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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덕 성령충만기
이기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10월
평점 :
세상을, 넉넉하고 건강히 오랫동안 살아야 한다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해마다 튀어나오는 괜찮은 신간을 볼 때가 바로 그 때이다. 좀 의아한 정의긴 하지만 나는 그렇다. 책이 아닌 다른 것을 좋아한다고 해도 새로움의 활력을 느끼겠지만, 책은 활자의 나열만으로도 늘 새롭다. 그래서 책 좋아하는 내가 좋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내 인생에 큰 영향을 준 책은 없다. 책을 통해 크게 알기보다는 아주 조금씩 알아가는 것 같다. 읽는 순간 뭔가를 크게 느낄 때도 있긴 하지만 전환점이 되기보다는 이 전의 나에게 녹아들어버린다. 그 방향이 긍정적인 쪽이라는 건 확실하지만, 가끔은 추한 내용도 같이 가게 된다.『최순덕 성령 충만기』는 추한 내용이다. 그러나 긍정적인 방향만은 확실한 것 같다.
제목으로만 짐작했을 때 <최순덕 성령 충만기>를 박현욱의 『동정없는 세상』과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보기 좋게 순덕의 성령에 뒷통수를 맞았다. 성경구절을 응용하여 소설을 엮는데, 문어체이나 문어체 같지가 않다. 순덕의 맹목적인 교리숭배와 선행을 위해, 악재를 비는 것 장면은 정말 웃겼다. 하나만 알고, 둘을 모르는 융통성 없는 내 꼴이 아닌지 뜨끔하긴 했지만 웃을 수 밖에 없었다.
<버니>는 현대문학 신인 추천공모에 수상한 작품이란다. 독특한 문체가, 수상에 한몫 한 것 같은 데 그게 바로 랩이다. 덕분에 가볍고, 무겁게 강ㆍ약을 조절하면서 더 빨리 읽다. 랩 가사를 시어라 하며 경배하는 힙합보이들처럼 비트와 리듬을 넣어가며 읽어볼까 했지만 주인공 순희가 연예인 서민정으로 떠올라 그만뒀다. 비트고, 힙합이고 아무 것도 없이도 술술 잘 읽히니 어울리지 않는 사람으로 대치할 필요는 없다.
<햄릿 포에버>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실제로 검은 비닐에 얼굴을 들이대고 있는 사람들을 본다면 왔던 길을 되돌아 갈만큼 섬뜩하겠지만 시봉이라 맘에 들었다. 햄릿과 구시렁대는 주인공 시봉은 경찰서의 취조문에 응하는 글이다. 휘발되는 유기용제같이 끈적끈적하게 웃겼다.
나머지 단편들은, 비교적 평범한 문체지만 결코 평범한 내용은 아니다. 죄다 어딘가 모자라고, 뒤틀려서 더 웃기며, 웃겨서 안스러운 인간들이다.
이 이름에 무슨 원한이 있는지 이상한 인물들에만 ‘이시봉’을 쭉 붙여주는 것이 심상치가 않다. 그보다 <발밑으로 사라진 사람들>의 아들 이름이야 말로 보통 심상치 않은 것이 아니다. 사이언스지에서 보면 놀라 자빠질 이름이 소 쟁기를 끌고 있다. 저자도 문예ㆍ출판가에서 놀라 자빠질 만한 작가로 펜대를 끌고 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