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처방해드립니다
카를로 프라베티 지음, 김민숙 옮김, 박혜림 그림 / 문학동네 / 2009년 4월
평점 :
품절


인터넷을 돌아다니다가, 어느 독서가의 인터뷰 글을 보게 됐다. “책은 절대 취미가 아닙니다. ‘인생의 과정’으로, 죽을 때까지 인간의 피와 살을 만드는 양식과 같은 ‘삶의 영양소’입니다.”라고 했다. 이 문장을 읽으니 주변이 시원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독서는 취미가 아니라니, 너무 근사하지 않은가. 그래, 취미의 범주에 넣긴 너무 좁다. 내게 독서란, 일상이자 일생의 과제가 된지 오래다. 책은 자존감을 한껏 고양시켜주기도 했지만 오만할 땐 준엄히 꾸짖었다. 모두가 날 힐난할 때도 내말을 들어주는 건 책 뿐이었다. 책 앞에선 내 재능이 부담스럽지 않았고, 콧물 흘리며 울어도 부끄럽지 않았다. 세상 빛을 보게 해준 건 부모님이었지만, 세상의 빛깔을 구별하게 해준 건 책이었다. 늦게나마 책을 즐겨 읽게 된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책이 없었으면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견뎠을까 싶다.

이래서 책 관련된 제목을 단 책이 나오면 기어이 사보고 마는 것이다. 이번에는 기괴스런 표지에 책을 처방한다는 제목에 끌려 구매하고 말았다.

전문털이범 루크레시오가 어느 외딴 저택에 잠입한다. 집안으로 들어서니 왠 대머리 아이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 칼비노라고 자신을 소개한 아이는 대뜸 자신의 아버지가 되어달라고 협박한다. 어쩔 수 없이 민머리 칼비노를 따라 머리까지 밀게 된 루크레시오, 그 괴상한 집에서 동거를 하게 된다.

가택 침입한 도둑놈을 아빠가 되게 하는 설정, 예전에 읽은 미야베 미유키의 <스텝 파더 스텝>(이하:스텝) 이 생각났다. <스텝>의 주인공 도둑도 어수룩했고, 상대 아이들은 영악했는데 <책을 처방해 드립니다>(이하:책을)도 비슷하다. 도둑이면 좀 악랄해야겠지만, 둘 다 아이를 불쌍히 여겨 집안 대소사에 얽여 버리는 점까지 닮았다. 차이 점이라고 하면 <스텝>은 현실적이고, <책을>은 몽환적이다.

루크레시오는 여자애인지, 남자애인지 정체가 불분명한 칼비노를 따라 정신병원인지 도서관인지 헷갈리는 곳을 따라가게 되고, 냉동된 시체를 발견하고, 거인 행세하는 난쟁이를 만나기도 하는 등 황당한 일을 겪게 된다. 더 황당한 건 이 뒤죽박죽한 이야기 조각을 맞춰 보려고 내가 짱구를 굴린다는 거다. 에필로그인지, 프롤로그인지 헷갈리는 마지막 장에서 허탈하게 웃었는데, 옮긴이의 말을 보고 마음 정리했다. 딱딱하게 굳은 편견에 물음표를 달고 상상하고 끊임없이 질문하게 만드는 게 이 책의 특징이란다.

   
  “책을 읽을 때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이곳 환자들과 똑같이 행동해요. 특정 등장인물과 우리 자신을 동일시하고 그들의 모험을 재현하지요. 이게 당신이 말한 대로 잠시나마 우리의 일상에서 스스로를 멀어지게 하는 거죠. 하지만 만약 그 책이 좋은 책이라면, 그러니까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생각하게 만들고, 새로운 질문을 하게 만든다면, 나중에 우리가 현실세계로 돌아왔을 때 우리를 좀더 강하고 지혜롭게 만들어줄 거예요.”
p. 56

“이야기책은 사건을 간단하고 정리된 형태로 들려주죠. 그래서 우리가 기억하고 배우고, 또 우리 머릿속에 정리하는 걸 도와줘요. 어린애들이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듣고 싶어하는 건 자기가 그 정보들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고, 또 머릿속에 잘 정리해놓았다는 걸 확인하고 싶어하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이야기 자체를 즐기기도 하지만, 자신이 그 이야기를 제대로 기억하고 이해하고 있다는 걸 확인하는 게 아이들을 안심시키기도 하고요....”p. 57
 
   

스토리를 따라 가다가 독서의 치유력에 대해 써 놓은 것은 너무 좋았다. 그러나 책 두께에 비해 정가 9000원은 좀 그렇지 않은가? 그로테스크한 일러스트 값인가? 스페인 문학상 엘 바르코 데 바포르 값인가? 책을 덮으니, 팀버튼 감독의 <크리스마스의 악몽>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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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IC 2009-04-22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제목만 보고 딴지 걸려고 했는데... 오해를 했습니다. 그렇죠. 책은 밥입니다. 그리고 (저에겐) 취미이기도 합니다. 밥이기도 하고, 취미이기도 하고, 놀잇거리이기도 하고, 보물이기도 하고... 그래서 책이 좋죠.

모과양 2009-05-04 01:22   좋아요 0 | URL
헌책방IC님. 찌찌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