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랑가족
공선옥 지음 / 실천문학사 / 200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너무나 가까운 겨울


착실하고 성실케 살면 나도 부자가 될 수 있을 거라 믿던 시절이 있었다. 이젠 안 믿는다.  산타클로스 따위는 지여낸 거라고 말하는 것처럼, 부자도 성실케만 살아선 될 수없다고 한다. 가족이니까 가난도 함께 할 수 있다는 건, 성탄 트리의 꼬마전구만큼이나 예쁘다. 그러나 전기가 흐리지 못할 때, 꺼져있는 차가운 유리알도 봐둘 필요는 있다.


찢어지게 가난한 가족들을 만났다.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을 만큼 가난에 시꺼멓게 그을린 사람들을 봤다. 더 이상 회상하고 싶지 않다.


내가 중. 고등학생 때만 해도 책장에 두산 동아의 ‘한국소설문학대계’ 시리즈가 꽂혀 있었다. ‘흙’의 이광수부터, 조정래, 박완서의 현대소설까지 한국문학이란 문학은 모두 담긴, 말 그대로 대계 시리즈를 가지고 있었다. 그 책 모두 읽으면 언어영역에 나올 수 있는 한국문학은 모두 다 읽은 거다. 장편이고 단편이고 가릴 것 없이 무요약, 무삭제 판이었는데, 항시 사전두께를 유지했었다.


그런 연유로, 문학사를 일찍 가깝게 느낄 수 있었다. 근대에서 현대문학 쪽으로 읽는 건 좋아했었다. 문제는 1930~40년대 소설들이다. 시대상이 그랬다는 것도 인정하지만, 읽으면서도 부아가 났다. 지지리 궁상, 강점기 가난의 압박, 불편한 연민이 뒤섞여 착잡하게 읽히면서도 재미는 있는 묘한 상태였다. 내게 너무나 먼, 일제 때의 가난했던 이야기였으니까.


이젠 대계시리즈가 없다. 그 자리에 김영하가 있고, 박민규가 있다. 확실히 변했다. 유쾌하지 않은 가난 문학 따위는 수능 언어영역 답안지 낼 때 같이 내버렸다.


그런데, ‘유랑가족’ 때문에 30~40년대 그 소설들이 생각나 버렸다. 너무나 가까운 가난한 우리 이야기였으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