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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가 뭐라고 - 괴짜 의사의 '진짜' 의사 수업
곽경훈 지음 / 에이도스 / 2018년 11월
평점 :
절판
의료용어 몇자를 검색하면 의사 블로그 찾는 건 어렵지 않다. 거의 대부분은 병원홍보 또는 퍼스널브랜딩 블로그다. 정보로써 활용하긴 하지만, 길게 보진 않는다. SNS, 블로그 문화가 활성화되기 전 흥미로운 글을 쓰던 의사들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그들이 사라졌다기 보다, 나의 여윳시간이 더 빨리 사라졌다. 이런 글을 쓰는 의사가 있는 것을 보면.
'의사가 뭐라고'는 중소도시의 응급의학과전문의가 병원에서 겪는 일상과 소회를 적은 책이다. 인턴, 레지던트들이 쓴 책은 동요의 느낌이라면, 이 책은 노동요의 느낌이다. 일생에 한 번 올까 말까한 일반 사람들에겐 응급실이 무척 흥미로운 공간이겠지만, 오래 병원밥 먹은 의사에게는 밥벌이 공간이다. 그 공간에서 뻗어나가는 의사일기다.
책은 잘봤다.
병원을 늘 떠나고 싶었는데, 병원 생활만 15년이 넘어간다. 글이라도 꾸준히 써보면 어떨까란 생각이 잠깐들었다. 그런데 현실은 퇴근 후 책 읽을 시간도 없어서 미쳐버리겠다.
p.46 어릴 때부터 나는 책벌레였다. 또래와 어울리며 뛰어놀 시기에 집에 틀어박혀 책을 읽었다. 독서는 나에게 방대한 간접 경험을 주었고, 이런 간접 경험은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또래와 함께 살면서 배워야 할 사회적 기술을 배우지 못하는 문제를 남기기도 했다.
‘잘 알고 이해하는 것’과 ‘공감하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나는 이성적으로 인간을 분석하고 사람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원인이 무엇이며 그로 인해 예상되는 결과가 무엇인지 잘 예측하는 편이다. 그러나 행동의 원인을 분석하고 결과를 잘 예측한다고 해서 사람들에게 깊이 공감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사람들이 미워하고 사랑하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행복해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이유와 원인은 잘 찾아내지만, 그 이유와 원인에 대해 함께 공감할 때는 드문 편이다. 물론 이런 독특한 부분이 적어도 응급실 의사로 일하는 데는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다.
p.139 가끔 사람들은 내게 묻는다. 그런 일을 하면서 아무렇지 않으냐고 혹시 감정적으로 힘들지 않으냐고. 그럴 때마다 나는 이야기한다. 내가 감정적으로 힘들어해도 환자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감정에 휘둘리면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한다고. 그리고 과잉된 감정에 나부끼는 것은 미숙한 아마추어일 뿐이라고.
p.153 이들이 ‘열사병에 의한 다발성 장기부전’이란 응급의학과 3년차의 진단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던 것은 그 진단이 그들에게 보다 유리했기 때문이다.
내가 속한 집단에서 윤리의식이 부족한 사람과 마주하는 일은 응급 의학과 의사가 아니라도 적지 않게 겪을 수밖에 없다. 또한 윤리의식이 부족한 사람 혹은 윤리적으로 문제 있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 나보다 상급자거나 집단에서 우월한 영향력을 지닌 경우도 있을 수밖에 없다. 과연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다른 사람이 그런 상황에서 내리는 판단을 비난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하지만 당사자가 된다면 과연 스스로 부끄럽지 않게 행동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