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풍요의 가능성과 빈곤의 지속성: 산업화와 국제무역
오늘 읽은 부분 중 인상 깊었던 것은 유럽이 맺은 외부의 정치적 공간 중 비유럽에는 유럽에 적용된 중상주의가 적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예를 들어 영국 정부는 아시아 상품을 수입할 때 금은의 유출이 가져올 문제에 대해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편 전쟁은 중국과 서양의 관계에 변화를 가져온 사건이 아니라 경제적으로는 중국과 유럽 사이 진행되던 국제무역 논리가 어떠했는지 실증된 사례였다.

산업화의 발전은, 그리고 그것이 국제무역에 미친 경제적 영향은 경제 논리에 따라 이루어졌다. 경제적 변화가 초래한 사회적·정치적 결과가 어떤 의미와 중요성을 지니는지는 이데올로기 원칙에 의해, 그리고 점차 제도화된 산업자본주의에 의해 결정되었다. - P309
유럽에서 소비혁명은 농촌의 주민보다 형편이 좋았던 도시민들에게서 일어났다. 반면에 중국에서는 수공업 상품의 소비자가 주로 농촌에 살고 있었다. 필요한 거의 모든 상품을 구매하기 위해 시장이 필요했던 도시민과 달리, 농촌 가구들은 식량을 스스로 경작했으며 필요한 단순 도구들도 스스로 제작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의 경우 상업 활동과 소비가 점차 증가했 - P313
을 때 이러한 변화로부터 심각하게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유럽보다 적었다. - P314
유럽의 근면 혁명과 상업혁명은 근대 초에 유럽의 정치 경제가 세계의 다른 지역으로확산되면서 그 전체적인 맥락 안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그러나 중국의 경우아시아를 넘어서는 무역 네트워크가 아시아 해역을 넘어 활동한 중국 상인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중국 해안에 등장한 유럽 상인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 P314
유럽과 동아시아의 비교는 설사 완전히 확실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고 할지라도 적어도 중요한 두 가지 교훈을 제시한다. 하나는 분석적인 교훈이고 다른 하나는 경험적인 교훈이다. 첫째, 분석적인 교훈은 사실 근면 혁명도 소비혁명도 산업혁명을 촉발하는 데 충분치 않았다는것이다. 만약 근면 혁명이나 소비혁명이 산업혁명을 촉발했다면, 유럽보다 이미 수백 년 전에 동아시아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났을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경험적인 교훈은 그리 뚜렷하게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근면 혁명과 소비혁명이 19세기 초 유럽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는 방식에 영향을 주었던 것처럼, 근대 초 동아시아의 경제적 작동 방식은 19세기 말에 동아시아에서 일어난 산업혁명의 방식에 영향을 주었다. - P316
에스파냐가 아메리카에서 채굴한 은은 상인들에게서 유럽산 상품을 구입하는 데사용되었으며, 상인들은 상품 대금으로 받은 은을 중국과 무역하는 데 사용할 수 있었다. 근대 초 유럽 상업 제국들의 정치 경제는 이런 식으로 유럽의소비자들과 아시아 생산자들 사이의 관계에 중요한 영향을 행사했다. 하지만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유럽 소비자들과 아시아 생산자들의 관계는 유럽인들이 아프리카와 아메리카의 원주민들에 대한 또 다른 관계를 구축했기때문에 비로소 가능했다는 것이다. 이 관계는 아프리카와 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을 자기들의 대농장과 광산에 노동자로 강제로 투입하는 방식이었다. - P317
아메리카 대륙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아시아에 무역 거점을 구축하려는 유럽 국가들의 노력은 둘 다 마찬가지로 부와 권력을 둘러싼 유럽 내적 경쟁의 일부였다. 유럽 국가와 그 국가에 속한 상인들은 공동 목표를 추구했기 때문에 한 국가의 정치적 목표는 특정 상인 집단의 경제적 성공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었다. 정치권력과 경제적 부 사이의 이러한 결합은 아메리카에서 정치적 존재감을 강화하고 아시아에 경제적 거점을 구축하려는 통치자들의 노력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났다. 근대 초 유럽 국가들은 재정적으로 아메리카 식민지와 아시아를 상대로 한 무역에서 발생하는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렇듯 근대 초 유럽의 상업자본주의는 해상무역 제도를 통해 구체적으로 실현되었는데, 이 무역 제도를 추진하기 위해 소수의 상인이 수익성 높은 사업과 점차 규모가 커지는 경제 분야에 대한 통제권을 부여받았다.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특권적 지위를 이용해 이익을 창출했다. - P319
중국의 사회적 안정과 정치적 정통성의 기반은 농경과 수공업에 동시에 종사하던 농민층의 안녕이었다. 이들의 안녕을 촉진하려는 다양한 정치 전략들은 생산이 증가하면 백성들에게 직접 유익을 가져다주면서도 다른 사람들의 물질적 조건을 악화시키지 않는다는 인식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수요와 공급이라는 기본 원칙이 각자 전문화된 능력에 따른 노동 분업을 촉진해 생산성을 높이면 판매자와 구매자 모두 거래에서 전반적으로 이득을 보았다. 따라서 중국 관리들은 일상적으로 상품의 상업적 유통을 지원했으며, 만약 소수의 개인이 물자 공급을 통제하는 방식으로 가격을 조작해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하면 이를 받아들일 수없는 상황으로 간주했다. - P323
유럽의 관점에서 볼 때 중상주의는 유럽 국가들 사이이의 관계를 결정했으며, 나아가 세계 다른 지역에서 유럽의 경쟁자들이 서로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에 영향을 준 이론이었다. 18세기에 영국 정부는 이전 세기 동안에 상품 거래에서 중요한 부분이 되기 시작했고 특히 아시아 상품을 수입할 때 결제 수단이 되었던 금과 은의 유출이 어떤 문제를 가져올지에 관해 별 고민을 하지 않았다. 아시아 상품의 구매자로서 동인도회사가 누리던 독점적 지위가 서양의 개별상인들을 통해 점차 무너지면서 영국 정부의 관리들은 은의 유출이 심각한 문제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점차 깨닫기 시작했고, 은을 대체할 수단을 찾기 시작했다. 이때 인도산 아편이 특히 유용한대체 수단으로 등장했다. 그런데 여기서 아편은 은을 대체하는 유용한 교환수단일 뿐 아니라 새로운 수익 모델도 되었다. - P325
누군가는 유럽이 세계에서 비교 우위를 차지하게 된 이유로 유럽이 세계 다른 지역을 정복하고 그곳에서 부를 이끌어 냈으며 그 부를 세계의 다른 지역들로부터 그들이 원하는 상품을 구입하는 대금으로 지급하는 것에 있었다는 견해를 제시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근대 초의 세계무역은 그런 단순한 의미에서 나타난 비교 우위를 기반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유럽이 비교 우위를 차지하게 된 이유를 그렇게 설명한다면 이는 비교 우위라는 개념을 우리 대부분이 경제라고 일컫는 영역을 넘어 널리 확대하는 것이 될 것이다. 물론 18세기 후반과 19세기 후반의 세계무역이 보여 준 모순적인 특징은 19세기 말의 산업자본주의에서 이루어진 세계적인 노동 분업이 사실상 노동의 분업을 가져다주었다고 할지라도, 해양 상업자본주의가 스미스식의 자유로운 시장 교환원칙을 기반으로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 P331
산업혁명의첫 단계를 이끈 것은 몇몇 기업으로 이루어진 집단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와정반대로 산업혁명이 확산될 수 있게 한 것은 시장이 확대되자 수익을 창출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인 소규모 회사들이 점점 증가해 이들이 결과적으로 상업자본주의뿐 아니라 산업자본주의를 형성했다는 사실이다. - P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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