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는 예술작품을 숙달된 기교라는 규칙에서 해방하고, 그런다음 내용 면에서 해방하고, 그런 다음에는 마르틴 하이데거가말한 그 자체의 사물성으로부터 해방하여 예술작품이 삶 자체에감싸이도록 한다. 예술작품을 박탈당한 우리에게 남는 것은예술가의 행위뿐이다. 문제는 예술가의 규칙 위반을 역사가 "예술"로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점이며, 이것은 그 예술가가권력에 접근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여성 예술가는 좀처럼 "교묘히 넘어가지 못한다. 흑인 예술가는 좀처럼 "교묘히넘어가"지 못한다. 뺑소니치고도 교묘히 넘어가는 사립학교부잣집 아이처럼, 교묘히 넘어간다는 것은 그 사람이 무법자라는뜻이 아니라 법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 악동 예술가가뭐든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신분 때문이다. 규칙을 위반하는 악동 예술은 사실 가장 위험 회피적이며, 돈있는 수집가라는 단 한 명의 관객을 위해 무한 반복되는 재탕묘기이다. - P160
여성 미술가의 명성은 사후에 소급하여 주어진다. 고고학자들이지하묘지를 파헤쳐 생전에 과소평가된 또 한 명의 천재를발견했다고 선언해야만 비로소 주목받는다. 마이크 켈리, 폴 매카시, 짐 쇼의 우정이나 데 쿠닝과폴록, 베를렌과 랭보, 브르통과 엘뤼아르의 우정에 관해 읽을때면, 나는 여성, 더 절실하게는 유색인종 여성이 우정을통해 미술가와 문인으로 성숙기를 맞은 이야기를 간절히읽고 싶어진다. 지난 몇십 년 동안 수많은 페미니스트 문인과미술가가 등장했지만, 그들이 함께 미적 원리를 기반으로우정을 맺는 이야기를 글로 접하기란 여전히 흔치 않은 일이다. 문학사와 미술사를 깊이 파면 팔수록 나는 더욱더 고독해졌다. - P161
우리 부모님이 내게 주신 최고의 선물은 어떤공부를 하고 어떤 직업을 고를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해주신것이다. 빛과 일주일 내내 일하는 고된 처지에서 부모님을구제해야 한다는 의무를 느끼던 다른 한인 타운 아이들은 나와같은 처지였다고 말하기 어렵다. 자녀의 도움이 필요 없는부유한 한국 부모들도 오로지 자랑할 권리를 누리고 싶다는이유로 자식들의 경력과 결혼을 가차 없이 관리했고, 그러다가애들의 인생을 망쳤다. 내가 운이 좋았던 것은, 아버지도 한때시인이 꿈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내가 오벌린 대학에서 시과목을 수강하기 시작하자 처음으로 그 사실을 밝히셨다. - P164
에린은 매력적이고 재능 있고 똑똑했지만, 칠면조 샌드위치하나도 반드시 에린이 만들어줘야 할 정도로 무력한 남자를사귀었다. 겉보기에는 그 관계에서 에린이 우위에 있는 것처럼보였으나 무력한 척하는 남자들은-오벌린 대학에는 이런부류가 특히 많았다-무능력을 핑계 삼아 하찮은 일을 여자에게떠넘긴다는 점에서 상남자만큼이나 여자 조종에 능했다. - P183
헬렌이 자기 몸을 쳐다보며 말했다. "나는 뚱뚱해." "헬렌." 에린과 내가 동시에 똑같이 말했다. "너 말랐어." "나 뚱뚱해." 헬렌이 다시 말했다. 그러더니 나를 노려보았다. 그 노려보는 시선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너 날 속였어." "무슨 소리야?" "내 뚱뚱한 몸을 비웃으려고 일부러 내 옷을 벗게 만들었어. 네가 날 속였다고." "캐시는 취했어." 에린이 조용히 말했다. "자기가 뭘 하고있는지 몰라." "나 안 취했어!" 내가 취해서 말했다. "너 예뻐! 왜 그걸 몰라! 그걸 좀 알라고! 네 몸은 아름다워! 네 몸은 섹시해! 제발 너자신을 사랑했으면 좋겠다고!" - P186
명미 같은 백인 시인의 말투를 닮을 필요도 없고 백인청중이 알아듣기 쉽도록 내 체험을 "통역할" 필요도 없다고 내게말해준 최초의 시인이었다. 그 후 다른 어떤 멘토도 명미 킴만큼그런 생각을 단호하게 강조한 사람은 없었다. 판독하기 어렵게쓰는 것은 하나의 정치적 행동이었다. 그전에도 아시아인으로서겪는 체험에 관해 쓰라는 독려를 받긴 했으나 여전히 백인시인이 쓰는 식으로 썼어야 했다. 그래서 나는 백인 시인을 흉내내는 대신 백인 시인이 아시아 시인은 이럴 거라고 상상하며흉내 내는 방식을 흉내 냈다. 킴이 내 시를 처음 읽고 말했다. "왜다른 사람의 말투를 모방하죠?" - P190
나는 다문화주의가 절정에 달했던 90년대중후반에 대학 교육을 받았다. 내가 아는 가장 재능 있는친구들과 교수들은 다 유색인종이었다. 강의 도서목록에다양성이 반영되어야 하는 것이 내게는 당연했다. - P191
우리는 미술사학자 로절린드 크라우스가 확장된 영역이라고일컬은 작업의 실행자들이었다. 여기에는 우리가 미술과 시를논의한 방식도 포함되었다. 기법에 관해서만 이야기하기는지루했다. 우리는 미술과 시를 인종, 젠더, 계급과 관련지어논의했다.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의 미적 특질에 영향을 주었지만, 우리의 미적 특질이 꼭 정체성하고만 관련된 것은 아니었다. - P192
그때 우리는 경력을 쌓는 모든 단계에서 매번 과소평가 당했기때문에 각자 능력을 되풀이해서 증명해야 했다. 그렇더라도 나는다른 길을 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고전했기 때문에 나는우리의 우정으로 배양된 창의적 상상력에 꾸준히 충실할 수있었으며, 그 상상력은 우리의 불만족스러운 의식의 진실성을반영할 수 있도록 엄밀성과 깊이에 의해 다듬어졌다. 다른사람은 아무도 우리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우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우리에게 가장 먼저예술가가 되라고 촉구한 유일한 사람은 바로 우리였다. - P203
차는 전통적인 서사를 피하고 그 대신 내가 볼 때 일종의구조주의 영화 대본이라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구조를 취한다. 장면은 무대 연출처럼 묘사된다. 시는 영화 중간에 들어가는독백처럼 배치된다. 환히 빛나는 하얀 화면처럼 보이도록 영화스틸컷 사이사이에 텅 빈백지가 삽입된다. 차는 『딕테』를 어떻게풀이해야 할지 전혀 안내하지 않는다. 프랑스어를 번역하거나이승만 대통령이 프랭클린 D. 루스벨트에게 보낸 편지의 맥락을짚어주거나 칼 드레이어 감독의 영화 「잔 다르크의 수난」에나오는 프랑스 배우 르네 잔 팔코네티의 사진에 설명 붙이기를거부한다. 독자는 나름대로 단서를 연결해 퍼즐을 풀어가는탐정이 된다. - P210
영어는 단조여야 할 체험을 장조로바꾸어놓았다. 영어로 써놓으면 한국어에 서린 친밀감과 우수가사라졌다. 영어는 내가 어릴 때부터 세관 직원, 위협적인 교사,홀마크 카드와 연관 짓던 언어였다. 영어를 배운 지 그렇게여러 해가 흘렀어도 영어로 글을 쓰려면 아직도 빈칸 채우기를하거나 남의 원문을 재인용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떨칠 수없었다. 그러나 영어는 자신의 언어가 아니고, 자신의 의식을 결코진정으로 반영할 수 없고, 하나의 표현 형식인 만큼이나 자신의의식에 지워진 부담이라는 것을 내비쳤다는 점에서 차가 구사한언어는 나의 언어였다. 그리고 바로 그 점 때문에 『딕테』가진실하게 다가왔다. - P211
아시아 문화에서 여자들이 이유 없이 사라지거나실성하는 이야기는 무성하다. 노출되는 부분은 기껏해야 어떤 나쁜 일이 일어났다는 것뿐이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신경을자극하는 고통은 일단 그 고통에 관해 이야기하면 신체로부터분리된다고 본다. 고통을 명명하면, 일어났던 일에서 아픔이덜어지고, 한계가 그어지고, 그 일을 감당하고 심지어 소멸까지가능해진다. 그러나 나는 마치 말이 치유법이 아니라 남을오염하는 독인 양, 자칫 고통을 언급했다가는 정신적 외상을 또한 번 입을 뿐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 트라우마를입히게 되는 문화에서 자랐다. 이런 비밀과 수치의 문화에서성폭행을 고발할 만큼 대담한 아시아 여성이 얼마나 되겠는가? - P213
상처를 내는 도구로 취급하기도 한다. 차의 언어는 정체성을드러내기보다는 감추는 언어다. 그의 예술 작업에서 언어는영어든 프랑스어든 한국어든 관계없이 고무도장처럼 뻣뻣하고, 돌에 새긴 무늬처럼 불가사의한 질감을 지닌 대상물로, 자신의일부가 아니라 자신과 동떨어진 대상물로 간주된다. - P220
그는 자그마하고 쾌활한 60대 유대인 여성으로 럿거스대학교에서 페미니즘 영화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버클리대학원 시절부터 차와 알고 지냈고 늘 차의 작품에 탄복했으며, 범주를 초월하는 방식 때문에 차의 작품을 영화감독 샹탈아케르만과 비견했다. 플리터먼 - 루이스는 그 사건에 대해 무척이야기하고 싶어 했다. "사람들은 그가 요절했다고만 말해요." 그가 말했다. "그 참혹함을 절대로 거론하지 않아요." - P227
강간이라는 단어는 글에 손상을 가하면서어떤 주장이든 엎어버린다. 강간을 넘어서 분석을 이어가고이해를 도모할 방도가 없다. 그것을 직시하든지 아니면 시선을돌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시선을 돌렸다. 그의 죽음이 너무끔찍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때때로 나는 뉴스 기사에서 범죄피해자가 아시아인이면 일부러 읽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무도그 사건에 주목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하기 싫기 때문이다. 아무도 상관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상관하기 싫다. 왜냐하면 분노속에 방치되기 싫기 때문이다. - P231
아시아계 미국인 여성은 눈에 안 띄는 소녀 시절을 벗어나면페티시의 대상으로 활짝 피어난다. 아시아계 여성이 드디어 눈에띄게 되면-드디어 욕망의 대상이 될 때-너무 분하게도 자신을향한 모든 욕망이 변태로 취급됨을 깨닫는다. 가장 극명하게드러나는 방식은 포르노다. 거기서 우리의 음험한 욕망은 몇가지 범주로 냉정하게 구분되는데 백인이 디폴트이고 다른 모든인종은 성적 일탈로 취급된다. 소름 돋는 틴더 메시지("아시아여성과의 첫 경험을 원합니다")를 비롯해 백인 친구들의 미묘한공격적 언사에 이르기까지 아시아 여성은 자신에게 끌리는 모든상대가 변태임을 매일같이 상기당한다. - P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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