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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ㅣ 속 깊은 그림책 4
다비드 칼리 지음, 세르주 블로크 그림, 안수연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7월
평점 :
‘적’이라던가 ‘전쟁’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독서실이나 영어 프리젠테이션 정도 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군인이나 국제정세 따위를 떠 올리기엔 경험이 좁다. 정확히는 개념자체가 없다. 전쟁놀이보다는 인형놀이를 하면서 컸고, 전쟁게임은 소리만 들어도 귀가 아프고, 군대를 갔다 온 것 도 아니니 전쟁은 정말 먼 나라 얘기다. 교련시간을 마지막으로 내 나라가 휴전국가라는 생각도 안 든다. 전쟁이란 영화 CG 발전을 보여주는 영상 컷 정도, 연인을 갈라놓는 시대적 배경,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처음 책 표지를 봤을 때 좀 충격적이었다. 전혀 그림책스럽지가 않다. 장군이 거수경례를 하고 있는데 양손에 피가 뚝뚝 떨어진다. 흉측한 그림이라고 얼른 책표지를 넘기니 도열한 군인들이 삼엄하다. 그 중 한 군인이 입에 네입클로버를 물고 있는데 뒷 표지 장에선 그가 없다. 씁쓸하게 다음 장을 넘겼는데, 페이지를 넘길수록 맛이 점점 써졌다.
참호 속에 고립된 병사는 아침마다 적을 향해 총 한방을 쏜다. 그러면 적도 병사를 향해 한방 쏜다. 밥을 하기 위해 불을 지피는 것도, 물을 마시는 것도 어렵다. 전쟁에 대한 명분도 모른 채 건재한 척하는 병사와 그의 적. 헷갈리는 상황에서 그를 참호 밖으로 움직이지 못하게 한 것은 ‘적은 인간이 아니다’라는 전투지침서 때문이었다.
어쩌면 전쟁은 벌써 끝났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모두 죽고 적과 나, 이렇게 둘만 남아 계속 전쟁을 치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 둘 중 살아남는 자가 전쟁에서 승리하는 셈이지요.
(중략)
내가 먼저 전쟁을 그만둘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그가 나를 죽일 테니까요. 그가 먼저 전쟁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러면 나는 총을 쏘지 않을 겁니다. 나는 인간이니까요.
참호 속에서 무너져가는 병사는 덤불로 위장을 하고, 적의 참호로 기습을 한다. 그런데 그곳에서 발견한 것은 나와 똑같은 전투 지침서였다. 그리고 다시 적의 참호 속에서 고립된다.
그는 아주 지쳐 있습니다. 이제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에게 그를 기다리는 가족이 있다는 것도요. 이 전쟁이 끝나면 우리는 각자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요. 전쟁이 끝나기만 한다면요.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닐 겁니다.
마지막에 휴전의 메시지를 적은 병을 적에게 보낸다. 적도 병사에게 병을 던져 놓았는데, 이게 끝 장면이니 결론은 모르겠다. 다만 참호 속으로 잘 떨어지게 그려 놨다는 것에 마음이 놓인다. ‘이 작가 잔인하지만은 않구나.’ 하는 안도가 들었다.
아직 평화니 반전이니 하는 것들에 대해 고민치 않고 살아왔지만 세계 끝 누군가에겐 처절한 비극을, 리뷰거리로만 서술한 것이 부끄럽다. 지금에 와서는 인식이 없었다는 것과 반전을 말하는 것이 다르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부끄러운 것은 부끄럽다.
책의 뒷 표지에 네잎 클로버 병사와 한명의 병사가 더 사라져있다. 처음에는 병기로 소모된 병사와 적이라고 봤는데 방금 생각이 바꿨다. 그들은 인간 없는 이 전쟁대오에서 도망쳤다. 가족의 곁으로 무사히 돌아가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