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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셋, 지구의 끝으로 가다 - 남극대륙에서 깨달은 인생살이
고경남 지음 / 북센스 / 2009년 1월
평점 :
품절
집에서 쉬고 있음에도 지친다. 이런 날은 차라리 일하는 게 낫다. 못난 직장, 에어컨 하나는 잘나오니까 말이다. 폭염으로 짜증이 솟구치기 시작할 때, 이 책을 발견했다. 책을 다 읽은 지금, 얼음조각을 삼킨 느낌이다. 입 안 가득 침이 생기고, 얼음의 차가움이 식도를 따라 흐른다.
저자는 서울대 소아과 레지던트 시절, 남극 세종기지 대원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호기심에서 원서를 썼었다. 합격해도 주변사람들이 남극 행을 말려 주리라 기대와 달리, 아무도 말리는 이가 없었다. 그 전까진 지극히 여행을 싫어하는 사람이었던 거다. 정해진 순서에 따라 학교와 집, 병원을 오가던 소시민이었던 그가 남극을 가게 된 이유는 이랬다.
서울에서의 생활을 찬찬히 되돌아 봤다. 열심히 걸어온 거 같은데 내 앞에는 주말에 잠이나 실컷 자는 게 희망사항인 처량한 일상이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정말 이 길이 맞는 건가?(중략)설사 오답일지라도 많은 사람들이 택하면 주저 없이 그 오답을 택하곤 했던 내가, 최초로 일탈을 결심했다. 그냥 충동에 몸을 맡기기로 했다. 궤도에서 벗어나서 지나온 궤적을 바라보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나는 지구 끝으로 내려왔다.(p.21)
책에는 사색의 흔적이 많다. 쳇바퀴 같은 서울생활을 반성하고 그리워하면서 1년을 남극에서 보낸다. 근무기간이 2년만 됐어도 안 갔을 거라고 했는데, 6개월도 결심이 필요한 일이다. 젊은이의 1년은 중요한 시기다. 더구나 병원에서의 1년은 까닥하다간 2년의 쳐짐을 각오해야 된다. 그럼에도 그는 갔다. 도시생활에서 전혀 쓸모없는 펭귄과 빙하를 보러 말이다.
저자의 남극의 생활은 추위만 빼면 무척 편했으리라 생각된다. 책속의 사진과 글들에 그 여유로움이 묻어난다. 남극은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얼음의 땅인데다, 남극으로 가는 이 들은 건강한 사람만 추려 뽑는단다. 그리고 남극의 삶은 단순하다. 쉬는 시간이 더 많았을 게다. 그 한가로움이 저자를 해표처럼 뒹굴거리게 하고, 보트를 타고 사진을 찍게 한다.
책 중간에 병원 수련 중에 겪은 수기가 하나 있었다. 어린환자에 대한이야기가 있는데, 예전에 한미수필상에서 봤던 내용이었다. 대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그 때 그 사람이 이 사람이란 사실에 잠깐 놀랐다. 그러고 보니, 책 전체문장이 매끄럽다.
의료담당으로 1년 극지 생활을 견딘 그는 지금 소아과 전문의란다. 지금 생각해보니 남극의 1년은 헛되이 보낸 게 아니었다. 삶의 쉼표를 얻어왔다는 생각이 든다. 빡빡하고 열 받는 일상 속에 느긋하고 시원한 남극을 떠올려 볼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남극 하면 많은 사람들이 신비로운 풍광과 흥미진진한 모험담을 떠올리겠지만, 세종기지는 기본적으로 생활의 공간이다. 남극 탐험대 베이스캠프라면 뭔가 대단한 에피소드가 생길지도 모르지만, 과학기지에 얼마나 굉장한 이야기들이 있겠는가. 물론 색다른 경험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때도 있지만, 이런 시간은 어디까지나 보너스일 뿐이다. 대원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자신의 업무를 처리하는 데 사용한다. 연구원들은 자신의 프로젝트를 완수하기 위해서 계속 데이터를 모으고 논문을 완성하느라 끙끙댄다. p.62~63
남극에도 모험은 없었다. 그 곳도 서울과 마찬가지로 생활공간이다. 사람 사는 곳, 결국 같구나 싶다. 일상탈출 따윈 역시 마음먹기 따라서인가 보다. 남극이든 서울이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