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턴일기 - 초보의사의 서울대병원 생존기
홍순범 지음 / 글항아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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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은 어떻게 일하는지 모르겠지만, 내 직업을 내켜하지 않는 사람 중 하나가 나였다. 욕을 뿜어대던 예전에 비하면 지금은 많이 순화됐다. 그리하여 아직도 자부심이 라던가 소명의식은 없다. 밥벌이 그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희생이니, 봉사니 하는 말은 노동착취의 다른 말일 뿐 병원에 들어선 순간 신경이 곤두선다. 직장이 어딘지,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에 따라 개인의 정체성이 부여된다는 말엔 동의한다. 그러나 내 직업엔 동의 못하겠다.

만약 지금이 경제호황기라면 다른 일을 하고 있었을까. 호황기라 상상해도 딱히 하고 싶은 일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 대책 없음, 상상력 고갈에 나도 놀랍다. 그래서 어릴 때, 하고자했던 일을 이루게 된 사람들을 보면 부럽다. 어린 시절의 상상을 현실로 품어낸 그 인내와 집념에 탄복한다. 그런 복된 집단 중 한 집단이 내가 매일 보게 되는 의사 들이다. 수능점수 남아서 의대 갔다는 Dr. K를 제외하곤 대부분 어릴 때부터 선명하게든, 막연히든 의사를 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그런지, 자신을 잘 가꾸어 온 의사들의 이야기를 좋아했다. 거기다 내가 병원에서 일 해야 하는 이유를 찾아야만 했던 그 시절엔, 배경이 병원이면 수기든 소설이든 마구 읽어댔었다. 오늘 아주 오랜만에 병원이야기를 읽었다. 서울대병원에서 인턴을 하던 시절의 메모로 쓴 <인턴일기>다. 제목 그대로 진짜 일기다. 바쁜 병원수련 속에 빛나는 찰라의 생각들이 신선하고 재밌다. 환자와 겪는 에피소드도 재밌다. 그 중 마음이 짠한 에피소드는 소아 흉부외과에서 소독하다가 겪는 이야기다. 저자의 다감한 성격과 바쁜 수련생활이 동시에 보였다.

세 살짜리 어느 여자 아이는 항상 남달랐다. 다가갈 때마다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곧이어 상처를 덮고 있는 반창고에 조심스레 손을 대면 너무나 고통스런 표정을 짓곤 했다. (중략) 그래서 하루는 소독하다가 살며시 물어보았다.
“선생님 얼굴을 왜 그렇게 쳐다보니?”
아이는 나를 쳐다보던 까만 눈동자를 톡 튕겨 천장으로 향했다.
“괜찮아. 쳐다봐도 돼.”

그러자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다시 나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까만 두 눈동자가 내 눈 안으로 빨려 들어올 것만 같았다. (중략)
“선생님을 아주 옛날에 본 것 같아. 아니면 최근에 본 것 같아?”
무슨 말을 하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입 모양을 가까스로 뻐끔거릴 뿐이었다.
“아주 옛날에?”
그러자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더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엉뚱한 짓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때 간호사가 우리 쪽으로 왔다. 묵묵히 소독을 마치고 자리를 떴다. (p.76~77)

나도 신규 간호사시절에 메모들을 해두었다면 간호사 노트정도는 쓸 수 있었지 않을까? 글쎄, 데스노트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인턴일기> 자기를 세우지도 비하하지도 않고 묵묵히 과장 없이 참 잘 썼다. 병원생활 오래한 사람들이 보면 귀엽게 느껴지고, 의대를 지망하거나 의대를 갓 졸업한 학생들이 보면 신나게 읽을 수 있을 거다. 난 귀엽게 본 쪽이다. 단편 이상의 완결성을 지닌 박경철의<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정도의 수준을 기대한다면 실망한다. 이 책은 말 그대로 인턴시절의 기록이다. 진료실에 앉아 환자에 대해 오래 생각하고 사색할 여유가 있는 글이 질이 같겠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훌륭하다. 사회에서 비춰지는 의사에 대한 편견을 초보의사로써 관찰하고 고쳐보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혀 어렵지 않다. 병원이야기라고 아프고 복잡한 이야기만 할 거란 편견은 버려라. 어린 의사의 고군분투 블로그를 본 느낌이다.

인턴일기를 쓰던 저자가 이제 정신과전문의가 됐단다. 어떻게 변해있을지 궁금하다. 이분, 10년 뒤 쯤에 또 책을 낼 것 같다. 그게 정신과 에세이 책이든 소설이든, 문장 생각하는 싹수가 보인다. 그 때 쯤이면 나는 어떤 눈으로 읽을 까.

문득, 더 이상 병원 쪽 책은 더 이상 읽지 않을 것 같단 생각이 든다. 이젠 병원에 대한 고민이 없어졌단 뜻이다. 예전부터 읽어왔던 책들이 나를 담금질 해줬는데, <인턴일기>가 마침표를 찍어줬다고 할까. 이젠 병원이 편하다. 가끔은 불합리한 일에 열 받을 때도 있지만 병원만 이러냐, 다른 곳도 마찬가지란 생각이다. 그리고 신규 때는 그렇게 높아만 보이던 수 선생 자리도 해보고 싶어졌다. 수 선생자리가 쉽다는 건 아니다. 나와 먼 사람일 것 같던 수 선생님들도 가끔은 실수하고 후임들에게 욕도 먹고 윗 상사을 비난하는 걸 보니, 같은 사람이구나 싶어진 것이다. 어리버리 신규였던 나도 병원사람이 다 됐다.  


ps. 위클리 조선 인터뷰의 한 꼭지

홍순범씨는 “처음에는 의사에 대한 오해를 벗기고 싶어 책을 쓰기 시작했지만 이제는 또 다른 목표가 생겼다”고 했다. “시행착오를 겪고 있는 우리 사회의 모든 초년생들에게 위로를 건네고 싶다”는 것이다.

사회 초년생들은 모두 비밀과 두려움을 안고 시작합니다. 제가 처음 인턴을 시작할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무언가 시작하는 사람들의 내적 갈등과 고민은 보편적인 숙제라고 할 수 있죠. 제가 서울대 병원 인턴에 선발돼 오리엔테이션을 받던 날, 강당에는 ‘인턴, 잔치는 끝났다’는 현수막이 걸려있었습니다. 정말 멋없죠. 인턴 생활 힘들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저는 반대로 ‘인턴, 잔치는 시작이다’라는 희망을 전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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