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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제단 - 개정판
심윤경 지음 / 문이당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대학교 교양으로 수강한 한국 근대사 강의를 맡으신 강사분은 내가 강한 인상을 받았던 몇 안 되는 교수, 강사 중 한 명이다. 강의 방식이나 글을 쓰는 방법이 대개의 분들과 많이 달랐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강의 첫 시간에 들은 그분의 독특한 이력의 영향이 컸다. 식물학을 전공해 석사학위까지 취득하고서, 진로를 틀어 사학을 전공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워낙에 관련이 없어 보이는 전공이기도 했고, 왠지 그 식물학 석사 학위가 아깝기도 해서(이런 게 바로 그 오지랖 넓다는 걸까) 그 강사는 내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심윤경도 대학에서 분자생물학을 전공하고 전업작가로 급격히 방향을 튼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앞서 말한 강사분이 90도 정도 방향을 틀었다면 심윤경은 180도 정도 되지 않을까 싶다. 그 강사의 강의 방식이나 글을 쓰는 방법, 강의중 곁말들을 통해 드러나는 인생관들이 기존의 교수, 강사들과는 상당히 궤를 달리 했던 것처럼, 심윤경의 작품이나 그녀가 작가로서 보여주는 행보 또한 기존 작가들과는 차별성을 드러낸다. 최근작인 "이현의 연애"는 아직 읽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처녀작인 "나의 아름다운 정원"과 차기작인 "달의 제단"은 2000년대 한국 문단의 주류적인 경향에서 벗어나 있는 작품이다. 그리고 아직까지는 한국 문단의 중심이 단편 소설인 상황에서 심윤경은 연속 3편의 장편만을 발표하고 있다. 작가 개인적으로 단편도 습작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발표된 단편은 아직 없다. - 이 부분에 관해서는 2007년 이상문학상 수상자인 전경린씨의 수상 인터뷰가 생각난다. 단편 중심의 한국 문단이 개별 작가들의 사회경제적 환경과 맞물려 있다는 그녀의 발언은 곱씹어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장편소설에 대한 문학상의 비중을 늘린다던가 하는 제도적 장치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고, 문학계의 자체적 논의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 심윤경이 꼭 단편을 써야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장편에서 이렇게 훌륭한 능력을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다.
"달의 제단"은 잘 읽힌다. 소재도 어찌 보면 고답적이고 이야기 전개가 크게 긴장감을 유발시키는 것도 아닌데 이 소설은 잘 읽힌다. 이는 기본적으로 심윤경의 문장이 군더더기 없이 매끄럽기 때문이다. 불필요한 문장이 잘 보이지 않고,묘사는 깔끔하고 정교하다. 언간에 사용되는 고문도 친절한 주석 덕분에 해석이 크게 힘들지 않다. 주인공 상룡의 복합적인 내면에 연민과 불가해를 동시에 느끼다 보면 어느새 소설속에 빠져버린다.
언간의 결말에서 드러나는 대로 끔찍한 치부를 가진 가문의 위신을 위해 한평생을 바치신 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눈에 차지 않는 종손 조상룡의 갈등이 소설의 기본축이다. 그리고 소설을 떠받치는 나머지 축 하나는 상룡의 10대 조모인 소산 할매가 그녀의 친할머니와 주고 받은 언간이다. 이 두 축의 교차 반복으로 소설은 짜임새있는 구성을 이룬다.
책을 다 읽고 멍하니 생각을 해보니, 어쩌면 이 소설의 핵심은 조상룡의 이야기가 아니라 소산 할매의 언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엔 고문에 대한 까닭모를 거부감으로 언간 부분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언간 부분이 결국 조상룡 이야기의 결말과도 맞물려 돌아가고 있고 이 작품에서 작가가 드러내고자 했던 것이 희생된 여인네들의 복원이라고 본다면 언간이야말로 작가의 의도가 잘 드러난 부분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언간의 진실이 드러나면서 효계당이 푸른 달빛 속으로 불타 사그라지는 장면은, 결국 달의 제단에 바쳐진 건 효계당과 효계당으로 상징되는 남근중심주의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그럼으로써 결국 복원되는 건 소산할매와 그녀로 대표되는 희생된 여인네들의 삶이라고 내멋대로 정리를 해보았다.
작가가 서문에서 밝힌 대로 뜨거운 작품 하나 써냈다. - 개인적으로 달의 제단 서문을 너무너무 좋아한다. - 서문과 작품에서 보여주는 그녀의 강단으로 보건대, 심윤경은 끈덕지게 뜨거운 작품들을 발표할 것 같다. 자신만의 길을 뚜벅뚜벅 힘차게 걷고 있는 심윤경의 행보를 게속 주목하고 싶다.