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1895년 청일전쟁으로 얻은 군사적 승리 후 자신만만해했지만 삼국간섭으로 자신들의 전리품을 토해내게 된다. 이 사건은 일본에게 외교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끼게 한 일이었다.
중국은 생존투쟁을 위한 국력 증강을 선택했다.

조약의 성립과 관련해서도 문제가 있었다. 조약 당사자국 간에 동일한 조건의 조약서가 담겨져 있는게 아니고 결국은 더 힘이 센 강대국의 입김에 따른 조약서가 체결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조약의 해석 문제도 있다. 국제적으로 알려진 언어가 아닌 언어의 경우 조약서 해석에 문제가 생길 소지를 담은 채 성립되는 경우도 있다. 해석에 미묘함을 남겨놓아 향후 분쟁을 일으키게 하기도 한다.

미래에 자유주의는 국제관계 이론 가운데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오늘날에도 국제관계를 논하는 자리에서 주류이론이거나 최소한 중요 논제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자유주의 국제관계 이론은 미국을 포함한 강대국 대부분의 정치가 갖고 있는 관점이지만 통일된 표현이 있었던 적은 없다. - P1328

사회적 다윈주의는 ‘서방’—유럽이 점차로 애용하게 된 자칭—에만 국한되지는 않았다. 그것은 국경을 초월한 현상이자 갖가지 이론적 변형을 낳았고, 그 변형들이 다시 결합하여 새로운 형태로 나타났다. - P1330

19세기가 끝나갈 무렵, 국제관계는 밀림의 법칙이 지배하고 있었다. 전 세계는 외교적인 수단을 통해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상대와 연합을 모색했다. 오늘날에는 아무리 작고 가난한 나라라도 전 세계에 외교기관을 주재시키고 있고, 외교 수장의 회담이 끊이지 않으며, 국가 원수가 만나는 정상회담도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다. 이런 방식의 외교는 1차 대전 이후 시대의 산물이다. - P1331

1815년 이후부터 효력을 발휘한 새로운 외교규범과 국제행위 준칙은 문명진보의 당연한 결과물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문호를 개방당한 비유럽국가는 조약을 체결할 때 문명세계의 규칙을 지키겠다는 조항을 포함시켜 이행을 보증해야 했다. 새로운 규범과 준칙의 일부 조항은 타국 내정 불간섭 원칙을 피해갈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함으로써 충돌의 씨앗이 되기도 했다. - P1334

19세기에 비유럽세계와 관련하여 외교관의 주요한 기능은 다양한 종류의 조약—통상조약, 보호조약, 국경조약 등—을 체결하는 것이었다. 유럽 이외의 지역에서 국제법에 근거한 조약의 개념이 전혀 알려지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중국은 1689년에 러시아와 조약을 체결한 적이 있었다) 여러 차례 구체적인 상황에서 문화적 차이 때문에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번역 문제만 해도 미묘한 차이가 생기기 때문에 조약의 실행단계에서 심각한 분란이 일어날 수 있었다. - P1338

개별적인 조약 하나하나가 모여서 결국에는 여러 당사자에게 영향을 주는 조약의 집합이 되었다. - P1340

1815년 이후 중시되기 시작했고 1840년대부터 영국의 법의 결핍을률가들이 개발하고 영국의 정치가들이 현실 정치에 적용했던 국제법은 유럽 바깥의 영토에 대해서는 보호장치를 마련하지 않았다. 또한 이 국제법은 공백으로 남겨둔 영역이 많았는데 특히 해양관리 분야가 그랬다. 예컨대, 같은 해역에서 작업하는 포경선 선장들은 포획물의 발견과 최종적인 소유권을 둘러싼 분쟁을 피하기 위해 사전에구체적인 규칙을 합의해두어야 했다. 영국이 해상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공정한 해양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법의 원칙에 반해 아무리 선의에서 보더라도 국가로 분류되기 어려운 공동체가 보호국으로 선포되는 경우가 흔히 있었다. 그런가하면 목록의 다른 한쪽 끝에는 세워진 지 이미 수백 년이 넘고 최소한대다수 유럽 국가와 마찬가지로 안정된 정통성을 누려온 합법적인국가였지만 지도에서 지워진 나라가 존재한다. 14세기부터 국가로서 역사적 연속성을 유지해온 조선은 1905년에 일본의 보호국으로 선포되었다. 1907년, 조선은 제2차 헤이그평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여 국가적 위상의 강등에 대해 항의하려 했다. 회의 의장단은 근본적으로 조선의 회의 참여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것은 조선이 합법적인 국가가 아니거나 현존하는 국가가 아니라는 입장의 명확한 표현이었다. - P1343

상호 분명한 연관성이 없는 이런 저항에 ‘민족주의’라는 표지를 붙이는 것은 피상적인 관찰에 지나지 않는다. 국가별로 본다면 저항운동은 각자의 특수한 원인과 동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새로운 형태의 운동 배후에는 분노에 찬 애국정서와 직접적인 경제적 이익뿐만 아니라 서서히 강화되어가는 국제적 정의감과 유사한 의식—이것이 각국의 운도을 하나로 연결시켜주었다—이 존재했다. 이러한 새로운 요구와 가치관의 발원지는 우드로 윌슨의 사상이며 1919년의 파리평화회의를 통해 원칙과 선언으로 포장되어 나온 것일 뿐이라는 해석은 그보다 앞서 유럽 밖에서 일어난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유럽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이 발원지란 사실을 무시하는 것이다. - P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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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1-19 00: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럼에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받은 배상금이 너무 막대해서 이후 군국주의로 향하는 일본의 밑천이 되었다죠. 인용하신 페이지 숫자에 깜놀하고 갑니다. ^^

거리의화가 2022-01-19 08:06   좋아요 0 | URL
네 그 배상금을 기반으로 철저히 배를 불렸죠.
페이지수는 총 3권인데 각 권의 페이지수를 따로 안 세고 이어져서 그런거예요 2권이 몇백페이지부터 시작합니다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