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차가운 밤에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7년 12월
평점 :
일본소설 좀 봤다는 여자라면, 세밀화 같은 일본감성에 대해 썰 좀 해주고 절대 감명과 눈물 좀 흘려줘야 하나? 아니. 내가 읽은 일본 소설 중에 눈물 흘리면서 본 건 이시다 지로의 <러브레터>단편이 다였다. (훗날 영화<파이란>의 원작이 된 작품이다.) 감정을 예민하게 건드리는 작품도 있었지만 무라카미 류의<69>처럼 ‘재미없는 것은 죄’라 외치는 작품들도 있었고, 하루키처럼 씨 나락 까먹는 귀신을 묘사하는 것도 있었다. 오쿠다 히데오처럼 살짝 꼰 소설은 내놓으면 다 챙겨봤었다. 우리문학이 최고를 외치고는 있지만 이것저것 떠올려보니 일본 현대소설도 꽤나 봐버렸다. 일본 문학이 좋네 나쁘네를 떠나서 손에 잡히는 대로 읽었더니 생각보다는 축적된 게 많다. 그동안 본 일본 소설에는 잡념이 없었다. 이것저것 끌어오지만 않으면 책읽기가 부담스럽지 않다. 머리 어지러울 때 읽으면 딱 이었다.
한 감성 한다는 사람들 속에서 <냉정과 열정 사이>가 유행했을 때가 있었다. 별 감성 없는 년인지라 그녀의 책엔 손도 대지 않았다. 작년, 그녀의 섬세함이 좋다며 일본소설 찬사가 있었던 책모임에 다녀와서도 읽지 않았다. 정확히는 읽고 싶은 마음이 생기질 않아서 난감했다. 책장 구석바닥에 있는 그녀의<당신의 주말은 몇 개 입니까>는, 올해로 4살이나 먹었지만 아직도 인쇄소 비린내를 벋지 못했다. 그래서 오늘에야 에쿠니 가오리를 대면했다. 첫 대면의 인상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
사고 치고도 당당한 천진난만한 소년이 하루키 단편에 숨어있다면, 에쿠니 가오리는 수줍음 잘 타는 소녀가 보인다. 죽은 애견이 청년으로 돌아왔다는 <듀크>에서 처음 보았었다. <여름이 오기 전>의 결혼 상상에서, <어느 이른 아침>의 크리스마스 아침 아이스크림에서도 보인다. 그 소녀는 조금 개구진 구석도 가지고 있는데 마치 숨은그림찾기 하는 느낌이다. <후지시마 씨가 오는 날>의 고양이, <코스모스 핀 마당>에서 혼자만의 휴일을 즐기는 아비, <밤의 아이들>의 전쟁놀이 하는 어른으로 모습을 바꾼다. 내연녀가 본처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겨울날 방위청에서>에서는 장난기 가득한 소녀가 이까지 드러내고 웃는다. 에쿠니 가오리는 담담한 맛만 내는 줄 알았는데 고소한 맛도 낼 줄 알았다.
에쿠니 가오리의 개구진 소녀가 내게로 왔다. 마주보며 배시시 웃는다.
“아, 맛있게 먹었다. 좋았어요, 이렇게 만나 뵈어서. 시미즈 씨가 당신에게 반한 이유를 알겠네요.”
그 말에는 아무런 가시도 독기도 없었다. 가시도 독기도 없지만, 반론의 여지가 없는 강한 목소리였다. 나는 이내 눈물을 글썽였다. 어째서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적조차 못 되었다. 에리코 씨는 모르는 척하면서 말을 이었다.
“우리가 오늘 만난 거 시미즈 씨에게는 비밀로 해요. 당황하면 가엾으니까.”
나는 더는 참을 수 없어 소리 내어 훌쩍거리고 말았다. 나를 울리는 거쯤이야, 그 사람에게는 식은 죽 먹기였다. (겨울날 방위청에서 p.171)
새벽 5시 49분, 이 아침 첫 손님이 왔다. (중략)
“어서 오십시오.”
명랑하게 말하면서 돌아보니, 후카자와 아키미가 서 있었다. 감색 코트에 녹색 머플러. 두 볼이 발갛게 얼어 있다.
“아이스크림.”
후카자와가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그 말이 내게는 ‘메리크리스마스’로 들렸다. 나는 크리스마스의 아침 식사를 웨하스 컵 두개에 듬뿍 퍼 담았다. (어느 이른 아침 p.1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