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섬의 아이
이네스 카냐티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10월
평점 :
절판


2008년이 가고 있다. 순탄과 비탄을 오갔던 올해는, 작년과 마찬가지로 덤덤하게 제갈 길을 가고 있다. 그동안 뭘 하고 놀았는지 궁금해져 다이어리를 펼쳤다. 별 볼일 없는 일상과 시덥잖은 기록을 보며 피식피식 웃었다. 그럼 옛날엔 어땠던고?

처음 상경했던 06년은 직장에서 깨지고, 사람한테 치이고, 책으로 자위하던 히키코모리였다. 07년엔 집구석에서 책 100권과 놀았고, 올해엔 밖으로 돌아다녔다. 한 달에 1번 이상은 영화관에 들렀고, 뮤지컬과 연극을 간간히 봤으며 싸구려 와인을 마시고 다녔다. 일상 기록만 변한 게 아니라, 생각도 같이 변했는데 추악해서 들춰보기가 싫다.

‘아이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어른은 보고 싶지 않는 것 까지 본다.’고 <건투를 빈다>에서 김어준이 말하더라. 보고 싶지 않은 것까지 보긴 했는데, 다시 보기는 싫은 반쪽짜리 어른이 됐다.

먹먹하고 막막한 12월 초, <파란 섬의 아이>를 다 읽었다. 쉬운 문장과 반복적인 어구가 많아 쉽게 읽힌다. 그러나 또 쉽게 읽기는 어렵다.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면 엉엉 울고 싶어진다.

화자는 사생아 ‘마리’다. 그녀 엄마는 ‘미치광이 제니’로 불리는데 원래는 명문가의 딸이었지만 강간으로 인해 모든 걸 잃게 된다. 나락으로 떨어진 제니는 종종 울었다.

엄마는 저녁에 불 앞에 앉아 종종 울곤 했다. 그럴 때 엄마의 두 눈은 눈물 빛깔을 띠었다. 엄마가 말했다.
“나는,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
나는 말했다.
“내가, 내가 있잖아요.”
그러나 엄마는 계속 울었다. 그래서 나는 엄마가 나를 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나는 엄마가 나를 원하도록 내 삶의 작은 순간마다 엄마를 사랑하고 싶었고, 어디든 엄마를 쫓아다녔다. 그러나 엄마는 말했다.
“엄마 뒤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니지 마라.”
하지만 나는, 나는 엄마를 사랑하고 싶었다. 늘 엄마 곁에 머무르고 싶었다. (p. 19~20)


책에서 밝은 구석이라고는 젖소 로즈와 마리가 함께 있는 잠깐과 피에르를 만나는 찰라가 다다. 마지막엔 그것마저도 비극으로 마감하고, 나머지는 모조리 우울하다. 미치광이로 취급해 모녀를 착취하는 마을 사람들과 힐난하는 외가만 있을 뿐이다. 됨됨이야 어떻든 마지막에 새 아빠 앙투안이 등장하는데, 잠깐의 안정을 찾는 듯 하더니 궁극을 쳐버린다. 책을 덮고 나니, 누구도 칼을 들지는 않았지만 경고 없이 폐를 찔린 것처럼 황당하고 숨이 찬다.

내용 마지막쯤에 사촌들의 장난으로 이복동생 루이가 죽게 된다. 그런데 마리가 이렇게 회상한다. 
하지만 그 날은 그 집에 들어가지 말고 도망쳤어야 했다. 정말로 온 힘을 다해 도망쳤어야 했다. (p.234)

인상이 써졌다. 그리고 엄마 제니가 강간 피해자이면서도 왜 헤어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지 그 의문이 해소됐다. 그 사건을 ‘내가 만약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면......’하는 식의 자책을 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 더 마음이 아프다. 마리에게도 말해주고 싶다. “마리 네 탓이 아니야. 네 잘못은 없어”라고.

드러내놓고 말하기 꺼려지는 폭력성과 야만성을 아이의 눈으로 보여 준 작품이었다. 그리고, 난 아직 반쪽짜리 어른도 되지 못했다는 걸 알게 해준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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