적 죽음을 강변했던 이들은 생존의 어려움과 직면할 용기를 갖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영웅적 비겁함과 일상의 용기가 대비되는 대목이다. 영웅주의적 민족주의를 대체하는 새로운 민족 담론으로 희생자의식 민족주의가 훨씬 더 복잡한 양상을 띠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영웅처럼 장렬하게 산화한 자들이 아니라 억울하게 희생된 자들이나 비루하게 살아남은 자들을 고귀하고 초월적인 추상으로 승화시켜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어떻게 이해하고 푸는가에 따라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는 천차만별의 모습을 띤다 - P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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