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
황정은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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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가 중간에 쉰 책을 다시 읽는 건 무척 드문 일이다. 조급증이 있는 탓에 못 먹어도 고이거나, 판을 뒤엎어야한다. 벌린 판을 쉬는 만큼 김 빠지는 일이 없고, 엎은 판을 돌려놓는 재주도 없으니 노상 고 아니면 스톱이다. 한 템포 쉬고 읽는다는 건, 더 이상 읽지 않겠다는 다른 말이다.

그런데 황정은, 그녀의 이야기는 달랐다. 다 읽는 데 쉬는 시간이 꼭 필요했다. 부러 아껴 봤다거나, 여운이 길어 이리 된 것이 아니다. 쉬었던 이유를 책을 다본 후에야 알았다. 해설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황정은의 환상이 지니고 있는 독특성은 명랑성과 비애가 결합되어 생겨난 것이라는 점이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이나 깊은 슬픔과는 달리, 비애는 우리가 일상인으로서 살아감에 있어 어떤 식으로건 감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체념의 소산이다. 그리고 그런 마음의 상태로부터, 즉 부조리한 세계 상태에 대해 체념할 수밖에 없고 그 불가피성 때문에 오히려 그런 상태에 대해 체념할 수밖에 없고 그 불가피성 때문에 오히려 그런 상태를 적극적으로 수용해버리려고 함으로써 마조히즘 적인 명랑성이 만들어 진다. (p.273)

명랑하게 마조히즘과 자기 비하를 뒤섞어 놓은 것이다. 유치하더라도 쾌활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나로썬 그녀의 이야기가 거북했다. 소설은 말짱 거짓부렁이라는 원제를 두더라도 그녀의 거짓은 피하고 싶은 것들로만 뭉쳐져 있었다. <모자>에서 보여주는 아비의 초라함은 오히려 건전했다.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의 아동 학대, <모기씨>의 단절, <소년>의 가족 유기, <마더>의 자해는 듣는 것 만으로도 귀를 씻어줘야 했다. 그렇게 듣기싫으면서도 끝까지 들었던 것이 바로 소설이 가진 안전장치, 원제 때문이었다. 소설의 허구성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유치한 비소를 지었다, 쉬었다 반복하며 읽어나갔다.

황정은의 명랑성은 기계적이고 무의식적인 감각 같은 것으로 다가온다. 그의 환상과 유머를 떠올려보자. 이전 시대 서사의 풍자나 골계, 익살 등이 지니고 있던 강렬함이나 절박함과 구분되는 그것은, 마치 외부의 자극에 대한 오뚝이의 반응과도 같은, 심드렁하고 무뚝뚝하고 아무렇지도 않아 비인간적으로 느껴지는 명랑성이다. (p.289)

잠시 책을 덮고 쉬는 동안 내 책장을 둘러 봤다. 순간 김언수의 <캐비닛>이 눈에 띄었는데,  소설가란 무릇, 우울과 분열증의 경계를 넘나드는 사람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조울증을 앓았다던 김언수의 책을 읽었을 때 느낌이, 그녀의 책에서도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게 뭘까. 뭔가를 얻고자하는 것도 없는 것 같고, 뭘 말하자고 이런 환상을 비극과 뒤섞어 이야기하는지 슬슬 걱정이 되었다. 책날개의 뚱한 표정과 작가의 말이 자연스럽게 연결까지 되니, 환자의 진료기록을 보는 듯 한 착각도 들었다. 허구판인 소설에 임상적인 잣대를 대보는 내가 더 문제이긴 하지만.

한국소설 좀 본줄 알고 살았다만, 더 많이 읽어야 될 것 같다. 해설에서 인용된 소설들을 당췌, 알 수가 있어야지. ‘나 좀 읽었소’라고 말 할 수 있을 때 황정은의 작품들을 더 챙겨 봤을지 미지수다. 그녀는 지금 데뷔한 신인이고, 나도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단정하긴 어렵겠지만, 지금 같은 경우이라면 멀어질 것 같다. 그녀와 나는 말하고자 하는 바와 듣고자 하는 바가 틀리다. 그래도 오늘은 다 들었다. 짤막한 문장에서 오는 명료함과 우울한 이야기를 담담히 견뎌 쓰는 그 신인에게 마음이 갔기에.

이 우울감을 상쇄시켜 줄 책을 찾으러 가야겠다. 우울한 책을 읽고 나면 쉬는 시간이 필요하다.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 열차>를 다 읽고 쉬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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